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왔다."

"우와, 한적하네. 주변에 나무도 많고."

성주군의 한적한 시골 주택. 소꿉친구이자 여자친구인 소의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았다는 단촐한 1층주택이었다.

정원은 가꿔지지 않은 듯 방치되어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일부러 짓밟아놓은 듯 어질러져 있었다고 하는 게 더 맞는 듯 했다.

우편함은 보이지 않았고 다만 현관문 앞에 택배를 놓으라는 표식만이 있었다.


"서훤아, 들어가자!"

"응, 들어가자."

집으로 들어가니 탁 트인 느낌이었다. 사방이 뻥 뚫린 듯한 넓은 공간이었다.

거실에는 텔레비전, 컴퓨터, 노트북 등 다양한 집기류들이 완비되어 있었고 주방에는 조리도구들이 완비되어 있었다. 한쪽에는 생필품이 완전히 쌓여있는 것도 보였다.


"드디어 서훤이도 집에 들어왔네!"

"응, 그렇지. 기대된다."

여기서 이제 무엇을 하게 될 지 설레었다. 사귄 지 좀 지났고 곧 있으면 성인이니까 남자라면 이 상황에서 할 생각들이 막 떠올랐다. 게다가 여자친구랑 단 둘이 사람없는 한적한 집에서 밤을 보낼 거라니. 심장이 요동치고 머릿속이 망상으로 가득 찼다.


"그럼 이제 이것만 하면 되겠다."

소의가 정수기 버튼을 눌렀다. 냉수에서 온수로 바꿀 때 기계음으로 여자의 목소리가 나올 때 소의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진 게 보였다.

소의가 컵에 온수를 다 따르고 컵에 무언가를 넣었다. 그리고 나에게 컵을 건넸다.

"근데 소의야, 여기에 뭐 탄 거야?"

"으응, 그런 거 있어.♡"

"마시면 돼?"

"응, 응!"

소의가 기대된다는 듯 몸짓을 하며 강하게 동의했다. 귀여워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제스처였다. 나도 무슨 약인지는 몰랐지만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준 약이었기에 대충 영양제거니 했다. 순간 정력제같은 그렇고 그런 목적의 약인가 나 홀로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기로 했다.


"마셨네? 그럼 서훤아 이리 와 봐."

"어디?"

"그... 저기 침대 있잖아."

컵에 담긴 물을 마시자 소의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 지 침대로 나를 끌고 갔다. 오자마자 벌써 어른의 짓을 하나 심장이 떨렸다.

침대는 내가 물을 마신 곳에서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침대도 방의 다른 곳처럼 신경을 많이 쓴 듯 했다.


예상대로 소의가 나를 침대에 눕혔다. 이제 나도 그것을 해보는 건가 떨렸다. 그래서 소의가 이제 나를 어떻게 할 지 기대하기로 했다.


그런데 의식이 점점 몽롱해졌다. 몸에 힘이 풀리고 눈이 점점 감기기 시작했다. 졸려오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소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들려오는 것은 사랑이 듬뿍 담긴 어딘지 모를 스산한 한 마디였다.

"이제 서훤이랑 영원히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있겠네.♡"

그렇게 눈이 감겼다.





*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몸에 힘이 들어왔다. 방금 막 잠이 깨 눈이 침침하고 잘 떠지지 않았다.

눈에 눈곱이 껴있는 게 느껴졌다. 눈을 비비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그런데 허공에서 손목이 탁 걸렸다. 무언가 이상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비몽사몽한 채로 고개를 움직였다. 고개를 돌리자 나를 뚫어져라 그윽하게 보고 있는 소의의 얼굴이 보였다. 소의는 내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뭐야, 소의네?"

침대 위에서 소의랑 같이 있다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 정도면 기정 사실화 아닌가.

그래서 조심스레 부끄럽게 한 마디 물어봤다.

"저... 혹시... 우리 그거 한 거야?"

"어떤 거?"

"그, 아기 만들 때 하는 거 있잖아."

"아, 그건 이제 하려고♡"

심장박동수가 급격히 빨라졌다. 침대에서 어루만지던 게 이런 뜻이었구나 싶었다.


손목을 자세히 보니 부드러운 밧줄로 묶여있는 게 보였다.

"그보다도 손목에 이건 뭐야?"

"응, 혹시 몰라서♡"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등골이 서렸다. 평소보다 따뜻한 애정이 담긴 소의의 목소리에 대비되게 나의 본능은 서늘한 위기를 직감하고 있었다.

"그보다도 좋은 소식이 있어♡"

"뭔데?"

"우리 결혼했어♡"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에이, 농담이겠지.

"방금 그거 프러포즈야? 이제 프러포즈도 받는 사이가 됐네."

과거를 회상했다. 학교 교실에서 공개적으로 고백을 해 당황스러우면서도 황홀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니, 우린 이미 정식으로 부부 사이야♡"

"에이 장난치지 말고."

"그치만 진짜인걸?♡"

예상치 못한 대답. 나의 본능이 서서히 맞아떨어져가고 있었다.


"이미 혼인신고서까지 넣었다고♡"

"자, 잠깐... 에이, 아니겠지. 에이 설마."

"혼인신고서 보여줄까?♡"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현실이 내 이해력을 아득히 넘어가 머리가 하얘졌다.

소의가 혼인신고서를 가져왔다. 코팅까지 완벽히 하고 액자에까지 끼워넣어 애지중지 보관 중이었다.

혼인신고서를 자세히 봤다. 남편 도서환, 아내 이소의. 그리고 지문과 아래의 수많은 인적사항까지.

