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하다. 어설프게 묶인 손목은 차라리 꽉 묶었으면 싶을 정도라 거친 줄에 쓸려 손목이 아팠고, 다리는 멀쩡하게 뒀다. 안대는 묘하게 널널해서 콧대 사이로 내 다리가 보였다. 참 어설픈 납치범이다 싶었다. 대체 어떻게 구한 약인지 골목길에서 손수건을 입에 대 재운 것까지는 좋았는데 왜 결박은 이렇게 어설픈가 싶었다.

 이젠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운전이 어설퍼서 너무 덜컹거리고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엷은 욕설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괜히 반항했다가 죽으면 곤란하다. 아직 해보고 싶은 게 많아서, 죽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어설픈 납치범이어도 흉기 하나 안 들고 있을 것 같진 않으니까.

"낯선 천장이다."

 눈을 감았다가 낯선 곳에서 뜨면 하고 싶었던 대사 중 첫 손가락에 드는 위대한 대사를 치고 몸을 일으키다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시 눕혀졌다. 짓눌린 목젖이 욱신거렸다. 손에서 서늘한 무쇠의 냉기가 느껴졌다. 족쇄 비슷한 것을 목에 걸어놓은 듯 했다. 아주 빌어먹을 납치범이었다.

"일어났네?"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들리니 키가 꽤 큰 여성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보다 조금 더 커 보였다. 앞머리는 남기고 중간 정도 올린 포니테일이 목덜미 너머에서 살랑거렸다. 녹빛 눈이 나를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평범한 옷차림이었다. 뉴스는 틀리지 않았다. 범죄자는 나쁜 인상이 아니고 평범한 인상의 사람이었다.

"저는 돈도 없는데…"

"걱정마! 돈 때문은 아니니까."

 어...음.... 그럼 뭐지? 혼자 사슬이 팽팽해지지 않게 주의하면서 일어났다. 아직도 목젖이 욱신거려서 기침이 나왔다. 건드리면 아플 것 같아서 손도 무의식적으로 올리지 않게 주의했다. 납치범은 천천히 내게 걸어와 발치에 앉았다.

"너는 날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네. 괜찮아. 당연한 일이니까. 스쳐지나간 인연은 스쳐지나가는 기억 속에 담기는 거잖아."

 연극이나 소설에서 나올 법한 말투였다. 의미가 꾹꾹 눌러담겨서는 아련한 말들.

"납치범 치고는 말하는 게 예쁘시네요."

"고마워. 친구들한테는 핀잔만 듣었지만. 너무 연극투라나."

"감수성이 부족한 친구분들이네요."

"괜찮아. 너한테 듣는 칭찬만으로도 몇 배는 기분 좋은 것 같거든."

 최대한 납치범의 비위를 맞추어야 한다. 어디서 들었더라. 아마 어느 소설책이었을 것이다. 저런 말투를 좋아하는 것도 있고, 소설책에서도 항상 저런 말투의 인물을 사랑하게 됐지만, 일부러 담은 칭찬이었다.

"왜 저를 이리로 데려오신 거예요?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돈도 없고, 어떤 중요한 사람도 아닌걸요."

 일부러 단어를 순하게 바꿨다. 납치라는 단어가 범인을 자극할까 봐 두려웠다. 흐릿하게 말이 떨렸지만, 납치범이 인식하지 못하길 바랬다.

"네게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네?"

"아무것도 하지 마. 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게임? 하게 해 줄게. 나랑 함께 한다고 약속만 하면 돼. 먹고 싶은 것? 다 먹게 해 줄게. 운동? 이곳을 헬스장처럼 꾸며 줄 수도 있어. 나랑 같이 운동하자."

 그녀의 얼굴에 행복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납치당할 때 당한 약 탓일까. 그녀의 주변에 꽃이 피는 것 같았다.

"돈은 걱정하지 마. 나는 돈이 많아. 많은 일을 했고, 많은 돈을 벌었어. 지금도 숫자가 올라가는 중이야."

"저에게, 저에게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알려줄 수 있어요?"

"아니, 못 알려줘. 왜냐면..."

 부끄럽잖아...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숨겼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친년이다. 완전히 돌았다. 돌아갈 이유도 없지만 빠져나가고 싶었다. 여기 있다간 내가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마 정조를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소름이 올라왔다. 나는 존나 순붕이었기 때문에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그딴 생각을 하자 토할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악마가 속삭였다. 언젠가 저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그럴리가 없다. 납치범하고 무슨 이유로?

 며칠이나 지났나? 아니면 몇 달? 시간 감각이 해와 달을 따르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갔다. 그녀는 정말 나와 함께 있었다. 문은 잠겼고 창문은 창살로 막혀 있었다. 밥을 함께 먹었고, 시답잖은 말을 했다. 함께 운동을 했다. 그녀는 운동을 잘했다. 진짜 존나 잘했다. 문을 따려다가 제압당해서 한동안 어설프게 사지가 묶인 채로 밥을 받아먹었다. 먹여주는 그녀의 얼굴은 행복에 가득 차 있었다. 사지가 묶인 동안은 혼자 씻을 수 없어서 그녀가 씻겨주었다. 빌어먹게 부끄러워서 혀를 깨물 뻔 했다. 게임도 함께 했다. 그녀는 게임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처음에 좀 헤매더니 금세 나를 따라잡았다. 그동안 그녀는 단 한번도 나에게 요구한 적 없었다. 단 한번도.

