1화: https://arca.live/b/regrets/23805175

2화: https://arca.live/b/regrets/24107633

3화: https://arca.live/b/regrets/24426320

4화: https://arca.live/b/regrets/24873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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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만에 동창들과 모임.

내가 졸업한 학교가 중 고등학교가 같이 붙어있던 곳이라서, 학창시절 6년을 같이한 친구들과의 모임이다. 

참고로 나 빼고는 모두 이미 결혼을 한 유부남들이라서, '결혼하지 마라' 드립을 치는 그런 녀석들이다.


- 너 여자친구 생겼다며? 축하한다.

- 오오. 그럼 이제 너도 결혼하는 거야? 그냥 하지 마.

- 이 씨발 새끼야?

- 그냥 하지 마?

- 개새끼야?


결혼 떡밥이 나오기 시작하자 내게 겁을 주려는 건지, 이상한 무용담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의무방어전을 피해 주차장으로 도망가서 차 문을 잠그고 밤새 공포에 떨었다는 이야기,

곧 태어날 아이 때문에 앞으로 들어갈 생활비에 대한 걱정, 

새로 차 뽑았다가 와이프한테 등짝 맞고 찜질방에 잤다는 이야기,

플스 샀다가 와이프에게 걸려서, 욕조에 담가지려는 플스를 들고 아파트 공원에서 도주극 펼친 이야기 등등.

아직 결혼까지는 생각하고 있지 않기는 하다만 걱정이 쌓여 갔다.

그리고, 나와 사귀는 여자친구이니 어떤 보실님이시냐며 농담들을 하다가 학창 시절 때 이야기로 넘어갔고, 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너는 그때, 학교에 아이돌과 같은 위치에 있던 애였으니까.


이번에 대기업 IT 계열로 이직을 한 녀석으로부터, 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 걔, 별로 안 좋은 소문이 있더라. 대학교 때 어장 관리한 거로 유명하다고.

- 그래?


초등학교 때처럼, 인기 많았을 너이니 다른 사람에게서 나온 험담이리라 생각했다.

인기 많은 여자 연예인들은 그만큼 악플도 많이 달리는, 그런 거로 생각했다.


- 아 맞아. 그러고 보니 회사에서 저번에 학회 참석하라고 해서 간 적이 있었는데... 발표자로 걔가 나오더라고. 

   근데 같이 갔던 번역팀 쪽 외국인 직원이 걔 알던데? 해외에서 뭐 어쩌고저쩌고....

   뭔가 좋은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넘겼지만.  아, 네 소꿉친구이니 말은 안 할게. 혹시 그 애랑 만나고 그러는 건 아니지?

- 나 지금 좆소기업 다니는 직장인인데. 이제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인간 여성이다. 


이제 갈라선 너와 나이긴 했지만, 너에 대한 나쁜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은 좋지 않았다.

설마.

아니겠지.


그렇게 얼버무리고, 동창들의 성화에 못 이겨 핸드폰에 저장된 후임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곧 헤드락과 암바가 걸리고, 양팔을 뒤로 붙잡힌 후 강제로 벌려진 입으로 고춧가루 섞은 소맥이 부어졌다.


*****


너에게 메일을 하루에 4번씩 작성하여 보냈지만, 여전히 읽지 않음 표시가 되어 있었다. 

뼈저리게 느꼈다.

네가 느꼈던 감정들이, 이런 감정이었구나.

사람의 호의가 거절당한다는 것이 이렇게나 쓰라린 감정이구나, 라는 것을.


너에게 호텔에서 거절당하고 난 후, 내 생활은 점점 망가져 갔다.

식욕이 사라져서 무언가를 억지로 입에 넣어도 너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라 도로 뱉어내었다.

모두가 잠든 밤에 잠을 자질 못했고, 

모두가 깨어나는 낮이 되어서야 피로에 지쳐 잠이 들었다.

하도 물어뜯어서 생기가 없어진 입술과 흉터가 나버린 손톱들.

그리고 무엇보다...너의 답장들을 하염없이 기다리느라 눈 밑에 짙게 깔린 다크 서클.

한국으로 돌아오고 난 후, 더 이상 한 발자국도 앞으로 없게 되었다.


하지만 외모는 꾸준히 관리했다.

너에게, 아니 너에게만  내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니까.

너에게 내 겉껍데기를 포함한 모든 것을 바쳐야 하니까.


대신, 욕실에서 돌비누로 살갗이 벗겨져 피가 흐를 때까지 문질렀다.

더럽혀진 몸과,내 피부 어딘가에 베여 있을 다른 남자들의 체취를 지워내기 위해서.

따가운 몸이 전신에 퍼져 나갈 때마다, 상처들이 생긴 틈에서 피가 흘러낼 때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수도자처럼, 몸이 정화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네가 내게 보내주었던 메일들을 모조리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읽는 것을 반복했다.

편지에서 느껴지던 성실함과 포근함, 그리고 평범한 일상들이 너무나 그리워서,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서일까.

매일 꿈을 꿨다. 

너에게 답장을 받는 꿈을.

