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얀갤 떠났었는데 오랜만에 써옴

어차피 기억도 못할테니 그냥 읽으셈 ㅋ


0. 나는 잠을 잘 수 없다.


“하 ~ 암” 입을 벌리자 산뜻한 바람이 입 안으로 스며들어온다.


낮잠을 자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가장 완벽한 행위일지도 모른다.


“왼쪽! 세 마리다! 잡아!” 거친 고함이 귓가에 쨍하게 울린다. 모험가들인가.


일부러 이런 한적한 곳까지 나왔는데, 왜 멀리서 간단하게 처리하질 못 하고 이런 곳까지 끌어들이는지 모르겠네.


낮잠을 방해받을 생각은 없다.


「라이트닝」 번개를 생각하며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면 손바닥에서 작은 스파크가 튀어오른다.


그리고 이 스파크가 가야 할 방향을 떠올리면,

쿠르릉! 쾅! 콰쾅! 콰쾅!

고함이 들리던 벌판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늑대 고기가 맛있는 편은 아니지만, 구웠을 때의 냄새는 나쁘지 않다.


특히나 서른 마리 정도를 한번에 구웠을 때는.


“하 ~ 암” 내리치던 번개를 거두자 고함소리가 멈췄다.


이제 좀 잘 수 있겠네.


“또 이런 곳에서 땡땡이야?”

젠장, 듣기 싫은 목소리가 고함소리의 빈 자리를 메웠다.


남들은 천상의 목소리니 치유되니 뭐니 하지만 내겐 늘 낮잠을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이다.


“저기! 왕가슴이 또 독차지하려하고 있어!” 시끄러운 목소리가 하나 더 늘었다.


“사람한테 그런 칭호는 좋지 않아요, 마츠리.” 자는 걸 방해하지는 않지만, 역시나 귀찮은 목소리가 하나 더.


끔찍한 날이야.


“「텔레포트」”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자 시원한 바람이 몸을 감싸안았다.


“「디스펠」 다른 건 몰라도 해주는 제 전문이라구요?” 그리곤 1초만에 그쳐버렸다.


진짜 최악의 날이야.



1. 그녀는 독차지 할 수 없다.


“야! 저기! 후배들 온다!” 옆에서 친구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깨우지 마.” 팔을 쳐내려 했지만 이 새끼는 이미 창문으로 달려간 후였다.


이럴 거면 왜 자는 사람 깨우고 지랄이야.


“쟤 좀 예쁘지 않냐?”

“니 얼굴을 생각해 등신아.”

“쟤가 그 1학년 수석이냐?”

“쟤 치마 왜 저래?”

잡다한 소리가 교실을 가득 메웠다.


시끄러, 1학년이라고 해봤자 어차피 졸업할 때까지 1년 밖에 안 남았는데 뭔 상관이야.


귀찮기만 하고 일처리도 제대로 못 하는게 신입생인데.


“야! 어디가!”

“자러.” 난 배게를 들고 동아리 실로 향했다.


운동장에 늘어선 신입생들의 행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남들 눈치를 보지 않고 교실에서 빠져나가기엔 딱 좋은 순간이다.


“또 자러 가?”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것은 아닌 모양이다.


“나 피곤해, 방해하지 마.”

이 여자의 이름은 렌카. 여러모로 귀찮은 동급생이다.


특히 어떻게 알았는지 낮잠을 자려고 할 때마다 깨우러 오는 것이 그렇다.


“어젯밤에 몇 시간 잤는데?”

“9시간 밖에.”

진심이다.


“그래, 그러시겠지.” 렌카는 코웃음을 치며 내 옆을 졸졸 따라왔다.


난 손가락을 휘적여 배게를 공중에 띄우곤 얼굴을 묻었다.


“동아리실?”

난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레파토리도 똑같은 대화.


“맞다, 너 자느라 점심 못 먹었지? 도시락 싸왔는데 먹을래?” 통을 감고 있던 천이 풀리자 음식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생각 없어.” 하지만 어림도 없지.


“사람이 성의를 보이면 너도 좀 보여줘라, 너 그러다 나중에 여자도 못 만난다?” 렌카는 뭐가 그리 아쉬운지 입을 쭉 내밀며 내 옆에 얼굴을 들이밀고 눈치를 주었다.


