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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자료실을 뒤적거리다 흘러내린 책 더미 속 서적 하나에 눈이 갔다. 아르망은 그 서적을 집어들고 뒷정리를 잊은 채 종종걸음으로 자신의 내무실로 돌아가 커피포트를 만지작거렸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철제 접이식 의자 하나를 챙겨 창가에 앉아 우아하고 차분히 춤추는 눈을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돌아오는 보트에서 맞이한 올 해의 첫 눈은 꽤 거칠었지 않았는가 하고 되뇌인다.        


물이 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커피포트에서 딱- 하는 둔탁한 알람이 들려왔다. 티백 녹차를 넣어 미리 준비해둔 머그 잔에 물을 붓고 티스푼을 천천히 시계 방향으로 저어 우려내니 텁텁한 녹색 향이 아르망의 코를 간질였다. 


"…" 


양 손으로 쥔 컵이 전해주는 따스함과 창 밖의 포근한 회색 빛에서 약간의 위안을 찾았을 수도 있으련만 굳어있는 아르망의 얼굴은 어제고 오늘이고 좀 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갓 우려낸 녹차 또한 무릎에 올려놓은 서적을 받침대 삼아 머그 잔을 올려놓기만 했을 뿐, 입가에 가져다 대는 일은 없었다.


사령관의 손에 의해 코헤이 교단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 한 달이 흘렀다.


보트 위에서 쓰러져 이틀 만에 깨어난 사령관은 간병을 하던 알비스와 아르망의 걱정어린 시선도,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그 누구보다 노심초사 했던 발키리도, 말 없이 자신들을 받아들여준 주인을 두 번 다시 잃지 않겠다는 결의가 생생히 느껴질 정도로 모든 것에 열심이던 몽구스 팀도 뒤로 하고서 곧 바로 해안가를 찾았다. 


한계를 맞이했었던 몸이 고작 이틀만에 온전한 상태로 되돌아올 리 없었다. 뛰는 것에 가까운 다급한 잰걸음으로 해안가를 향하면서 몇 번이고 쓰러지고 넘어졌으나 그럴 때 마다 사령관은 뒤따라 온 이들의 손을 쳐내었다. 할 수 있다고, 홀로 해낼 수 있다고 말 없이 악을 쓰는 그 모습은 아르망이 늘 보아왔던 심지 굳고 의지가 가득한 옛날의 그가 아닌 아무 근거도 없이 치료가 불가능한 병에서 회복할 수 있다 믿는 불치병 환자에 가까웠다.


모래사장에 들어서 바다의 지척까지 다가간 사령관은 철썩이는 겨울의 파도에게서 흩날리는 파편에도 아랑곳 않고 가만히 서서 먼 시선으로, 이제 막 동이 트려는 지평선을 묵묵히 바라만 보았다. 그 지평선 너머로 사령관이 무엇을 보고 있는가 아르망은 알 길이 없었지만 커다란 항아리의 내면과도 같은 공허한 두 눈으로 미루어보아 그저 어딘가, 아득히 먼 곳에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해가 완전히 그 모습을 지평선에서 드러내고 나서도 사령관은 고개만 위태로이 휘청거릴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보다못한 알비스가 다가가려 했으나 고개를 가로젓는 발키리에게 막혔기에 가냘픈 설치류와 같이 몸을 움츠리고 시선을 떨구었다. 발키리의 판단은 현명하지는 않았어도 어느 정도는 옳았다. 지금 그 누가 다가가든, 설령 알비스가 다가갔다 해도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할 수 있긴 커녕 제대로 된 반응이나 보여올까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발키리나 아르망, 그리고 그 이외의 누가 보던 사령관의 상태는 정상이라 말할 수 없었다. 제대로 깨어있긴 한 걸까. 아직 잠이 가시지 않은건 아닐까. 이 해안가의 풍경을 꿈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멍하고 공허한 눈, 휘적거리는 양 팔, 위태롭게 떨리는 두 다리를 본다면 그 누구라도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고 아르망은 생각했다. 


완연한 아침이 되어서야 사령관은 등 뒤의 일행들에게 돌아섰다. 햇살의 역광 탓에 그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방금 전 보다 생기가 도는 눈만은 확인 할 수 있었기에 아르망을 제외한 모두가 근심을 어느 정도 덜 수 있었다. 모두가 사령관과 시선을 마주한 사이에서도 아르망 만이 고개를 들지 못했고 사령관은 그것을 확인하지 못한 채 손쉽게 파도에 휩쓸릴 것 같을 크기의 목소리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섬 전역의 방비를 강화한다. 경계근무지와 순찰지역 또한 확대한다."


지시 자체는 옳았다. 베로니카의 저주와도 같은 서늘한 경고를 들은 이라면 누구라도 취할 반응이었다. 그러나 리리스가 휩쓸고 간 이후 보급대는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만이 생존한 상태였기에 사령관의 현 지시를 이행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물론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사령관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매일 같은 나날이 반복되었다. 섬 전역 곳곳에 빠듯히 배치 되고 추가적으로 순찰을 도는 병력들. 방어에 용이하게 지형을 바꾸고 보급대의 시설에 있는 장비들을 옮겨서 설치하는 등, 섬 내부는 돌아 볼 틈 없이 오로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외부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시간만이 계속해 흘러갔다. 그 고된 시간 속에 사령관의 일행은 물론이고 심지어 알비스, 사령관 본인까지 손을 뻗고 나섰다. 그러나 오직, 아르망 만이 그 곳에 없었다.


아르망이 나서지 않겠다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먼저 사령관의 지시를 이행한 것이 아르망이었다. 합리적인 계획표와 근무표를 발빠르게 작성하여 하루라도 빨리 사령관의 새 지시를 원활히 이행하게 할 수 있게 한 것은 아르망의 덕이었고 합리적이었기에 보급대의 모두가 조금이라도 피로를 덜 수 있었던 것도 아르망의 덕이었다. 그러나 계획표에 따른 아르망의 순번이 찾아오자 사령관이 막아서서 단 한 마디만을 던지고 아르망 대신 섬의 외곽으로 나섰던 것이다.


'아르망의 몫까지 내가 할테니 아르망은 나서지 않아도 돼.'


이해… 하지 못할 처사는 아니었으나 납득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령관에게 있어 아르망은 코헤이 교단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자기 자신 조차 폭격에 휘말릴 것을 감수하면서, 베로니카의 거짓인지 진실인지 모를 약속 하나에 기대어 그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면서 구해낸 존재였기에 보호하려고 드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것을 짐작하면서도 아르망은 불공평하다며, 자신 또한 나서겠다며 사령관에게 재고를 요청했으나 사령관은 단호하고도 칼 같이 절대 안 된다는 대답만을 반복했다. 그런 충돌이 십여 회 쯤 반복 되었을까. 아르망은 그제서야 작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사령관이 단순히 자신을 감싸고 도는 것이 아니라고. 그런 목소리, 그런 눈을 보면 알기 싫어도 알 수 밖에 없다고.


집착. 그것은 집착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향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아르망 만을 병영에 대기시킨 채 사령관 본인은 단 하루도 쉬는 일 없이 부릅 뜬 눈으로 섬 전역을 휘젓고 다니는 모습은 가히 기괴하다 여길 정도였다.


그리고, 아르망은 깨닫고 만다. 그것은 단순한 집착을 아득히 뛰어넘은 망집과 다를게 없다는 것을.

캐노니어의 지휘관 로열 아스널. 보급대로 복귀한 이래로 사령관에게서 그녀와 비슷한 냄새가 난다고.


사령관에게서 그 죄인을 비춰보인 것에 대해 뒤늦게 불경하다고 생각했으나 달리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그야 정확했으니까. 지금의 사령관은 아스널을 빼다 박았으니까. 물론 차이는 있다. 아스널이 자침을 이리저리 흔들어대는 고장난 나침반이었다면 사령관은 당장이라도 끊어질듯이 팽팽히 늘어나있는 고무줄이란 차이. 어느 쪽이든, 그것들을 마주할 담력이 아르망에겐 없었다.


