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 하나 없는 하-얀 방. 백색 먼지조차 쌓여있지 않은, 하얀 벽지와 바닥과 천장과 창문과 전등과 화장실 문, 그리고 그 가운데 놓여있는 한 장의 종이. 군데군데 지웠다가 다시 쓴 흔적이 역력한 장문의 글씨가 빼곡히 적혀있다.
<유서 굿-바이>
잠시 전만 해도 파-랗던 하늘이 어느새 검게 변해가오.
재수 없는 흐름이 몸을 찬찬히 어루만지오. 끈적하고 짭잘한 바닷바람이, 나를 바다로 내리끌것만 같은 기분이 드오. 묘한 기분에 괜스레 어스름히 난 땀을 투박한 바지에 닦았소.
머언 바다를 바라보며 수평선을 따라가니 괜시리 공포감이 나를 좀먹소.
공포, 바다. 수평선.
누군가 모든 이들의 어머니는 바다라 말했지마는, 나는 모든 것들의 회귀점이라 보오.
무덤, 거대한 관짝, 지하의 끝.
무지의 공포.
무의미한 망상에 잠겨 시간을 축내는 동안 머리칼 위로 빗방울들이 툭 툭 낙하하기 시작했소.
검푸른 하늘 속의 섬광을 필두로, 우르렁 거리는 호랭이 소리, 그 뒤를 따르는 무수한 비들의 집단 자살. 그들의 무언가에 홀려버린 듯 두려움 없이 거대한 관짝을 향해 머리를 박았소. 그 모습이 너무나 괴기해서 나는 배의 포어 미스트-배의 앞대가리쪽에 세워진 돛대요-를 왈칵 안아버렸소. 그들의 집단적인 의식행동은 쉬지 않고 한참은 계속되었소. 무미건조한 표정과 감정이 나와 그들의 무언가에 공명하오.
뒤통수 쪽에서 선원들이 제 나라 말로 무어라 웅성거립디다. 그러다 이내 제일 머리가 좋아 보이던-어쩌면 제일 멍청하고, 힘없는 막내 신참일 수도 있소.- 사내가 내게 다가와 곧 비칠 것이라는 제스처와 함께 겁먹지 말라 손사래를 칩디다. 단기간에 쏟아 내리는 비일 뿐이라고, 이맘때면 줄곧 내리던 것이라고.
허나 그 말이 무색하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미친 빗방울들의 집단 자살 현장은 더욱 과격해져만 가오.
썅, 이러다 퍼런 바다가 붉게 변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드오.
한 치 앞의 바다도 보이지 않소. 관짝의 뚜껑에는 균열이 일고, 점차 미지의 것들이 본색을 드러내오.
폭풍의 가운데, 나는 있었소.
어머니의 과격한 품속에, 나는 있었소.
쿵-
둔탁한 소리, 그것은 내가 들은 마지막 기억의 소리였소.
무지와 바다. 다시 눈을 뜰 때에 하늘은 청명했소. 아쉽게도 짹-거리는 참새 소리는 없습디다. 잔잔히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고 떠다니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소. 아니 기분 같은 것이 아니었소. 나는 몸의 대부분을 바다에게 버려두고 흘러가고 있는 중이었소. 본능적으로 허우적거리다 반복적으로 손에 체이는 것에 감각을 모았소. 돌처럼 단단한 것이 암초로구나 생각했지만 설렁설렁 움직이는 것을 미루어볼 때, 어떤 살아있는 것이 나를 물위로 띄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소. 다시 한 번 무지의 공포가 몸을 덮치오. 손가락서부터 손목까지 점차 경련이 일어납디다. 나는 떨리는 근육과 신경을 진정시키고 찬찬이 그것을 훑었소. 딱딱한 무엇, 균열 있는 굴곡의 무엇. 더 내려가 보니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알 수 없는 무엇. 고개를 돌려 무지의 것을 바라보았소.
바닷거북.
무지의 정체는 바닷거북이었소. 헛웃음이 나고, 졸도 할 것만 같아 큰소리로 웃었소. 무안해서, 미지의 것에 크나큰 공포를 가지고 겁먹었던 것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평소의 나라면 어여쁘다 하며 스다듬어 줄 한 마리의 짐승이여서, 나는 관짝의 뚜껑에 누워 바닷거북의 등딱지에 머리를 베고 한참을 웃었소.
