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일이 꼬이던 하루였다.

한창 온 정신을 집중해서 작업하던 자료는 회사 내 정전으로 인해 저장하지 않은 채 날아 가버렸고, 마찬가지로 비슷한 일을 당한 상사한테 불려가 한창 잔소리를 들었다.


자기도 작업물을 다 날려 먹었으면서, 괜히 짜증 나니까 만만한 내게 푼 것이다.

오늘도 몇 번씩 가방 안에 적기만 해둔 사직서를 만지작거리며 늘 있는 야근을 하였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창가로 스며드는 달빛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괜스레 복잡해진 마음에 한숨을 쉬고는 진행 중이던 작업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다짐했다.

어차피 내일부터는 주말이니 집에서 나머지 작업을 하면 될 것이다.

더 여기에 앉아있다간 정말로 사직서를 내버릴 거 같기에, 억지로 피곤한 몸을 움직여 사내 밖으로 걸어갔다.


사회 초년생인 내게 차가 있을 리 만무해 시계가 3시를 가리키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아직도 꺼지지 않는 여의도의 밤을 보며 집으로 걸어갔다.

아무도 없는 거리를 혼자서 걸으면 절로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다.


이런 단조로운 일상이 매일 반복되니 가끔은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색다른 경험을 해보고 싶다고 자주 생각한다.

뭐, 매일같이 회사에 잡혀 사는 내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렇게 계속 걸어가던 중, 외길 너머로 한 여성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고장이 났는지 점등을 반복하는 가로등 밑으로 가만히 서 있는 여성은 어느새 흐릿하게 변한 달빛을 받아 그 음산함을 더하고 있었다.


처음엔 늘 있는 취객이거니 했지만, 비틀거리지도 않고 똑바로 서서 날 쳐다보고 있는 게 아무래도 제정신이 바짝 든 것 같다.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 있는 듯, 가까이 가면 위험할 거라는 본능이 마구잡이로 날뛰었다.


새로운 경험을 원한다고는 했지만, 심령체험을 원한 것은 아니었는데….   

원한도 많은 귀신인지 흐느적거리며 나에게 조금씩 걸어오는 귀신과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공포영화를 볼 때마다 주인공들이 왜 그리 답답하게 행동했는지 궁금했는데, 막상 그런 상황이 내게로 오니 정말 두려움에 움직일 수 없었다.


“무...”


살아있는 신체가 아니라서일까, 언어 기관이 고장이 난 듯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걸어오는 귀신.

솔직히 너무 억울했다.

아침부터 필요한 서류를 안 챙겨서 지각하고, 작업물이 날아간 채로 상사한테 잔소리까지 들으며 야근까지 했는데.

이렇게 죽기에는 너무나도 억울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 다가오는 그녀를 밀쳐버렸다.


“폭력 멈춰!”


역시 나라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표어이기 때문일까, 소리치면서 휘두른 내 주먹은 물컹한 감촉과 함께 귀신에게 닿았다.

귀신은 맞은 부위를 움켜잡으며 그대로 넘어져 버렸다.

아니, 잠깐만 물컹…? 물컹이라니?

상대를 내려다보자 상당히 아팠는지 훌쩍이며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여성.


머릿속에서는 벌써 경찰서에서 저 여성과 정모를 한 뒤, 그대로 교도소로 들어가서 어머니께 편지를 보내는 수감자인 내가 있었다.

상식적으로 넘어져 있다면 (그것도 나로 인해서) 안부를 묻는 게 먼저겠지만, 야근과 날아간 작업으로 쌓인 스트레스는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였다.

반동으로 내 명함도 같이 떨어진 것을 눈치 못 챈 채로, 도망가듯 집으로 뛰어갔다.

정말 유난히 일이 꼬이는 하루다….



..........



하지만 문제는 시작도 하지 않고 있었다.

토요일 아침부터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에 짜증을 내며 잠에서 깼다.

남자 혼자 사는 작은 투룸이라 올 사람도, 울려댈 이유도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잘못 찾아왔다고 이불 밖으로 몸을 움직이지도 않은 채로 내뱉자, 들려온 소리는 예상했던 택배원이나 어딘가의 종교 가입 권유가 아니었다.


카랑카랑하면서 옛 된 여성의 문 좀 열어보라는 소리에 눈을 비비며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비몽사몽한 정신을 붙들고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 여성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일치의 망설임도 없이 집 안을 들어와 헤짓고 다니는 여성.

