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시화형 오랜만에 봐도 잘생겼더라.


능글거리는 동생놈에게 상냥한 목소리가 나올리 없었다.


"형 친구가 찾아왔으면 나한테 연락해주는게 정상 아니냐 인마?"

-뭐 어때, 시화형이잖아.


이 자식아 형이 아니라고. 혼란스런 현 상황은 미뤄두고, 옛 친구가 나를 찾아오게 된 원흉을 알았으니 나중에 집에가면 보자.


동생놈 전화를 끊고, 곧이어 입에서 한숨이 슬쩍 흘러나온다.


이시화.

중학교, 고등학교 장장 6년동안 사귄 내 절친.

내가 군대에 가기 전까지는 연락이 됐었던것 같은데, 일신상의 이유로 내 전화번호도 바뀌고, 시화쪽은 연예계로 들어서며 개인 전화가 없다시피하며 연락이 끝어졌었다.


연락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였지만, 굳이 잘나가고 있는 녀석에게 치근덕거린다는 소리도 듣기 싫었고...친구였던 녀식이 나랑 이렇게 차이가 나버리면 굳이 내 덜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도 있었겠지.


수컷의 마지막 자존심이라는 녀석. 이렇게 보잘것 없는 녀석이였던가.

알바시간이 남았다는 핑계로 주변 카페로 보내놓은 녀석을 만나야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게 조금 꺼려지기도 하고, 기껍기도 하니 기분이 오묘할따름...


아니 그 녀석 남자아니였어? 나만 몰랐나? 그 녀석 교복도 남학생 교복에 수학여행때도 나랑 같은 방이였고 출석번호도 남자였다고? 아니지 동생놈도 형이라고 부르는거 보면 남이 보기에도 남자같았다는건데 이제와서 여자...


문득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되짚어보면 여느 남자애들하고 다른 점이 있긴 했지...젖는거 싫어하고, 맨살보이는 것도 싫어하고...

내가 장난삼아 징그럽게 몸을 주물럭거리면 질색하기도 했고...


아, 세상이 노랗다.



-파트너, 기분이 좋아보이네.

"기한이 반응이 재밌었거든. 그 녀석, 은근히 리액션이 크다니까."


여성의 형상을 한 시화를 본 기한의 반응은 무슨 만화에나 나올법한 야단법석이였다. 그 모습을 다시 떠올리니 다시금 웃음이 새어나오나 싶더니,


-그건 그렇고 아까 그 이상한 남자는 어떻게 한거야?

"누구?"

-그, 술취한거같은 아저씨.


이어지는 아이리스의 말에 시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호선을 그었던 입가가 다시금 내려앉으며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한이 몸에 손을 댔는데 그냥 보낼 수는 없잖아. 팔을 날렸어."

-...팔을 날리는 환상을 보여준거 맞지?

"실제로 하면 그거 치우는게 누구겠어."

-이제 나도 모르게 그 정도는 우습게 할 수 있게 됐구나...감회가 새롭네.


파트너의 떨떠름한 목소리가 들리는지 아닌지 다시금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린 시화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깜짝 놀랐겠지. 그에게 나는 남자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을거다. 이 쓸데없이 날씬한 몸에서 여성적인 융기를 찾아볼 수는 없었을테니까. 그나마의 차이도 두껍고 큰 옷으로 가렸으니 모를만도 했다.


그래도 그렇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을건 뭐람. 그러고도 한참을 얼빠진 소리밖에 못내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그래, 넌 언제나 유쾌했어. 나랑은 다르게, 언제나 너는...


"기,기다렸지? 미안해."

"아냐, 금방왔네."


아이스커피 하나를 손에 든 채 맞은 편에 앉은 익숙한 얼굴이 시선을 피한다. 그것을 알아챈 시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진기한, 왜 눈피해?"

"그런적 없는데."

"맞잖아, 지금도 괜히 테이블만 보고있잖아?"


이제와서 너무 예쁘다던가하는 이유는 아닐터다. 진기한도, 이시화도 고등학생때와 그다지 다를바 없는 얼굴이였다.

