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대신들도 알고 있는 사안이옵니까?"

"정확한 사안을 아는 것은 당시 상황을 전파한 마법사 둘과 궁정백(宮庭伯) 뿐이네. 과인이 직접 얘기한 건 경이 처음이지."

"송구하오나 폐하, 어째서 저에게 이런 중대한 이야기를……."

 

공주의 호위기사라 해도 윌리엄은 기껏해야 일반 근위기사들보다 나을 뿐.

남작위()가 있지만 실제로는 귀족도 아닌 준 귀족 취급이었다.

 

영지가 없어 귀족 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자신에게 먼저 이런 중대한 이야기를 하는 왕의 의도가 무엇인가.

일개 군인인 윌리엄으로서는 뜻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윌리.”

 

순간 윌리엄이 고개를 홱 들어 왕을 바라보았다.

 

알현실에서 왕을 대면할 경우 직접 얼굴을 쳐다보아선 안 된다. 불경죄로 죄를 물을 수 있는 행동이었으니까.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윌리엄은 순간적으로 왕을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윌리

자신이 철이 들고 왕의 이마에 주름이 새겨지기 전, 공주와 허물없이 놀던 시절에 왕과 왕비, 공주가 어릴 적 자신을 향해 불러주었던 애칭이었다.

 

자네는 내 딸 케틀린과 아주 어릴 적부터 잘 지내 주었지.”

 

주름 가득 진 초췌한 얼굴 한 가운데에도.

왕은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행동이 불경했음을 깨달은 윌리엄이 서둘러 고개를 푹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괜찮네. 자네와 내 사이가 아닌가.”

하오나…….”

고개 들게.”

 

왕의 재촉에 윌리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왕이 말을 이었다.

 

"자네가 궁정에 발을 들인 지 얼마나 됐지?“

”15년 하고 7개월이 되었나이다.“

그 때 자네 나이가 9살이었나?“

그러하옵니다, 폐하.“

그 철딱서니 윌리가 지금은 한 나라의 기사단장이라니, 과거의 나에게 이 얘기를 한다면 절대 믿지 않을 거 같군 그래.“

…….“

말하다 보니 그 날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군. 특히 어린 시절의 자네는 꽤 막 나가는 구석이 있었지. 자네를 따라 나무를 타는 케틀린을 볼 때는 정말 내 혼이 나가는 줄만 알았네.“

, 송구하옵니다.“

, 자네가 아니었으면 그 말괄량이가 지금처럼 공주 노릇을 하지는 못했을 터인데. 나로서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벌개진 얼굴에서 열이 확확 올라왔다.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윌리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재밌는 우연이라는 생각이 드네. 그 날 내가 마을 시찰을 가지 않았다면? 하필 그 날 딸이 떼를 쓰지 않고 날 따라오지 않았더라면? 딸이 자네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자네가 살던 마을이 평온했다면…….“

 

거기까지 말한 왕이 말문을 멈췄다.

후끈거렸던 윌리엄의 표정도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크흠.“

 

분위기를 환기하듯 왕이 짧게 헛기침을 했다.

 

미안하네. 실언이었군.“

폐하.“

 

굳은 얼굴로 윌리엄이 고개를 들었다.

 

저는 그 날의 일을 잊었사옵니다.“

그런가…….“


굳은 표정의 윌리엄을 왕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윌리엄도 그런 왕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마치 서로의 진의를 파악하듯이.

두 사람은 한동안 말 없이 그렇게 있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왕 쪽이었다.

 

트로웰에는 사절단을 파견할 걸세.“

 

욍의 말에 윌리엄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트로웰과의 외교가 단절된 지도 무려 8.

수 년 만의 사절단이니 그에 준하는 지위의 귀족, 혹은 왕족이 가야 할 것이다.

이는 실리를 떠나 체면이라는 게 있기에 반드시 행해야 하는 사안이었다.

 

허나 현재 자국은 서부에 있는 소왕국의 침략으로 인해 적지 않은 귀족들이 지원을 간 상황.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하나뿐이다.

 

설마 공주님을……?“

이제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를 알겠나?“

 

그제서야 윌리엄도 왕의 의도를 깨달았다.

아무리 어릴 적 허물없이 지낸 관계라 하지만, 일국의 왕이 일개 기사인 자신에게 이런 얘기를 가볍게 뱉을 리가 없었다.