이후, 보급대에 내려진 사령관의 지시에 응하듯 베로니카의 경고대로 몇 번의 침투가 있었다. 아르망의 기억대로라면 세 번, 아니, 네 번 정도였을 것이다. 가장 취약하다 여겨지는 시간대에 보트로 침투한 이, 무모하게도 수영을 통해 맨몸으로 침투한 이가 있었으나 리리스와 베로니카의 경우와는 달리 이번에는 확실히 인지한 후 과하다고 여길 정도의 대비를 해두었었기 때문에 아군의 사상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바이오로이드 중 손에 꼽힐 정도로 강한 개체인 블랙 리리스를 겪었어서일까. 오히려 맥이 빠질 정도였다.


역시 사령관 님 이라며 보급대의 대원들은 쾌재를 불렀지만 사령관의 일행, 그 중에 특히 아르망은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사령관에게 있어서 그 괴물들이 갖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기뻐한다는 것은 불 붙은 나무에 기름을 들이붓는 것과 다를게 없었기 때문이었고 여기에 더해 아르망 없이 훌륭히 방어를 해냈다는 사실이 아르망을 더더욱 움츠러 들게 했다.


연산능력. 아르망의 연산능력은 언제나 사령관에게 최고의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아르망 본인의 표현대로 예지라고도 부를 수 있는 그 연산능력에 사령관은 의지했고 아르망 또한 그에 부응해 최고 보다도 더 뛰어난 결과를 사령관의 손에 쥐여주고자 노력했다. 어디까지나 과거, 철충에 한해서. 철충이 아닌 두번째 사령관의 손에 의해 태어난 괴물들은 아르망이 예지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예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가 없었으니까. 그 정보를 수집 할 기회조차 없었으니까. 단순한 전술, 전략에 대한 조언은 굳이 자신이 아니어도 되었다. 그런 것이라면 알비스라도 가능하다. 


자신의 가장 커다란 가치와 존재이유가 오늘 날에서는 쓸모없다 이전에 발휘 조차 불가능 하다는게 무력감을 넘어서 비참하게 마저 느껴졌다. 사령관의 손으로 수백의 바이오로이드를 죽이게끔 만들고 살아남았으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숨만 쉬고 있는 꼬라지는 더더욱 비참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새장 속의 새, 화원 속의 꽃. 아르망은 그것들과 다를 것이 없어졌다고 느끼면서도 다시, 허망하게 웃으며 부정했다.

새와 꽃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기쁘게 해주는 기능이라도 하지 않냐며. 나 자신은 지금 누가 필요로 하냐며.

이미 한계였던 사령관이 두 눈 뜨고 마주 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것은 내가 살아남은 결과이지 않느냐며.


격해진 감정 탓에 얼굴이 달아올랐음에도 오른 쪽 눈에서 떨어진 눈물 한 줄기가 뜨겁다 못해 달궈진 쇳물처럼 느껴졌다.

양손으로 잡고있던 머그 잔은 이미 식어버린지 오래다.

미약한 열을 품은 한숨을 회한과 함께 토해내고 차가워진 녹차를 단숨에 비운 후 아르망은 자료실에서 가져온 서적에 고개를 떨궜다.


대부분의 종이 서적이 그랬 듯 아르망이 챙겨온 서적 또한 멸망 전의 것이었다. 전자와 홀로그램으로 대체 된 세계였음에도 인류는 종이 서적을 생산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멸망 전 인류는 의외인 부분에서 묘한 고집이 느껴진다. 아르망은 그렇게 생각하며 역동적이고 알록달록한 서적의 겉표지를 넘겼다. '마법소녀 매지컬 시리즈 코믹스'. 제법 고상한 취미의 아르망이라면 좀 더 옛 시대의 서적, 예를 들자면 최후를 맞이하기 직전의 LRL이 읽었던 것과 비슷한 서적을 골랐겠으나 오늘은 왜인지, 꽤 발랄해 보이는 그 서적에 눈이 갔다.


"…풉."


웃음이 나왔다. 순수히 웃기거나 재미로 인한 것이 아닌 낮잡아보는 뒤틀린 비웃음이었다.

이제는 오르카와 함께 사라진, 오로지 서적의 캐릭터로써만 접할 수 있는 뽀끄루 대마왕의 대사가 아르망의 미간을 자극했다.


'이 곳에 마가 강림하여 세상을 지배하고 지옥이 펼쳐질 것이니, 너희 모두 절망 하리라.'


비웃음이 나올 정도로 우습고 귀여웠다. 그래, 사실 진짜 뽀끄루 씨는 마왕이란 역과는 어울리지 않게 귀엽고 가녀린 성품의 존재였으니 서적에서 마저도 은연 중에 귀여움이 느껴지는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르망은 자신과 같은 빌런인 이 어설픈 마왕에게 귀띔해 주기로 했다.


마왕 님. 뽀끄루 대마왕 님. 

그래서는 세상을 지배 하실 수 없답니다.

고작 마법 소녀들을 괴롭힌다고 해서 지옥을 불러오실 수도 없지요.

안타까워요. 살아만 계셨다면 전부 알게 되셨을 텐데요.

구원할 길 없는 이 절망을.

절로 몸서리가 쳐지는 이 두려움을.

당신의 마 따위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진짜 지옥이 뭔지 아시는지요.

사랑하는 이가 무너져감에도 몸부림 조차 칠 수 없는 것. 

그게 바로 지옥이에요.

그러니까 알겠어? 당신은 진짜 마왕이 아니야.

진짜 마왕은……


아르망의 오른 손이 뽀끄루가 그려진 페이지를 거칠게 잡아 뜯었다. 이어서 만화책을 통째로 찢어버리고자 겉표지 째로 마구 비틀었지만 그 가냘픈 양 팔이 가지는 완력으로는 터무니 없는 행위였다. 백년 가까이 된 만화책 하나 조차 제대로 작살 낼 수 없다는 것에 분노한 아르망은 이내 마구잡이로 만화책을 짓뭉개기 시작했다. 페이지를 찢고, 꾸기고, 잡아뜯고. 그러는 사이 종잇날에 손가락이 몇 번이나 베였지만 아르망은 그 시린 통증이 느껴지지도, 신경쓰이지도 않았다. 아르망의 발치에 종이쪼가리가 가득해지자 이제야말로 통째로 찢을 수 있겠다며 다시 한 번 비틀어 보았지만 겉표지에 미미한 균열만이 일었을 뿐, 만화책이 두 쪽이 나는 일은 없었다.


쾅!


눈물 자국이 남아 뻑뻑해진 뺨을 잔뜩 일그러뜨린 아르망은 듣는 이는 오직 자신 뿐인 비명을 지르며 관물대에 만화책을 집어던졌다.

무너지듯 의자에 기대어 파르르 떨리는 양 손에 얼굴을 묻는다.

속삭이는 흐느낌을 들어주는 이는 이번에도 오직 자신 뿐이었다. 

창 밖에 내리는 눈이 그런 아르망에게 한심하다는 듯 시선 한 번 주지않고 우아한 춤사위를 계속해 이어나갔다.



/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화단을 조용히 산책하던 아르망에게 샬럿이 다가왔다.


"파티라고요?"


샬럿이 전해온 소식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아르망에게 샬럿이 다시 말했다.


"그래요. 크리스마스잖아요. 오늘 밤에 조촐하게나마 파티를 여시겠대요."


샬럿의 말에 의하면, 근 한 달이 넘게 이어진 고된 일과 속에서 지칠대로 지친 보급대의 대원들을 대표해 개체 번호 2744번 브라우니가 사령관에게 넌지시 제안했다는 모양이다. 일행들은 난감해 하며 사령관의 눈치를 살피면서 브라우니를 만류 했지만 골똘히 생각하던 끝에 사령관은 예상 외로 긍정했다고.


몇 차례 이어진 침투의 방어는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있었고 파티 중에도 경계를 늦추진 않을 것이다. 자신의 강박적인 지시에 대원들이 고생하고 있다는 것은 사령관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니 하루 정도는 늘어져도 괜찮겠다는 것이 사령관의 대답이었다.


"저기 그… 아르망, 당신…"


"뭔가요?"


"괜찮은…거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샬럿이 우스웠는지 아르망은 가벼운 한숨과 함께 피식 웃었다.


