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따까리!"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가방을 들쳐매던 수혁의 어깨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무언가 붙잡을 새도 없이 의자가 넘어가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뒤로 자빠진 수혁.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깔깔거리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한껏 망가진 그의 머릿속을 더 헝클어놓았다.


"으윽..."

뒤로 넘어질 때 바닥에 부딪힌 팔뒤꿈치가 깨진 것만 같다.

쓰라린 팔을 손으로 감싸쥐자 전기가 아닌 번개가 내리치듯 찌릭거리는 감각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온다.


하지만 소리는 낼 수 없다. 그랬다가는 학교를 나서자마자 시작될 지옥을 조금이나마 늦출 기회조차 사라진다.

그렇게 가슴 속에 꾹꾹 눌러담는 고통과 상처고름 속에서, 그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진다.


왜 이렇게 됐을까.


분명 이렇지 않았는데.


그녀도 이렇지 않았고,


나도 이렇지 않았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내가 잘못한 걸까.


평생 떨쳐내지 못할 것만 같이 무겁게 가슴을 짓누르는 질문에도 이제는 질려버렸다.

이미 바뀐 지 오래인 둘의 관계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자신뿐이라는 생각에, 무언가 울컥 올라오려는 것을 힘겹게 다시 안으로 삼킨다.


"뭐해, 빨리 안 일어나?"

"빨리 가방 들고 따라와."


앙칼진 목소리가 웃음을 그치고 바락 소리를 내지른다.

팔에 흐르던 전류가 단숨에 머리를 통과하듯 몸이 순식간에 바들바들거렸다.


떨리는 손으로 발에 걸려있는 가방끈을 가까스로 빼내고, 부자연스러운 자세를 고치며 다급히 그녀의 가방을 받아든다.

그를 향해 수군거리는 소리가 마치 공명처럼 머릿속에서 울린다. 그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으... 응..."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가까스로 대답하자 그녀가 몸을 홱 돌려 제 갈 길을 걸어갔다. 

더벅머리가 눈까지 내려올 듯한, 하지만 그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꽤나 맑고 단아한 그가 살짝 튿어진 와이셔츠 팔꿈치를 매만졌다.

피가 찰랑거리는 피부를 손끝으로 연신 찍어누르자 흰 셔츠자락에 핏자국이 남았다.


"어떡해... 진짜 불쌍하다..."

"아니... 쟤는 맨날 수혁이한테만 그런대? 아무리 막나가는 애라도 그렇지, 하루이틀도 아니고..."

"야, 조용히 해, 잘못하다가 우리까지 걸릴라...!"

"걸리면 뭐, 걸려도 저 년은 쟤한테 다 화풀이할걸..."


다른 사람의 말소리인지 그의 바람이 담긴 환청인지 분간이 가지를 않았다. 

머릿속 어딘가가 망가진 듯, 쉼없이 웅웅거리는 속삭임 때문에 시야가 핑 돌았다.


이름 모를 친구에게 건네받은 말의 속에 담긴 악의 없는 연민.

그로 미루어보아도 그가 조금이라도 정상적인 학교 생활을 했다면 꽤나 수수하게 인기 많은 남학생으로 거듭났으리라.


하지만 그것도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저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던 간에, 그들도 이 마수에서 그를 구할 수는 없을 테니.


시도때도없이 지끈거리는 옆머리를 손바닥 아랫부분으로 짓눌렀다.

폭력이 시작되고서부터 약간씩은 아팠지만, 요즘따라 유난히 더 심해지고, 또 심해졌다.

'하... 오늘은 타이레놀 한 알로는 안 될 것 같은데...'

바지 주머니에서 달그락거리는 알약통을 매만지며 그가 잠시 무릎을 짚고 서 있었다.


"연수혁, 안 나와?"


불같이 화를 내던 불꽃이 고온에서 푸른빛으로 바뀌듯,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워진 말투.

기다리던 그녀가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뜻이었다.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어느새 교실을 나서는 옛 친구를 따라 옮기는 발걸음.

그에게 이 교실은, 지옥과도 같은 공간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발랄하게 찰랑거리는 머릿결이 끝없이 그의 시야에 어른거렸다.

눈이라도 마주칠라면 순식간에 그를 향해 날아오는 주먹에, 그는 몸을 떨며 시선을 바닥에 처박을 수밖에 없었다.

