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터


 은을 품은 땅.

 금을 품은 땅.

 기름을 품은 땅.

 보석을 품은 땅.

 사람을 품은 땅.


 어느덧 시간이 지나

 사람을 품은 땅은

 땅이 없는 땅이 되고


 사람을 품은 땅은

 사람을 품은 땅이 되니.


 이곳이 바로 불행한 터로구나.



회한(悔恨)


 지난 나이라는 세월

 세월동안 쌓아온 나

 나라고 생각한 가치관


 사실은 전부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에 불과한 것

 그 사실이 문뜩 생각나자

 다가오는 끔찍한 망상, 비관, 역겨움

 욕지기가 치밀어오르는

 자신에 대한 확신의 부재


 그럼에도 살아온 세월은

 자신을 속이지 못하고

 스스로를 갉아먹지만

 그럼에도 다시 돌아오니


 변할 수 없게 바뀌었다는

 지극히 모순적인 사실은

 동심을 버린 과거를 후회하네.



영원


 나무는 운다.


 사람은 운다.


 영원을 살게 된 자는 환호한다.

 영원히 잃게 된 자는 절망한다.


 나무도 그렇다.


 함께 살아가던 동포들을 잃은 나무는.

 늘상 보아오던 풍경들 마저 잃게 됐다.


 영원한 시간은 허구에만 존재하는 불행이 아니다.

 영원한 시간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불행이다.



무과화(無果花)


 꽃들이 만개하는 시절

 꽃가루가 흩날리는 때


 그 꽃은 수술만을 가진 채로

 암술은 찾아볼 수 조차 없네


 벌들과 나비가 꽃들 사이를 지나는 때

 누구하나 열매를 맺지 않으려는 그 꽃


 그러나 그 어떤 꽃들보다 만개한 꽃



몽중안(夢中眼)


 길게 늘어진 빗방울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영상을 볼 때면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빛이 산란되는 모습을 즐길 수 없게 되었다.

 보기 싫어도 봐야만 했던 것을 볼 수 없었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던 것을 보게 되었다.


 눈이 좋다는 것은 무었일까.


 분분히 흩날리는 꽃잎조차 즐길 수 없는 것, 그런 것을 정녕 눈이 좋다고 할 수 있을까.



각설(角雪)


 네모난 담벼락에 갇힌 하얀 눈.

 불어오는 바람에 날아오르니


 세상 천지에 퍼진 눈은

 네모상자 밖을 느끼네



출퇴근


계단을 오르면 표정은 밝아지고

계단을 내려가면 표정은 어두워지네


기분은 높이와 거꾸로 움직이고

표정은 기분과 거꾸로 움직이네


아아 고단한 삶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