"괜찮지 않다면요? 왜 당신이 나를 걱정하는거죠? 지금의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니란 것은, 총사대장. 당신이 가장 잘 알겠지요. 아니면 또 먼저 동행해 왔을 때 처럼 멋대로 구는 건가요? 육지에 온 이래로 시간이 좀 지났다 해서 이젠 거리낌 없이 굴어도 되겠다 생각한 것은 아니길 바라요. 폐하께서 당신을 다시 받아 들이셨다고 해서 착각하지 마요. 폐하께서는 당신을 용서 하셨을지 몰라도 저는 아직 당신에 대한 것들이 전부 가시지 않았답니다. 그러니 서로 필요한 용건만 보도록 하지요. 앞으로도."


평소에 화를 내지 않는 자가 화를 내면 무섭다고 했던가. 칼 같이 눈매를 세우고 입을 통해 발사 되는 아르망의 속사포가 사정없이 샬럿의 전신에 날아들었다. 샬럿은 평소와는 명백히 다른 아르망에게 당황하여 또 한 번 괜찮냐 물어 볼 생각이었으나 아르망이 상기해 온 자신의 과오를 되씹자 염치가 없었음을 통감하고 미안하단 말과 함께 씁쓸히 등을 돌렸다.


"…"


그리고 아르망 또한 당황하고 말았다. 폐하께서 샬럿을 받아 들이신다면 개인적인 감정은 홀로 청산하고 최소한 표면적으로나마 이전과 같은 관계를 구축해도 좋을 것이라 정한 것이 테마파크에서였다. 그 이후로는 오르카에 있을 무렵 보다 줄어들었다 해도 몇 번 정도 사적인 대화가 오고간 적이 있었고 아스널에게서 사령관을 구출 할 때도 아르망은 샬럿과 호흡을 맞췄다. 


자신이 민감해진 것과 아무 관련 없는 샬럿에게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감정을 소모한 여파가 아르망을 덮쳐왔다. 샬럿에게 어떤 식으로든 큰 소리를 칠 처지가 되지 못한다고 아르망은 생각한다. 자신과는 다르게 샬럿은 현재 사령관의 최대 전력으로써 소임을 다하고 있으니까. 


애다. 나는 어린 애다. 알비스 보다도 어리다. 오르카의 머리 중 하나이자 참모였던 자신은 지금, 심술을 부리는 치기어린 어린 애와 다를 것이 없어졌다. 


"…한심하긴."


오늘 하루, 보급대의 움직임은 평소와 달랐다. 경계근무나 순찰지역을 분주히 돌아다녔어야 할 대원들은 창고를 들르거나 개인에게 배급된 부식 등을 들고 식당을 드나들었고 저녁 직전이 되어서는 파티라 부르기엔 민망했으나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내기엔 충분한 모습으로 탈바꿈 된 식당을 보니 샬럿의 말대로 진짜 파티가 열리는 모양이었다. 해가 숨기 시작해 땅거미가 지고 조금 더 지나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어둠으로 물든 보급대 사이에서 형형색색 튀는 밝은 식당이 눈길을 끌었다. 서적을 읽을 생각도 없이 창가를 통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출입문을 통해 알비스가 들어왔다.


"아르망 언니! 여기 있었구나!"


"알비스? 무슨 일인가요?"


"무슨 일이라니? 샬럿 언니가 말 안했어? 오늘 파티 하잖아!"


"…있죠, 알비스. 나는…"


"자자, 빨리 가자! 지금 안가면 먹을 거 없어!"


제빠르게 아르망의 겉옷을 챙기고 다가온 알비스가 아르망의 손을 잡아끌었다. 솔직한 변명은 할 수 없었기에 폴리에스터 소재의 반팔과 알비스에게서 빌려입은 돌핀팬츠 차림을 겉옷 하나로 커버할 수 없다며 엉뚱한 변명을 둘러댔지만 만면에 웃음지은 알비스는 아르망의 말을 듣는 척 마는 척 점점 더 걸음을 서둘렀다. 알비스의 완력이 이렇게나 강했던가 하고 아르망은 생각했지만 알비스의 태생이 전투용 바이오로이드 였음을 떠올리고는 잠자코 잡아끌리는대로 따라 갈 수 밖에 없었다. 병영을 나섰으면 겉옷을 건네야 하거늘 알비스는 추위에 떨든 말든 도망칠 기색이 역력한 아르망의 손을 절대 놔주지 않고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우리 왔어! 앗! 벌써 먹고 있잖아! 초콜렛 남겨 놔!"


알비스는 아르망에게 겉옷을 전달한 뒤 한창 먹자파티를 벌이는 스틸라인 분대에게 달려갔다. 전투적으로 먹거리에 달려드는 브라우니들에게 레프리콘이 칠칠치 못하다며 몇 마디를 날렸지만 레프리콘 또한 입에 한가득 먹을 것을 머금고 있었기에 본인은 그 뭉개진 그 발음부터가 칠칠치 못했다.


"…"


식당에 들어설 때 마다 아르망은 생각한다. 이 곳이 과연 한 달 하고 좀 더 전에 그 아비규환이 일었던 장소인가. 곳곳에 그 때 새겨진 탄흔과 폭발흔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식당은 전체적으로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형형색색의 천쪼가리를 만국기 처럼 천장에 걸어두고 온화한 주홍 빛 램프로 밝혀놓은 실내. 요리라 부를 것은 없었으나 간식거리나 음료 그리고… 술로 채워둔 테이블.  살짝 아쉬운 것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억지로 내겠답시고 락카로 MERRY CHRISTMAS라 중구난방 적어놓은 누더기를 천장에 걸어놓은 것. 달아놓느니만 못한 그 누더기를 보며 분명 브라우니의 짓일 것이라고 확신한 아르망은 식당을 가만히 돌아보다가 아무도 없는 적당히 구석진 자리에 다가가 앉았다.


"폐하께선 아직 이신가…"


'기름에 튀긴 양파가 좋다네.

맛있으니까 양파가 좋다네.   

기름에 튀긴 양파가 좋다네.

양파가 좋다네. 양파가 좋다네.'


아르망의 고국으로 설정된 나라의 군가이겠으나 들을 때 마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테이블에는 양파가 없는 데다가 부르는 이가 브라우니여서 그럴 것이라고 여긴 아르망은 테이블에 놓인 간식거리에 손을 대는 일도 없이 한동안 가만히 앉아서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몸을 숨겼다.


시간이 지나자 사령관의 일행 중 샬럿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고개를 두리번 거리는 샬럿과 시선이 마주쳤으나 샬럿이 바로 고개를 돌렸기에 마주친 것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샬럿은 아르망이 앉은 자리와 조금 떨어진 중앙 쪽에 자리를 잡고 모자와 검을 내려놓아 거추장스러움을 덜었다.


멍하니 테이블을 응시하는 사이, 어느새 속속들이 참석한 보급대의 생존자들로 가득해진 식당은 서로의 말소리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번잡해졌다. 아르망은 생각보다 살아남은 이들이 많다며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의 숫자를 헤아려본다. 스물 다섯, 여섯… 어림잡아 서른 명 정도. 사령관의 일행까지 더하면 서른 네다섯 정도는 되겠다며 중얼거리고는 갈증을 해소하고자 캔 음료 하나를 손에 쥐었다. 고개를 들고 목에 음료를 흘려보내고 있자 마침내 사령관이 발키리와 함께 식당으로 들어섰다. 생각지 못한 타이밍에 나타난 사령관의 모습에 사래가 들린 아르망은 켁켁거리면서도 샬럿과 마주 앉아 식당을 둘러보는 사령관의 시선을 급하게 피했다. 


"하아… 하아…"


왜 피한거지? 사령관 님, 내가 모시는 폐하이신데 방금 왜 시선을 피한거지? 아르망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행동에 의문부호를 띄우며 목에 걸린 음료를 쓸어넘긴 뒤, 안그래도 아담한 몸집을 더 웅크리고서 아르망은 사령관을 곁눈질로 살펴보았다.