중략-
나는 며칠간 거북의 몸에 의지하며 태양과 달을 관찰했소. 아니 어찌 보면 그들이 나를 관찰한 것일지도 모르겠구려. 물위에 떠다니며, 목이 말라 죽을 때 즈음 저 멀리 수평선서 빼액-거리며 지나가는 배를 보았소. 나는 소리치지 않았소. 바닷거북의 위에서 정신이 반쯤나간 상태의 목소리는 닿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오. 체념했소. 0이라는 확률에 내가 수렴한다는 것을 느꼈소. 순간 바닷거북이 움직이기 시작했소. 며칠간의 움직임과는 다른 느낌으로 저 멀-리 지나가는 배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소. 우리와 배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을것과 같이 보였지만, 거북이는 나아갔소. 반나절, 어쩌면 그 이상을 헤엄쳤을 때에 그쪽 배의 선원이 나를 보았소. 아직도 그 표정을 잊을 수 없소. 웬 거북 하나가 시체를 등에 업고 왔으니, 오죽 기괴했겠소? 무슨 생각으로 반나절을 헤엄쳐 왔는지. 아직도 그것은 무지의 영역이오. 여튼 그 덕에 나는 살아서 땅을 밟을수 있었소. 배를 타고 육지로 돌아가는 길에도 바닷거북은 그 뒤를 졸졸 따라오덥디다. 돌아가면 후하게 대접하리라는 마음을 담았소.
충분한 휴식. 인자한 선장과 선원 덕에 만 하루도 안 되어 기력을 챙겼소. 나는 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수 차례 하고는 거북이 따라오는 곳으로 갔소. 배의 선미 부분 말이오. 지치지도 않는지 쭉- 헤엄칩디다. 그래도 힘들겠다 싶어 나는 뱃전에 언제 올라왔는지 모를 생선들을 거북에게 던져주었소.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덥석 잘 먹덥디다.
한참을 거북에게서 눈을 떼고 있지 않았다가, 뒤를 돌아보니 배는 항구에 기항 할 준비를 하고 있었소. 그립던 육지의 내음이 나의 폐로 찬찬히 들어왔소.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라 믿었던 나의 고향에 나는 돌아왔소. 눈을 감고 한 숨을 푹 쉬오. 나는 모든 이의 고향에 돌아왔소.
중략-
사고를 잔잔히 잊어버릴 때 즈음, 나는 우연히 그곳을 다시 찾아갔소. 어쩌면 무의식 중으로 거북이가 눈에 밟혔는지도 모르오.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 한 채로 헤어졌기에 나는 그에게 조금은 섭섭했소.
바다의 향은 그대로였소. 무지의 향은 더 진해졌소. 음미하고, 깨닫고, 느꼈소. 멍-하니 머언 바다, 무지의 관뚜껑을 바라보았소. 순간 오한이 덮치오. 그 거북이 없었다면 나는 무지 속에 가라앉고, 가라앉아 분명 물고기들의 하얀 집이 되어주었을 것이오.
집 없는 이들의 집이 되어준다니. 이 또한 낭만이지마는, 무지 속에서 받아들이는 낭만은 유쾌하지 않을것이오.
무지 속 낭만이란 것을 맛보고 있다 보니, 나의 배도 출출해지기 시작했소. 두리번거렸고, 곧 허름한 식당 하나를 찾았소. 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 이곳의 말을 조금 배우고 왔는데, 이곳의 글자가 복잡해 보여서 식당의 메뉴판을 읽을 수는 없었소. 점원에게 이곳서 간단히 요기 할 수 있는 것을 달라고 했소. 띄엄띄엄 말했지마는 그는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방으로 들어갑디다.
잠시 뒤 수ー프 하나가 나왔소. 나는 바다내음을 간직하고 있는 그것을 말한마디 하지 않고 잔찬히 먹고는 가게로부터 걸어 나왔소.
적당한 포만감을 느끼며 식당을 걸어 나왔소. 트림을 꺽꺽 하며 바다를 향해 걷다 보니, 무언가 발에 채이오. 바닷가에 웬 커다란 돌인가 싶어 자세히 보니 허옇고 친숙한 형상이 눈에 겹쳤소. 설마 날 구해주었던 거북이려나 하고 등딱지 부분의 흉터를 찾아보았소. 어떤 어부가 만들어 놓아두었을 작살의 흉터를, 손으로 매만지며 인식해버렸소.
나는, 나는, 곧장 다시 식당으로 돌아가 주인장에게 손짓 발짓하며 내가 먹은 것이 혹 저 거북이로 만든 것이냐고 물었소. 그는 당황하다 이내 알아들었는지는 눈웃음을 지으며 끄덕거렸소.
썅. 썅. 썅.
나는 은인 거북이를 먹어버렸소. 이제 금수만도 못한 것이 되어 버렸소. 한 목숨 구해준 은인을 이리 무정히 먹어버린 나는, 한 마리의 짐승과도 다름이 없게 되었소. 헛구역질, 그마져도 끈질기게 나오지 않아 눈물만 바다에 버렸소. 손가락을 깊숙이 집어넣어도, 구정물을 집어 삼켜도 끝끝내 나의 천박한 위장은 뱉어내지 않덥디다.
나는 짐승이오.
아니 짐승보다 못한 존재요.
모래에 대가리를 쳐박고 엉엉 울었소.
미안하오. 미안하오. 미안하오. 뚝뚝 눈물이 떨구어 지고, 빗물도 떨구어 지오.
굿 바이, 굿 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