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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의 거처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았던 텐트로 돌아오니 날이 밝아있었다. 그런 꼴로 가버린 옛 부하들을 그대로 남겨두면 그 비참함만 가중되어 다시 떠날 발걸음을 잡아왔을 것이기에, 남은 시신이라도 수습하여 간략하게 화장으로 장례를 치루고 근처의 나무에 뿌려주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나를 반기는 모습들은 밝았지만 늘어진 눈가들을 보아하니 뜬 눈으로 기다린 듯 했다. 


"늦었지… 미안해. 설마 안잔거야?"


"폐하!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다치신 곳은 없나요?"


피와 골분으로 지저분해진 옷을 벗어던진 뒤 배낭에서 새 옷을 꺼내 갈아입는 것으로 대답하고 나는 한시라도 빨리 이 곳을 뜨고자 모두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골치아파졌어. 빨리 움직여야 돼."


이른 아침부터 어수선하고 분주했음에도 아이들은 당황하지 않고 떠날 채비를 거들었다. 몇 일간의, 그리고 앞으로도 이어질지 모를 야숙에 나름대로 익숙해진 것이겠지. 외형이야 어쨌든 이 아이들도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서 제작된 바이오로이드이다. 지금은 내가 아이들을 보호하지만 생각해보면 한 때엔 이 아이들이 나를 보호했었다. 특히나 알비스는 전투 목적의 바이오로이드다. 어떤 의미로는 철충 보다도 위험한 요소가 등장한 이상, 여차하면 알비스의 손 마저 빌릴 상황이 다가올지도 모른다.


공장지대를 나서고 다시 도시로 들어서서야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던 것을 깨닫고 근처의 폐건물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 떠나올 때 챙겨온 식량들이 슬슬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해 어떻게 배분할지 고민 중인 때에 발키리가 말했다.


"각하. 계속해서 가실 겁니까?"


"…"


발키리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고있다. 모든 위험요소를 배제하더라도 각지에 퍼진 대원들을 찾는 것이 만만치 않은 상황에 철충은 물론이고, 모습만 같지 도저히 바이오로이드라고 부를 수 없는 것들까지 나타났으니 앞으로 길을 나설거라면 100m, 아니 단 20m라도 절대 한 눈을 팔아선 안 될 것이다. 무장 또한 변변치 않고 전투가 가능한 인원이래봐야 샬럿과 발키리 뿐이다. 노획한 총 한자루와 탄창이 다 바닥나면 나 또한 손가락이나 빨면서 둘에게 의지하거나 최대한 덜 고통스럽게 죽기를 바래야 할 것이다.


"역시 물불 가릴 때가 아니야. 알비스도 무장 시켜야겠어."


"해안으로 돌아가는 것을 권합니다."


"난 상관없어. 걱정도 필요없고. 오르카고 함대고 대부분 박살이 난 이상 앞으로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않아. 너희 말대로라면 오르카를 떠나서 홀로 생존해왔을 때도 순전히 운이 좋았던 것일 뿐이야. 해안으로 돌아가봐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있어. 더해서 어제 같이 형편 좋은 상황에서만 전투가 일어나지도 않겠지. 살거면… 계속 생존하려거든 멈추면 안 돼. 나 하나면 몰라도 이제는 너희까지 있는 이상, 하루 빨리 최소한의 기반이라도 구축하는게 최우선이야."


"알겠습니다. 각하."


식사 중에 알비스에게 넌지시 간략한 사정과 함께 무장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결과만 말하자면 알비스는 매우 반색했지만 역시 내가 제안해놓고도 다시 한번 재고하게 된다. 이성적인 판단과 감정에서 오는 저항의 충돌 속에서 끙끙대는 것을 보다못한 것인지 알비스가 만면에 쾌활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사령관 님! 나 잘싸우는 거 알잖아!"


