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부터 여기까지. 전부 과제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해낼거라는 것을 믿고 있어요."


"시발 믿고 있으면 내지를 말던가. 지 수업만 듣는 줄 아나"


만우절은 이틀 전이였는데, 양심도 없게 오늘도 과제를 와장창 내는 교수.

하지만 평범한 대학생인 나는 그걸 거절할 도리가 없다.


내가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도 아니고 자퇴할 이유도, 동기도 없기에 꾸역꾸역 지루한 강의를 들어간다.

유투브나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다른 사람들의 일탈과 모험을 보며 동경하기만 하는 나날.


이렇게 살다 사회에 나가게 되면 남들과 똑같이 개성은 없어지고, 톱니바퀴가 되어 굴러갈 뿐인 인생이 되겠지.

알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이 현실이 너무나도 괴롭다.

다 버리고 떠나고 싶다고 매일같이 말하면서도 이 굴레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집에 도착했어도 투덜거림은 계속된다.

과제를 하다가 모르면 질문하라면서 전부 다 모르게 내버린다.

심지어 질문을 하면 어떻게 이것도 모르냐고 어투로 말하는 교수.


열심히 해 제출한 과제의 점수는 처참했다.

이제는 정말 이세계 전이가 아니면 답이 없다.

트럭 아저씨, 제발 내게도 기회를...!


이런 시덥잖은 생각이나 하며 하루를 보내는 나는 평범한 대학생이다.

영웅이 되길 꿈꾸지만 나설 용기도, 능력도 없는 일반인 1.

그런 내게 지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다.


눈 앞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는 마법진.

처음보는 글자들이 입체적으로 빙글빙글 돌며 뿌연 연기가 진을 중심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다.

마치 만화나 영화에서나 보던 광경에 멈춰있던 심장이 다시 뛰는 느낌을 받았다.


평소와 같이 과제를 하다가 게임으로 바꿔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중, 갑자기 방 한복판에 마법진이 나타났다.

마치 나를 콕 집어서 지목하는 듯한 이 느낌에 온 몸이 떨려왔다.


그동안 나를 키워준 아버지, 어머니!

소자, 이세계에서 성공 후 돌아오겠습니다!

솔직히 이건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나도 영화에 나오는 영웅들처럼 멋있고, 새로운 나로 바뀔 수 있을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마법진에 발을 딛뎠다.

용사 얀붕이, 출발이다!


시야가 회전함과 동시에 날아다니던 문자열들이 내 몸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배꼽 부분에서 간지러운 느낌과 함께 느껴지는 개운함.


나는 내가 어떤 능력을 얻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무슨 능력일까?

나도 이제 이야기 속 용사로...!!


새로운 다짐과 설렘으로 눈을 뜨자마자 나는 내가 좆됐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으스스한 분위기의 빽빽한 나무들로 둘러쌓인 숲은 아무리봐도 초보자 마을이 아니였고, 그 나무들 위로 까마귀 가면을 쓴 사람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까 전 느꼈던 힘은 무슨, 각인된 문장에서는 내가 무언가랑 이어져있다는 느낌만 줄 뿐, 아무런 능력도, 기회도 주지 않았다.


머릿속에 든 생각은 단 한가지.

그것은 설렘도, 기대도 아닌 위험이였다.

풀린 다리에 힘이 돌아오자마자 손살같이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내가 움직이자마자, 뛰는 나를 까마귀 가면들이 쫓아오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묵묵히 쫓아오는 그들이 무서워 최대한 반대편으로 달렸다.


나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채 계속해서 달리는 까마귀 때들.

점점 깊은 숲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도 내게는 방법이 없었다.

마법진에 발을 디디는게 아니였다.

그냥 하던 과제나 마무리 지을껄.


등에 땀이 가득 찬다. 서서히 지쳐간다.

나는 운동도 안했던 대학생이었기에, 결국 풀뿌리에 걸려 넘어져버렸다.

넘어지는 순간 나를 까마귀들이 둘러싸는 것을 보았고, 그대로 정신을 잃게 되었다.



..........



"일어났어?"


불편한 마음에 몸을 뒤척여 위치를 고정하려 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두운 방안.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아 그저 내가 감금됐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었다.


"누, 누구야!"


"와아-! 소환 성공이네! 딱 내가 그렸던 사람이 왔어!"


"나,나는 요..요..용사라고! 내가 여기 이러고 있으면 세,세상이.."


"응? 얀붕이 그런 플레이를 원하는 거야? 그러면 내가 마왕해줄까?"


"흐,흐윽.. 여기 어디야.."


"어,어? 얀붕아. 왜 울어"


마법진에 뛰어드는게 아니였다.

내 주제에 모험은 무슨.

점차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앞의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땀 뭍은 내 윗도리를 입은채로 싱글거리며 웃고 있는 검은 머리의 여자와 그 뒤를 둘러싼 아까의 까마귀 가면들.

나는 이상한 의자에 묶인 채로,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어머니의 밥이 그리워져 눈물이 마구잡이로 나오기 시작했다.

한번 터진 눈물은 멈출 기새가 안보였고, 납치범 또한 당황했는지, 손을 흔들며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일단은 내 생존이 먼저이기에, 나는 최대한 어벙한척 계속해서 울었다.

그녀가 당황할 줄 몰랐기에, 기회로 여겼다.


인간은 극한에서 성장한다 했던가.

짧은 시간 내에 주위를 둘러봐 내가 도망갈 길을 찾았다.