사령관을 지나치거나 찾아가 인사하는 보급대 대원들. 유미, 실키, 안드바리, 브라우니, 레프리콘 등등… 그 모든 이들 하나하나에 반응해주며 옅은 미소를 지어주는 사령관의 모습은 한 달 전의 사령관에게선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미소다. 무려 미소. 아스널 이래로는 본 적이 없는 모습에 동요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아르망은 다시 사령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사령관이 아주 조금이나마 다시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된 것은 아르망에게 있어서 더 없이 기쁜 일이다. 그런데 왜일까. 딱히 추운 것은 아닌데도 테이블에 올려둔 손이, 모아둔 다리가 발발 떨리는 것을 좀 처럼 주체 할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흘끗 곁눈질을 하니 사령관은 발키리, 샬럿과 함께 술을 막 나누고 있는 참이었다. 조촐한 병맥주였지만 지금은 그것으로도 괜찮다는 사령관의 만족스러운 표정에 아르망의 눈썹이 들썩였다.


"왜 혼자 있는 거니?"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향하자 바로 눈 앞에, 어느새 맞은 편에 앉아있는 메이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아르망에게 물었다.

일부러 나를 찾은 것은 아닐테고, 그냥 구석진 자리를 찾았을 뿐인가. 아르망은 내리깔은 눈으로 조용히 메이를 응시했다.  


"…"


"…동석하지 않는 거니? 그들과…"


사령관을 칭하는 메이의 그 표현이 위태롭던 아르망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리고 말았다.


"…그들? 지금 그들이라고 하셨나요?"


아르망의 손이 주먹을 쥐었지만 떨림은 여전한채였다. 아르망이라곤 생각 할 수 없는 무거운 목소리와 그 손을 보자 당황한 메이가 조심스럽게 손사래를 치며 아르망에게 말했다.


"앗… 아니야. 그… 나는… 사령관과는…"


제대로 된 변명조차 똑바로 못하는 메이를 아르망은 기다려주지 않고 말을 가로챘다.


"아니에요? 방금 그들이라 말씀 하셨잖아요. 지금 거짓말을 하시는 건가요?"


"읏…"


"그들… 그들? 마치 폐하를 남인양 말씀 하시는군요. 아, 메이 대장님께는 폐하가 남과 다를 바 없는 것이죠? 그렇죠? 그야, 짐을 꾸리시던 폐하께 나갈거면 어서 나가라며 마지막까지 폐하를 괴롭게 한 것은 둠 브링어의 대장님, 당신이니까요."


"잠… 잠깐만, 내 얘기를 들어 줘. 난 단지…"


"……시끄러워. 너. 내가 잊었을 것 같아? 기억하도록 해. 너희는 반역자, 배반자들. 폐하께 감히 그 역겨운 얼굴을 들이미는 것 조차 용납되지 않는 것이 너희들이야. 특히나 오만했던 너와 레오나는 더더욱. 아 그렇지. 혹시 들었어? 레오나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아르망의 고요한 박력에 하려던 말을 잊은 메이는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래? 그러면 알려줄게. 뭍에 있는 공업도시에서 그 자가 만든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잡아 먹혔어. 한 끼 식사가 되었지."


아르망의 대답에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한 메이를 무시하고 아르망은 계속해 말을 이었다.


"…내가 아쉬운게 뭔 줄 알아? 레오나의 몰골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다는 거야. ……역겨운 배반자 같으니. 그 추한 몸뚱이를 언제까지 살려둘 셈? 폐하를 위해서라면 너도 레오나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그 꼴이 되어야만 해."


아르망은 뒤늦게 본인이 내뱉은 말에 놀라며 잠시 머뭇거렸지만 지금은 메이가 우선이었다.


"태연하게 말이나 걸고… 홀로 있으니 내가 만만해 보이셨나요? 유감이에요. 조금이라도 염치가 있으시다는 가정하에 말씀드리지요. 여기에 오래 있지 마세요."


아르망이 말하는 여기란 어디인가. 식당인가. 아니면 보급대인가. 아르망의 말을 곱씹으며 고여오는 눈물을 재빨리 훔친 메이가 속삭였다.


"…미안…"


사과받을 이유는 없다. 받아봤자 불쾌하기만 하다. 애초에 사과할 대상이 잘못됐다. 그리고, 나도 잘못됐다. 샬럿을 쏘아붙였던 것과 같다. 내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메이 대장의 말꼬리를 붙잡아다가 폭언을 퍼붓는가. 게다가… 폐하를 위해서 죽어버리라니. 마치 코헤이의 천사들이나 할 법한 말이 아닌가. 이래서야 그 천사들과 다를게 없지 않은가. 


아르망은 테이블에 올려둔 손과 함께 고개를 떨궜다.


"하… 하하…"


의식하지 못한 허망한 웃음이 입가에서 새어나왔다. 그 웃음에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메이였으나 더 이상 메이는 아르망의 신경범위내에 들어있지 않은 자였다. 머리를 몇 번 좌우로 흔들고 고개를 든 아르망은 다시, 몇 번째 인지 모를 곁눈질을 사령관에게 향했다.      


술기운이 오른 탓일까. 살짝 발그레진 얼굴을 한 사령관의 시선을 따라가니 그 곳엔 똑같이 사령관을 마주보고 있는 발키리가 있었다.

묘한 표정. 사령관은 지금 아르망에게 있어서 익숙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다. 그윽하게 풀어진 눈매에서 오는 포근한 인상과 어딘가 흡족스럽다는 표정이 합쳐진 사령관의 얼굴은 낯설었다. 그런 낯선 얼굴을 한 것은 발키리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이것도 술기운이 오른 탓일까. 아니, 그럴 리 없다. 폐하야 어쨌든 발키리 마저 폐하와 완전히 똑같은 저런 편안해 보이는 표정을 짓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발키리가 어떤 자인가. 오르카에 있었을 때에는 표정을 살짝 찡그리기만 해도 그 날 하루 동안 모두의 화제가 될 정도로 포커페이스 였던 자였다.


"…"


골똘히 생각해보니, 낯설었을 뿐 본 적이 없는 표정은 아니었다. 사령관이 오르카에 있을 무렵, 오직 발키리에게만 보이던 그 표정이었다. 

…아, 그래. 그랬지. 하마터면 잊을 뻔 했었다. 저 둘은 서약을 나눴던 사이. 부부의 연을 맺은 사이였지. 혹시, 이 한 달 사이에 다시 관계를 회복한건가? 그렇다면 그건 축하할 만한 일이다. 눈을 질끈 감아버릴 일이 아니란 말이다. 서로를 향한 감정이 아직 남아 있다면 아르망은 알 수 없을 표정을 짓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머리 속에서,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건지 차가운건지 분간이 안되는 거대한 응어리 하나가 촉수를 뻗어와 아르망을 휘감았다. 어째서? 기쁜 일이 아닌가. 축하 할 일이다. 영문 모를 답답함을 느낄 일이 절대 아니다.


누군가가 적색 사이렌을 울리며 경고해 온다. 


아르망 추기경. 

네가 잘못 본거야.

네가 착각한 거야.

정신 차려.      

상대는 폐하야.

폐하를 상대로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그 이상은 감히 생각도 하지마.

마음을 고쳐 먹어.

이성을 찾아.


"아르망? 여기 있었어?"


불현듯 들려온 사령관의 목소리에 놀란 아르망은 퍼뜩 몸을 튕겼다. 다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메이가 있었어야 할 자리에 사령관이 서서 아르망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찾아도 없길래 설마 안오는가… 싶었어. 언제 와있었던 거야?"


"…"


"아르망?"


"알비스와 먼저 와 있었답니다."


"그래? 알비스 이 녀석… 스틸라인 녀석들이랑 보드 게임 한다고 쪼르르 막사로 달려가더니…"


샬럿은 알고 있었을텐데. 뭐, 아르망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안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되도않는 걱정을 한 끝에 따로 사령관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겠지.


"그래도 잘 됐어. 동석하자 아르망. 따라 와. 이쪽이야."


아르망은 걸음을 옮기려던 사령관을 뒤따르지 않고 테이블에 있는 것을 가만히 응시했다.


술… 술인가.


"……아하."


"…아르망?"


따라오는 기색이 없자 뒤돌아본 사령관이 발견한 것은 양 손으로 공손히 커다란 술병을 들고있는 아르망이었다.


"폐하. 오늘은 술을 드시는거였죠? 여기, 마침 좋은게 있네요."


생긋 웃어보인 아르망이 사령관을 지나쳐 샬럿과 발키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밝은 웃음 속에서 미묘한 요염함을 느낀 사령관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아르망의 뒤를 따랐다.