 

먼 길이 될 걸세. 비밀리에 가는 여정이므로 수행원도 극히 적을 것이고."

“다른 고위 귀족도 함께하는 것입니까?”

“물론일세. 설마 이제 성인식을 막 치른 아이에게 정치적 부담을 지게 하겠는가? 그 부분은 걱정할 것 없네.”

 

그 말에 윌리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아직 마냥 안도할 상황은 아니었다.

 

"하오나 폐하, 아직 전면전이 확실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굳이 공주님을 파견할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오히려 가장 안전한 수도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그게 그렇지가 않다네. 우리가 먼저 손을 뻗어야 할 상황이야."

"어째서입니까?"

"세 가지 이유가 있네."

 

왕이 세 손가락을 펼쳐들었다.

그러고는 약지를 접었다.

 

"첫째로, 우리 님블은 트로웰에 비해 군사력이 너무도 약하네. 병력의 수는 물론이고 척박한 지대에서 살아온 트로웰 병사들은 쉽게 물리칠 수 있는 이들이 아니지. 이는 자네도 잘 알고 있을 테지.“

 

왕이 중지를 접었다.

 

둘째. 이런 상황임에도 트로웰과의 친화를 주장하려는 대신들이 있다네. 그렇기에 과인은 현 상황에서 쉽게 전쟁 이야기를 꺼낼 수 없는 것이야. 친화파의 귀족들은 당근을 먹이면 그들이 순해질 꺼라 진정으로 생각하는 듯하네. 멍청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지. 아직 표면화되진 않았으나 과인이 전쟁 얘기를 한다면 곧바로 반대 의사를 보일 걸세.“

 

왕이 마지막 검지를 접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이번에 새로 자리에 오른 트로웰의 젊은 통치자께서 내 딸에게 반했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더군.“

 

그 말에는 목석같던 윌리엄의 표정에서도 살짝 금이 갈 수밖에 없었다.

충격을 받은 윌리엄의 표정을 보며 왕이 쓴웃음을 지었다.

 

, 이건 아직 소문일 뿐이니 확신할 순 없네만.“

그렇다면 오히려 공주님을 보내는 게 더 독이 되는 게 아닌지?“

과인은 그리 생각하지 않네. 자랑스러운 국력과는 별개로 그들의 정치체제는 참으로 비효율적이거든. 공화국(共和國)이니 뭐니 하면서 꺼드럭거리다 못해 주변 국가의 귀족들에게 독을 뿜어대고 있더군.“

 

공화에 대한 이야기는 정치에 문외한인 윌리엄도 설핏 들은 적이 있었다.

왕이 아닌 다수의 통치자가 하나의 나라를 운영하는 것이라 했던가.

 

허나 어릴 적 시골에서 자라온 윌리엄으로서는 쉽사리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기도 했다.

 

국가와 왕은 하나가 아닌가?

어찌 그것을 감히 쪼갤 수 있단 말인가?

 

의문을 느끼면서도 윌리엄을 입을 다문 채로 가만히 있었다.

정치는 한낱 시골 출신인 자신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분야였으므로.

 

아주 기가 막힐 따름이야. 뱃사공이 많으면 산으로 가는 법이거든.“

…….“

표정을 보아하니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군.“

송구하옵니다. 정치와는 연이 없는 삶인지라…….“

굳이 이해하려 들 필요는 없네. 그저 저쪽의 왕은 왕 답지 못하다는 거지. 자기 욕심에 눈이 멀어 적국 1순위인 타국의 공주를 어찌하진 않으리란 얘길세.“

.“

 

마침내 설명을 끝낸 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까지 왔다면 왕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윌리엄을 향해 다가온 왕이 무릎을 꿇은 윌리엄과 눈을 맞추었다.

 

과인이 자네에게 부탁할 것은 단 한 가지일세.“

 

일개 기사에게 손수 몸을 숙인 왕이 그의 양 어깨를 꽉 붙들었다.

플레이트 메일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윌리엄은 어깨에서 왕의 아귀힘이 느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명하시옵소서.“

내 딸을 무사히 데리고 와 주게나.“

 

간절한 표정의 왕을 보면서, 윌리엄은 응당 해야 할 말을 꺼냈다.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공주님만큼은 무사히 돌아올 것입니다,“

 

 




공주랑 야스하는거 쓰려고 시작한 건데 생각해보니 그냥 야겜하면 될듯

선생님들도 갓겜 커오메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