너에게 용서를 받는 꿈을.

그래서 내가 너와, 손을 붙잡고 옛 추억이 담긴 거리를 함께 걷는 꿈을.


결국, 너에 대한 그리움이 한도를 넘어버려서.

너를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지만, 3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 법이다.

너의 집으로 향하는 길은 분명, 많이 변해 있었다. 

예전에는 없었던 지하철역도 생겼고, 분식집이었던 곳에는 오피스텔이 들어서 있었다.

중학교 때 준비물을 사기 위해 멀리까지 걸어왔던 문방구는 사라져 카페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너의 집은 날 기다리기 위해서인 것처럼,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너와 함께 했던 추억으로 가득한 그 길의 냄새들에 이끌려 도착한 골목길 구석, 꽃나무 한 그루가 있는 다가구 주택.

대문에 매달린 우체통 안에 들어 있는 우편물을 꺼내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너의 이름 세 글자가 박혀 있는 우편물들이 들어 있었다.

세금 고지서, 카드 명세서, 민방위 통지서 등...

다른 사람에게는 의미가 크지 않은 것들이었지만, 내게는 아니었다.

너의 이름 세 글자를 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여전히, 너는 여기에 있었구나.


너와 관련된 서류 파일이 2개나 있는데, 아마도 또 하나가 생길 예정이다.

하나는 네가 보내주었던 편지들.

하나는 네가 보낸 메일들을 인쇄한 것들이 담겨 있었다.


너의 이름이 새겨진 우편물들을 소중히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편지 봉투를 뜯어, 내용물들에 있는 너의 이름들을 찾아 가위로 오려내어 서류 파일에 채웠다.

다른 내용들은 내게 의미가 없다.

너의 이름만이, 내게 의미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너의 집에서 가지고 온 우편물들을 통해, 네가 다니고 있는 회사에 대해서 조사했다.

당연하잖아.

내 소중한 사람이 다니고 있는 회사야.

이름 들어본 적도 없는 회사인데 사기 취업 당한 것은 아닌지, 

최저임금 어기고 있는 회사인지, 그래서 혹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회사 주소를 찾아내고 난 후부터, 평일마다 나는 너와 함께  회사로 출근했다.

네가 회사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나면, 난 맞은 편 카페에 앉아 너의 회사 쪽을 지켜보았다.

출근할 때 너는 항상 종점인 역까지 걸어가서 급행 지하철을 탔다.

자리에 앉자마자 입을 벌린 채 가방을 끌어안고 조는 너의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습관이 몸에 밴 건지, 너는 하차 역이 가까워지면 자동으로 눈을 떴다. 

하차한 후에는 무인 카페에 들어가서 키오스크로 싸구려 커피를 구입하고는 이동했다.


그런데. 

너의 곁에는 항상 여직원 한 명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회사 직원 현황 페이지에서 봤던, 너의 직속 후임이었다. 

분수도 모르고 네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바보 같은 이야기들만 지껄이는 년.

저딴 여자가 감히 너의 곁에 있다. 

어떻게든 너에게 어필하고 싶었는지, 두툼한 몸 사이즈에 맞지도 않는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억지로 껴입었으며,

연약한 모습도 보여주기 위해서 굽이 올라온 구두를 신고 걷다가 중심을 잃은 척 너에게 팔짱을 끼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니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내가 더, 잘해줄 수 있어.
저년 따위가 줄 수 없는 모든 걸, 너에게 줄 수 있는데.


하지만 무엇보다 내 마음을 후벼 파는 것은.

내게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미소를 다른 여자에게 보여주고 있는 너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난 보았다. 

지난주 네가 그년과 퇴근하고 카페에서 그년이 장난스럽게 너의 뺨에 입맞춤할 때,

내 쪽을 바라보며 승자의 미소를 짓는 것을.


******


- 흠....

- 뭔가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주임님?

- 고민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 주임님이요. 지난주까지는.

- 이게 진짜. 됐고, 카레나 먹으러 가자. 저번에 먹고 싶다는 집 예약해놨어.

- 넵

배터리가 다 닳아버린 스마트폰을 충전기에  꽂아두고 식사를 하러 이동하자, 곧 후임이 잽싸게 구두로 갈아신더니 내 뒤를 따라온다.


후임의 부모님과 만나고 난 그 후부터, 강아지처럼 날 쫓아다닌다.

회의라던가 내 업무가 끝날 때면 어떻게 안 건지 금방 쫓아오고, 다른 남직원들의 접근은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거절을 하며 철벽을 치고 있다.

가끔 내가 타 부서와의 협업으로, 여직원과 모니터를 보며 앉아 있으면 먹잇감을 노리는 눈빛으로 날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지금 와서 보니, 기니피그가 아니라 기니피그의 탈을 쓴 삵이다.

그래도 내가 몇 번 주의를 주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내게 고개를 연신 숙이곤 했으니까.

버리지 말아 달라며, 잘못했다고 울먹이는 후임이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금새 정상인 상태로 돌아오는 여자였으니까.


...본론으로 돌아와서.

