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지. 얌전히 있어."


총구 너머에서 마치 어르는듯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살벌한 상황과는 맞지 않는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내가 권총을 바닥에 내려놓고 손을 들자, 그녀는 내가 바닥에 내려놓은 권총을 가져갔다. 총을 뺏었음에도 경계를 놓지 않는걸 보면 외부인을 그리 반기는것 같지는 않았다.


"우선 이건 잠시 압수. 나중에 돌려줄께."


어차피 쓸 일도 없었기에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총구가 허공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타테냐가 있는 내 오른쪽 어깨 위였다.


"거기 조그마한 친구도 손 들고있는게 어때?"


나는 당황하며 타테냐를 올려다보았다. 타테냐 또한 자신을 볼 수 있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에 적잖히 당황한듯 보였다.


"잠깐만, 잠깐만! 지금 쟤 보여요?"


보통의 인간에게는 천사가 보이지 않는다. 나처럼 천사가 직접 관리하는 죄수, 천국으로 가게 되는 성인, 아니면 천사가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에만 천사가 보인다... 고 전에 타테냐가 말해준 적 있었다.


"어허, 너무 흥분하지말고~ 가만히 있어."


다시금 내 머리로 향하는 총구.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 했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겨누었던 총구를 내렸다.


"우선, 몇가지 물어볼 사항이 있어. 그래도 손님을 계속 서있게 할수는 없으니 일단 안으로 들어와. 문 닫고 실내화로 갈아신는거 잊지 말고."


아무래도 이 여자에게 나는 손님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손님에게 총구를 겨누는 집주인은 이 여자가 유일할것이고. 마을의 유일한 주민이 순 날강도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신발을 벗어 실내화로 갈아신은 뒤 집 안으로 들어섰다. 난방을 틀었는지 제법 따듯한 기운이 느껴지는 집 안은 묘하게 정겨운 느낌이 들었다.


"아. 이것 좀 저기 벽에 걸어줄래?"


그때, 앞서가던 집주인이 내게 방금까지 그녀가 들고 있던 소총을 건넸다. 나는 엉겁결에 총을 받아들었지만 총기 관리가 너무 허술하다는 생각이 든다. 외부인인 내게 이런걸 맡겨도 되는거야?


"잠깐만..."


그러던 와중 머릿속에 떠오른 한 생각.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볼트를 열어 약실 안을 확인했다. 약실은 총알은 커녕 먼지 하나도 없는 완전히 빈 상태였다.


"아니 이거 빈 총이었잖아?!"


그렇다. 사실 그녀가 여태껏 들고있던 총은 빈 총이었고 나는 거기에 쫄아 내 유일한 무기인 권총을 바쳤던것이었다. 화가 난다기 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기훈씨는 사기꾼 치고는 굉장히 잘 속는 편이네요? 마왕에게 사기도 치던 인간이 총은 무섭나봐?"


옆에서 비아냥 섞인 타테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사실이라서 뭐라 할 말이 없었던 나는 거실을 살펴보기로 했다.


"뭐 마시고 싶은거라도 있니?"


그때 부엌에서 다시금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 생각 없이 주변을 돌아다니던 나는 순간 놀라 근처 진열장에 머리를 박았다.


"어머, 괜찮니?"


마치 종이 울리듯 머리속이 그야말로 울렸고 곧이어 쪽팔림이라는, 고통보다 더 아픈것이 찾아왔다. 나는 부엌에서 물을 끓이고 있던 집주인에게 괜찮다는 의미로 손사래를 첬다.


"그... 홍차 있나요? 있다면 한잔만 주세요."


홍차 한잔을 주문한 나는 거실을 죽 둘러보았다. 벽 한쪽에 놓인 벽난로에서는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내가 지금 앉아있는 소파 바로 앞에 놓인 사각형의 탁자에는 책이 쌓여있었다.


그 앞에는 TV도 있었는데 전원 버튼을 눌러도 켜지지는 않았다. 하긴 여기까지 전기나 전파가 올 리가 없지.


"이건 뭐야. 가족사진?"