"그래. 든든하네. 무장하게 되면, 앞으로 나서는 것도 좋지만 알비스가 꼭 LRL을 지켜줘야 된다? 그래야 언니들도 마음이 놓일거야."


"걱정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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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건물을 나서고 도시를 거의 다 벗어날 즈음에 발키리가 나를 불러세웠다.


"각하. 여기서부터는 저도 전부 파악해두지 못했습니다. 보다 신중히 나아가야 해요."


발키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땅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진동에 신경이 곤두섰다. 눈 앞에 보이는 셀주크의 잔해에 달려가 몸을 숨기고 숨을 죽여 경계하고있자 전방의 사거리 측면에서 하베스터 하나와 다수의 나이트칙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베스터의 느릿하고 육중한 걸음걸이 사이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나이트칙들의 모습은 철충이란 이름에 걸맞게 혐오스러운 벌레들의 군집을 연상시켰다.

그 철충 무리들이 나타난 방향 그대로 일제히 향하는 것을 보니, 근방에서 무언가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지나가던 순간이었다.


공중에서부터 건물 사이로 날아온 여러 발의 미사일이 하베스터의 정면을 직격했다. 미사일이 궤적을 그리며 날아와 발생한 굉음이 뒤늦게 귓가를 울려왔고 눈 앞에서 일어난 폭발에 추가로 청각이 마비 됐을 무렵, 고꾸라지는 하베스터와 갈팡질팡하는 나이트칙들에게 무자비한 폭격이 뒤따랐다.


수십마리의 철충이 폭발의 화염 속에서 한 순간에 재가 된 광경에 어안이 벙벙해하고 있자 옆에 있던 아르망이 얼굴을 가까이하고 입을 움직여 왔다. 귀가 먹어 잘 들리지 않았던 탓에 다급히 손짓으로 대답하자 아르망은 공중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천천히 움직이는 작은 점 하나가 방향을 선회해 내가 있는 쪽으로 날아온다. 가까워질수록 커지고 빨라진 그 점이 마침내 셀주크의 잔해와 재가 된 철충 사이의 지점에 착륙하여 폭발의 화염을 등에 두른 채 내게 다가왔다.


다가온 그 바이오로이드가 무어라 말한 듯 했지만 귀에 울리는 이명 탓에 잘 들리지 않았다.

눈 앞의 바이오로이드도 그것을 알아챈 것인지, 폭발로 인해 근처까지 날아온 철충의 파편을 하나 집어들고 땅을 그어 글씨를 적기 시작했다.  


안녕, 사령관 님. 못알아볼까봐 이름도 써줄게요. -나이트 앤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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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지 마. 쏘고나서 발견했잖아. 데인저 클로즈였다고."


"정말로 그 전에 사령관님을 발견했는데요?"


"아하, 날 죽일 생각이었다?"


"설마요. 당연히 구하려고 한거죠."


내 귀를 이렇게 만든 눈 앞의 바이오로이드를 째려보면서 아직도 가시지 않은 먹먹함에 귀를 두드려댔다. 청력이 정상으로 돌아오려면 적어도 반나절은 걸릴 것 같다. 물론 고의는 아니었겠지만 퉁명스러운 태도로 본인이 저지른 행태를 애써 모른 척 하는 나이트 앤젤을 보고있으니 심술이 났다.


"그래 뭐, 미사일을 쏘기 전에 날 봤으면서도 그랬다니. 마치 네 가슴마냥 절대로 믿기지 않는 얘기지만 믿어주마. 만약 그게 아니라면 참 형편 없는거야. 네 가슴처럼 말이야. 안 그래? 나이트 앤젤."


"…"


그 얼굴에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그 기분이야 어쨌든 나이트 앤젤의 입장에서는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심술이다.

실제로 내가 죽을 뻔 한 것은 사실이고 그 사실에 비해 내 처분이 가벼운 것도 사실이다.


"…화를 내실 줄 알았는데요."


"화 내고 있잖아. 아니면 뭐, 그냥 대놓고 욕이라도 해줘?"


