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헤매는 흡혈귀 사냥꾼이 풍작신과 만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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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작품]

얀데레 안드로이드의 주인에게서 시민권을 상큼하게 빼앗아보았다(총 10화)

https://arca.live/b/yandere/14626115

 

자결투표(총 25화)

https://arca.live/b/yandere/19195399

 

K시 살인사건에 관한 면담 카르테(단편)

https://arca.live/b/yandere/19964826

 

 

0.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주었다.

 

-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황무지」, 제1장 죽은 자의 매장.

 

 

1.

 

“한 잔 하겠니?”

“아뇨. 저 커피 안 마시는 거 아시잖아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잔.

그것을 쥐고 온기를 느끼다 탁목조는 문득 물었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고개를 젓는다.

예전부터 차나 커피 따위는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더욱이 이제 그는 더 이상 인간의 몸이 아니었다.

흡혈귀가 된 이후로 잠이 엄청나게 줄어들었기에 카페인을 더 추가하고 싶진 않았다.

 

그나마 이만큼만 자고도 컨디션 저조가 없다는 게 다행이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며느리가 둘이나 생길 줄은 몰랐는데.”

 

그 말에 드미트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귀가 쫑긋 돋아난 소하는 그의 무릎을 빌려 잠을 청하고 있었고,

진령 역시 어깨에 기대어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아슬아슬하게 산에 들어오지 않는 경계에 걸쳐 탁목조가 앉아있었다.

 

“그게 좀 이야기가 긴데요…….”

“그럼 됐어. 원래 신령한 것들과는 한 번 섞이면 평범한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으니까.”

 

본디 이야기라는 것이 그렇다.

 

요물에게 홀린 자는 제3자의 조언이 없으면 빠져나오지 못하고,

이물과 맺어지면 비슷한 힘을 가진 자가 아니고서야 헤어나올 수 없다.

 

“그건 그렇고 구슬은 안 먹여주던?”

“애초에 그쪽 여우가 아니잖아요.”

 

아마 여우구슬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여우가 인간의 정기를 앗아가기 위해 사용한다는 구슬.

 

점차 허약해지던 소년은 학당 스승의 조언에 따라

여우구슬이 입에 들어온 순간 냉큼 삼켜버림으로써 여우를 쫓아내고 신통력을 얻게 되었다.

 

이것 역시 제3자의 개입으로 요물을 쫓아낸 설화 중 하나였다.

 

이 ‘개인은 괴이에 대항할 수 없다’라는 보편적 인식을 전제로

‘때마침 지나가던 제3자’를 인위적으로 만들고자 했던 게 협회의 시작… 이었을 텐데.

 

“정작 그 협회의 일원이 홀려버렸으니 이 난장판이 벌어진 거지.”

“아니, 그… 죄송합니다.”

“미안할 게 뭐가 있니. 이번엔 그냥 상대가 나빴던 거야.”

 

협회의 일원이니 뭐니 해도 자세히 뜯어놓고 보면 대부분은 무력한 개인에 가깝다.

저 정도 신령이 엮인 일에 감히 인간 따위가 어떤 저항을 할 수 있으랴.

 

“…내 힘 때문인 게야?”

 

그러다가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리기에 드미트리는 무심코 곁을 바라보았다.

진령이 머리를 기댄 채 살포시 올려다보고 있었다.

 

“안 자고 계셨어요?”

“드미트리가 나를 받아들인 것도 그래서더냐?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저 풍작신의 힘에 홀려서…….”

“얘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던 것인지 더듬거리며 말해오는 진령이었다.

그러나 탁목조는 그 말을 아주 간단히 일축해버렸다.

 

경칭이라곤 없는 걸로 봐선 이미 며느리로 받아들인 모양새였다.

 

“거 처음에는 외모 때문에 반할 수도 있잖니.”

“아니, 그것과는 이야기가 다르…….”

“뭐가 다르다는 거야?”

 

외모에 반하나 색기에 반하나 그건 별 다를 바가 없는 일이라고, 탁목조는 말을 이었다.

 

“정 그러면 생각해보지 그래?”