“만날 생각도 없어.”

“진짜?” 묘하게 기뻐하는 목소리가 거슬린다. 잠을 자려고 할 때는 모두가 조곤조곤 말해주면 좋을텐데.


“부회장? 교감 선생님이 찾으세요.” 그래, 얘처럼 좀 차분하게 말해줘.


“에? 한창 좋았는데.” 렌카는 이제야 귓가에서 얼굴을 떼어냈다.


“선수치면 안된다, 코토하? 우리 약속한 거 알지?” 렌카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걱정 말아요, 전 시간이 제편이라고 믿으니까.” 여자끼리의 대화는 이해할 수 없다. 무슨 내용인지 감도 안 오고.


내 감이 맞다면 동아리실이 코앞일텐데.


“그쪽 문은 잠겼어요, 앞문으로 들어가셔야죠, 선배.” 렌카 대신 코토하가 옆에 따라붙었다. 귀찮은 건 여전하지만 말수가 적고 차분하다는 점에서 잠을 방해하지는 않는 타입이다. 훨씬 낫지.


대충 앞문이 있을 만한 위치에 대고 손가락을 휘젓자 드르륵 하며 문이 열렸다.


그리곤 앞에 있는 칠판을 당겨 뒤에 숨어있는 침대를 꺼냈다.


드디어.


난 그대로 동아리실 침대 위로 쓰러졌다.


“이불이라도 덮어드릴까요?”

“고마워, 코토하.” 푹신한 이불이 내 몸을 덮었다. 하, 정말 최고야.


“잘 자요, 선배.” 점점 몸이 가라앉는 느ㄲ...




꿈이다. 그것도 자각몽.


마력 사용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자고 나면 또 찌뿌둥하겠네.


“선배, 몸은 좀 어떠세요?” 주변이 서서히 밝아지며 무슨 병원 같은 곳이 눈에 들어왔다.


누워있는 곳도 병실 침대, 옆에 놓인 기계들.


이번엔 병원 꿈인가보다.


“진찰 시간이에요, 선배.” 내 옆엔 간호복을 입은 코토하가 차트를 들고 서 있었다.


“열부터 체크할게요.”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차피 꿈인 거, 난 몸에서 힘을 쭉 빼고 눈을 감았다.


가만히 누워있기만 해도 피로는 좀 풀리니까.


간호사 코토하는 체온계를 들고 내 몸 이곳저곳을 문질렀다. 팔, 다리, 이마. 겨드랑이.


삑 삑 거리는 기계의 소리가 머리에 울렸다.


점점 병실 안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어머, 아래쪽이 조금 많이 뜨겁네요. 이쪽도 체온을 좀 재야겠는걸요?”

뭔가 이질감이 들었다. 아래에 뜨거운 바람이 느껴졌다.


“상처가 많이 부었네요, 치료가 필요하겠어요.” 머릿속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츄흡, 하아.” 몸이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무거웠던 몸이 붕 떠오르며 팔다리가 차가워졌다. 그 반동인지, 가슴과 머리는 점점 더 뜨거워졌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역ㅅ... 선배, 맛....어요.” 물이 요동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깊은 물 속에도 파도가 치는지, 수면 위에서 찰박거리는 물의 떨림이 전해져왔다.


점점... 정신이... 아득해ㅈ...




“끄으으으으응!” 기지개를 펴고 나서야 피곤에 찌들었던 몸이 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일어나셨나요?” 옆에는 코토하가 책을 읽고 있었다.


어딘가 익숙한 모습인데.


뭔가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은 나지 않는다. 뭐, 푹 잤으면 됐지.


“몇시간이나 잤어?”

“음, 이제 곧 기숙사로 돌아갈 시간이죠?” 저녁 시간은 훌쩍 넘었나보네. 내일 또 렌카가 한소리 하겠어.


“6교시랑 7교시는 땡땡이친 것 같지만, 학점은 제대로 따뒀으니 괜찮겠지 뭐!” 난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쭉 켰다.


몸의 관절이 하나씩 떨어져나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느낌.


물론 좋은 쪽으로 말이다.


“그 책은 뭐야?” 책은 까만 커버로 덮혀 표지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냥, 수업 내용에 포함 안 된 부분이 있어서 읽고 있었어요.”