//




"잠깐, 아르망. 지금 몇 잔 째야? 너무 거리낌 없이 들이키는 거 아니야?"


아르망에게 고개를 내민 사령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저는 문제 없답니다. 폐하. 절 걱정하시기 보다는 폐하 본인을 먼저 돌아보시는게? 저보다도 술이 약하신 것 같은데요?"


막 동석 하자마자 술을 마시겠다고 한 아르망이었다. 신체 연령이 신경 쓰였던 걸까. 그런 아르망을 만류하던 사령관이 우습다는 듯 짓궃은 미소를 보인 아르망에게서 끈적한 아우라가 풍겼다. 

막 벗은 겉옷을 의자에 걸어두고 아르망은 채워져 있는 술잔을 다시 한 번 비웠다. 

홍당무같은 얼굴을 한 채 간헐적으로 숨을 몰아쉬는 사령관 대신 발키리가 입을 열었다.


"각하께선 옛날부터 술에 약하셨으니까요. 주의 하신다면 괜찮습니다."


"…흐응… 그런가요? 잘 알고 계시네요."


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었다. 사령관에게 물은 것이지 왜 네가 대답하냐고, 앞으로 대신 대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런 아르망의 예리한 가시를 느낀 발키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 가늘게 뜬 눈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네. 과거에 각하와 몇 번 정도, 술을 나눴던 적이 있으니까요."


두 여자 사이에 흐르는 기류를 감지하지 못한 사령관이 아르망에게 다시 말했다.


"아르망, 술 엄청 세구나. 정말 처음 마시는게 맞아?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은데. 오르카에 있을 때 몰래 마셨던 적 있는 거 아냐?"


유쾌한 얼굴의 사령관과 시선이 마주치자 아르망은 때를 감지했다. 몸에 달라붙는 타이트한 활동복을 입고 있던 것이 이런 식으로 생각지 못한 기능을 할 줄이야. 아르망은 사령관의 시선에 응하듯 몸을 조금 내밀고 은연 중에 자신의 바디라인이 좀 더 드러나보이는 자세로 사령관에게 어필했다. 귓가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거나. 팔을 안쪽으로 오므려 고개를 내밀거나. 삐딱한 자세로 턱을 괴고 자신을 보는 사령관을 똑바로 마주보거나. 혹자에겐 어설퍼 보일 수 있는 섹스어필이었을지 몰라도 아르망에겐 망설임이나 수치심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


발키리와 샬럿은 평소와는 너무나도 다른 아르망의 이상을 진작에 감지했지만 사령관은 고개를 숙이고 취기오른 뜨거운 숨을 내쉬느라 바빴다.


"폐하? 더 드실 수 있으시겠어요? 후훗… 더 못 드시겠으면 약하디 약한 폐하 대신 제가 마셔드리지요."


아르망의 말투가 짓궃어진 것은 술 탓이라고, 마시면 거칠어지는 스타일이라고 여긴 사령관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맞받아쳤다.


"아. 그건 안되지. 마시는 건 오늘 뿐인데… 다들 고생하니까… 그래. 더 마셔야지."


사령관이 내민 술잔을 채워주려던 아르망을 발키리가 제지하고 나섰다.


"각하. 한계이신 듯 합니다만. 무리하시면 건강을 해치실 수도 있습니다."


"발키리? 폐하께서 드신다는데 뭘 그렇게 까다롭게 구시나요? 폐하께서 더 즐기시게 두세요."


"…아르망. 그만하시죠."


"그만하라니요? 폐하께서 원하신다니까요?"


"당신…"


난방이 돌아가고 있는 식당에 있을 수 없는 서릿바람이 두 여자 사이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저… 저기, 두 분? 조금 진정해요."


이제껏 아르망의 눈치를 보느라 잠잠히 있던 샬럿이 끼어들었다. 폐하 앞에서 추태를 보일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러나 말려오는 샬럿을 전혀 아랑곳 않고 두 여자는 각자의 온도를 품은채 계속해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크리스마스 하니까 생각나네… 옛날에 내가 산타를 자처했던 적이 있었지?"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테이블에 엎드리고서 뜬금없는 말을 꺼낸 사령관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언제더라… 잘 기억은 안나는데 그건 기억 나. 닥터가 갑자기 성장한 몸으로 찾아왔던 거. 그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눈 둘 곳이 없어서 고생했는데… 닥터… 잘 지내고 있을까…"


"…"


눈만 빼꼼히 들고서 식당을 살펴 본 사령관은 다시 팔에 얼굴을 묻었다.


"파티라… 이런 식당이랑은 상대도 안 될 곳이었던 거 같은데. 쇼핑몰… 쇼핑몰이었나…? 그래. 파티를 이 보다 좀 더 성대하게 열었던 적이 있었어."


머리를 감싼 팔뚝을 오래된 사진첩으로 삼아 한 때의 과거를 곱씹는 사령관의 목소리에 점점 흥이 오르면서도 떨리기 시작했다.


"레오나 하고는 위험했었어. 갈 때까지 갈 뻔 했지. 하하. 그 때 품어줬다면 뭔가 좀 달랐을라나. 아 맞다. 그러고보니 페더 녀석. 그 무렵에 도촬하던 걸 나한테 들켰었지. 뭐가 즐겁다고 침실까지 찍어댄건지… 난 무분별한건 질색이었는데 말이야. 서약 이래로는 발키리 이외엔 그다지…"


취기에 젖은 가쁜 숨에 들썩이던 등이 멈추고 머나 먼 풍경의 감상을 읊조리던 몽롱한 목소리가 갑작스러운 정전과도 같이 끊겼다.  


"…각하?"


"……트리아이나와 만났을 땐 성가셨지만 나름 재밌었어. 뜻 밖의 수확도 있었지. 로크 녀석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날 찾고 있을까. 아니면… 모르겠네. 그래… 잘 지내고 있을꺼야. 그 놈은 강하니까. 아 참, 그러고 보니 발키리. 그 때 너 쉰다고 수영복 입고 나갔으면서 기어이 화기도 챙겼었지? 물에 젖을까봐 소총을 바리바리 싸매고서는… 지금도 그래. 조금은 여유를 가져 봐. 쉴 때는 확실히 쉬라고."


당시에 화기를 챙긴 것은 합당한 이유가 있었으나 지금 그런 걸 구구절절 말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엎드려있어서 보이지 않을텐데. 그럼에도 발키리는 사령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샬럿은… 곤란했어."


"곤란…이요?"


"그래. 곤란했지. 그게 어떻게 수영복이야. 그냥 걷기만 해도 위험한데 그런 걸 입고 사방팔방 뛰어다녔잖아. ……애교도 많았던가. 그 땐 콧소리를 안내던 적이 없었는데. 앨리스였나… 소완이었나. 누가 뭐라고 했던 거 같은데 그건 기억이 잘 안나네. 어쨌든… 샬럿 너는…… 아니, 아니야. 방금 건 취소."


뭐가 취소라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과거를 말해오는 사령관에게 감히 샬럿이 올릴 말은 없었기에 잠자코 사령관을 바라보기만 했다.


엎드린채 그대로 사령관의 과거를 읊는 시간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기뻤던 일. 즐거웠던 일. 감동했던 일 등. 술기운에 기대어 당시에 품었던 감상과 속마음을 보다 상세히 밝혀오는 사령관의 모습에 일행은,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그 때의 나날에 젖어 울적해 지면서도 마음 한 켠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사령관이 그 자에 관한 것에 대해서는 애써 피한다는 걸 의식하자 피어오른 것은 다시 싸늘히 식어 서리가 되었고 그 서늘함에 지금껏 겪어온 비참함이 보다 선명하게 다가왔다.


"옛날엔… 전부 다 좋았어. 전부 다…"


싫은 건 하나도 없었어. 라는 말을 끝으로 사령관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잠들었는가 싶어 발키리가 각하. 하고 몇 번 부르자 대답은 또박또박 잘만 해왔기에 그저 술기운에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 졌을 뿐인 걸 알고서 샬럿과 아르망에게 말했다.


"밤도 깊어졌고 식당에 남은 인원도 몇 없습니다. 여기까지 하죠."


"그래요. 저는 이제 순찰 돌 시간이니까요. 먼저 가볼게요. 두 분, 폐하를 부탁드려요."