“무, 무엇을 말이냐…?”

“하루아침에 풍작신의 힘을 잃어버리면 내 아들이 너를 버릴지.”

“…….”

 

이내 진령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드미트리의 팔을 더욱 힘주어 끌어안곤 얼굴을 포옥 파묻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불안감 때문에 그러는가 싶었던 드미트리였으나

이내 그녀의 귀가 아주 붉게 달아올라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으으, 하고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수줍음과 기쁨이 잔뜩 뒤섞여있었다.

 

“아무튼 우리 쪽에서도 회의 결과가 나왔다.”

 

그러다 탁목조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들이키고 화제를 돌렸다.

 

“뭐라고 하던가요?”

“국외추방.”

“다행이네요.”

 

나름 나쁘지 않은 선에서 정리가 된 것 같아서 드미트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국외추방이라고 하면 꽤 큰 징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진령의 힘이 벌인 일을 생각해보면 그녀는 방사능 덩어리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소하의 혈통을 돌이켜보면 사실 꼭 그녀 혼자의 책임은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아무튼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 작물에 영향을 끼치니 내버려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더 이상 아무런 위해도 끼치지 않는 이 결과는 드미트리로선 그럭저럭 만족할만한 것이었다.

 

“그나저나 추방이라고 하면 방법을 찾은 거예요?”

“이 산에 걸려있는 저주를 푸는 법? 그거라면 당연히 준비했지.”

 

드미트리와 소하는 한 번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저주에서 벗어난 몸이 되었다.

 

사실 소하는 다시 산에 들어왔지만 평범한 형태의 죽음은

그녀를 영원히 잠들게 하지 못한다는 게 밝혀졌으니 저주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정작 사태의 근원인 진령이 여전히 산에 묶여있으니 그걸 풀 방법을 가져왔다고 보는 게 옳으리라.

 

“…은말뚝이랑 은망치?”

 

이내 그녀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드미트리에게 넘겨준다.

 

“어부의 반지를 부술 때 쓰는 망치야.”

“아니, 그거 루머잖아요?”

 

전대 교황의 인장이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은망치로 반지를 부수고 매장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던 적이 있다.

다만 실제로는 그렇게까진 하지 않는다고 밝혀졌을 터였다.

 

“그렇게 믿어진다는 게 중요하지. 그 정도 규모의 루머면 그것만으로도 힘이 실리거든.”

 

아무튼 신령한 계약을 취소시킨다는 관점에서는 이만한 도구가 없긴 할 터였다.

실제로 효과만 있다면 드미트리 입장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기도 했고.

 

“그러면 이 말뚝은요?”

“내가 예전에 쓰던 것 중에 튼튼한 걸로 골라왔지.”

 

…매번 생각하지만 협회 제일가는 말뚝광이란 소리는 헛소문은 아닌 듯 했다.

 

“내일 바로 시작해. 자정에 시작해서 동트기 전에 이걸 산 정상 나무에다 3분의 2 지점까지 박아.”

“그렇게 간단히 되는 건가요?”

“아니, 한쪽 팔에 칼을 꽂고 그쪽 팔만 써서.”

“…흡혈귀 아니었으면 무리였겠네요.”

 

드미트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만큼 자신의 재생능력이 고마웠던 적이 없었다.

 

“기회는 한 번뿐이니까 신중하게 해. 실패하면 진짜 협회랑 전면전밖에 안 남으니까.”

 

그러다가 드미트리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떼었다.

 

“그러고 보면… 돌아오자마자 소하 씨가 전화했다는 건 어머니가 도와주셨다는 거죠?”

“뭐, 그렇지.”

 

탁목조는 잠시 하품을 내쉬었다가 말을 잇는다.

 

“정확하게는 저쪽에서 연락을 해온 거야. 여권이 없으니까 일반적인 방식으론 출국할 수가 없으니까.”

“용케도 도와주셨다 싶어서요.”

“아들이 죽지 않아도 되는 길이 있으면 당연히 그쪽으로 가는 게 부모 아니겠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드미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습격 때 동참하셨던 건요?”

“그야 뻔하잖니?”

