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손자는 정석대로 킹 앞의 폰을 두 칸 전진시켰다. 노인은 일단 손자를 모방해 보기로 했다. 검은색 병사에 자신의 기물을 맞붙이면서, 노인은 불현듯 장기를 배우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멋도 모르고 동네 어른들이 하는 수를 따라하던 그 때. 다 같이 따라하다 자신의 말이 먼저 먹히게 되면 어쩔 줄을 몰랐던 그 때. 치기 어린 그 시절이 생각난 노인은 잠깐 이빨을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수() 싸움은 계속된다. 폰을 지키기 위해 출격한 나이트는 뒤따라 나온 비숍에게 견제당했다. 다른 기물을 이용해 비숍을 쫓아내려 해도 뒤에 버티고 있는 퀸을 생각해야 했다. 이기기 위한 모든 시도가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그 와중에도 노인은 체스가 주는 바둑, 장기와 사뭇 다른 재미가 어디에 기인하는지를 찾아내고 있었다. 지금까지 숙달되었던 바둑과 장기의 기보들이 현재 체스에서 응용편을 펼치고 있었다. 반복으로 여겨져서 싫어 했던 중복된 움직임들이 재미있게도 전혀 다른 부분에서 도움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간지러움은 이 쪽이 아니었다.

 

 다시금 폰을 앞으로 밀었다. 방금 전 손자에게 폰이 끝까지 가면 다른 어떤 기물로도 승급할 수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노인은 자신의 청년 시절을 떠올렸다. 무턱대고 앞만 보고 달리던 시절, 그저 노력하면 되겠지 라는 생각에 몸도 돌보지 않았던 그 때. 같은 줄에 있던 동료들은 이미 죽거나, 다른 길을 택했다. 홀로 고립되어 있던 폰을 지키기 위해 다른 폰을 전진시켜 대각선 방향을 막게 했다. 그래.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뒤를 지켜주는 동료는 어디에나 있었다. 노인은 그런 자신의 인생을 자랑스러워 했고, 그들의 믿음을 저버릴 수 없었기에 더욱 앞으로 달렸다.

기물을 움직일 때 마다 노인의 생각은 깊어졌다.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는 바둑의 집들과 달리,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장기의 말들과도 다른 조종감이 노인을 즐겁게 했다. 원한다면 칸 끝까지도 갈 수 있는 비숍과 룩, 그리고 퀸의 존재는 그 선택 하나 하나로 모든 국면에 영향을 주었다. 처음에는 조금씩 밖에 움직일 수 없지만, 곧 그것은 모든 판으로 옮겨진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지금까지의 인생을 되짚어 보는 것 같았고, 이야기를 떠올릴 때 마다 장고를 거듭했다. 손자는 그저 할아버지가 체스를 처음 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는 자신의 수에 집중했다.

 

 계속되는 교환. 하얀 말이 하나 판을 벗어나게 되면, 검은 말 또한 사라진다. 노인은 검은 머리와 흰 머리가 어지러이 뒤섞인 자신의 머리숱을 좀 강하다 싶을 정도로 헤집었다. 이것은 수가 잘 풀리지 않는다 싶으면 나오는, 처음 바둑을 시작할 때 부터 갖고 있던 버릇이었다. 반상에서 잔뼈가 굵은 노인이지만, 첫 판인데다 약간이나마 대전 경험이 있는 손자에게는 밀릴 수 밖에 없었다. 노인의 기물은 확연한 차이를 내며 줄어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갈 곳이 없어질 때가 마지막이라고 했던가. 노인은 나지막히 읊조렸다. 누가 보아도 앞으로 한 수. 어차피 질 수밖에 없어 보였지만 노인은 왠지 끝까지 두고 싶었다. 단순히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까지 수많은 상념을 떠올리게 한 이 판의 진정한 마지막을 지켜보고 싶을 뿐이었다. 그 마지막을 향해서.

하얀색 킹은 유일하게 남은 선택지로 이주했다. 도망가는 킹을 따라 검은색 퀸이 그 바로 앞에 떨어졌다. 체크메이트. 마지막을 알리는 한 단어가 손자의 입에서 나왔다. 노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킹을 넘어트렸다. 손자는 해맑게 웃으며 할아버지에게 한번 더 할것을 이야기했고, 노인은 아까와는 약간 다른 미소를 지으며 손자를 쓰다듬어 주었다. 체스판은 다시금 제 자리를 찾았고, 손자는 또 다시 할아버지를 이기기 위해 머리를 짜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