타박타박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발뒤꿈치가 유일한 이정표라도 된 것마냥, 그는 그곳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슬리퍼 뒤꿈치에는, 답지 않게 앙증맞은 글씨체로 꾸깃꾸깃 새겨넣은 그녀의 이름이 있었다.


이설아.


이 이름을 힘들게 박아넣어줄 때만 해도 그녀는 그에게 웃어주었던 것 같다.

이제는 흐릿해져 어떻게 그녀가 순수히 웃어주었는지도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어릴 적부터의 소꿉친구가 그에게 짓는 표정은 이제 딱 세 가지였다.


짜증과 화가 뒤섞인 기본 표정.

그가 고통스러워할 때 그를 보는 악마같은 미소.

그리고 수혁이 가장 두려워하는, 어딘가 텅 빈 듯한 눈빛.


"연수혁."

설아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은 그의 이름이 아니었다.

인간 그 이하, 어떤 무생물을 부르듯 튀어나온 그 명칭은 그녀에게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게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이 텅 빈 복도 이곳저곳을 걸어가는 그녀가 마침내 어떤 작은 교실의 문을 열었다.

"들어와."

어딘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그녀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순간의 후환이 두려웠기에, 그의 동선은 교문에서 교실로 향하는 길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위화감이 들 정도의 상냥함이 있었다.

마치 아주 재미있는 먹잇감을 발견했을 때의... 그런 다정함.

그 먹잇감이 누구인지를 직감한 지 오래인 수혁의 팔꿈치는 아까보다도 쓰라렸다.


"...무슨 일이야."

고개는 여전히 바닥을 향한 채, 그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러자 눈 깜짝할 새 그의 머리에 세게 부딪히고 바닥에 떨어지는 책 한 권.

차라락 넘어가던 책장이 깔끔하게 접힌 페이지에 마법처럼 딱 멈추었다.


<최면 시전법>


"푸흡, 파하하하하....!"

다른 아이들 앞에서 참고 있었던 게 분명한 웃음소리가 탄산처럼 터져나왔다.

그에 반해 수혁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우리 따까리, 얼마나 살기가 힘들었으면은 이런 잡것까지 뒤져가면서 발악했을까아?"


발뺌하려 해도, 그 책 중간중간에 적힌 글씨들은 열혈독자의 그것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글씨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가장 큰 글씨로 쓰인 문장.


제발 이 지옥이 끝났으면 좋겠다.


"후후... 수혁아."

"...응."

"넌 네가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거야? 응? 진심으로?"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 외에는 아무 방법이 없었다.


학교 이사장의 딸조차 감히 말을 걸지 못하는 학생, 이설아.

선생님은커녕 교장 선생님과 경찰조차 설아의 부모님을 뵙고 나면 비난의 화살을 내게로 돌렸다.

그녀의 부모님들이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단순히 이 지역을 쥐락펴락하는 수준에서 끝날 분들은 아닌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를 바꾸려 했던 것이고, 이 책은 지치고 지친 그가 마지막으로 인터넷에서 찾은 희망이었다.


"후훗, 그래도 수혁이... 이렇게 터무니없고 유치한 방식으로 날 떼어놓으려던 건지는 몰랐네? 귀여워라♡"

그녀가 달콤한 말투로 속삭이며, 공포스럽게 내 손목을 틀어쥔다.

마치 독사에게 휘감기는 것처럼 내 온몸은 마비되었고, 손끝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어 그저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흐음... 그러면 우리 따까리에게 기회를 딱 한 번 줘볼까? 어때?"

"...뭐?"

"이 최면... 지금 당장 나한테 걸어봐. 그리고 뭘 하려고 했는지,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이야기해줘."


부탁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그저 반역자의 사형선고를 내리기 직전인 여제의 꾸며낸 듯한 상냥함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이 빌어먹을 최면, 먹힐리도 없고 제대로 될 리도 없는 최면을 그녀에게 걸어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긴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눈 사이를 피 묻은 손끝으로 약하게 쓸어내렸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방과 후 고등학교의 평범한 별관.

그 건물의 가장 외진 교실에 가만히 서서, 멍하니 어딘가를 응시하는 수혁.

따스한 오후 햇살이 그의 눈을 간지럽혔지만, 그는 자신이 헛것을 보는 것은 아닌지 연신 눈을 끔뻑여 확인할 뿐이었다.

그렇게 몇 번이고 고개를 잘래잘래 돌려보아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교실.

약간 벌어진 입과 당혹스러움이 섞인 그가 딸꾹질처럼 한 마디 내뱉었다.