 

이내 탁목조는 당당히 입꼬리를 틀어올렸다.

 

“이수가 우리 아들한테 손을 쓰려고 했으면 옆에서 기습해서 죽여버리려고 한 거지.”

“…어머니. 혹시 맘충이라는 말 아십니까?”

“뭐, 이 자식아?”

“어머니 자식입니다.”

 

즉, 여차하면 협회 뒤통수를 칠 생각이 만만이었다는 소리였다.

하긴 자신도 나라 하나 작살내겠다며 협박을 했으니 뭐라 할 입장은 아니긴 했다.

 

“하아… 그래, 여튼 이제 앞으로 한동안 만날 일 없을 테니 수고해라.”

 

뒤이어 그녀는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거기 풍작신.”

“앗?! 그, 나, 나 말이더냐…?”

“그쪽 말고 또 누가… 있기는 하지만 문맥으로 알아들으렴.”

 

갑자기 자신을 부를 줄은 몰랐는지 깜짝 놀라서 눈이 커지는 진령이었다.

 

“아무튼, 우리 아들 잘 부탁한다 며느리.”

“그… 알겠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키겠노라!”

“그래. 이상한 수작 부리는 연놈들이 있으면 작살을 내버리렴.”

“아니, 어머니?! 괜한 소리 불어넣지 마요!”

 

그러더니 탁목조는 더 말하지도 않고 휙 떠나버린다.

 

“…….”

 

사실 드미트리는 누군가와 이별할 때에도 그다지 와닿는 것은 없었다.

어느 순간 휙 하고 떠나는 흡혈귀 사냥꾼을 부모로 둔 입장에서는 본래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조금뿐이지만 무언가가 느껴진 것만 같았다.

 

드미트리는 곁에 있는 여신의 손을 붙잡고 조용히 그 온기를 느꼈다.

 

밤이 더욱 깊어갔다.

잠은 아직 오지 않았다.

 

 

2.

 

금속음이 울려퍼진다.

망치가 말뚝을 내려친다.

 

물론 귀로 듣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흡혈귀의 청각이라 하더라도 정상에서 나는 소리를 다 내려온 비탈에서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듣고 있는 건 주술적인 무언가였다.

영혼에 아로새겨지는 성스러움과, 가슴께를 울리는 흔들림이었다.

 

산의 저주가 깨어지고 있음을 소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뒤이어 들려오는 것은 여성의 목소리.

그 후에 익살스러운 소녀의 목소리가 뒤덮는다.

 

“괜찮아?”

 

처음은 소하의 모친이 말한 것이었다.

태어나며 자신과 아버지를 이 땅에 두고 떠난 풍작신은 입술을 떼었다.

 

그러나 물론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리는 없는 소하는 잠시 기다렸다.

 

이내 이나리의 손에 들려있던 자그만 나무 상자가 말한다.

작달막한 아기 도깨비. 일전에 소하가 언급했던 ‘구하는 데 오래 걸린 통역’의 정체였다.

 

통역이 가능하면서 흡혈귀와 풍작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도 괜찮은 존재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돌아오는 게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상황이 어떻게 되었을지 지금 생각해도 몸이 오들오들 떨린다.

 

“무슨 의미요?”

“이대로 괜찮냐고.”

 

이나리는 소하에게 눈을 맞추며 물었다.

이것이 정말 그녀의 말투인지, 아니면 통역의 결과물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소? 

“지금이라면 그 아이를 독점할 수 있어.”

“…드미트리 말하는 게요?”

 

대명사에 가까운 표현이었으나 소하가 독점하고 싶어하는 인물이야 뻔했다.

 

“주술을 깨는 걸 방해하면 돼. 나무 신령은 영영 이 산에 갇힐 테고.”

 

드미트리는 이미 안에서 한 번 죽었으니 산의 영향에서 벗어난 존재가 되었다.

 

즉, 소하 입장에서는 그를 데리고 이곳에서 도망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동이 틀 때까지 망치질을 끝맺지 못하게 하여 진령을 영영 이곳에 가둬두고 말이다.

 

드미트리와, 단둘이.