“성실하네, 보기 좋아.” 이러니 2학년 수석을 놓친 적이 없지. 그러고 보니 렌카는 언제쯤 3학년 차석을 벗어나려나.


“선배는 자고 일어나셨을 땐 늘 긍정적이시네요.”

“음... 맑은 정신에 긍정적인 생각이 뒤따른다고 해야하나? 뭐 그런거지. 반대로 말하면 피곤할 땐 정말 좋아하는 것 빼곤 다 짜증나는 것 투성이지만.”

“...!” 코토하는 무언가 깜짝 놀란 듯 급히 몸을 빳빳하게 세웠다.


두고 온 물건이라도 떠올랐나.


“늦었네, 너도 빨리 돌아가. 뒤는 내가 정리할 테니까” 뭔지는 몰라도 잃어버리기 전에 보내주는게 매너겠지, 음음.


난 오랜만에 가벼운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가방에 물건을 담았다. 몸이 가뿐해져서 그런지 가방도 오늘따라 가벼운 기분이었다.


“선배! 잠시만요!” 그런 나를 코토하가 멈춰세웠다.


“응? 왜?” 몸 상태는 최고지만 같이 찾으러 가 달라는 부탁은 조금 피하고 싶은데.


“잠시만, 혹시... 시간 있으세요?”

음, 역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네. 차라리 렌카처럼 들뜬 목소리였다면 나도 즐겁게 거절했겠지만 코토하의 낮은 목소리는 이상하게 사람한테 죄책감이 들게 한단 말이지.


“그 있잖아요...” ‘싫어’라고 바로 잘라야하나? 그렇자니 렌카를 쫓아내 준 은인을 이렇게 박대하는 것도 좀 마음에 걸리고...


“선배, 혹시 저번에 하셨던 말씀 기억나세요...?”

“어떤 말?”

“제가... 선배랑 처음 만난지 47일... 되던 날 하셨던 말씀이요...”

음? 그런 구체적인 날짜를 기억할 리 없잖아...


주문이야 대충 감으로 외운다지만 적게 잡아도 1년쯤 됐을 일을 그렇게 구체적으로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과하게 기억력이 좋은 거 아냐?

라고 말하긴 조금 그러니,

“음... 글쎄...? 조금 옛날이라 기억이 잘 안 나는걸? 사건이라던지 하는 걸로 말해주면 기억이 날지도 모르겠네.”

좋아, 잘 돌려 말했어.


“아...! 죄송해요, 이렇게 숫자로 말씀드리면 잘 모르시겠죠...” 역시 코토하는 눈치가 빠르단 말이야.


“괜찮아, 코토하가 기억력이 좋다는 뜻이잖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이 슬픈 두 눈을 보고 위로의 한 마디를 건네지않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학생회 취임 연설이 끝난 날... 다들 남아있을 때... 목소리가 작다고 그래서 연설은 제대로 하겠냐고... 다들 그랬었잖아요...” 코토하는 뭔가를 망설이는지 말을 길게 늘였다.


덕분에 기억을 더듬을 시간은 더 길어졌지만 겨우 몇초 늘어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때... 선배가 제게 제 목소리는 차분해서 좋다고... 그렇게 말씀해주셨었는데... 그... 뒤로... 바로 주무시러 가셨었거든요...”

끄윽... 그렇게 말해도 기억이 잘 안 나는데... 특히 자기 전에 한 말이라면 대충 생각나는 대로 했을법 하고.


“선배는... 제 목소리가 싫지 않으셨어요? 남들보다 작고... 렌카 선배처럼 또렷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특색이 있거나 한 것도 아닌데...”

기억이 나지 않는 일을 상대가 말하려 하고 있다.


이건 빨리 화제를 돌려야 할 필요가 있겠어.


“음... 그런 건 모르겠지만 남들처럼 잠을 깨우는 목소리가 아니라 그 반대라서 좋다고 생각해. 그런데 그건 왜?” 내 반응이 조금 무례해보였는지, 코토하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내가 침을 삼키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려오는 것이 없었다. 동아리실 안에 감도는 적막은 너무나도 참기 어려웠다. 마치 선생님이 날 세워놓고 저번 시간 졸았던 부분에 대해 질문을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선배는... 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상 외의 질문이었다.