TV를 확인하고 다시 소파로 돌아가려던 나는 TV 바로 옆에 놓인 작은 액자를 발견했다. 그곳에는 잿빛 머리의 여성, 그 옆에서 어색하게 미소짓고 있는 남성, 그리고 1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남자아이 두명이 환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어머, 뭐하니? 차 다 됐으니까 어서 오렴."


그때 등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찻잔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사진을 다시 원래 있던 자리에 올려놓고 다시 소파로 향했다.


"주문하신 홍차 나왔습니다~ 폴로늄은 서비스."


탁자를 보니 김이 모락 모락 피어오르는 찻잔 세개와 과자 한접시가 놓여있었다. 찻잔 하나는 타테냐를 위해 준비해놓은것 같았지만 타테냐는 마시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차 한모금을 마셨다. 따듯한 차는 맛도 향도 썩 괜찮았다. 다행히 폴로늄도 들어있지 않았고.


"..."


그리고 내 '감사합니다' 이후 집 내부가 어색하기 그지없는 침묵에 휩싸였다. 그렇게 찻잔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려오다 집주인이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이름을 모르다 보니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그럼 아까 말했던데로 몇가지 질문 좀 할께. 우선 이름과 이곳에 온 이유를 말해줘. 그정도 묻는건 되지?"


나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잠시 뭐라 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내가 만약 '나는 대천사 미카엘의 부탁으로 유물 세가지를 찾기 위해 이곳에 파견된 죄수 사기훈이고, 이쪽은 하급천사 타테냐' 라고 한다면 여기 근처에 정신병원은 없는데~ 라는 대답이 돌아올것이 뻔했기에 일단 아무말이나 내뱉었다.


"일단 제 이름은 사기훈이에요. 이곳에 온 이유는... 저도 모르겠어요. 뭐라 말하기가 좀 그런데 누군가를 해치려고 온건 아니고요."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좀 없는 소리였다. 실비아는 잠시 내 말을 듣고는 입을 열었다.


"누군가를 해치려고 온건 아닌데 권총을 들고 내 집에 침입하려 하셨다? 일단 이유는 묻지 않을게. 내 이름은 실비아야. 실비아 노튼."


집주인, 실비아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차를 홀짝였다. 뭔가 판타지 소설 속 귀족 이름 같아보인다.


"어쨌든, 이름이 사기훈이라고했지? 좀 특이하네. 아,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야. 이름 괜찮네."


나는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실비아를 잠시 바라보았다. 나이는 30~40대로 보이고 어깨를 넘어갈 정도로 긴 회색 머리, 추운 지역에 사는 사람 치고는 그리 두껍지 않은 옷에 왼손 약지에는 반지가 끼워져있었다. 뭔가 특이해보이는 분위기에 묘한 말투가 인상적이다.


"이렇게나 열정적인 시선을 받은건 굉장히 오랜만이라 좀 부담스럽네~ 다음 질문 해도 되니?"


성격은... 잘 모르겠다. 친절하면서도 어딘가 수상한 구석이 있어보이는데...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인 뒤 과자 하나를 집어들었다.


"저기, 네 옆에 날라다니는 저 아이는 누구니? 요정?"


실비아는 타테냐가 날아다니고 있는 지점을 정확히 가르키며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솔직히 대답하기로 결정했다.


"천사에요. 하급천사 타테냐."


내 말을 들은 실비아는 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내가 실비아를 만난건 채 10분조차 되지 않았지만.


"저 아이가 천사라고? 천사가 있다는건 뭐 교회 다니는 나로써 그리 놀랄만한건 아니지만, 나는 천사가 더 크고 멋있을줄 알았는데 저런 귀여운 아이일줄은 몰랐네?"


실비아는 아마 겁내 큰 성당에 그려져있는 프레스코화 같은 천사를 생각한 모양이다. 그 미카엘 같은 천사 말이다. 그때 내 어깨 주변에서 날던 타테냐가 느닷없이 튀어나와 물었다.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뭔가요? 평범한 사람인데 나를 볼 수가 있지를 않나, 다 망해가는 마을에 죽치고 앉아 지나가던 사람에게 총을 겨누지를 않나, 수상한 점이 한두개가 아니에요."