그 상상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을 달콤하게 채웠다.

 

하지만 소하는 금세 고개를 내저었다.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면서 말이다.

 

“잊으셨소? 이 몸에게는 여우가 하나 들려있다오. 결국에 독점은 무리인 셈이지.”

“그런가.”

 

이나리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

 

“다만 그래도 경쟁자는 줄이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 이야기는 그만하면 됐소.”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 드는 것인지 이나리가 물어왔다.

소하는 그 말을 흘려넘길 뿐이었다.

 

허나 정말로 그게 전부였을까.

 

이나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드미트리를 독점하지 못한다는 건 타인이 그에게 손을 대어도 좋다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당장에 또 다른 암컷이 드미트리를 유혹한다면 소하는 곧바로 그녀를 참살할 의향이 있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진령이기에 괜찮은 것은 아닐까.

 

소하는 무심코 며칠 전 죽기 직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내 아무리 드미트리를 두고 싸우는 사이라 하여도 이런 식으로 끝내는 건 용서할 수 없다.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 말했던 순간, 진령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무심코 피식 웃는다.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고민했거늘, 이미 답지가 나와있지 않소.

 

“아마 정이라도 들었나 보오. 이만하면 설명이 되었으면 줗겠구려.”

“다행이네.”

 

다행이라, 소하는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통역이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으나 그 음색에는 알 수 없는 따스함이 스며있었다.

 

어머니가 있다면 마치 이런 느낌이었으리라.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모친이 맞을 테지만 솔직히 실감은 나지 않았다.

 

소하를 낳자마자 이 땅을 떠났던 그녀였으므로 아버지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만이 전부였다.

 

그런 상황이니 낯설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상 힘만 이어받았을 뿐 남이라고 봐도 좋았다.

 

소하는 다시금 의문에 빠졌다.

 

자신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입술을 달싹이며 잠시 하고픈 말을 오물거릴 뿐 내뱉지 못했다.

 

“어머니, 그대는…….”

 

한참 침묵이 감돌고서야 소하는 입을 뗄 수 있었다.

 

“…왜 이곳까지 와서 이 몸을 도와준 게요?”

 

이나리는 잠시 묵묵히 소하와 눈을 맞출 뿐이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짧은 답을 해왔다.

 

도깨비가 그 말을 해석해주기 전에도, 소하는 어째서인지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엄마니까.”

 

대답을 듣고서 소하는 양손으로 스스로의 얼굴을 가렸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솔직히 말하겠소. 이 몸은 그대 얼굴도 며칠 전에 처음 봤다오.”

 

사실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들어도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건 아시오?”

“지인에게 전해들었어.”

“이 몸의 이야기는?”

“죽었다고… 들었지.”

 

소현이 죽어가면서 남긴 부탁을 들어준 탁목조 탓에 공식적으로는 그랬다는 게 떠올랐다.

 

“그래서, 너를 봤을 때는 정말로 안심했어.”

“이 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던 게요? 태어났을 때 봤던 게 전부이니 아주 변했을 터인데.”

“닮았더라.”

 

누구를?

그 질문은 목구멍에 턱 걸려 나오질 않았다.

 

“모르겠소.”

 

소하는 나지막이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그대가 어째서 이 몸을 떠났는지는 굳이 묻지 않겠소.”

“…….”

“하지만 그래도 역시 모르겠소. 이해할 수가 없소.”

 

소하는 다시금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저 웃고 있을 뿐인 그녀를.

 

“한평생 보지도 못했던 사람을 어떻게 그런 눈으로 볼 수가 있는 게요?”

“아마도 곧 알게 될 거야.”

“대체 언제쯤 말이오?”

“아이를 갖게 되면.”

 

딸에게 미소를 지어오는 이나리의 모습에 소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신랑감. 잘 물어왔더라.”

“…그 이야기는 됐소.”

“딸아이 결혼 이야기면 하루 종일 말하고도 남지.”

“헛소리 끝났으면 이제 돌아가는 게 어떻소?”

 

홱 돌아서며 무심코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했음에도 뒤에서는 키득대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좋았어. 사랑해, 우리 딸.”