방이 두 개밖에 없어서 그런지 빠르게 위생 상태나 식재료 등을 파악하며 혼자서 만족했다는 웃음을 짓는다.


“너, 뭐야?”


“묻지마 폭력에 당한 억울한 피해자?”


그제야 기억나는 어젯밤의 기억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였다.

야근에 대한 스트레스, 한밤의 스릴러, 무엇보다 손에 닿았던 푹신했던 감촉….


“귀신!”


“누구보고 귀신이래!”


소리를 지르는 여자는 확실히 귀신이라기에 생기가 넘쳐 보였다.

짧게 자른 단발은 그녀가 말할 때마다 윤기 나게 찰랑거렸고, 오히려 당당하게 말하는 그 태도는 그녀의 성격을 짐작하기에는 충분했다.

어려 보이는 티를 감추려고 한 것인지, 과한 화장은 보기에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그녀가 여기 온 이유를 어림잡을 수 있어서 딱히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분명 어제 일에 대한 보상을 받고자 온 것이겠지.

어떻게 우리 집을 알고 주말 아침부터 찾아왔는지는 모르겠다마는 요즘 정세를 보면 나 같은 남자의 편을 들어주는 곳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솔직히 어제는 내가 잘못한 것이 맞아서 뭐라 할 말도 없었다.

단지 이죽거리는 저 특유의 표정이 너무 짜증이 났다.


“원하는 게 뭐에요?”


“존댓말로 바뀌었네?”


“하아,,,”


“한숨? 하~안~숨? 지금 누가 잘못했는지 몰라?”


“주위를 둘러봐도 알겠지만, 저 가난합니다. 손해를 갚을 돈도, 능력도 없네요.”


정말 될 데로 대라는 마음이었다.

저항할 힘도, 능력도 없는 20대 후반의 사회에 막 발을 디딘 나에게는 아무런 아군도 없었다.

심지어 어제는 내 과실이 100%였기에, 배 째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 가학적인 미소를 짓는 저 얼굴이 너무나 미웠다.

나보다 어려도 5살은 어려 보이는 것이 마치 약점을 잡았다는 듯한 저 의기양양한 표정.


“드디어 약점을 잡았어.”


“드디어라니?”


“그런 건 상관없고, 말꼬투리나 잡으면 여자한테 인기 없을걸? 그게 최고긴 하지만”


“... 본론이나 말해요”


“나 여기서 당분간 머물려고. 가출했기도 하고.”


“가출? 아니, 나이도 어린 사람이 이렇게..”


“쉿. 그래서 싫어?”


“당연히 싫죠, 애초에 당신은 저 같은 남자랑….”


“그러면 감옥 가시던가. 힘들게 들어간 회사인데, 또 잘리고 싶어?”


“또라니, 여기 위치도 그렇고 제 신상은 또 어떻게 알고 그러는 겁니까?”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나 여기서 당분간 머무른다?”


나는 수상쩍은 구석이 너무나 많은 그 여자에게 거스를 수 없었다.

이리 가나 저리 가나 내게 남은 길은 하나였다.


“언제까지 머무를 거에요.”


“글쎄, 하는 거 봐서?”


조금 둘러봤을 뿐이면서 마치 내 방의 위치를 훤히 꿰뚫고 있는 듯, 어느새 옷장에서 자기가 잘 여분의 매트를 꺼내는 그녀.

매트를 내가 자는 위치 바로 옆에 딱 붙여놓더니, 자기가 가지고 온 물건들을 배치하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내게 자기가 메고 왔던 작은 가방을 건넨다.


“뭐해? 받지 않고.”


“통성명도 하지 않은 사이인데 너무 편하게 있는 거 아니에요?”


“얀순이. 잘 부탁해 얀붕아”


“제 이름은 또 어떻게 아는 거예요….”


마치 잘 짜여진 연극처럼 나는 그녀가 말하는 데로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어제 떨어트렸던 명함을 내게 건네며 짐을 풀기 시작하는 그녀를 보고는 내 처지를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명함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을텐데. 괜히 의문점만 키우고 있다.


그런 나를 쓱 보고는 기분이 더 좋아졌는지 이제는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래서 나도 마음가짐을 바꾸기로 했다.


“나 안 무섭냐? 막말로 내가 입막음으로 널 어찌할지 모르는데?”


“이제는 말 놓기로 한 거야?”


