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됐을까.

분명 교수놈의 사악한 과제러쉬에 아르바이트 크리티컬이 터지면서 뒤진 건 얼추 생각나는데.

왕국의 공주로 전생해서 신도 미안했구나 싶었는데.

...... 왜 내가 옆 제국의 황제와 결혼하게 된 거야?


"아니, 아바마마. 갑자기 결혼이라니요! 얼굴 한 번 못 본 외간남자입니다!"

"당황스러운 건 안다만... 미안하구나.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나라를 위한 선택이니-"

"...... 나라를 위한 선택이라 하셨습니까?"


국익을 위한다고?

나는 사익을 추구하는 사람인데.

당신이 말하는 국가는 대체 뭡니까?


온갖 영화 대사들이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동시에 빠르게 돌아가는 사고회로.


나는 제 2왕녀다.

두 나라의 우호라는 명분상 내 언니가 결혼하는 게 맞지만 그쪽은 이미 약혼자가 있으니 패스.

셋 있는 왕자들은 제국 쪽에서 딱히 여자 황족이 없으니 무용지물.

그러니까 내가 갈 수밖에 없긴 한데.


"하나만 여쭤보겠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나라를 위해서라면 사소한 손해를 감수하실 건가요?"

"...... 그렇게 하지 않고자 노력하고 있다."


입술을 깨무는 걸 보면 틀린 말은 아니리라.

그나마 속이 좀 편해져서, 나는 애써 웃으면서 양쪽 치맛자락을 살짝 들었다.


"알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 미안하구나."


적어도 이번 생에서는 부모가 나를 버리지 않았네.

그렇게 생각하면서 제국으로 향했다.


"억지로 그럴 필요 없다. 건들지 않을 테니 편히 쉬도록."

"...... 예?"


대충 잘생긴 황제와 정략결혼.

여자를 마구 학대한다는 소리에 바짝 긴장했는데 알고 보니 그냥 귀찮아서 낸 소문.

약간의 진실은 여자 스파이들을 패죽였던 것.


어쩌다보니 제국에서 더 좋은 대우를 받는 틋녀.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지만 괜히 이상한 소문이 날까봐 황제 집무실에서 책 읽는다.

그러다가 의무감으로 같이 산책나갔다가 웬 고양이 발견해서 얘 내가 키우면 안 되냐고 묻고.

그러라고 해서 타지의 첫 친구가 생긴 틋녀.


전 약혼자와 달리 아랫사람들에게 친절해서 좋은 평가를 받는 틋녀.

사실 그냥 부려먹히던 입장에 조별과제 팀장직을 극도로 싫어해서 그러는 건데.

기사들이 훈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 알고 자기 호위기사들에게 훈련하는 걸 보여주지 않겠냐며 개인 시간을 제공하는 틋녀.

황제는 틋녀가 군사기밀이라도 훔치려는 걸까 해서 몰래 갔다가 그냥 고양이랑 박수 치면서 보고 있어서 김 빠졌다.

그래도 일단 돌직구를 던져보는데.


"그대, 제국의 군사기밀이라도 바라는 건가?"

"아니요. 아바마마께서 그런 언질은 주시지도 않았고, 설령 주셨다 한들 따를 생각도 없습니다."

"어째서지? 그대의 나라가 소중하지 않나?"

"소중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제 나라는 폐하와 함께 있는 제국이며, 저는 제 사람에게 신의를 어기고 싶지 않습니다."


틋녀는 레포트 돚거사건과 뒷담 등의 기억으로 그런 쪽은 환멸한다.

자기 편이라면서 개짓거리하던 인간관계도 싫고.

그 대답에 황제는 오묘하게 웃으며.


"신의라... 우리가 그만큼 가까운 사이였나?"

"마음은 아직이겠지만 몸은 그렇지요. 적어도 폐하께서는 저를 존중해주시지 않았습니까."


틋녀가 고양이의 애교에 배시시 웃는다.


"저는, 저를 존중해주시는 분을 존중합니다. 그것이 신의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고요."

"...... 그렇군."

대충 그런 이야기.

고양이가 황제 볼을 꾹 눌러서 당황했지만 황제는 픽 웃으면서 조금 놀아주다가 되돌려준다.


"오늘 저녁은 같이 하지. 일도 거의 끝났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