갑자기 튀어나온 타테냐 때문에 놀랄법도 한데 실비아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은채로 여유롭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저기, 이 천사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것 같은데 나는 듣질 못하거든? 통역 좀 해주렴."


아무래도 실비아는 타테냐를 볼 수만 있고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쪽 정체가 뭐냐고 묻고 있어요. 솔직히 저도 좀 궁금하긴 하거든요? 당신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에요?"


이 여자는 도대체 뭘까? 애초에 왜 여기에 있는걸까?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의문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의문을 한순간에 지워버리듯, 실비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 했잖아? 내 이름은 실비아라고. 그거면 내가 누군지 설명 다 한거야. 더 할말 없으면 이거 좀 치울게."


그녀는 더 이상 말 할것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컵과 접시를 치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저 여자에 대한 정보는 더 이상 얻기 힘들것 같다.


"그럼... 다시 찾으러 가볼까?"


이제 좀 쉬었으니 다시 퀘스트를 수행하러 갈 시간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에 계속 있고 싶었지만 여기에 계속 눌어앉아있으면 우리 실비아 여사님께 민폐가 될지 모른다.


"어머, 벌써 가는 거니?"


부엌에서 나오던 실비아가 현관 앞에 서있던 나를 발견하곤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머물다 가도 좋은데... 뭐, 정 가고 싶으면 가보렴."


실비아의 말투에서 묘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나는 실비아를 뒤로한 채 현관 문 밖으로 나서려다... 무언가 두고왔다는것을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거 안 갖고 가니?"


아까 빼앗겼던 권총이 그녀의 손에 들려있었다. 어차피 쓸때도 없어서 그냥 가지라고 할까 생각했지만 나중에 미카엘이 다시 돌려달라고 할것 같아서 일단 챙겨두기로 했다.


"아, 감사합... 어, 이게 뭐죠?"


실비아는 내게 권총을 돌려주며 무언가를 손에 쥐어주었다. 실비아가 건내준것은 돌...이다. 정확히는 룬 문자 같은게 새겨진 돌. 이게 도대체 뭘까.


"이것도 가져가. 부적 같은거라고 생각하면 돼."


나는 돌을 주머니 속에 보관하고 권총을 가방에 넣은 뒤 마지막으로 뒤돌아보았다. 잘 가라며 손을 열심히 흔드는 실비아의 모습이 보였다.


"뭐, 나중에 찾아뵐게요."


실비아에게 작별인사를 한 뒤 현관문을 열자,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차가운 공기가 내게 훅 밀려들어왔다. 다시 퀘스트를 수행할 시간이었다.



"역시 여기에도 없네."


나는 손에 든 지도를 다시 두어번 확인한 뒤 혼잣말했다.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유물을 찾기 시작한지 몇시간은 지났지만 유물은 커녕 무언가 떨어진 흔적조차 없었고 슬슬 해도 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숲 속이라서 바람은 덜 불어오는게 다행이네요."


나와 같이 지도를 보던 타테냐가 말했다. 일단 나는 구역을 나누어 유물을 탐색할 계획을 세웠고 첫번째 수색 구역이 마을과 가까운 이 숲이었다.


그렇게 계속 숲에 머물며 주변을 돌아다녔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그래도 포기할수는 없었기에 일단 내일 다시 숲을 둘러보고 없다면 다음 수색 구역인 울프 레이크에서 유물을 찾을것이다.


그렇게 야영을 결정한 사는 괜찮은 장소를 찾아 텐트를 펴기 시작했다. 지난 퀘스트때 한번 해 본적 있었지만 그때는 완성품이 조잡하기 그지없었고 얼마 안가 무너저버렸다. 이번에는 꽤나 괜찮게 펼쳐져있었다.


"저번 마검 찾는 퀘스트에선 텐트 하나 치는데 한시간은 족히 걸렸는데. 텐트 치는 스킬이 확실히 상승한것 같지 않아?"


만족스럽게 펼쳐진 텐트를 보며, 나는 향상된 내 솜씨에 감탄했다. 퀘스트를 하면서 이런 잔재주만 느는것 같다.


