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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이 풀리며 기절하듯이 잠든 유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침대에서 일어났어.


본 적 없는 천장이었지만 주변은 그녀가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 있던 방이었어. 유미는 밖에서 들리는 세찬 빗소리를 들으며 그녀를 덮은 이불을 껴안고 벌벌 떨었어.


“드디어 일어났네. 뭐라도 마실래?”


방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 그녀보다도 작지만 같은 전공의 선배인 유키라는 걸 확인한 유미는 안심했어. 모르는 남자들보다는 더 안전해보이고 또 사촌오빠인 바딤의 지인이라 믿을 수 있었으니까.


“아오보시 양이었지? 하루키는 좀 있다가 올거니까 그 동안 여기서 기다리자.”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유키는 하루키를 믿고 넘어가줬어.


유키를 빡치게 만든 건 하루키도 다른 남자들처럼, 걸레같은 여자한테 애원해서 동정을 떼는 한심한 남자라는 믿음이었어. 하지만 하루키가 선의로 그녀를 데려왔고 흑심을 품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다른 여자와 알몸으로 있던 것도 일단은용서해줬어.


유미와 유키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대부분은 유키가 얘기하는 하루키에 대한 얘기였지. 하루키가올 때까지 기다리자며 시작된 이야기는 계속됐고 유미는 하루키가 누구인지 어느 정도 알기 시작했어.


“하지만 하루키는 내 거야.”


유키가 그 말을 하기 직전 삑삑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어. 하루키인줄 알고 나온 유키는문을 열고 기웃거리며 두리번거리는 남자와 눈을 마주쳤어.


문을 잠그고 경찰에 신고하고 싶어도 식탁 위에 충전하고 있는 핸드폰을 잡으려다가는 강도들에게 잡힐 게 뻔했어. 바로침실로 달려가 문을 잠그고 그 작은 몸으로 문이 안 열리게끔 틀어막는 유키를 본 유미는 뭔가가 심하게 잘못됐다는 걸 보지도 않고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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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얼마동안 기절했는지도,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모르겠다. 온 몸이 아프고 다리는 특히 더 아프다. 무릎을 꿇지 않아서 야구방망이로 정강이뼈가 부숴졌지만 그 놈한테만큼은 무릎꿇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비굴하게 무릎꿇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의자에 팔은 묶였고 이미 망가져서 쓸모없는 다리는 묶이지 않은 채 감금된 지하실의 문이 열리고 선배가 처음 보는 무리의 불량배들과 들어왔다.


“이런 짓 하고도 그냥 넘어갈 수 있을거같아?”


선배는 기가 찬다는 듯 내 얼굴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어. 넌 부모없는 거지새끼잖아. 자존심 말고는 가진 것도 없는 거지새끼. 근데 웃기는 게 하나 있다? 들어볼래?”

“......”

“유미가 도와달라고 너까지 찾더라? 근데 걔가 네 이름을 몰라! 이름이 뭔지도 몰라서 꺽꺽거리는 거야! 따귀 몇 대 더 때리고 자지 물리니까 입닥치긴 했는데-”

“자랑이다 병신아.”


퍽.


목덜미가 여러 겹으로 접힐 정도로 살찐 것도 모자라 접힌 살 위에 때가 딱지처럼 낀 남자가 내 배를 걷어찼다.


“이 새끼가 몇년 안 쳐맞으니까 아주 살판났지!”

“야, 살살 쳐라. 애 죽겠다.”

“이 개새끼가 주둥이만 살았잖아!”


저 천박한 말투에 앵앵거리는 목소리를 듣고나서야 기억났다.


타도코로 하지메.


나를 두들겨패는 걸 삶의 낙으로 삼던 친척.


“하늘같은 선배님한테 대든 건 맞아야 싼데, 일찍 죽이면 제대로 못 패잖아.”

“그러면 좀 우러러보게 행동해라, 이 하늘같은 씹새끼야.”


선배는 바닥에 쓰러진 나를 향해 몸을 숙이고 다시 같은 질문을 했다.


“유미 어딨는지만 말하면 살려는 줄게. 유미 어디 숨겼어?”