“너보다 나이도 많으니까. 외간 남자 집에서 이러는거 알면 부모님이 속상해하실 거다.”


“나 부모님 없는데? 그리고 얀붕이면 괜찮아.”


아, 진짜 왠지 모르게 이럴 거란 예상이 들었다.

당당하게 나오는 게, 마치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을 한 듯, 내가 하는 모든 말에 대한 반박을 따박따박 하고 있다.

문제는 내가 이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자꾸 그녀에게 끌려간다는 것이다.

어느새 내 보금자리까지 들어와서는 자신의 영역까지 만들어버렸다.


나만의 공간이 침범당하니 평소에 하던 것도 괜히 눈치가 보인다.

저녁을 먹기에는 이르고, 누워서 빈둥거리자니 옆에 있는 얀순이가 신경이 쓰인다.

무엇보다 나를 계속 힐끔힐끔 쳐다보며 뭔가 말을 걸어달라는 분위기를 내는 그녀의 기대를 배신했다간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사정이나 설명해봐. 가출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거야?”


“그럼 이 상황에서 내가 뭘 하리?”


작게 파이팅 포즈를 하며 “지금부터야”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그녀에게 순간 어느 모습이 스쳐 갔지만, 지금 생각할 때가 아니라 흘려 넘겼다.


운 나쁘게, 아니 이 경우에는 좋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밤길에 그런 위협을 당해놓고 다음 날에 찾아오는 배짱은 솔직히 신기하긴 하다.

나였다면 아마 무서워서 다가오지 않았을 것 같은데 .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최악의 첫 만남이었기 때문일까, 그녀에게 하는 내 말은 평소 나의 말과는 약간 거리가 있었다,

좋게 말하면 가식 없이 말하는 거지만, 그녀에게는 싸가지 없게 들렸을 것이다.

가해자가 피해자한테 짜증을 내는 상황이니.

그런데도 그녀는 그저 배시시 웃으며 이 상황이 즐겁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궁금하다고 말해줘”


“궁금해”


“히히히. 그러면 말해줘야지”



..........




조그만 투룸의 공간에서 우리는 마주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의 경계심은 한켠으로 미뤄둔 채로, 그녀의 삶을 들었다.

안줏거리로 가져온 맥주 캔들이 산을 쌓아 갈 때쯤, 이야기의 본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뤠가지고 눼과 이롷게 고아원에서 살궤 뒌게야”


“너 취했냐?”


“아늬? 내가 이 날뫈울 올만나 귀다렸눈데에”


“내 살다 살다 맥주로 취하는 애는 처음 본다. 누구 하나 호구 잡을 날까지 기다렸다고?”   


“히히히... 오빠다”


순간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꾸욱 누르며 부르는 오빠라는 호칭에 그녀의 얼굴이 누구와 조금씩 겹쳐 보였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분명 나는 그녀와 만난 적이 있다.


“약속.. 기억하고 있어?”


“약속이라니?”


비비 꼬인 어투가 아닌 내 두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하는 그녀에 적잖이 당황했다.

어디서부터 연기를 했던 걸까?

내게 무언가를 기억하라는 제스처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피히.. 됐어”


“야, 일어나봐! 약속이라니?”


원하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이른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곯아떨어져 버렸다.

이쪽은 일어나자마자 이 여자를 상대하느라 기긴 맥진했는데 말이다.


상당히 피곤했거나 안심을 했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잠꼬대까지 해가며 묘하게 익숙한 한쪽 눈이 고장 난 파란 곰 인형이 달린 가방을 베개 삼아 자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얘는 어떻게 모르는 남자 집에서 이리 편하게 있는 걸까.


화장을 지우지도 않고 자는 그녀는 얼굴에 분칠을 한 것도 아니고 창백할 정도로 하얗게 얼굴을 칠해놓았다.

요즘 나이대 청소년들의 화장이 어느새 저렇게 변했나.

가면 갈수록 유행이 기괴해지는 것 같다.

분명 원판은 이뻐 보이는데, 화장이 전부 망쳐놓았다.


‘오빠는 저런 분칠한 여자가 뭐가 좋다고 맨날 비실거려?’


순간, 누가 내게 한 말이 떠올랐다.

내가 저런 과한 화장을 좋아했었나?

뭔가 기억이 날 것 같으면서도 안 나는 게 답답해 생각을 돌렸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이 좁은 공간에 지금 남자와 여자 단둘만이 있다는 것을.