뭐, 기한의 경우에는 군대에서 세월의 풍파를 직격으로 맞고 아이같은 얼굴은 사라졌지만.


시화의 말을 들은 기한은 잠시 머뭇하는가 싶더니, 이내 슬쩍 시선을 내리깔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저기...오랜만이네?"

"음, 그러네. 얼굴본건 너 군대가기 직전이 마지막이였나?"

"그랬나...? 4년전?"

"정확히는 3년 10개월 17일 16시간 전이지."

"...응?"

"아, 어플이야 어플."


그렇게 말하며 스마트폰 화면을 쓱 들어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기한은 떨떠름하게 웃었다.

애초에 4년전에 친구랑 만난 날이 아직까지 D-DAY로 지정되어있다는게 이상한 거라는걸 알아차리진 못하고.


"흠흠, 그래서...무슨 일이야? 이렇게 오랜만에, 갑자기."

"놀러왔지. 기선이한테 들었어, 너 여기서 알바한다고."

"그래, 나도 전화해서 자초지종은 들었어...후."


거기까지 말한 기한은 아이스커피를 쭉 들이키고, 뭔가를 다짐한듯 말했다.


"그, 수술한거야?"

"...어?"


몸의 피가 전부 빠져나가는 느낌이였다..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그걸 기한이 어떻게. 숨겼는데, 분명히 숨기고, 아무도 모르게, 알만한 사람의 입은 전부 막았어. 그런데 그걸 어떻게...


그리고 이어지는 기한의 말에, 시화는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언제부터 여자였던건데?"

"...혹시 성전환 수술 이야기하는거야?"

"아,아니야?"


이번엔 기한이 잔뜩 당황하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편의점에서 생각했던 결론인 성전환 수술이 아니라면? 그럼 내가 지금까지 친구에게 했다고 생각한 장난이 전부...


"자,잘못했습니다. 뭐든지 할테니 고소만은...!"

"...뭐라는거야 멍청아."

"유,유명세와 권력을 얻은 옛 친구가 학창시절에 당한 폭력과 부조리를 갚아주기 위해 온게 아니야?"

"너 바보야?"


폭력과 부조리라니, 그 시절을 그렇게 흉흉한 단어로 언급하고 싶지 않았던 시화의 미간이 살짝 구겨짐과 동시에,


"자,잘못했습니다! 일단 뭔지 모르겠지만 내가 잘못한거지?! 제발 자비를...! 시화야,아니 시화님!"

"아, 변함없는 네 모습을 보니 편해지네. 너는 그대로구나. 다행이야."

"그,그 말은 내가 아직까지 반성의 기미가 없다는거지? 무릎,무릎꿇을까?!"

"그만해 멍청아. 그런거 아니야."


가볍게 웃으며 손사래 치는 모습에 정말인가 싶어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던 기한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는 시화의 모습에 비로소 의자위에 축 늘어지며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난 또, 학교폭력 고발이나 미투같은건줄 알았지..."

"...너 그런거 했어?"

"아니, 안했지. 안했다고 생각했는데...네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니까 별생각이 다 나더라."

"그런 모습이라니."

"이시화, 너 원래 여자였던거야?"


웃음기 빠진 그 진지한 얼굴에, 시화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걸 이제 알았어, 바보야?"

"세상에 맙소사..."


곧바로 세상잃은 표정으로 변하는 그의 모습에 오늘 몇번째로 웃음을 터뜨리는지.

원래 이런 녀석이였다. 한없이 둔감하면서도, 어딘가에서 눈치는 빠른. 그래서 더 속이기 힘들고 괴로웠던.


이제 그럴 필요는 없다. 비로소 출발선에 섰으니까, 빠르게 뛰어나가기만 하면 돼.


"그 얘기는 차차하고, 이후에 할 일 있어?"

"아니, 집에가서 자야지. 야간 알바가 할게 뭐있겠냐."

"집이라, 자취한다고 들었는데."

"작은 단칸방이야."

"가자."

"...응?"

"치킨 좋아하지? 이따 저녁에 치킨사줄게."


그렇게 말한 시화가 활짝 웃으며 덧붙였다.


"1인 1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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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기한과 이시화의 학창시절은 다사다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