액자를 들고 있는 소의의 얼굴은 지금까지 봐온 얼굴들 중 가장 행복한 표정이었다.

"너 서, 설마..."

"이제 우리 평생 이 집에서 살자♡"


당황스러웠다. 아니, 패닉이 날 정도로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정확하게 꽉꽉 기입된 나와 내 가족의 주민등록번호.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찍힌 나의 지문.

이 정도면 대체 얼마나 나를 파헤친 것인가. 

당황 다음 감정은 분노였다. 갑작스러운 상황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격한 반응이 터져나왔다. 침대에서 내려와 따지려 들려 했다.

그런데 그 때 아까 나의 손목을 붙잡은 밧줄이 나를 속박했다. 반작용에 튕겨져 나와 다시 침대에 고꾸라졌다. 그 자세에서 바로 따졌다.

"아니 이건 또 언제 했어? 그보다도 내 개인정보는 어디서 안 거야? 지문은 또 뭐고?"


순간 소의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입은 아직도 사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지만 생기가 사라진 섬뜩한 눈과 합쳐져 공포를 자아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답이나 해! 이게 뭐하자는 거야! 난 또 왜 이렇게 가둬둔 거고!"

"조금 진정해줬으면 좋겠어. 네 몸이 다치잖아♡"

그 말에 더 화가 치밀었다. 겉으로 표출해야 했으나 어떻게 해도 소의의 몸에 닿지 않았다. 난동을 부릴 때마다 내 손목을 쥐어잡은 밧줄에 턱턱 걸릴 뿐이었다.


조금 지나자 현실을 이기지 못해 지쳤다. 속으로는 아직도 씩씩거렸으나 더 이상 몸을 움직일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말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 지 소의가 입을 뗐다.


"오늘이 무슨 날인 지 기억해?♡"

"무슨... 헉... 날인데."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이 주택에 온 게 우리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라고 했지.

"생일?"

"응, 우리 생일. 그리고 우리가 100일이 되는 날이자 우리가 성인이 되는 날♡"

소의가 침대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밧줄을 더 꽉 묶기 시작했다.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인데?"

"만19세는 부모 동의 없이 혼인신고를 할 수 있거든♡"

"그걸 노렸던 거야?"

"응.♡"


이제 지쳤다. 지쳐서 분노도 나지 않았다.

"생일 같아서 얼마나 좋아. 학창시절부터 생일이 같아서 서로 맨날 엮였잖아. 생일 축하도 같이 받고 파티도 같이 열고. 그게 얼마나 좋았는데. 그리고 지금 이렇게 혼인신고도 누구 하나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말이야♡"

"그럼 지문은 언제 찍은 거야?"

"서훤이가 혹시라도 거절할 까봐 수면제 먹여서 찍었지.♡"

"그럼 주민번호는?"

"주민번호? 그거야 조금만 관심 가져도 알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이제 공포도 들지 않았다. 그저 소의가 하려는 걸 잠자코 보기로 했다.


"내가 얼마나 공들였는 지 알아? 주택도 꾸미고 날짜도 맞추고. 그리고 서훤이 몸 다치는 게 싫어서 밧줄도 몸에 상처 안 나는 걸로 공수했다고♡"

그 말을 듣고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진짜로 상처 하나 없었다. 그러고보니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

소의가 발목의 밧줄을 다 조였는지 이제 손목의 밧줄을 조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서훤이가 대학교 갔을 때 생각난다. 그래도 네 학업에 지장 없으라고 사이버대학으로 유도하는 데 얼마나 공들였는데♡"

사이버대학. 나랑 소의가 같이 같은 과에 입학했었다. 그래서 초중고에 이어 대학교랑 학과까지 같아 속으로 엄청 기뻐했던 게 기억났다.

"솔직히 수시로 웬만한 대학 다 갈 수 있었다? 지방대 의대까지 갈 수 있었어. 그런데 그러면 서훤이랑 같이 못 다니잖아? 그래서 일부러 면접 망치고 억지로 정시 하겠다고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다고♡"

뭐야, 그런 거였냐. 어디서부터 계획인 거냐. 사이버대학 노래 부르고 다닌 게 재밌어서가 아니라 다 그런 목표였던 거냐.


서서히 진실이 밝혀지고 있었다. 사이버대학을 시작으로 다른 과거들까지 떠올랐다. 내가 쓴 고등학교 지원서랑 같은 대학을 쓴 것, 내가 다른 여자랑 조금이라도 친해보일 때면 만나지 말라고 은근히 눈치준 것, MT 때 어떤 여자가 내가 좋다고 하자 바로 나랑 소의가 사귄다는 기정사실을 만들었고 그 후로 그 여자가 내 눈 앞에 보이지 않은 것...


화나야 했다. 그러나 조금 발버둥쳤을 뿐 화는 금세 사그라들었다. 이미 나올 수 있는 분노는 아까 모조리 쏟아냈고 뭘 해도 소의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분노가 막히자 나오는 것은 눈물이었다. 그저 서럽고 슬펐다.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어 울화통이 치밀었다. 모든 게 각본이자 손바닥 위였다는 사실에 애통했다.


말하는 도중에 소의가 손목까지 다 묶었다. 단단히 묶인 게 확인되자 소의가 다시 침대 위로 올라와 내 옆에 누웠다.

소의의 손가락이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그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대며 눈물을 먹었다.

"으응, 울지 마♡"

소의의 입술과 나의 입술이 합쳐졌다. 입에 무언가 따뜻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간간이 짠 게 왔다갔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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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쓰기 귀찮아서 1달 넘게 방치해뒀다가 그냥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