[가출한 소녀를 꼬셔 한 방에 단 둘이...]

내일 헤드라인으로 적격이다.


분명 그녀가 나온 시설에서 찾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대학교를 1년 앞둔 시기여도 결국은 아이의 범주에 들어갈 테니.

다시 한번 곤히 자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전화기를 들어 그녀가 말했던 고아원을 검색해본다.


“이번엔 내가 찾아줄게”


“뭐라고? 언제 일어났어?”


“그러니 울지마. 이번엔 내가 찾아줄게”


“야, 일어난 거야? 뭔 잠꼬대를 그렇게 실감 나게 하냐?”


꿈속에서 헤매는 그녀의 코를 두 손으로 움켜잡고는 나도 내 할 일을 시작했다.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어차피 저 나이대의 여자들은 금방 질리리라.


이상하게 그녀를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마치 꼭 후회하게 될 것 같은 기분.

결국, 휴대폰을 내버려 두고 어제 미처 다하지 못했던 잔업이나 마무리 짓기로 했다.


아침부터 워낙 충격적인 일이 있어서 그다지 집중이 되지 않았지만, 어찌어찌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작게 코 고는 소리를 반주 삼아 차근차근 일해 나갔다.

그렇게 키보드 소리로 방이 메워질 즈음에 그녀가 일어났다.


“으음..”


“자기 전에 했던 말 기억해?”


“아니, 하나도 기억 안 나. 날 술 취하게 하고 뭔 짓을 화려한 거야. 변태!”


이제는 알 수 있다.

저 태도는 주제를 돌리려고 한다는 것이라는걸.

그녀의 태도가 눈에 보인다.


“나 약속 기억났는데”


“뭐? 정말?? 진짜로?? 빨리 말해봐!!”


역시 숨기고 있었다는 듯, 약속이라는 단어에 자리를 박차고 내게로 온다.

혹시나 해서 던져봤는데, 그대로 물 줄이야.

약간 기대를 머금은 듯, 흥분을 감추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난다.


“역시 기억하고 있었네.”


“아니, 그보다 기억나?”


“기억 안 나. 그냥 물어본 거야. 모른 척하나 해서”


“다시는 그런 장난 치지마!!”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런 말을 하는 건데!!”


“말했잖아, 기억 하나 물어보려고….”


“그러니까 하지 말라고!!”


역린을 건드린 듯, 방금 일어났으면서 작은 몸 어디서 저런 에너지가 나오는지, 막 소리를 질러댄다.

아까의 흥분된 감정은 사라지고, 정말로 상처받은 듯한 얼굴에 죄책감이 일렁인다.


“다시는, 이 일로, 장난 치지 마!”


“알겠어. 알겠으니까 진정해.”


한참을 달래 겨우 처음 만났을 때의 상태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새벽이 거의 다 돼감에도 불구하고, 씩씩거리며 나갔다 오겠다고 하였다.

아직도 삐진 건가 싶어서 농을 던져 봤지만,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가버렸다.


“가출 소녀가 가출을 또 하네”


“한번 들었던 농담은 재미없어”


“내가 언제 너랑 만났다고”


“됐어. 나갔다 올 거야”


그녀만이 알고 있는 무언가. 

그녀는 과거에 살고 있는 여자 같았다.

모든 것이 다 예전의 기준점으로부터 움직이고 있으니까.

자꾸만 과거의 무언가와 연관 짓고 있지만, 나는 알 도리가 없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를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비록 그녀가 내 일상의 침략자라고 해도.


깊은 이야기는 안 했지만, 맥주를 마시며 자신의 삶을 털어놓는 모습이 그려진다.

만 하루뿐인 만남, 그것도 대부분은 자며 보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가 자꾸만 눈에 걸렸다.


나와 비슷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그녀.

비록 방향성은 엇갈렸지만, 어딘지 그녀를 놓을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최악의 만남이었음에도.

그녀는 나와 달랐다.


“어디가. 이 밤에”


“나, 아니.. 물어봐..”


생각하는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신기한 여자다.

겉으로는 쌀쌀맞지만, 속으로는 계속 자신에게 관심을 주길 바란다.

그런 모순적인 부분은 아마도.. 


자꾸만 내 어릴적 모습과 겹친다.

나 또한 부모님을 일찍 여의어 홀로 살아가야했기에.