"네~ 네~ 아주 대에단 하네요."


역시나 타테냐는 내 자화자찬에 비아냥거리는 대답과 함께 한손으로 박수를 쳤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한손은 가만히 있고 다른 손은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다. 그리고 도대체 무슨 재주인지는 몰라도 한손으로 허공을 치는데 소리가 난다. 


아무튼 텐트를 다 친 나는 근처에 있는 나뭇가지와 돌맹이들을 모아 모닥불을 피웠다. 그런 다음 가방에서 깡통 햄을 꺼내 열었다. 이거 은근 까기가 힘들다.


"스팸? 아무리 귀찮아도 조리는 해야하지 않겠어요?"


타테냐가 방금 깐 깡통 햄을 숟가락으로 퍼먹는 날 보며 말했다. 이런 햄은 구워서 쌀밥이랑 먹으면 맛있지만 가끔 귀찮을때면 이런식으로 먹기도 한다.


"잠깐만..."


식사를 끝내고 모닥불 앞에서 멍때리는, 이른바 불멍을 하던 나는 끝내주는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라 급히 타테냐에게 물었다. 잘만 하면 퀘스트를 빨리 끝내고 쉴 수 있다.


"타테냐. 너 유물이란거 본 적 있어?"


미카엘은 내게 퀘스트를 줄 때 '유물을 관리하던 천사의 실수'로 유물이 이곳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 말은 유물을 관리하는 천사가 따로 있다는 소리다.


"글쎄요. 할 일 없이 한가한 천사라면 모를까 보통은 일 때문에 볼 일이 없죠."


이제 방법은 확실해졌다. 그냥 아무거나 들고가서 유물이라고 구라 치면 되는거 아냐? 그거 별로 중요해보이지도 않더만 다들 눈치 못챌것 같은데?


"혹시 아무거나 들고가서 유물이라고 구라 칠 생각은 말아요. 그거 생각보다 엄청난 물건들이니까."


언젠가 저 천사 안대로 한쪽 눈 가리고 철퇴를 찾을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터 나에 대한 너의 신뢰도가 그리 바닥이었어?"


이 말이 끝나자 마자 타테냐의 얼굴이 짜증과 함께 급격히 어두워졌다. 나 뭐 잘못 말했나?


"아, 신뢰도? 처음 만났을 때 부터 바닥을 찍었어요, 이 미친 인간아. 그리고 지금은 그 염병할 신뢰도가 바닥을 찍다 못해 씨이~벌 아주 바닥을 뚫고 기어다니고 있고."


확실히 타테냐가 나랑 퀘스트 수행하러 다니는게 조금 힘든 모양이다. 성격이 더 나빠지는건 둘째치고 무엇보다 말이 점점 험해진다.


그러던 그때, 느닷없이 바람이 불어왔다. 가뜩이나 스산한 분위기에 바람이 불어 스치는 침엽수들의 소리에 겁먹어 잔뜩 쫄아있던 나는 무심코 타테냐 뒤의 풀숲을 보았다.


"야 잠깐만..."


그리고 그 풀숲 너머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뭔지는 몰라도 확실히 움직이는 생물이었다. 뭔가 털이 많아보인다?


"뭐에요? 왜 또 말을 돌리는..."


순간, 나는 캐나다에 많이 사는 털 달린 4족보행의 생물을 떠올렸다. 설마 아니겠지?


"저기 뭔가 움직여. 평범한 야생동물은 아니야."


나는 급히 가방에서 권총과 같이 들어있던 서바이벌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마치 곰 같은 무언가 거대한것이 다가오는걸 느낀 타테냐도 아무 말 없이 상황을 주시했다.


바람이 불자, 침엽수림이 흔들리며 스산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새 몇마리가 하늘로 날아올라 달빛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나이프와 권총을 함께 쥐며 풀숲을 주시했다.


"와라..."


풀숲의 흔들림이 격해지자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어느새 손에는 땀이 가득했고 권총을 쥔 손이 덜덜 떨려왔다. 나는 마치 염불을 읊듯 침착하자는 말을 계속 외워댔다.