폭격에 대한 것이라면 이미 나와 동행하는 바이오로이드들이 충분히 대신 분노해 주었으니 나까지 그녀를 질타 할 필요는 없다.

폭격 이외의 것이라면, 누가 되었든 지금은 죄를 물을 생각이 없다. 다시 생각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들춰내 봤자 쓸데없는 열량만 소모할 뿐이다. 죄를 묻는 것은 생존을 보장 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고 나서도 늦지 않다.

더해서, 애초에 나이트 앤젤은 내게 있어서 죄라고 부를 만한 짓은 딱히 하지 않았다. 오히려 메이를 뜯어 말렸다는 소문이 있었고 실제로도 그러했을 것이다.


"아니에요. 그건 그렇고 꽤 심술이 많아지셨네요? 오랜만에 봐서 다시 들려던 정이 다 날아갔어요."


"헛소리 그만하고, 메이랑 네 부대원들은 어디에 있어? 이 근처를 비행한 거 보니 멀리 있지는 않나본데?"


"저 사거리에서 철충들이 나온 방향으로 가면 항만이 하나 있거든요? 그 항만 근처에 있는 인공 섬에 모여있어요."


"항만까지 가는 길이나 청소해 둬라. 금방 갈거니까."


아직도 나이트 앤젤을 노려보는 일행들에게 손짓하고 내려놓아둔 배낭을 집어들려는 와중에 나이트 앤젤이 물었다.


"…오시게요? 정말로?"


"뭔 뚱딴지 같은 소리야? 왜? 가면 안돼? 내가 가면 싫냐?"


"아뇨. 그런게 아니라… 그 꼬맹이는…"


"…내가 알아서 할 문제니까 눈에 띄는 철충들이나 치워 놔."


나이트 앤젤은 난감한 기색으로 고개를 떨구더니 통신기를 만지작 대고는 사거리 쪽으로 비행해 사라졌다.

나이트 앤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안다.

얼마 전의 나였더라면 나이트 앤젤의 걱정은 적중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발을 옮겨 사거리에 닿자, 사그러들고 있는 불길 속에서 나이트칙 하나가 미약한 안광을 밝혀왔다.

나는 그 안광에 총알을 두세 발 먹여주고 나이트 앤젤이 날아간 방향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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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십시오, 사령관 님.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항만에 유일하게 정박 중인 수륙양용보트에서 모습을 드러낸 밴시가 인사를 건네왔다.

상당한 크기의 보트였기에 나를 포함한 나머지 여섯을 태우더라도 공간은 넉넉해보였다.


"그래, 준비성 한 번 좋군. 설마 기동장비로 이동하나 싶었어."


"나이트 앤젤 대령의 연락이 있었습니다. 모두 섬에서 대기 중입니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보트에 올라 항만 밖으로 펼쳐진 해양을 살펴보니 시선 먼 곳에 섬이 하나 위치해 있었다.

그 곳을 가리키고 밴시에게 물었다. 


"얼마나 걸려?"


"경우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만, 약 삼십 분 정도 소요 됩니다."


"알았다. 너는 날아가도 돼. 먼저 가서 쉬어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애초에 그럴 수단도 없고요."


밴시의 말에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둠 브링어 소속 대원들이라면 다들 기동장비를 착용할텐데 눈 앞의 밴시는 맨몸에 무장은 커녕 그 어떤 보조 무기 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의문이 들어 밴시를 위 아래로 살펴보니 허벅지 쪽에 있는 커다란 화상자국이 눈에 들어왔고 더 자세히 살펴보니 오른 쪽 소매가 왼쪽 소매에 비해 눈에 띄게 허전해보였다. 그 안쓰러운 모습이 내 의문에 대한 답이 되어주었기에 나는 굳이 밴시에게 비무장인 연유에 대해 캐묻지 않기로 했다.


"운전은 내가 하마. 옆에 앉아 있어."