그녀가 틈을 보이는 순간, 도망부터 가야한다.


"응? 얀붕이 도망 못가는데?"


계획을 짜던 나에게 당황해하던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얀붕이 나랑 사역마 계약이 된거라 도망 못 가. 애초에 어느 사역마가 주인에게서 도망가려고 하니?"


"생각을 읽는거야?"


"물론. 나는 네 주인님인걸? 평생에 한 번밖에 소환할 수 없는 사역마라 나는 내 취향의 남자를 필터로 걸었거든. 결과는 대만족! 얀붕아, 나 너에게 반한거 같아"


"그,그럼 풀어주면 안될까?"


"어차피 풀어줘도 도망 못 가는데? 네가 생각하는 모든건 이뤄질 수 없어."


절망적이었다.

멍청하게 설레발로 들어와서는 꼼짝없이 잡히게 생겼다.


"걱정마. 얀붕이가 내 말만 잘 들어준다면 최대한 자유롭게 해줄게"


"저,정말..?"


"물론이지! 나는 내 애인한테는 한없이 관대한걸?"


"그럼 빨리 요구를 말해줘! 나 돌아가고 싶어!"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녀는 나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내가 납치된 상태, 그 뿐이 아니라 저 까마귀 가면들이 나를 쳡다보고 있는 상태가 아니였다면 반했을만한 미소.


"저주를 걸건데 이건 네 동의가 필요해. 걸려줄래? 딱 3가지만 걸려주면 돼!"


저주.

단어만 들어도 피하고 싶다.

하지만 거절하는 순간 내 자유를 뺏어버린다 단언하는 그녀에게 나는 승낙할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끝까지 거절한다해도 결국은 하게 될거란 그녀의 압박도 있었다.


"첫번째 저주는 나 의외의 모든 생명체와 소통이 불가해지는 저주야! 아, 특별히 부모님은 허락해줄게"


티끌 없이 빛나는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저주의 내용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두번째 저주는 나랑 붙어있을 수록 내게 빠져드는 술식이야! 물론 얀붕이 곁에는 내가 항상 있을거니까, 언젠가는 임계점에 다다르겠지?"


역시 타인의 감정이나 행동을 속박하는건 동의가 필요해서 까다롭다며 투덜대는 그녀가 이제는 미소녀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마녀다.

그것도 나를 노리고 있는...


"마지막 저주는 너의 모든 것을 나와, 내 모든 것을 너에게 서로를 공유하는 술식이야! 이러면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우리는 서로를 느끼고 알 수 있어!!"


"저,절대 싫어.. 아니, 싫어요.. 제발 저를 그냥 보내주세요.."


울음이 나왔다.

내 안의 무언가가 자꾸만 변하는 기분이다.

저 3가지를 수용하는 순간 분명 나는 이상해질 것이다.


"흐윽.. 흐읍... 제발.."


"얀붕이, 이거 승낙 안하면 얀붕이 주위의 모든 것을 부셔버릴거아? 얀붕이 혼자만 남을 수 있도록. 얀붕이가 아끼는 모든 것들을 망가트려서 결국엔 나만 남게 할거야?"


"흐윽.."


"빨리 동의해. 마지막으로 말하는거야. 다음은 바로 행동으로 옮길거니까."


급속도로 냉정해진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고, 정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와 그 뒤에 가만히 말 없이 서있는 까마귀 가면들이 너무 무서웠다.


"좋아! 그럼 시작한다!"


그녀가 입으로 손을 물어 뜯어 피를 내고는 내 입으로 그 손가락을 집어넣는다.

내 구강을 헤집는 손가락은 이빨 하나하나를 눌러주며 혀를 만지작 거렸고, 그녀는 황홀한 표정과 함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릿속에서 그녀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얀붕아사랑해얀붕이너무멋지다얀붕이먹고싶다얀붕이너무좋아어쩌면좋지주체할수가없어얀붕아얀붕아얀붕아]


"이,이게 뭐야!"


"아.. 내 생각이 흘러들어가나보네.. 너무 좋다.."


몸을 부르르 떨며 그녀는 계속해서 술식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내게 나타난 변화는 그녀가 더 이상 괴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그녀를 바라볼 수록 그녀의 대한 마음이 변해간다.


"흐윽.. 내 마음을.. 흑.. 멋대로 바꾸지 말아줘.. 흐윽.."


내가 눈물을 보이자, 다시 술식을 멈추고는 다리를 구부려 나와 눈을 맞춘다.

걱정이 담긴 그녀의 얼굴에 희망이 보이는 순간, 그녀의 분홍빛 입술이 열렸다.








"싫.어"






아...










그녀가 너무 좋다.

그녀에게서 나는 향기를 놓치기 싫다.

빨간빛을 내뿜는 눈동자도, 손가락에 맺힌 내 침을 핥는 저 행위도.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


자꾸만 두근대는 내 가슴이 그녀에게 전해졌으면 한다.

내 마음을 그녀가 알아줘서 당장이라도 그녀와 함께하고 싶다.


얀순이.

그녀에게서 직접 이름을 듣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다.

그녀는 얀순이. 까마귀들의 왕.

그리고.. 내 하나뿐인 반려.


[얀붕아, 들려?]


"응. 내 사랑. 너무나도 잘 들려. 너의 목소리가 참 좋다."


"사랑해"


"나도 너무 사랑해"


뭔가 공허한 느낌이 들지만 무슨 상관이 있으랴.

나는 얀순이만 있으면 된다.

그녀만이 내 유일한 이해자이며 동반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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