문제풀이의 면접을 준비했는데, 인성에 대한 질문을 받은 기분이랄까.


그래도 모르는 내용을 묻는 것보단 백배 천배 나았다.


“음... 잠잘 때 듣기 좋은 목소리의 후배?” 판타지 소설에서 읽은 ‘ASMR’이란 것에 대해 말해봤자 알 리가 없겠지.


“목소리 말고요! 저, 절 있는 그대로 봐주세요. 예를 들면 여성으로서의 모습이라던지...”

선배에게 연애상담을 하는 후배의 모습은 책에서 읽은 적 있다. 코토하도 그 캐릭터랑 비슷한 나이대니까, 좋아하는 남학생이라도 생긴 건가.


물론! 나한테 그런 걸 물어봐도 알 턱이 없지만 말이야!

“어... 그ㄱ...”

“잠까아아아아안!!!!!!!!” 문이 쾅 열리며 시끄러운 목소리가 적막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숨막혀 죽을 뻔 했는데, 구해줘서 고마워, 렌카.


“우리 협약은 어디로 간 걸까, 코토하?” 렌카는 웃는 얼굴로 코토하를 바라보았다.


이마에 잡힌 주름은... 조금 전 졸다가 생긴 거려나?

역시, 렌카도 학생회에서 졸기도 하는구나!

이래놓고 나한테는 매번 그만 좀 자라고 했단 말이지?

내가 렌카의 이마를 보며 추리를 시작했을 무렵, 코토하도 긴장했던 표정은 어디가고 활짝 웃는 표정으로 렌카를 맞이했다.


“도시락의 성분 분석을 의뢰해도 될까요, 선배?”

“그 책 커버부터 벗기고 말할까?”

둘이 사이가 참 좋단 말이야. 여자들 대화는 따라가기 힘들지만.


“두 사람 할 얘기 있으면 마저 해, 난 먼저 올라갈게?” 걸즈 토크에 남자들은 빠지는게 매너라고 그랬으니까.


“「텔레포트」.”

“잠ㅅ...!”

“잠ㄲ...!”

슉! 탁, 잠시 강한 바람이 지나간 후, 두 발이 기숙사 바닥을 딛었다.


“6, 7교시 과제 없데.” 방에 도착하자 룸메이트가 당연하게 과제를 말해주었다.


“오늘 12시에 옆방에서 카드 칠 건데 너도 올 거냐?”

“신입생 환영회 초대장 써야 돼.”

흠,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군.


학교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파트너를 데려가려면 반드시 상대에게 편지를 써, 다음날까지 답장을 받아야 한다.


신입생 환영회가 올해 첫 파티라 다들 편지 쓰기에 분주한 모양이다.


지금껏 늘 대충 써서 저렇게 골머리 앎아본 적은 없지만.


“그냥 ‘같이 파티 갈래?’ 여섯 글자만 써! 뭘 그렇게 고민을 하냐, 귀찮게.”

“너 같은 기만자 새끼들이나 그렇게 쓰는 거고, 병신아.”

“음! 내가 기만자의 말 뜻을 잘못 알고 있었던 모양이구만!” 난 편지에 말했던 대로 여섯 자를 갈겨쓰곤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잘 알고 있는 거다, 좆 같은 새끼야. 하여튼 이런 새끼들만 옥상에서 밀쳐도 파트너 구하기 훨씬 쉬울텐데, 시발.” 룸메는 뭐라고 궁시렁거리며 다시 편지 쓰기에 몰두했다.


흠, 편지 줄 상대나 좀 정해야겠어. 코토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고, 렌카는 팬클럽이 한 트럭이니 신입생 아무한테나 던지고 퇴짜맞고 와야겠네.


“하~암” 정신은 말짱했지만, 침대에 누우니 하품이 절로 나왔다.


아, 그러고보니 두 사람, 아직도 떠드는 중이려나?

다들 편지에 답장도 해야할 테니 걸즈 토크는 그만하고 기숙사로 돌아가야 할 텐ㄷ....


“드르러어엉... 쿨...”

“미친 진짜 그렇게 쳐 자고 또 자네, 이 기만자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