출입문 앞에서 다시 한 번 사령관을 돌아 본 샬럿이 먼저 자리를 떴다. 


"아르망. 저도 곧 경계를 나섭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각하와 함께 바래다 드릴까요?"


발키리의 물음에 잠시 대답을 망설인 아르망이 사령관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발키리에게 답했다.


"아뇨. 괜찮답니다. 폐하는 제게 맡겨주세요. 무사히 모셔다 드릴테니까요."


"……그래, 그렇군요. 부탁 드립니다."


아르망을 지그시 바라보던 발키리가 샬럿의 뒤를 이어 식당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보인 발키리의 표정에 아르망은 의문을 가졌다. 자신을 쏘아볼 때 지었던 그 차가운 표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서글픈, 어떻게 보면 안쓰러워 보이는 것을 쳐다보는 듯한 그 표정이 발키리가 식당을 나선 후에도 계속해 뇌리에 남았다.


"폐하? 일어나실 수 있으신가요?"


등을 가볍게 흔들어 깨우자 사령관이 고개를 들고 아르망을 보았다.


"어… 아르망? 아, 미안해. 잠깐 졸았나 봐. 응? 다들 어디갔어?"


"샬럿과 발키리는 각각 순찰과 경계를 나섰답니다. 폐하를… 제게 맡기고서요."


아르망의 대답에 식당에 걸린 시계를 확인한 사령관이 말했다.


"그렇구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래. 슬슬 돌아가자."


"…폐하."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으로 향하려던 사령관의 옷깃을 아르망이 붙잡았다.


"왜? 아르망?"


"괜찮으시다면…"


사령관을 붙잡은 아르망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술을 향했다. 혀로 마른 입술을 가볍게 적신 아르망이 다시 입을 열었다.


"돌아가서 한 잔 더 하지 않으실래요?"





///




"난… 이제 정말 한계야. 와… 아르망. 너무 쎈데?"


"후후… 폐하께서 약하신게 아닐까요? 제 주량은 바이오로이드 평균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어느새 창 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사령관의 내무실에서 아르망은 사령관과 단둘이 술을 나누던 중이었다.

사령관 과는 다르게 또다른 마음을 품고서.


"그건 그렇고, 폐하. 놀랐어요. 갑자기 파티를 여시겠다고 하셔서요."


내무실의 테이블은 식당의 것 보다 훨씬 폭이 좁았다. 상체를 내밀어오는 아르망의 얼굴이 사령관의 지척에 곧장 닿을 정도로. 사령관은 그런 아르망을 달리 의식하지 못하고 창 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게 직접 말씀해 주셨으면 좋았을텐데요."


아르망이 내뱉는 말들이 뜨끈한 열기를 품기 시작했다.

방금 전 부터 끈적하게 느껴지는 아르망의 목소리에 귀가 간질거린 사령관이 아르망에게 고개를 돌리자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와 있는 상기된 아르망의 얼굴에 흠칫하고 살짝 몸을 뒤로 뺐다.


"서운했구나. 아르망. 미안해. 이틀 전 까진 한창 바빴어서 말이야. 이제는 좀 여유가 생겼으니까… 다들 지치기도 했고 마침 크리스마스도 가까워졌으니 가볍게 하루 정도는 즐기게 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파티를 연 거야. 뭐, 파티라고 부르기엔 민망하지만…"


"폐하, 서운한 건 없어요."


"그래? 다행이네. 좀 화난 것 처럼도 보여서 서운한 건가 했지."


"…화가 나는건 맞아요. 지금 폐하가 말씀하신 걸 들으니까 화가 나네요."


"어… 어?"


의자에서 엉덩이를 조금 떼면서 까지 사령관에게 상체를 더 가까이 한 아르망이 말을 이었다.


"서운하거나 화가나 보인다고 말씀 하신 건… 제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해 보셨다는 소리 아닌가요?"


"음…"


"당연히… 서운하지 않을까요? 저를 병영에 혼자 두셨잖아요."


"아니, 아르망. 잠깐만. 그건 말했듯이…"


아르망은 작은 틈 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다급히 변명하려는 사령관의 말을 끊었다.


"폐하. 제 말 아직 안 끝났답니다.  …저를 위해서라니요. 폐하… 알아요. 이해해요. 두려우신 거… 잘 알아요. 폐하께서 괴로워하신 끝에 저를 살리신 거도 알아요. 그래도 있죠 폐하. 저한테 그러시면… 안됐어요."


사령관은 아르망이 술에 기대어 속마음을 풀어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이다. 아르망의 의식이 아주 또렷하고 몸도 잘 가눌 수 있다는 것만 뺀다면. 아르망은 알고있다. 사령관이 착각하고 있다고. 더하여 본인이 제 주인에게 주제넘은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더 멈출 수 없었다.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아르망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령관의 뒤로 향한 다음, 양 팔을 사령관의 목에 감았다.


"제가 얼마나 속앓이를 했는지 폐하께선 아실까요?"


사령관의 귓가에 뜨겁고 습한 숨이 느껴짐과 동시에 술 냄새와 머리칼에서 풍기는 샴푸향이 뒤섞인 오묘한 향기가 코 끝을 간질였다. 사령관은 흉부에 늘어진 아르망의 팔에 손을 얹고, 손가락 끝으로 피아노의 건반을 다루듯이 자신의 가슴을 어루는 아르망을 가만히, 전부 받아내주었다.


"그래. 내가 좀… 뭔가에 씌였던 것 같아. 아르망을 위해서라곤 해도 너무 일방적이었지. 미안해 아르망. 내가 먼저 정신차리고 아르망에게 다가갔어야 했는데. 미안하다는 말 밖엔 할 말이 없네."


"됐어요. 폐하. 혹시나 해서 여쭤봐요. 만약, 제가 이렇게 따로 말씀드리지 않았다면 폐하는 끝까지 모르셨을까요?"


"글쎄… 시간이 허락했다면 알았지 않았을까?"


"그 말은 몰랐을 거란 말씀이시네요?"


"저, 저기. 아르망. 아르망?"


사령관의 등에 기대어 감은 팔에 힘이 들어가는게 느껴졌다. 목에 느껴지는 압박감과 가슴에서 노닐던 아르망의 손은 사령관의 옷자락을 움켜잡고 놔주지 않았다. 

의식이 보다 선명해졌으나 반대로 자각이 옅어진다. 아르망 본인도 종에게 허락된 선을 넘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지만 어렴풋한 수준이었다. 격해지는 감정으로 인해 언행들이 점점 뇌의 필터를 거치지 못하게 되자 더는 거리낄 것이 없어졌다.


"폐하. 저는 폐하께 있어서 무엇인가요?"


"소중한 동료지. 멋지고, 훌륭한 참모야."


"그것 뿐인가요?"


"그것 뿐이라니? 아르망. 조금 차분해지자. 너무 흥분했어."


"바로 알아보셨어요. 흥분한 거 맞아요. 폐하. 다시 여쭐게요. 저는 폐하께 있어서 무엇인가요?"


"방금 대답한 것과 같아. 아르망. 이제 그만 마셔. 술 깨고 내일 다시 얘기하도록 하고. 알았지? 순찰 돌 때 같이 나가자. 자, 오늘은 어서 돌아가."


"…"


휘감겨있던 팔을 푼 사령관은 출입문까지 아르망을 조심스럽게 끌고가 문을 열어주었다. 마지못한 아르망이 손잡이를 잡고 반 정도 나가자 사령관은 자신의 침대로 다가가 걸터 앉았다.


또 다시, 머릿 속에서 적색 사이렌이 울린다.


너답지 않아.

넌 현명한 아이잖아.

뭘 멀뚱멀뚱 서있는 거야?

아르망. 폐하의 말에 따라.

폐하에게서 고개를 돌려.

지금 당장 곱게 나가.

아까도 말했지만 꿈도 꾸지마.

그 생각은 접어.

고작 불경하다고 부를 수준이 아니니까.

완전히 끝장나고 싶은거야?

네 손으로 부수려는 거야?

멍청하게 굴지 마.

자, 어서 나가는 거야.

나간 다음 문을 닫고 네 방으로 돌아가.

지금 당장.