"왜, 왜 저한테 이런 걸 하는 거에요?"

"응?"

 어느 날,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아침을 먹을 때였나, 점심을 먹을 때였나. 최소한 이런 말을 하기에는 좋지 않은 때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가 웃으며 답했다.

"좋아해서."

"좋아해서요...?"

"응, 좋아. 그래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네가 나를 좋아하게 되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함께하다보면 언젠가 네가 날 좋아하게 될 것 같아서."

"왜요...? 당신은 저를 강제로 어떻게든 할 수 있잖아요."

"그래선 의미가 없어. 내가 원하는 건 네 마음이야. 몸 따위는 의미가 없어."

"순애보네요."

"응, 그렇지? 나도 내가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어. 너를 좋아하니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조용했다. 먹던 것도 멈추고 초록빛 달을 휘며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보다, 문득 가슴이 조이는 것 같았다.

"점심, 고마워요."

"응,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워."

 작은 규칙이었다. 자포자기하고 그저 그녀가 해주는 것에 감사할 무렵에 말해봤던 작은 말과 그녀의 대답이 이제는 그 자리에 못박혀 시간에 다리를 걸어댔다.

"저, 게임할 건데. 설거지 도와줄 테니까 같이 할래요?"

"좋아."

 한명 반 정도 들어가는 싱크대에 함께 들어가 함께 설거지를 하다 보면 어깨가 부딪힌다. 고무장갑 너머로 손이 맞닿을 때도 있다. 그때마다 조여오는 가슴을 나는 그냥 넘겼다. 아마 바깥을 보지 못해서 생긴 답답함이라고 치부하면서.

 이젠 일상이 되어버린 감금 생활 안에서 나는 건강하고, 꽤 나쁘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운동을 자주 함께 해서 몸은 오히려 더 좋아졌고, 활동 범위의 제약 이외에는 아무런 걱정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계속 가슴이 조였다. 게임을 할 때, 집중하는 그녀의 옆모습을 보면서. 함께 설거지를 하며 맞닿는 어깨를 의식하며, 그녀가 나를 보며 고개를 기울이고 웃을 때면 계속 가슴이 조였다. 아팠다. 참을 수 없는 어떤 것이 응어리졌다.

 그녀는 잘 때, 내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내 목에 쇠로 된 목줄을 걸어놓고 또다른 침대를 두었다. 납치당한 사람이다 보니 돌발행동을 우려한 걸까. 미묘하게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똑바로 누워서 자는 법이 없었다. 항상 내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눕지 않고 베개에 앉아 속삭였다. 그녀에게 들리지 않도록. 내게만 들리도록. 하지만 분명하게.

"좋아해요."

 가슴이 시원하다. 조여진 가슴이 풀어지고, 가슴이 살아 숨쉬듯 두근거린다. 열이 올라 얼굴이 뜨겁다. 속삭일 때마다 더 그런 것 같았다.

"좋아해요. 좋아해. 사랑해요."

 이것도 이젠 일상이었다. 며칠 전에, 자각하고 나서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이 아파서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가 듣지 않기를 바랐다. 사람 중에는 어떤 목표를 달성했다고 느끼면 더 이상 그것이나 그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그런 사람이 아니길 바라고, 아닐 것 같지만 그래도, 그래도...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천장에 흐릿하게 지나가는 먼지를 보다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저 옆에 그녀가 있다는 것 만으로도 눈을 감는 게 쉽지 않았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녀가 뒤척이나 싶었다. 발소리가 들렸다.

"정말로?"

 숨소리, 말소리. 그녀의 목소리. 내 귓가를 멤도는 소리가 갑작스러웠다. 나는 눈을 떴다. 그녀가 내 위에 엎드려 있었다. 눈이 맞았다. 초록빛이 달빛을 받는지 투명했다. 발그레한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부끄러웠다. 밤에, 그녀가 잠들었다고 속삭인 모든 것이 부끄러운 일이었다.

"날 좋아해?"

"...."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성취감에 나를 놓아버릴까, 내게 흥미를 잃을까."

"다 들었어. 좋아한다고 속삭였잖아. 내게. 날 좋아해?"

"읏..."

"한번만 다시 말해줘.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좋아해요... 좋아한다구요...."

 그녀가 웃었다. 달을 닮은 초록빛이 초승달로 삭아들었다. 흐릿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부드러웠다.

"응, 나도 좋아해."

 입술이 입술에 맞닿는다. 누가 다가갔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달빛 아래 입을 맞췄다.



순애챈에서 퍼왔고, 허락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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