"...이게 뭐야."

최면이었다.

그리고 골 때리게도... 효과가 탁월했다.

너덜너덜해서 고서에 가까울 정도로 구닥다리로 보이던 책에 쓰인 최면은 정말 효과가 있었다.

미소가 가시려던 그녀의 입술 끝부분과, 마지막 순간 약간의 당황이 섞여있는 눈빛이 그 능력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 함께한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였다.

설아의 두 눈 사이에 가볍게 남은 그의 핏자국만이 이 모든 광경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최면에 걸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는 수혁.

그러나 그 모습에서 정복감이나 배덕감은 피어오르지 않았다.

지금 그녀를 어떻게 하고자 하는 욕망조차... 그의 속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에게 남은 것은 짓이겨진 마음뿐이었다.

한껏 뭉개지고 짓밟혀서, 그 원형도, 본질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마음의 파편들.

그리고 그 속에서 한없이 끓어오르는 하나의 감정은...


원망이었다.


"...이설아."

행여나 넘어지기라도 할까 소리내지 않고 그에게로 다가섰다.

아직까지도 그녀를 신경쓰는 자신의 모습에 허탈한 웃음이 나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건, 그런 거니까.


몇 년만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비열하게 최면을 걸고 나서야 그는 앞에 자리할 수 있었다.

그녀와 눈을 맞추어도, 비겁한 눈동자를 마주한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의 감정은 더욱 격해져만 갔다.


"너는 내가 널 몇 년 동안 좋아했던 걸... 최면에서 깨어나면 알게 되겠네."

"그리고 그 마음을 네가 기어코 망가뜨린 것도 말이야."


반응은 없었다. 깨어있을 때 이야기했더라도 같았겠지.

약한 숨소리만이 그녀가 조각상이 아닌,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걸 보이는 증거였으니.


"나... 진짜로 너 좋아했어. 소꿉친구로서 좋아했던 게 아니라... 진짜 너를 좋아했다고. 알아?"


찌질해. 진짜 찌질해.

속으로 몇 번씩 속삭이듯 맴도는, 자신을 조롱하는 목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서 너랑 같이 있고 싶었고... 네가 조금씩 변해갈 때도 떠나지 않고 있었어."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부터 그녀는 이전의 활달하고 밝은 이설아가 아니었다.

어딘가 비뚤어져, 조금씩 망가져가는 그녀를 친구들은 하나둘 떠났다.

하다못해 양아치 무리도 그녀를 스카우트하려고 하지 않았다.

엮였을 때 그녀는 음지를 양지로 드러낼 최대 위험요소가 될 게 뻔했으니까.


"그런데... 너는 나를 유일한 호구 취급하더라."

"매점 셔틀, 가방 셔틀까지는 그러려니 했어. 그냥 친구 사이 장난이라 생각했으니까.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으니까."


내기라는 명목으로, 종목은 그녀가 이길 수밖에 없는 것들만을 준비했다.

그녀가 지기라도 하면, 그날 그녀는 하루종일 히스테리를 부렸다.

그 모습이 싫어 계속 내기를 져주었고, 어느 날 그 '내기'라는 명분은 사라졌다.


"그랬는데... 넌 기어코 날 망가뜨리더라."


아직 남아있는 멍자국들이 욱신거렸다. 더 이상 대항하지 말라고, 최면이 풀렸을 때 그녀를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용서를 구하라고.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경험들이 내 신체를 옭아매고 있었다.


"나, 이제 너 좋아하지 않아. 오히려... 경멸하지."

"그러니까 잘 생각해봐. 내가, 그렇게 널 생각하는 유일한 소꿉친구였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그리고...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이 최면은 단순한 마비이자 의식 정지니까,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었다.

단순히 맨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 사이를 쓸어내리는, 가장 간단한 최면이니까.

그렇지만...


"그리고, 이설아."

"난 네가 내게 죄책감을 가졌으면 좋겠어. 한없이... 나로 인해 망가졌으면 좋겠어."

"네가... 단 한순간이라도..."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녀의 고요한 호수와도 같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이 마지막 말밖에는 없었다.


"단 한순간이라도... 날 좋아했었다면."


그렇게 손가락을 튕기고, 멈춰있던 그녀의 의식이 깨어났다.


무슨 일인지 당황하며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남은 것 없이 간신히 자리에 서 있던 나와 눈을 마주쳤다.