누구보다 강한척을 헀다.


“이야기나 더 하자.”


“내가 밉지 않아?”


“밉지, 당연히”


“민폐야?”


“알면서 왜 물어보냐”


“그래도 안 나갈 거야.”


“기대도 안 했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건 학교. 너 학교도 안 가지?” 


“가출 소녀는 안 가도 돼”


“뭐든지 일반화하지 마”


어느새 나가려던 동작을 멈추고 내 옆에 다시 앉아서 나를 바라본다.


“언제나 똑같구나”


“난 모르겠으니까 혼자만 아는 거라면 알려달라니까”


“싫어.”


“에휴.. 됐다. 배 안고파?”


“고파. 사실 나가서 먹으려 했어.”


“에휴, 무슨 여자애가 성격이 오락가락하냐. 거기 있어봐. 간단하지만 해줄게”


“내가 여기 쳐들어와서 하고 싶었던 일 중 8번째야. 얀붕이랑 같은 공간에서 밥 먹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 그만하고 상 펴고 앉아 있어. 아, 상 어디 있는지 알아?”


“응! 이미 펼쳐 놨어.”


“밥 먹으면서 학교 얘기나 하자. 잠은 여기서 잔다고 해도 학교는 가야지”


“난 상관없는데”


“이렇게 계속 계획 없이 살게?”


나도 부모 없이 자라서 저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사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알면 알수록 재밌는 소녀.


나는 왜 이렇게 그녀에게 잘해주려 하는 걸까? 그녀가 나가면 내게도 분명 좋을 일일 텐데.

아마 이때부터였는 거 같다.

이왕 그녀에게 이끌리게 된 거, 그녀를 올바른 길로 돌려놓기로 마음먹은 것은.


항상 반복되는 일에 치이며 살아가는 내게도.

항상 모든 것에 대해 추억 속에서 살아가는 그녀에게도.

서로에게 나쁜 일이 되진 않을 것이다.


“나도 아직 사회 초년생이라 뭐라 할 처지는 아니긴 한데, 역시 학교는 다니는 게 좋아”


“이미 내 목표는 이뤘는걸?”


“참으로 젊은 나이에 이뤘겠다.”


“우물우물. 밥 맛있다.”


“말 돌리지 말고. 그리고 누가 의성어 내면서 밥 먹냐?”


“이러는 편이 좀 더 귀엽지 않아?”


“귀여워서 뭐 하려고. 어쨌든 여기서 머물려면 미래 계획서를 만들어서 내게 보여줘”


“마치 내 보호자처럼 말하네?”


꺄르르 웃으며 내게 말을 하는 그녀를 보고 문득 깨달았다.

분명 그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내 일상으로 침범한 존재인데, 왜 이렇게 마음에 걸리는 건지 느낌이 온다.


자꾸만 겹쳐 보이는 누군가의 모습. 

기억이 날 것 같으면서도 나질 않는다.


“혹시 우리 만난적 있어?”


“글쎄에~? 한번 생각해보던가. 그러면 해달라는 거 들어줄게”


“나가라는 것도?”


“그건 아니지. 그게 내 목표였는데”


“호구 잡아 사는 인생은 사는게 아니라니까. 좀 더 주체적으로 살아야지”


“크큭, 나 많이 노력했는데?”


“남자 한 명 걸려라~ 하고 밤에 돌아다닌 게?”


“자꾸 이야기가 왜 그쪽으로 가! 그리고 그런거 아니거든.”


“그럼 다시 학업으로 옮기던가”


“으.. 걱정해주는게 좋으면서도 귀찮은 이 기분은 뭘까”


“얀순아. 대답”


“한 번만 더 불러줘”


“뭐를”


“히히, 이름. 듣고 싶었어”


“얀순아”


“응. 왜 불렀어?”


“학교 가라”


“얀붕이가 그토록 간절하게 부탁하면 어쩔 수 없지”


어느새 다 먹은 빈 그릇을 부엌으로 가져가며 흥얼거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항상 고요했던 몇 평짜리 공간이 이상하게 멋대로 들어온 인물로 인해 채워지고 있다.

콧노래 소리를 들으며, 조금씩 나 또한 체워진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맞다, 나 궁금한거 있는데”


“이름으로 불러주면 대답해줄게”


“얀순아, 우리 집은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명함이나 이런 거로는 알 수 없잖아”


“그것도 약속을 기억하면 알려줄게”


“보나마나 약속같은 것도 지어낸..”