“…….”

 

소하는 그저 그 자리에 서있을 뿐이었다.

 

“…이 몸도, 언젠가 그대에게 그리 말할 수 있다면 좋겠소.”

 

한참이 지나서야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이나리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아무렴 신이라는 건지 어느 틈에 사라졌나 알 수도 없었다.

 

과연 마지막에 소하가 중얼거린 말을 들었을까.

 

그녀라면 분명 대답을 끝까지 듣고서 그제야 떠났으리라고, 소하는 그리 생각하는 것이었다.

 

 

3.

 

달그락. 나무 테이블에 아직 김이 나는 머그잔이 내려놓아진다.

안에 든 커피는 반까지 줄어있는 상태였다.

 

그녀의 사진을 본다면 누구나 입을 모아 미인이라 말할만한 외모의 여성이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그래서 다음은 어디로 가는 게요?”

 

다만 그 모습을 실제로 마주한다면 영문 모를 오싹함에 함부로 바라보지 못할 터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정체는 흡혈귀다.

더군다나 예사 흡혈귀도 아니고 여우 귀신까지 들린 괴물이었다.

 

“나, 나는 이번엔 좀 따뜻한 곳이 좋겠도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여성 역시 몹시 빼어난 미인이라 할 수 있었다.

 

허나 이쪽은 한술 더 뜨는 것이, 고대부터 신으로 숭배받던 신령인 탓이다.

지금에야 조금 순박하고 소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폭주하면 도통 제어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그게 어디 저희 마음대로 결정이 나던가요.”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내는 한숨을 쉬며 지적했다.

 

아름답고도 무서운 미인들과 동석한 이 자가 누구인가 하면 여기도 또 흡혈귀다.

 

엄밀히 말하자면 드미트리라는 가명을 쓰는 그는 얼마 전까지는 인간, 정확히는 담피르였으나

어쩌다보니 죽음을 맞이하고 흡혈귀로서의 새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조합이 완성되었느냐 묻는다면 참으로 이야기가 길어지니 넘기도록 하자.

어차피 여러분들은 모두들 잘 알고 있으리라 짐작되므로.

 

흡혈귀와 풍작신, 여우가 얽힌 사태가 끝난 뒤로 몇 달이 지났다.

그들이 국외추방 명령을 받은 게 벌써 수개월 전이라는 소리였다.

 

다만 그렇다고 다른 나라에서 자리 잡고 여생을 보내고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멋대로 주위의 식물을 괴악한 수준으로 성장시키는 진령이었으므로

그들이 한 곳에 머무르는 일 따위 가능할 리가 없다.

 

드미트리와 소하, 진령 세 사람(그리고 여우 귀신 하나)은 그 뒤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지내고 있었다.

 

“그래도 이번엔 잡졸이어서 다행이었소.”

“소하 씨 기준에서 잡졸이 아닌 게 있긴 해요?”

“시어머님은 강하시지.”

“…저희 엄마는 규격 외니까 제외하고요.”

 

다만 그렇게까지 촉박한 것도 아니고 흡혈귀 사냥으로 나름 돈도 벌고 있었기에

실제로는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드미트리가 완전히 흡혈귀가 된 탓에 해가 떠있을 땐 오래 돌아다니지 못한다는

사소한 단점 정도만 빼면 아주 느긋한 여행이었다.

 

“나 정도면 충분히 강하지 않느냐?”

“할멈. 젊은 것한테 힘자랑하니 좋소?”

“으, 너도 천 살은 넘게 먹었잖느냐!”

“적어도 이 몸은 기원후 출생이라오.”

 

…그 외에 매번 신경전을 벌이는 두 사람의 존재가 있었으나, 이건 여행을 안 해도 문제였으니 제쳐두자.

 

“자, 그만 싸우시고요.”

“저 녀석이 먼저 시비를 건 게야. …흠흠, 그래서 다음은 어디로 갈지 정했느냐?”

“한동안은 좀 정착생활을 해도 될 것 같아요.”

“뭐? 그런 곳이 있느냐?”