"예? 무슨 말씀을…"


"가는 길에 흔들리는 걸 한 팔로 버틸 셈이야? 섬에 있는 것들은 무슨 생각으로 너한테 마중나가라 한거냐? 잔말 말고 앉아있어라. 명령이야."


"…죄송합니다."


죄송 할 일은 아니라고 말해줄까 생각했지만 밴시라면 오히려 배려가 더해질 수록 불편해 하기만 할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혹시 몰라서 뒤를 돌아 전원 자리잡아 앉으라 명령한 뒤, 나는 보트의 엔진에 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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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눈에 익는 곳이다 했어."


도착한 섬은, 사령관일 때에 철충으로부터 탈환해 점유하고 군수물자를 저장하는 용도로 삼았던 곳이었다.

체류하던 이들이 공을 들여 구축했던 곳인 만큼, 자동화 된 방비는 물론 생활에 필요한 설비까지 온전히 유지 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더하여 그 미친놈의 마수를 피해간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곳이기도 했다. 정말 오랫만에 문명이 남겨놓은 이기의 혜택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간의 생존에만 급급했던 긴 시간들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상태가 좋군. 여기는 그 놈이 손을 쓰지 않았나보지? 아니면 아예 몰랐거나."


"네, 이 곳에 당도했을 때 체류하고있던 이들의 말에 의하면, 사령관님께서 장거리 항해 때 들르신 이후로는 들어온 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단 한 번을 제외하고요."


"한 번? 누구?"


"AA 캐노니어의 로열 아스널 준장입니다."


밴시의 입에서 나온 생각지도 못한 그 이름에 나도 모르게 몸이 튀어오를 뻔 했다.


"뭐? 아스널?!"


일행들을 돌아보자 그들 또한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멀뚱히 섬의 시설들과 밴시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아스널이라면 내가 오르카를 떠나기 직전부터 본 적이 없다.

아스널이라고 하니, 그 놈과 한 배를 탔을 무렵부터 지휘관들 사이에서 알력이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아스널이 특히 거칠게 의견을 부딪혀 오는데에 거리낌이 없었다고 들었기에 당시의 불편한 상황에서 큰 일이라도 터지는 것은 아닌가 조마조마 했던 적도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아스널과 밴시의 말로 미루어 보자면 아스널은 이 곳에 내가 오르카를 떠나기 직전, 직후에 왔을거라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돌고 돌아 이런 곳에서 아스널과 재회하게 된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든든한 우군과 마주 할 생각에, 지금보다는 어느정도 희망적인 미래를 그려보는 것이 이전과는 달리 그렇게 무의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세한 사정은 들어보면 알겠지. 일단 들어가자. 오랜만에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겠어."


내 말에 너나 할 것 없이 일행들의 얼굴이 벌써부터 따뜻한 물에 몸이라도 담군 것 마냥 기분좋게 풀어져있었다. 레오나의 일로 평소보다 어두웠던 발키리도 조금은 풀어진 듯 했다.


잘 갖춰진 하얀색의 병영같은 4층짜리 건물에 다가가자 경계를 서고있는 폴른 두 대가 반갑게 맞이해온다.

거기에 가볍게 인사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두 번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것 같았던 생동감이 몸을 감싸왔다.

눈 앞에 있는 시끌벅적한 무리들의 사이에서 나이트 앤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무사히 오셔서 다행이에요. 사령관 님."


"설마 항만까지의 길을 청소하라는 명령만 수행하고 바로 돌아갈 줄은 몰랐다. 밴시의 반만 닮아 봐."


오랫만에 느껴지는 인공적인 생기가 반가웠던 탓에 나도 모르게 웃음짓고 농담을 던져댔다. 


"준비할게 있었으니까요. 여기저기 보고도 해야했고… 그럼… 권해드리지는 않지만 바로 메이 대장을 보러 가실건지?"