방어용 제압사격 몇발이다. 명중만 한다면 곰은 날 노리는걸 포기할것이다. 곰 스프레이 같은것이 있다면 더욱 상황이 좋았겠지만 이 융통성 제로인 천사는 고춧가루는 커녕 후추 한봉지 넣어놓지 않았다.


"온다!"


흔들리는 풀숲, 나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심호흡이 끝나자 마자 무언가 튀어나왔다.


황급히 방아쇠를 당기려던 그때 나는 튀어나온것에 놀라 방아쇠도 당기지 못한채 뒤로 자빠질 뻔 했다. 크기는 내 생각보다 너무 작았고 애초에 곰 조차 아니었다.


"토끼...네요. 네 토끼에요."


큰 귀에 갈색의 털을 지닌 토끼 한마리가 풀숲에서 튀어나왔다. 내가 너무 호들갑 떨었나? 


"뭐야... 겨우 토끼였어?"


토끼는 깡총거리며 오른쪽 바위 너머로 사라지자 황당함과 허탈한 감정이 섞여 오묘한 기분을 만들어냈다. 그래도 토끼여서 다행이다 생각하던 나는 다시 총구를 내렸다.


그리고 그때였다. 산 속을 찢을듯 울리는 굉음과 함께 무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다시 앉으려고 자리를 정리하던 나는 황급히 다시 총을 올렸다.


"이런 씨발!"


저절로 튀어나오는 욕설. 당황한 나는 반쯤 이성을 잃은 채로 방아쇠를 당겼다.


"끄어어엉!"


거의 폭발음에 가까운 소리가 총구에서 튀어나왔다. 그 소리에 일제히 새들이 날아올랐고 수풀 뒤에서 보이지 않는 곰이 괴성을 질러댔다. 맞았나?


"젠장 빗나갔...!"


온 몸이 살짝 휘청일정도의 반동. 곰은 어느새 수풀을 뚫고 제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그러나 곰의 모습에서 총상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신에게 기도하며 심장 부근에 조준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워어어어엉!"


당황한 총알은 심장 대신 어깨 근처를 명중시켰다. 총알이 가죽을 뚫고 살 내부를 파고들었으나 곰은 멈추지 않았다. 제압사격은 실패했고 곰은 나를 덮쳐 쓰러뜨렸다.


"끄아아아... 젠장!"


이제 내게 남은 방법은 목숨을 건 영혼의 맞다이. 나는 왼손에 든 서바이벌 나이프를 꽉 쥐고 곰의 얼굴 어딘가에는 맞기를 기도하며 그대로 찍었다.


"커어..."


곰의 눈과 코 근처에 꽂힌 나이프. 그러나 나이프를 뽑아 다시 반격하기도 전에 곰의 오른팔이 왼팔을 후려쳐 눌러버렸다. 엄청난 고통에 비명이 나오다 말았다.


"이... 개 씨발 곰새끼가..."


곰에게 덮쳐지며 권총을 놓쳤기에 오른손에도 무기는 없었다. 이대로 죽고싶지 않다는 마음에 혼신의 힘을 담아 오른손으로 주먹질을 했으나 곰에게 내 펀치는 고양이의 냥냥펀치보다 못했다.


곰이 다 잡은 먹이를 포기할리 없었기에 이제 내게는 죽는 선택지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어차피 죽어봤자 단지 퀘스트만 실패할 뿐이었다. 실패하면 갚아야 하는 금액에 이번 퀘스트 보상이 추가된다고 했었나?


"..."


휘둘러지는 곰의 앞발. 나는 우리 곰 님 께서 배풀어주시는 빠르고 자비로운 죽음에 감사하며 눈을 감았다. 그래 뭐 퀘스트 실패할수도 있겠지. 어차피 다 갚는데 300년 넘게 걸리는데 여기서 더 추가된다고 뭐 달라지나? 


그렇게 생각하며 난 죽으려했다. 느닷없이 감은 눈을 때려대는 푸른 빛에 눈을 뜨기 까지는.


"뭐야..."


그리고 눈을 뜨자, 모든것이 얼어붙어있었다. 그야말로 모든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