“진짜야!”


설거지를 멈추고 뒤를 돌아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렇게 답답한 표정을 지을 바에야 차라리 말하는게 좋을텐데.

물줄기가 싱크대에서 떨어지는 소리만이 적막을 깨고 있다.


“진짜라고..”


그녀의 두 눈에서 닭똥같이 굵직한 물방울이 하나, 둘 씩 떨어진다.

물방울이 흐르며 화장이 가득한 피부를 씻어갔고, 그녀는 아까처럼 화를 내는 것이 아닌, 그저 서서 울고만 있었다.


조금씩 지워져가는 화장.

그 하얀 가면 속에서 서서히 들어나는 그녀의 본 모습.

상처를 감추는 그 막이 사라지자, 그제야 그녀를 어디서 봤었는지 알 수 있었다.


기억났다.

화장을 저렇게 하니 알아볼 수 없지.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살던 동네의 소녀.


당시 내가 중학생이었을떄, 그녀는 마을에서 왕따를 당하는 소녀였다.

부모님 없이 할머니와 둘이 살던 소녀를 나는 측은한 마음에 자주 챙겨줬었다.

친구가 없어 혼자 지내던 소녀는, 친구가 생기자 묶어두던 감정을 푸르는 듯, 자기 자신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기뻐, 그녀와 많은 일을 했던 기억이 있다.

모르는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많던 그녀는 이것저것 내게 가리지 않고 물어봤고, 나 또한 아는 선에서 항상 대답해주었다.

말꼬리를 늘리는 습관, 웃을 때 장난기를 숨기지 못하는 습관. 전부 그 당시의 그녀와 같다.


당시 유행하던 갸루풍을 내가 이쁘다했던 것도.

그녀의 망가진 곰인형을 내가 내가 입던 옷의 단추로 눈을 만들어 주었던 것도.

괴롭힘을 받아 울던 그녀를 내가 찾아가 달래주었던 것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홀로 살게 되어 이사를 갈때, 울면서 찾아와 꼭 찾아가줄거라며, 나에게 울지 말라하던 소녀.


"얀순이..?"


"흐윽.. 왜 자꾸 울리고 변명이야"


"나 약속 기억난거 같아"


"... 이 상황을 무마하려고 거짓말 한거면 플렌 B로 넘어갈거니까 그렇게 알아"


"웬지 별로 듣고 싶지 않는 계획인데"


"말이나 해"


"뭐가 좋다고 아직도 저 곰돌이를 달고 다니냐. 다 큰게"


"..."


"계속 말해?"


"응.."


"미안하다. 일에 채이며 사느라 잊고 있었다."


"나는 이것만 보면서 살았는데"


"그래도 최악의 접근 아니였냐?"


"그야 오빠가 일 끝날때마다 찾아가도 모른척 넘어가서 밤에 찾아간거야"


"귀신인줄 알았다."


"덕분에 여기 머무를 수 있게 됐지만"


"그냥 말만 했어도 들여줄텐데. 뭐이리 복잡한 방법을 썼어"


"오빠의 약점이 필요해서?"


"남의 약점을 잡아서 뭐하게.. 나 돈 없다~"


"그런게 있어. 최악의 경우는 기억 못 할거라 생각했으니까 강제로라도 들어와야지. 물론 진짜 기억 못하는걸 보니 조금 슬프더라"


"아까 살아온 이야기 말 할 때도 조금씩 바꾼 이유가 그거구나"


"응. 내가 말해서는 의미 없으니까"


"에휴, 예전부터 이어진 똥고집은 여전하구나"


"히히, 그래도 기억해주니까 너무 좋은거 있지?"


"그럼 약속도 기억했는데 아까 내가 물어봤던 내 집 알아낸 방법 알려줘"


"베- 직접 알아보시지"


눈가를 팔로 비비고는 혀를 내밀며 한쪽 눈으로 윙크를 보내는 얀순이에게 헛웃음을 지어 보인다.


만 24시간도 안지난 사건들.

이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어쩐지 이 소녀와 함께라면 꽤 재밌는 일상이 될 것같은 기분이 든다.


"오빠, 보고 싶었어!"


그녀가 내게로 달려와 안긴다.

기필코 그녀를 사회로 환원시키리라.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웃음과 함께 그녀를 보는 나를 한쪽 눈이 고장난 곰인형이 반짝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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