메이라는 이름이 신경쓰였지만 어제부터 한숨도 못 자 녹초가 된 일행들을 돌아본 뒤 말을 이었다.


"일단은 좀 씻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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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 같은 인상이었는데 정말일 줄은."


나이트 앤젤에게 안내 받은 4층의 내무실을 둘러보았다. 2층 침대 두 개와 딱 필요한 것만 들여놓은 모습이 영락없는 병영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게 있어서 이 내무실은 여느 스위트룸 못지 않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렀을 때엔 시설을 직접 시찰하진 않았기에 몰랐지만 샤워실까지 내무실 안에 있을 줄이야. 거점화 당시에 기합이 잔뜩 들어갔을 인원들의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침대에 걸터앉아 몸을 담글 수 있는 욕조가 없는 것에 아쉬워 하는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말려주고 난 뒤 함께 침대에 누웠다. 이대로 아이들을 품에 안은 채 그대로 잠을 청할 생각이었다.


"각하."


노크도 없이 들어선 이의 정체는 발키리였다. 발키리의 양 손에 들린 참치캔과 빵, 우유를 보아하니 방문한 목적을 알 수 있었다.


"졸려서 배 안고프니까 너희나 챙겨 먹어라."


"테이블에 두고 가겠습니다."


'바로 옆 내무실에서 대기할테니 유사시에는 꼭 찾아주시길.' 

내무실의 불을 끄면서 조심스럽게 문을 여닫는 발키리의 말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고 이미 품에 안겨 골아떨어진 아이들의 새근새근한 숨소리가 더더욱 수면을 재촉했다. 앞으로의 일을 골똘히 생각해보려 했지만 밀려오는 수면의 달콤한 유혹에 속절없이 넘어가 일단은 뭐가 됐든 전부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충분히 자고 일어나니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적어도 오전은 가볍게 넘긴 듯 했다.

일어나자마자 곁에 있었어야 할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에 놀랐지만 곧 이 장소가 어디인지를 깨닫고 마음이 놓였다.

 

날이 밝아 창을 통해 좀 더 잘 보이게 된 이 곳의 풍경은 이 병영에 딱 어울리는, 구인류 시대의 군대시설과 같은 인상이었다.

연병장을 중심으로 ㄷ자 모양으로 퍼져있는 건물들. 

그 건물들을 따라 돌면서 체력단련으로 열을 올리는 중인 인원들.

우측 방향에 길게 뻗어있는 시공을 마친지 얼마 안 된 듯한 깔끔한 도로.

마지막으로 그 도로의 끝에 위치한 위병소에서 근무 교대를 하는 모습을 지켜본 뒤 내무실을 나섰다.


복도로 나와 걸어보니 병영은 꽤나 한산한 상태였다. 모든 인원이 한창 일과 중인 시간대일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건물로 들어오는 햇살과 인적으로 가득한 건물이 가져다주는 어제와 같은 생동감이 낯설게 다가왔다. 그 모든 것이 전해주는 평온함과 포근함을 한껏 만끽하면서 병영의 곳곳을 돌아본 뒤에 연병장의 사열대로 향했다.


"폐하, 안녕히 주무셨어요?"


병영을 나서자 바로 근처의 화단에서 아이들과 함께 산책 중인 샬럿이 고개를 꾸벅였다.

꼬질꼬질했던 의상이 윤기를 되찾고 하늘거리는 것을 보니 밤 중에 세탁을 마친 듯 했다.


"지금 몇 시냐?"


"두 시! 사령관 님 밥 먹었어?"


알비스가 쪼르르 달려와 손을 잡아왔다. 귓가에는 노란 꽃 한송이가 걸려있었다.

눈높이를 맞추고 알비스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주는 사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다가온 LRL이 초코바를 하나 건네왔기에 마주보니 새로운 안대를 착용한 상태였다.  


"이제 먹어야지. 꼬맹이들은 먹었냐?"