내 고민은 후임에 대한 것이 아니고, 내 소꿉친구에 대한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내 번호를 어떻게 안 것일까.

부모님은 결코 내 번호를 그녀에게 알려준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도, 그녀로부터 얼마 전부터 카톡 메시지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답장으로 그만하자고 말하고, 채팅방을 나가면서 해결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집요하게도 나를 카톡방에 초대하고 장문의 사과 메시지들을 보냈다. 그걸  몇번이나 겪었더니  밤새도록 오는 카톡 알림을 이기지 못하고 스마트폰이 방전되어 버렸다.

그녀의 행동에 질려 버려서 카톡방을 차단했더니, 문자와 전화가 미친 듯이 왔다. 

핸드폰 번호들을 수신 거부로 등록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제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들이 오고 있었다.

혹시나 다른 회사 영업팀들의 전화일까, 받았더니 거기에서는 소꿉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지어 언젠가는, 내 자리에 있는 업무용 전화기에서도,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 적이 있었다.

거기다가 부모님으로부터, 누군가 내게 온 우편물들을 훔쳐 간다는 부모님의 이야기까지.
요즘 들어 이상한 일들 천지였다.


- 주임님, 고민 있는 거 맞죠?

- ...네가 상관할 일은 아니야. 

- 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무슨 일 있으면, 숨기지 말고 꼭 알려주셔야 해요.

- 으, 으응. 

후임이 내 속을 꿰뚫어보는 것 마냥, 미소를 지으며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바라본다. 그 시선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다음 날, 어깨에 담이 들려서 물리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 예약을 잡을 겸 겸사겸사 오후 반차 휴가를 냈다.

후임이 내가 없는 오후는 외롭다면서 같이 오후 반차 쓰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을 겨우 달랬다.

후임과 사귀는 것이 즐겁기는 하다만 가끔은 조용히 혼자 지내고 싶어져서, 병원 갔다가 집에 일찍 들어가 맥주나 마시고 게임 중계 보면서 잠을 자고 싶었다.

해가 떠 있을 때 퇴근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며 회사 1층 흡연장소에서 담배 하나 피우려는 순간, 

선글라스를 쓴 여인이 다가와서 내 앞을 가로막았다.

 

- 생각보다 작은 회사네?

선글라스를 벗자 얼굴을 드러낸 것은, 바로 너였다.

내 소꿉친구이자 이제 갈라서기로, 인연을 끊기로 한 내 오랜 친구.


- 중소이니 당연하지.

- 담배도 피우고, 불량해졌네?

- 어른이 되면 술도 담배도 할 수 있는 거지 뭐. 나 간다.


널 무시하며 돌아서는데,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내 손목을 움켜쥔다.

대체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 거야.

안 그래도 담 들린 팔이라서 아파 죽을 것 같다.


- 널 기다렸어. 답장이 없어서. 왜 연락을 안 받는 거야? 너네 집까지 찾아가서 매일 매일 기다렸는데....

   너희 부모님은 보이는데 넌 안 들어오더라.   어디에서 살고 있는 거야? 언제 독립했어?

- 네가 알 거 없잖아?

- 자꾸 나 피하면, 어떻게 할지 몰라?

- 이거 놔...큭!


손목을 붙잡는 힘들이, 점점 세진다. 

동시에 너의 표정도 차갑게 변해가고 있었다. 


-  이깟 회사, 그만두는 게 어때? 연봉도 낮잖아? 이번에 갓 상장하려는 회사이고 이직률도 높은 회사인데 힘든 게 당연하겠지. 

    대신 나랑 같이 지내자. 내가 더 잘해줄 수 있어. 응, 그게 더 행복할 거야.

    나, 네 편지들을 모두 가지고 있어. 그저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 망설였던 것 뿐이야.

    집에 같이 가자. 너의 편지들을 정리해 놓은 것들을, 보여줄게. 


너는 미소를 지은 채로, 부서진 인형처럼 높낮이 없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퓨즈가 나갈 것 같은 전구처럼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주이이이임니이이이임!!!! 부장님이 ppt 업로드하고 퇴근하라고 하셔요!!!  

널 떨쳐내기 위해 밀어붙이려는 순간, 슬리퍼를 신은 후임이 5층에서 1층까지 비상계단으로 급하게 뛰어 내려오며 소리쳤다.

너는 놀라서 내 손목을 잡고 있는 손을 놓았고, 후임과 눈이 마주쳤다.

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고, 표정이 점점 험악해져 간다.

까드득, 하는 소리와과 함께 너의 손톱에 붙어 있는 네일아트들이 부서져 내리는 것이 보인다. 


- 응? 자자. 빨리 올라가요, 주임님. 아, 저기요. 주임님이 좀 급해서.

- ...씨발년.

-  하아. 뭐라는 거야.


험악한 표정을 짓는 너와는 반대로, 후임은 어이 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너에게 다가갔다. 


- 나중에 한 번 만나요. 할 이야기 있으니까. 그니까 오늘은 돌아가. 개망신당하기 싫으면.

- 뭐?

- 그쪽이야 날 모르겠지만.... 난 당신 잘 알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