아까 전처럼 고요하던 그녀의 눈동자에, 약간의 파문이 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더 이상 담아놓은 말은 없었다.

"...가 볼게."

그녀가 화낼 것이 뻔한데도, 그는 담담하게 이별을 고했다.

내일은 조금 더 아플 것이 뻔했지만... 오늘은 그녀를 정면에서 마주하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교실 문이 덜컹거리며 오래된 경첩의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밖으로 나가며, 그의 귓가에 설아의 작디작은 말소리가 들렸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듣고 싶지도 않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날 이후로 학교를 나가지 않았다.


설아가 어떤 표정일지, 그에게 어떤 짓을 할지 집에 걸어가며 하나둘 상상이 되었다.

경멸하며, 벌레 보듯이 보겠지.

아마 그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 할지도 몰랐다.

어쩌면 꼴도 보기 싫다는 이유로,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끌고 가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지워버릴지도 모른다.

그녀라면, 이설아라면 그럴 수 있었다.


집에 들어가 방문을 걸어잠갔다.

부모는 어린 시절 수혁을 버려두다시피 하고 해외로 떠났으니 돌아올 리가 없고.

친구들도 그녀가 두려워 감히 이곳을 찾아오지 못할 것이다.

혹시 설아가 알게 될까봐, 집 주소도 말한 적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그는 혼자다.

혼자이고 싶었다.

혼자여야만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띵동-


...선생인가.

몸이 아프다고 결석하긴 했지만, 이미 수혁이 어떤 상황인지 아는 이상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확인차 왔을 것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가고 싶지 않았다.

선생의 옆에, 거짓으로 꾸며낸 얼굴의 설아가 그를 노려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그렇지만 나가지 않으면 몇 번이고 다시 찾아오겠지.

그러다 설아가 미행이라도 한다면...


'하... 괜찮겠지...'

사실 두려움을 제외하면 그의 컨디션은 상당히 좋았다.

집에 머무르니 연신 깨질 듯하던 머리의 통증도 조금은 잦아들었고, 몸의 상처도 거의 다 나아가고 있었다.

뒤집어쓴 이불을 걷어내고, 적당히 멀쩡한 척 얼굴을 가다듬고, 현관으로 향한다.


끼익-


현관을 살짝 열며, 누가 앞에 서 있는지를 확인한다.

틈 사이로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정면에 서 있겠지.

하지만 바로 집주인을 죽이려 들지 않는 것을 보니, 설아는 아니겠거니 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ㅅ... 수혁아..."


설아가 문앞에 서 있었다.

다시 심장이 갈가리 찢어졌다.

그녀가 내 집을 찾아왔다. 어떻게, 어떻게, 그리고 도대체 왜...


"예전 집 주소는 이사 갔다고 해서... 생기부 목록에서 찾아왔어..."


그녀가 내 마음을 아는 듯이 평소와는 달리 나긋해진 목소리로 말끝을 늘인다.


역겨웠다.


"왜 왔어."

예전과는 달랐다. 막상 그녀를 마주하니, 더 이상 그녀가 두렵지 않았다.

분노가 공포보다 커진 탓에, 그녀의 얼굴이 어떤지도, 그녀의 옷차림이 어떤지도 눈에 들어오지 않은 채 거친 말을 쏟아내었다.


"왜 다시 찾아왔어? 아, 따까리 새끼가 학교에 안 오니까 다른 년놈들한테 시비거는 건 맛이 제대로 안 나서 전용 샌드백 찾으러 온 거야? 그런거야?!"

"아, 아니야...! 잠깐만 내 얘기를..."

"그러면 뭔데, 나 같은 새끼가 뭐 그리 잘나셨다고 이설아 님께서 여기까지 행차하셨는데요? 아, 맞네. 꼴에 그래도 예전 소꿉친구라고 걱정돼서 찾아오신 건가? 근데 어떡하지? 지금 마주한 분 때문에 이 새끼는 죽어버릴 것만 같은데!!"

"수, 수혁아, 그러니까 내 말은..."

"됐어, 꺼져. 난 친구로서 아껴주지도 않고 매번 때리고 협박하고 괴롭히는 소꿉친구는 둔 적 없으니까."

"아... 아아..."

"양심이 있으면, 제발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마.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두서없이 쏟아낸, 곱씹어보면 유치하기 그지없는 빈정거림과 폭발하는 증오가 가득 섞인 말들이 그녀에게 날아가 어디에 꽂히는지 알 턱은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 상관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수혁아... 수혁아..."