"응. 많이 먹었어! 저기 왼쪽에 큰 건물 보여? 저기가 식당이야! 초코바도 엄청 많다?"


"그래. 그거 잘됐네. 진조 님은 어때? 여기 인원들이 안대를 챙겨준거야?"


"네. 방금 전에 받았어요. 아, 맞아."


마음에 들었는지 홍조를 띄우고 붉은 색 안대를 만지작대던 LRL이 마침 떠올랐다며 귀를 빌려달라 손짓했다.


"어제 자고 있을 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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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아직까지 못봤다고?"


"네… 꽤 일찍 일어나서 돌아다녀 봤는데 지휘관들은 커녕 둠 브링어나 캐노니어에 소속 된 개체도 마주친 적이 없어요."


'나이트 앤젤도 어제 이후론 본 적이 없고요.' 테이블에 마주앉은 샬럿이 커피 잔을 쥔 양손을 꼼지락대며 표정을 찡그렸다.

먹다 남은 빵을 마저 입에 가져가면서 LRL이 해준 말을 곱씹어본다. 


자다가 깬 LRL은 목이 말랐던 탓에 물을 마시기 위해 내무실의 냉장고로 향하던 참이었다.

그 때 창가 쪽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왔기에 확인해 보니, 여러 명의 바이오로이드가 결박 당한 상태에서 얼굴이 가려진 채 어딘가로 연행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바로 나를 깨울까 했지만, 너무 깊게 잠든 듯 해서 깨우기 미안해 그대로 두었다고.


"발키리는 왜 안오는거야?"


혼잣말을 중얼거린 것이었지만 샬럿은 재촉한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 출입구로 향했다.

앉아서 기다리라고 하려던 그 때, 샬럿이 다가가기도 전에 먼저 출입구가 열렸다.


"호랑이도 제말 하면 온다더니."


"각하,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디서 찾은건지 등에 소총을 한 정 매고 양 손에도 기관단총을 한 정씩 들고서 모습을 드러낸 발키리가 급한 기색으로 성큼성큼 내가 있는 테이블로 걸어왔다.


"보고사항이 있습니다."


"급한 일이면 통신기로 보고하면 되잖아."


"통신채널이 섞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흔들림 없이 똑바로 마주보아 오는 눈을 보니 예삿 일은 아닌 듯 했다. 자세를 고쳐잡는 걸로 발키리의 보고를 재촉했다.


"이 곳에서 처형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LRL이 해준 얘기가 아니었더라면 내 반응은 조금 더 소란스러웠을 것이다. 발키리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잠자코 있자 주위의 눈치를 살피던 발키리가 계속해 말을 이었다.


"자세한 것은 더 알아봐야겠지만 제가 목격한 현장으로 미루어 봤을 때 처형이라고 부를 만한 행위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LRL이 해준 얘기랑 관련이 있겠군. 어제 연행되던 바이오로이드 무리가 있었다고 들었어. 메이나 아스널에게 사정을 들어봐야겠는데…… 그러고보니 발키리, 너 혹시 두 지휘관이나 그 휘하들을 본 적이 있냐?"


"캐노니어는 본 적이 없습니다만, 둠 브링어의 부대원들은 아침에 봤습니다. 메이 지휘관도 봤고요."


"그래? 어딨는데?" 


"각하.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립니다. 둠 브링어의 지휘관 개체는 신경쓰지 않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뭐? 무슨 소리야?"


발키리에게 되묻고 나서야 어제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나이트 앤젤의 태도가 이상했던 것은 메이 때문이었는가.

어떤 사정이 있는 것인지 막 궁금해진 참이었으나 이내 쓸데없는 짓인 걸 깨닫고 궁금증은 접어두기로 했다. 그 놈이 할퀴고 간 흔적 속에서 온전한 이는 없다. 아이들이 그랬고, 어제 본 밴시 또한 그랬다. 눈 앞의 샬럿과 발키리는 태연해 보이더라도 그 내면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하물며 메이는 어떨까. 겉과는 다르게 여린 마음씨의 그녀라면 하루하루가 지옥처럼 느껴져 죽지 못해 살고 있을 수도 있다. 자초한 부분이 있고 책임이 있더라도 이 곳에 안쓰럽지 않은 이는 없다. 모든 걸 알고서 선택했던 건 아닐 테니까.