"…아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이라 했던가. 당연히 그런 식으로 가벼이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얼추 비슷한 것도 같다며 아르망은 자조했다. 머릿 속의 사이렌을 거칠게 깨부수고는 나가려던 몸을 다시 들여놓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문고리에 있던 잠금버튼에 손을 가져가 누르자 들려온 철컥 하는 소리에 사령관이 고개를 들었다. 사령관이 무어라 말하는 듯 했지만 아르망은 듣고 있지 않았다. 내무실의 모든 전등을 끄고 주홍 빛 야간등만을 켜놓고서 아르망은 사령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아르망. 뭐하는 거야? 어서 돌아가야지."


알코올 탓에 야간등 만으로는 아르망의 얼굴을 확인하기가 어려웠지만 그 작은 얼굴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 있는 것 처럼 느낀 사령관은 아르망을 다시 내보내고자 일어나려 했다.


"…그러고보니 폐하. 분명 한 달 전의 그 광장에서 제게 약속하셨지요?"


아르망의 말에 몸을 일으키다 만 사령관이 멍하니 아르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 이목구비는 윤곽만 겨우 보이고 있었다.


"…무엇이 되었든 전부 받아 주시겠다고, 그렇게 약속 하셨지요?"


"응… 그랬었지."


"헌데 이 한 달 동안 단 한 번도 안받아주셨죠? 어머나. 거짓말을 하신거네요?"


"그건… 미안해. 아르망. 미안하단 말로는 모자라겠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그 때는 뭔가에 씌였던 것 같아. 내일부터는 함께 하자. 응?"


"내일요? 거짓말쟁이 폐하의 말을 믿으라고요? 아뇨. 내일까지 못기다려요. 지금 당장 원해요."


"뭘 원한다는 거야? …아르망. 너 지금 좀 이상해. 일단 진정하고 한 숨 자고난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이상한 거 맞아요. 이런 데서만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그만 해라. 아르망."


"그만… 못하겠다면요? 폐하. 그렇다면 어떻게 하실건가요? 또 약속을 어기실 건가요? ……수백 명의 목숨을 대가로 맺은 약속이 아니었나요? 제가 원치도 않던 약속이 아니었나요?"


"아르망!!!"


"…"


"…미, 미안해. 소리 질러서. 나도 모르게 그만."


"…세요."    


"응? 뭐라고?"


"안아 주세요."


사령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안아달라. 어둠 속에서 야간등 하나에만 의지한 상황, 아르망의 노린 듯한 차림새. 오늘 하루 술을 나눌 때 묘하게 요염해보였던 모습들. 그리고, 두 눈이 어둠에 적응하여 점점 사방이 선명해져 보이게 된 아르망의 저 표정까지. 이 모든 걸 고려한다면 아르망의 안아달라는 말은 단순히 양 팔을 펼쳐 감싸안아 달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가 듣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아르망, 너 정말로…"


"정말이에요. …폐하 탓이라구요? 그러니까… 위로해주세요."


폐하 탓이라니. 못할 말을 내뱉은 자기자신이 어이없어 헛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제가 뭐라도 된양 구는 것은 또 우습게 느껴졌다. 누구보다도 가장 상처를 입으신 것은 폐하다. 그런 꼴을 당하셨음에도 자신들을 이끌고 여기까지 달려오신 것은 폐하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알고 있다. 눈 앞의 사령관이야 말로 나와 우리의 진정한 주인이다. 나는 그런 주인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책임이 있는 무능한 참모다. 그런 자가 도리어 폐하를 탓하다니. 그런 내게 화를 내긴 커녕 또 자책하는 듯한 표정이나 지으시다니. 정말, 모든게 다 이상하다.


라고, 평소의 아르망이었다면 생각했을 터 였다.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의식은 있어도 자각이 옅어진지 오래다. 그래서 신경쓰지 못한다. 더는 신경쓰지 않는다. 지금은 오로지 눈 앞의 사령관과 자기자신에게만 충실하면 된다. 아주 확실하고 뚜렷한 형태로. 사령관은 말했다. 떠나지도 떠나려고도 하지 말라고. 아르망 또한 그렇다. 바라는 것은 그것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오직 그것을 위한 것일 뿐이다.


"폐하. 폐하를 원해요."


"…"


"만약, 거절하신다면 저는…"


저는, 떠나겠어요. 브레이크가 고장나고 망설임이 없어진 아르망이었지만 차마 그 말 까지 꺼낼 수는 없었다. 오늘 하루 사령관에게 꺼낸 말들 중 유일한 거짓말이기도 했고 혹시 사령관이 거절하더라도 오기와 일그러진 반감 만으로 가볍게 저지를 수 있는 짓이 아니었다. 사령관은 아르망의 뒤이을 말을 알아챈 것인지 아르망의 시선을 피하고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마음대로 해."


마음대로 해? 섹스를 하되 리드는 하지 않겠다는 소리인가? 어째서? 나는 분명 안아달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 정도 되면 사령관이 마지못해서라도 자신을 품어야 한다. 이미 할 말 못 할 말 다 한데다가 굳이 섹스까지 가지 않더라도 선은 넘을대로 넘었다. 그렇게 생각한 아르망은 상의와 하의를 벗어던진 뒤 입술을 질끈 깨물고 침대에 걸터앉은 사령관에게 다가섰다.


마음대로 하겠다. 사령관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리 해주겠다. 지금은 그걸로 됐다. 사령관이 알지는 모르겠지만 지식만은 있다. 말하기 부끄럽지만 자위 경험도 꽤 있다. 지식에 더해 남녀의… 사령관의 정사 장면을 직접 본 적도 있다.  브라우니와 탈론페더가 쑥덕대던 자리에 아닌 척 하며 몇 번 끼어든 적이 있었으니까.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일단 시작하는 것이 먼저다. 그 다음은 직접 맞닥드린 다음에 생각한다.


가랑이 사이에 사령관의 무릎을 두고 서서 아르망이 말했다.


"폐하. 손… 빌려 주시겠어요?"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은채 사령관은 왼 팔을 내밀었다. 아르망은 그 팔뚝을 양 손으로 잡아 조심스럽게 자신의 비부 쪽으로 가져갔다.


"읏… 폐하. 느껴지시나요?"


아르망의 비부에 닿은 사령관의 손가락에 이제 막 물을 먹기 시작한 속옷의 감촉과 따뜻하고 포근한 습기가 느껴졌다. 팔뚝을 잡고 손을 움직여대는 아르망에 의해 사령관의 손가락들이 아르망의 하얀 속옷 아래의 비부 곳곳을 스쳤고 그 가벼운 자극에 아르망은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오려던 것을 참으면서 사령관에게 요구를 추가해왔다.


"…손가락. 세워 주세요."


머뭇거리던 사령관의 손가락 중에서 검지가 고개를 들었다. 각도를 달리한 그 손가락을 비부로 느낀 아르망이 팔뚝을 잡고 있던 손을 각각 사령관의 손목과 손등으로 옮겼다. 사령관의 손을 보다 쉽게 조종할 수 있어진 아르망은 검지를 위로 향하게 하고 좀 더 가까이 당기자 눌리게 된 속옷 너머로 비부의 균열이 비쳐보이기 시작했다.


"으읏…아… 폐하…폐하…"


균열에 파묻힌 손가락이 오가던 방향으로 물든 속옷이 양을 늘려가는 끈적한 꿀에 의해 원 모양으로 눅눅해져 간다. 사령관의 손을 움직이던 아르망의 애타는 움직임도 시간이 지날수록 가속되어 천쪼가리에서 나는 슥슥대는 마찰음이 속옷과 같이 물기를 머금어가고 있었다.


"제, 이 곳, 느껴… 지시나요? 아흣… 보이시나요? 벌써 이렇게… 폐하. 대답… 해주세요."


"…"


"직접… 하앗… 안하, 읏… 셔도 되니까. 제가 지시…해드리는… 흣… 대로, 해, 주세요."


"축축하고… 미끌거리네."


아르망의 비부로 고개를 돌린 사령관이 말했다. 야간등 하나 뿐인 어두운 내무실이었지만 비부와 맞닿은 검지에 가늘고 걸쭉한 실이 늘어진 것은 확실히 확인 할 수 있었다.   