꽈악.

그녀의 손이 내 손을 잡고 문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눈썹이 뒤틀리며 문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마지막까지 이러는 이유가 뭐냐고, 이제 연락하지도 말라고 다시 쏘아붙이려던 순간.


"내가... 내가 다 미안해..."

"...뭐?"


미안하다고?

무슨 미친 소리를...


잠깐.


그 순간 퍼뜩 기억이 떠올랐다.

최면이 적혀있던 책의, 대수롭지 않게 읽어넘겼던 경고문.

최면을 믿고, 마지막 카드로 숨겨둔 나조차도 최면을 믿지 못해 대수롭지 않게 치부했던 부분.


"내, 내가 잘못했어... 그동안 내가, 흐으, 내가아, 너한테, 끄윽, 못 살게 굴었던 것도오오..."

"...잠깐만, 이설아. 일단 진정하고, 우읏...!"


그녀가 힘없이 쓰러지며 무릎을 바닥에 찍었다.

너무 놀라 생각할 새도 없이 그녀를 잡아 끌어안았다.

그러자마자 그녀가 놓지 않겠다는 듯이, 내 목 뒤로 두 팔을 두른다.


"때렸던 것도, 마음에, 흐윽.., 상처 준 것도, 전부, 저언부... 전부 다 미안해애애... 흐으아앙...!"


그의 앞에 서서 참고 참았지만, 끝끝내 얼음호수처럼 고요하던 수면이 깨져버린다.

빙판이 무너지고, 차갑게 식어버렸던 눈물이 시울에서 뜨겁게 덥혀져 주르르 흘러내린다.

그러자 멈출 수 없게 된 것처럼, 그 얼음마저도 녹아 한데 섞여 흘렀다.

그동안 그녀를 막아서고 있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 무너져내렸다.

그렇게 녹아내렸다.


십여 년을 그녀와 같이 지냈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운 적이 없었다.

화를 내려면 냈지, 나를 때리려면 때렸지, 이렇게 무력하게... 내 품에 안겨서 운 적은 없었다.


"흐으윽, 내가... 내가 다 고쳐줄게, 몇 번이고 너한테 사죄할게, 다 내 잘못이니까, 그러니까...!"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감싸 안은 그의 머릿속에, 책 마지막 페이지에 적혀있던, 번진 글씨가 떠오른다.

흐릿해서 제대로 읽을 수조차 없었던 문장이, 이제야 눈앞에 또렷이 보인다.



<주의 : 이 단순 최면을, 시전자의 피가 묻은 손가락으로 하게 될 경우, 이 최면의 강도는 극도로 강화됩니다.>


<이때 최면 대상자는 시전자가 내렸던 명령을 수십 배, 수백 배 이행하게 됩니다.>


수혁의 품에 안긴, 작은 소녀를 내려다본다.

자신의 용서를 갈구하며, 몇백 번은 망가지고 무너져내렸을 그녀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죄책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그 무게에 짓눌려 몸부림치는 소꿉친구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이 최면은 절대로 해제할 수 없으며, 대상자가 그 명령을 완수할 때까지 명령은 유효합니다.>


"내가 다 해줄게, 나 밀어내지 마, 다시 좋아해 줘, 수혁아, 수혁아, 수혁아, 수혁아아... 흐아아아아!!!"

손을 놓는 순간 부서져버릴 듯한 그녀를 무서운 마음에 더 꽉 끌어안는다.

그녀의 초점잃은 눈이, 오늘따라 더 공포스러웠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고장난 기계처럼 되풀이하는 말이 그가 알던 사랑인지, 전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남은 단 한 문장의 기억은, 책 맨 앞 장에 깔끔히 적혀 있던 단 하나의 그것이었다.


<최면 부작용은, 온전히 시전자의 책임입니다.>


수혁의 손아귀에 들어간 힘은, 그를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사료 오랫동안 못 올려서 필력 박살난 사료싸개임


요즘 소설탭 글리젠이 조져가는 걸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아직 부족하지만 도입 하나 싸질러봄


상상할 때는 분명 괜찮았는데 노피아 간 사료업체 사장님들 글 생각하니 아직 멀었네


다들 소설탭 많이 올려줘 내 삶의 낙이 요즘 뜸해지니 참 마음이 그렇다


그래도 긴 글 읽어봐줘서 고마워! 열심히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