나름대로의 대가를 이미 치르고 있다면 그걸로 됐다.


"…아니다. 됐어. 네 말대로 하마. 보고한 건에 대해선 계속해서 알아 봐. 급하게 굴지는 말고. …아, 그리고 발키리."


출입구로 향하는 발키리가 고개만 돌려 이어질 내 말을 기다렸다.


"좀 더 휴식하는게 어때."


"틈틈히 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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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마치고 반년 가까이 하지 못한 면도를 끝마치고서 침대에 앉았다. 일일히 야영지를 구축 할 수고를 덜고 난방 걱정도 없이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다시금 뼛 속까지 느끼면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낸다.

시기 상 계절은 가을을 넘어가고 있는 중인지 몇 일 전보다도 해가 숨는 시간이 빨라졌다. 

알비스는 발키리에게 받은 기관단총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펴보는 중이었다. 방패 삼을 만한 것이 없어서 아쉬워하는 눈치로 초코바를 오물거리는 모습이 작은 설치류를 연상시켰다. 


"LRL, 뭐 읽고 있는거야? 응? 고전문학 걸작선?"


테이블에 조신히 앉아 페이지를 넘기던 LRL이 수줍게 책으로 고개를 묻었다. 진조였을 시절이라면 읽지 않았을 책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중2병은 졸업했는가 싶었으나 곧 바로 그 생각을 접었다. LRL이 변한 계기가 계기인 만큼 취향의 변화에 대해 묻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재밌어? 나랑 같이 읽을까?"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인 LRL이 내게 다가오는 중에 갑작스럽게 내무실의 문이 열렸다.

문을 닫고 들어온 아르망의 표정이 심각했기에 아이들은 일제히 하던 것을 멈추고 급변한 기류에 몸을 움츠렸다.


"아르망, 오늘 하루종일 안보이더니 뭐하고 다녔던 거야?"


"폐하! 지금 중요한 건 제가 아니에요! 이 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르망, 잠깐."


손바닥을 내밀어 진정하지 못하는 아르망을 제지했다.

그제서야 아이들이 눈에 들어온 아르망이 헛기침을 하고서 숨을 고르고 다시 말했다.


"저희 방에서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알았다. 꼬맹이들, 잠깐만 둘이서 있을래? 내가 늦으면 먼저 자도 돼."


"다녀 와!"


"다녀오세요. 사령관 님."


아르망과 함께 나서서 바로 옆의 내무실로 들어서니 샬럿과 발키리가 테이블에 앉은 채 아르망과 똑같은 얼굴로 나를 맞이해주었다.

돌아보니 있어야 할 한 명이 없는 것을 보고 나는 입을 열었다.


"더치는 어디갔어?"


"더치 걸이라면 흡연으로 자리를 비웠습니다."


"알았다. 겉모습과 다르게 억샌 녀석이니까 알아서 오겠지. 그래서 뭐가 그리 급한거냐? 발키리, 네가 말했던 거와 관련있는거야?"


"맞습니다. 자세한 것은 그녀가."


곁눈질로 아르망을 가리킨 발키리가 일어나 창가에 있는 커피포트로 향했다.

의자를 하나 끌어와 테이블에 앉은 뒤 머릿 속을 정리 중인지 눈을 감고 골똘히 생각 중인 아르망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이 곳에서 처형이 자행되고 있다는 것은 들으셨는지요?"


"그래, 발키리에게 들었다. 뭔가 알아낸 거야?"