 

드미트리는 태블릿을 꺼내어 다음 목적지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막이구려.”

“사막이잖느냐.”

“네, 사막 맞는데요?”

 

태블릿 화면에 표시된 모래언덕을 보더니 두 사람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긴 주위에 식물이라곤 없는 사막이 아니면 정착은 무리니 말이오.”

“꼭 그것만은 아니고 사막 녹지화 사업을 한다고 해서 의뢰받은 거예요.”

“호오. 방탕한 생활만 하고 있으면 돈이 나오는 거요?”

“그렇게 말하니 좀 묘하긴 한데, 일단 행위만 늘어놓으면 그렇게 되겠… 죠?”

 

그러다가 문득 소하는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는 양 손뼉을 마주쳤다.

 

“그러면 그때 힘을 쏟아부어야 하니 할멈은 한동안 금욕이구려.”

“자, 잠깐?! 왜 그렇게 되는 게야?!”

“풍작의 힘이 폭주하는 건 그대의 교합에서 벌어지잖소? 그때까지 모아둬야지.”

 

하더니 냅다 드미트리에게 달려드는 소하였다.

잽싸게 무릎 위에 올라타는 움직임에 의자가 덜컹거렸다.

 

“훠이, 물러나시오.”

“그, 그렇지만…….”

 

그 모습에 안절부절하며 진령도 다가온다.

하지만 조금 전의 말 때문인지 뭐라고 하지 못하고 드미트리의 옷깃만을 잡을 뿐이었다.

 

“들어보시오. 저 할멈이 그대가 받은 의뢰를 망치고 싶다는군.”

“아니, 으, 그러니까… 아, 그렇지.”

 

그리고 진령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을 때는 드미트리가 완전히 지면에 드러누운 후였다.

 

“나는 좀 오래 한 곳에서 머무르고 싶도다. 그럼 드미트리의 의뢰가 최대한 늦게 끝나게 미뤄야 하지 않겠느냐?”

“대체 뭔 소리를…….”

“네가 말한 걸 반대로 하겠다는 게야. 사막에 도착하기 전에 내 힘을 최대한 빼놓겠다.”

“아니, 이 약삭빠른 할멈이…!”

 

그러더니 금세 서로를 몸으로 밀어내듯 하며 드미트리의 옷을 벗겨가기 시작하는 그녀들이었다.

 

“저기, 제 의견은요?”

“여태껏 이런 상황에 그대 의견이 통용된 적이 있었소?”

“…없었죠.”

“그럼 그대는 얌전히 세우시오. 우리가 즐겁게 해줄 터이니.”

 

드미트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가 이런 괴물 같은 존재들에게 코가 꿰였는지 원.

 

“…적어도 상냥하게 해주세요.”

 

여러분께 누누이 일러둔 바이나 이 상황에서 그는 발언권이 없다.

따라서 이 말 역시 완전히 무시당했다는 결말은 간단히 상상할 수 있으리라.

 

그의 탄식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밤의 연회는 계속되는 것이었다.

 

더욱이 여기 있는 모두가 실상 불멸에 가까운 존재인 이상 어쩌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다만 그 이야기를 전부 늘어놓았다간 아마 여러분이 먼저 흙으로 돌아가리라.

 

그러니 사냥꾼과 풍작신, 장난꾸러기 흡혈귀, 그리고 여우가 엮인 익살극은 여기서 마무리하도록 하자.

 

참으로 아쉬운 일이겠으나, 여기서 이만 작별을 고하는 게 좋겠다.

 

──여러분의 이야기꾼, 청실배는 슬슬 물러나도록 하겠다.




이걸로 이 소설은 끝.


사실 엔딩각을 어떻게 잡아야 하나 고민했음.

다시 봐도 조금 애매하긴 한데, 개인적으로 결말은 이것 말곤 없다고 생각함.

한 편 정도 더 써서 조금 더 부드럽게 할까 싶었지만 괜히 내용만 늘어질 것 같음.


그리고 언제나처럼 설정 및 후일담 정리편으로 하나 더 올라올 예정.


아무튼 여기까지 읽어줘서 다들 고마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