“———“


나는 웅얼거렸다.


“뭐? 잘 안들리는데? 좀 크게 말해봐~”


퉷.


선배의 눈에 가래침을 정확하게 뱉었다. 가까이 올 때를 노리고 침을 뱉었는데 얼굴을 노린 게 정확히 눈에 맞았다.


당연하겠지만 선배는 내 얼굴을 향한 발길질로 대답을 대신했다. 고통으로 눈 앞이 보이지 않지만 놈의 목소리와 씩씩거리는 숨소리만은 크게 들렸다.


“야, 카네키. 나 잠깐 예핌네 갔다 올테니까 이 새끼 감시 잘 해.”

“......예, 도련님.”


선배는 그의 패거리를 데리고 나가기 전 노트북 하나의 화면이 내게 잘 보이게끔 뒀다. 눈 앞이 흐려서 화면은 잘 보이지않았지만 화면 한가운데에 뜬 재생 버튼만은 확실히 보였다.


“이 형님은 물빼고 올테니까 넌 이거나 보고 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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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보기와 운전을 담당해서 도살당한 걸 피한 한구레만이 살아남아 도축실에서 심문을 받고 있었어.


“니시카타...”

“누구?”

“니시카타 마모루...”


그를 보낸 배후도 알고 아직 묻지도 않은 주소까지 알아낸 마카롱과 소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어.


“그럼 안 되지, 아저씨. 그렇게 알아서 술술 불면은.”

“다 말했으니까 살-“

“오메르타라고 들어는 봤니? 너같이 입싼 남자는 뒷세걔에 어울리는 남자가 아닌걸?”


부들거릴 틈도 허락받지 못한 한구레가 가공당하는 지하에 있는 도축실이 아닌 레스토랑의 테이블에 앉았어도, 지하실에서 돼지사료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지 않아도 유키는 겁에 질려서 벌벌 떨었어.


방금 전까지 와인 진열대였던 벽의 반대편에 숨겨져있던 다양한 총기들을 보고선 겁에 질려 벌벌 떨었어.


주방에서 조리복을 입고 식칼과 음식을 든 밴덤은 없었어. 그 자리에는 회색 위장복과 발라클라바로 정체를 감추고 소음기가 부착된 기관단총과 컴뱃 나이프를 든 바딤이 있었지.


그 모습을 보고서야 유키는 예전에 바딤이 프랑스 특수부대에서 복무했다는 하루키의 얘기를 떠올렸어.


그리고 바딤과 마찬가지로 검은 양복과 가죽장갑을 낀 르 쁘띠 푸틴의 직원들도 벽에 진열된 무기와 탄창들을 익숙한 손길로 점검하며 유키의 앞에서 코사츠카야로서의 본모습을 드러냈어.


“다녀오겠습니다, 아가씨.”


하루키의 집에 쳐들어온 강도 일곱을 쿠크리 하나로 참살한 민머리의 동양인 남자가 유미에게 허리를 굽히며 공손하게 인사했어. 협화어로 얘기하는, 장 실장이라고 불리던 유미의 경호원이라는 그를 본 유키는 하루키가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는 것만어렴풋이 알았고 발만 동동 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심란스러웠지.


“쉬... 쉬... 괜찮아. 그 아이는 우리가 무조건 구해줄테니까.”


불안감에 벌벌 떠는 유키의 손을 잡아준 것은 검은 생머리에 유미처럼 피부가 하얀 늘씬한 미녀였어. 유미한테 “마라 언니”라고 불리고 유키한테도 그 호칭을 요구한 그녀는 감았던 눈을 뜨고 초점없는 갈색 눈동자를 희번뜩이며 말했어.


“조직이 무서운 줄 모르는 들개새끼들은 이 언니가 죽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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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만 열흘 넘게 쓸 줄은 몰랐네.


일본어는 왕서방 말투를 협화어라는 걸로 부르더라고. 근데 난 그걸 조선족 말투로 쓰려고.


이건 별 상관없는 얘기기는 한데 캬루는 배신의 야수면서도 망조의 야수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