"네, 그것도 현장에서 말이죠. 선착장 근처를 산책하는 도중에 섬에 도착한 캐노니어의 부대원들과 마주쳤답니다. 그 지휘관도요."


"아스널? 섬 바깥에 있었던 거야? 다시 돌아온거고?"


"네, 폐하. 아스널 지휘관에게 폐하에 대한 것을 설명하려는 와중에 대뜸 총구를 들이밀어서 당황했지만 섬에 들어오게 된 사정을 설명하니 원만하게 풀 수 있었어요. 제 이야기야 어쨌든, 문제는 지금부터랍니다."


"계속 얘기해 봐."


"참모로서의 저를 기억한 아스널 지휘관이 동행을 요청했기에 따라갔어요. 선착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해안가였는데, 그 곳에서 간략한 절차를 밟고 처형이 자행되었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마치?"


"구인류시대의 기록에 있던 인민재판이란 것과 다를게 없었어요. 왜 제게 동행을 요청한 것인지는…"


"인민재판? 아스널이…?"


"네. 모두가 '유죄'를 선고받고 그 자리에서 총살 당했습니다."


"……아스널이라면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처형된 것들은 어떤 녀석들이었어?"


"그 광인의 휘하에 있던 바이오로이드. 그리고…"


테이블로 돌아온 발키리가 건네는 유리잔을 받아 한모금 홀짝였다. 살짝 묽은 티백녹차로 목을 축이고, 마저 입을 떼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르망에게 괜찮다는 시선으로 뒤이을 말을 재촉했다.


"오르카의 생존자들 입니다."


"……"


"…폐하."


"아스널이 나에 대한 얘기는 안했어?"


"곧 찾아 뵙겠다고는 말했습니다만, 그 자리에서 용건을 마친 뒤에 바로 헤어져서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정리해보자면… 뭍으로 나간 뒤에 눈에 보이는 바이오로이드들을 잡아들여와서 죽이고 있단 소리군."


"…네."


"발키리."


"네, 각하."


"오늘까지는 쉬고 내일부터 캐노니어의 동태를 살펴라."


"알겠습니다."


"샬럿은 어딜가든 무조건 아이들과 동행하고."


"네, 폐하."


"발키리를 제외한 그 누구도 단독으로 나다니지 마라. 명령이야. 더치 걸에게도 전해 줘. 오늘은…생각을 좀 해야겠어. 다들 쉬어라. 혹시라도 오늘 중에 아스널이 찾아오면 내가 독대할거니까 따로 반응보이지 말고."


말을 마친 뒤 서둘러서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아이들을 생각해서 표정관리를 하려고 했으나 좀 처럼 인상이 펴지지가 않았고 내게 감도는 무거운 분위기를 곧바로 감지한 아이들은 침대에 누워있는 내게 다가와 꼬물거리면서 옆구리의 품으로 들어오더니 걱정어린 말들을 건네왔다.  나는 아무 일 아니라며 애써 달래주었지만 아르망에게 들은 이야기는 지금의 내게 있어서 정말로 곤란하고 난감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최대한 많은 이들의 생존과 그를 위한 기반을 생각하고 있는 내게 있어서 아스널이 자행하고 있는 '인민재판'은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에 있는 사항이다. 자세한 것은 아스널과 마주해봐야 알겠지만, 로열 아스널이라고 하는 지휘관의 성향과 성격상 그 모든 행동원리가 아주 확실한 개체이기에 의견이 충돌하는 상황이라도 생긴다면 골치 아파질 것은 안 봐도 비디오일 것이 뻔 했다. 최악의 경우, 명령을 통해 모든 행동을 완전히 봉쇄시켜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내 배를 꼭 껴안고 불안한 시선으로 올려다보는 아이들을 잠이 들 때 까지 보듬어주면서, 계속된 생각으로 일어난 두통에 잠을 청하기도 어려워 밤이 더 깊을 때 까지 혹시나 하고 기다려봤지만 아스널이 찾아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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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밌게 읽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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