"하아… 후으…"


충분히 비부를 자극했다고 여기자 사령관의 손을 놓고서 등으로 손을 뻗은 아르망은 한껏 축축해진 팬티와 같은 색의 브레지어를 풀었다. 그러자 자기 주장은 나름대로 하고 있는 연분홍색 꽃잎이 달린 아담한 두 봉우리가 사령관의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폐하. 이번엔… 다리, 빌릴게요?"


걸터 앉아있는 사령관의 한 쪽 허벅지에 가랑이를 끼운 아르망이 사령관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며 올려다보았다.


"가슴… 만져주세요."


아르망의 이번 요구에 사령관은 움직이지 않았다. 사령관의 그런 망설임을 기다려 줄 생각 없던 아르망이 축축한 사령관의 왼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대었다. 사령관은 저도 모르게 뿌리치려 했지만 아르망의 시선이 그런 짓을 했다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해온 탓에 잠자코 힘을 뺄 수 밖에 없었다.


"크지는 않지만… 다른 건 자신 있답니다. 예를 들면 탄력…이라던가. 폐하. 어떠세요? 대답해주세요."


"…"


"대답 하셔야지요?"


"말랑하고 부드러워."


"주물러 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아르망은 허리를 앞 뒤로 천천히 흔들어 비부를 사령관의 허벅지에 비벼대기 시작했다. 손가락 보다 강한 자극, 음핵까지 능동적으로 자극할 수 있게 된 덕에 스며나오던 애액이 양을 달리하여 팬티와 대음순 부분이 접한 사이에서 까지 베어나오고 있었다.


"하아… 아… 아앗… 좀 더… 더, 더 만져주세요. 폐…하. 폐하앗… 읏…"


가슴에 대었던 손을 올려 사령관의 턱과 뺨을 어루만지고 쓰다듬는다. 사령관은 아르망과 시선을 마주하지 않고 멍한 눈으로 아르망의 두 가슴 사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기만 했을 뿐이지만 지금은, 아르망 자신의 사랑을 전달하기 전의 전희를 허락받은 것 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나머지… 가슴, 도… 아읏… 만져 주세요…"


놀고있는 사령관의 한 쪽 손을 잡고 남은 가슴에 가져다대어 허전함을 채웠다.

아르망의 아담한 가슴을 만지작 거리는 사령관의 양 손을 통해 아르망의 유두가 점점 빳빳해지고 봉긋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르망의 붉게 물든 뺨과 열기를 품고 헐떡이는 숨은 술 때문만이 아니다. 손에서 느껴지는 몰캉한 감촉과 허벅지를 짓눌러대며 몽롱한 눈을 한채 입가에서 침이 조금씩 새어나오는 것도 모르는 아르망을 곁눈질로 보고 있으니 조금씩, 사령관의 하반신에도 반응이 왔다. 사령관은 어쩔 수 없는 무조건반사 라며 자기 자신에게 변명하고는 아르망이 눈치채기 전에 하물의 발기가 빨리 사그라들기를 바랐다.  


"하아… 하아…하앗…하아…"



매끄러운 허리의 움직임이 점차 격해져가던 아르망은 사령관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자신이 올라타 있는 사령관의 허벅지를 껴안듯이 잡았다. 음핵을 포함한 비부 전반에 더 강렬한 자극을 가하고자 취한 자세는 네발짐승의 교미에서 수컷이 취하는 자세와 똑닮아있었다. 가슴을 애무당하고 사령관의 허벅지를 암컷 짐승 삼아 더욱 강하게 비부를 비벼대자 그 격렬한 움직임이 사령관을 통해 침대에 까지 전해졌다. 

삐걱- 삐걱- 아직 전희 단계인데다가 걸터앉아 있는 것일 뿐인데도 침대가 비명을 질러댔다. 사령관의 허벅지는 이미 미끌거리고 끈적한 꿀로 범벅이 된 지 오래다. 풀려가는 눈과 가늘게 떨리는 골반. 간헐적으로 미세하게 튀어오르는 허리. 전신에 베어나오는 땀. 행위의 대상이 사령관이라는 만족감과 행복. 그리고, 뒤틀린 정복감.


엉덩이를 뒤로 빼고 상체를 자신에게 기대어 오는 아르망이 절정에 가까워졌음을 느낀 사령관은 가슴을 주무르던 양 손을 떼고 파르르 떠는 아르망의 어깨를 한 팔로 감싸안고 골반을 잡아 지탱해주었다. 아르망은 자위와 다소 다른 오싹하고 낯선 쾌감에 한창 범해지고 있던 탓에 그런 사령관의 배려를 알아채지 못하고 사령관의 허리춤을 끌어 안은 뒤 허리의 움직임을 가속했다.


"앗…아앗…하…하아… 읏!"


튀어오르는 어깨와 등. 고개 숙인채 질끈 깨문 입술과 눈가에 고인 눈물. 오싹함에 닭살이 돋고 땀에 젖은 아르망의 희고 고운 피부.

사령관은 난생 처음 경험하는 타인을 통한 절정에 흠뻑 젖은 처녀를 껴안고 진정이 될 때 까지 토닥여주었다. 아르망이 이렇게 된 것에는 자신의 책임도 있음을 통감하고 필요한 만큼의 배려를 아르망에게 베풀었다. 됐다. 이걸로 됐다. 이걸로 아르망은 평소의 아르망으로 되돌아 올 것이다. 진정이 되면 부끄러워 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건 얼마든지 눈 감아 줄 수 있다. 


어깨를 껴안고 살며시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헐떡이는 호흡이 진정된 아르망은 떨리는 눈망울로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아주 조금 몸을 내밀면 입술이 맞닿을 거리에서 뜨거운 숨을 몰아쉬는 아르망이 입술을 달싹이며 당장이라도 사령관의 입술에 달려들 듯 했지만 뒤이은 사령관의 말에 아르망은 머리가 식어버려 사령관의 양 어깨에 팔을 올려두고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르망. 이제 된거니? 이걸로 만족했지?"


"…"


"미안해. 누구보다도 너에게 신경써야 했는데. 바보 같이 굴어서 미안해. 오늘은 여기서 씻고 마무리 하자. 내일 내가 찾아갈게."


"…하."


"아르망?"


우스웠다. 다정하게 양 뺨을 어뤄만져주는 사령관이 우스웠다. 아직도 사령관은 아르망이 어떨 생각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아니, 애써 파악하려 들지 않는지도 몰랐다. 고작 이런걸로 자신이 만족할 수 있을리 만무했다. 자신의 요구에 미온적인 사령관이 본 궤도에 오르지 않는 것에 애가 타고 있는 것도 모르는게 화가 났다. 평소라면 기뻤을 이런 다정한 미소는 여전히 자신을 보호해야 할 어린 애로만 대하는 것 같아 짜증이 치밀었다. 나는 알비스가 아니다. 알 만한 건 다 알고, 성기를 자극해 얻는 쾌감 또한 익히 알고 있었다. 그 행위를 위한 주 소재가 사령관이었다는 것은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당연한 것이었다.


어깨와 머리를 감싼 사령관의 팔을 거칠게 밀어내며 아르망이 싸늘하게 말했다.


"폐하. 이거 놓으세요."


"아, 아르망. 잠깐…"


사령관에게서 떨어진 아르망이 똑바로 사령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골반에 걸쳐져있는 새하얀 속옷에 두 손을 뻗었다.


"폐하. 설마 제가 여기서 멈출 거라고 생각 하는 건 아니시죠?"


"…아르망. 이러지 말자."


쭈욱, 양 손을 내리자 비부를 가리던 속옷이 끈적한 실을 늘어뜨리며 내려갔다. 


"네? 싫어요. 이제 시작인걸요? 폐하. 폐하도 이제 솔직해지셔요. 폐하의 그 곳만 솔직해서는 민망하지 않으세요?"


전라가 된 아르망이 도발적인 표정으로 사령관의 고간을 바라보며 다가갔다. 침대에 무릎으로 걸터앉고 거짓말쟁이의 고간에 아래로 눕힌 손바닥을 가져다댄 다음 위 아래로 천천히, 유일하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그 단단한 응어리를 살살 풀어주는 느낌으로 살며시 문질러댄다.


분명 발키리가 이런 식으로 사령관을 애무했었지, 기억을 더듬으며 사령관의 음경 밑 부분을 문지르던 와중에 박살냈을게 분명한 사이렌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불현듯 아르망을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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