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얀갤에 올리면서 2020년에 얀갤 더 흥했으면 좋다고 생각했는데 대피소만 몇번을 터지는 거냐 ㅋㅋㅋㅋ




 

[8월 17일]

“으.... 제가 몇 시간 잠들어있던 거에요?” 커다란 밴 뒷좌석, 한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잠에서 깨어났다.


“8시간 17분 31초, 너 때문에 다른 애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진 알아? 너 자는 동안 사건 하나 더 터졌다고!” 운전석에 앉은 여자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죄송해요, 잠복을 너무 오래 했더니.... 하아아암.....” 남자가 크게 입을 벌렸다.


“너 차에 놔두고 돌아다니면 난 맘 편한줄 알아? 그나마 블랙박스가 있어서 망정이지, 니가 안 일어나니까 나가지도 못할 뻔 했다고.” 여자가 조수석을 뒤지자 경찰 배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빨리 이거나 먹어, 오늘도 여기 지나갈 예정이라고 하니까.” 여자는 비닐봉지에서 빵과 캔커피를 꺼내 슥 내밀었다. 다른 손으로 바닥의 배지를 줍자 여자의 깊게 패인 가슴골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한번 끼웠다간 녹아내릴 것 같은 계곡에 남자는 빨개진 얼굴로 그곳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야! 너 어디 보냐?” 여자가 소리쳤다.


“너 딴 여자들도 이런데 쳐다보고 있는 거 아니지? 저번에 박 순경이 니가 자기 가슴 봤다면서 나한테 하소연 했던 건 알아? 어후 변태새끼....” 여자는 경멸하는 눈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빨리 빵이나 먹어!” 여자의 불호령에 남자는 허겁지겁 봉지를 뜯었다. 트득, 비닐을 붙여놓은 끈적이가 너무나도 쉽게 떨어져나갔다.


“어허, 경사님, 이거 왜 뜯겨있습니까? 설마 먹던 거 준 건 아니죠?” 남자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미쳤냐? 내가 먹던걸 왜 줘? 그냥 내 샌드위치랑 착각해서 실수로 뜯었다가 다시 붙여놨을 뿐이야. 잔말 말고 빨리 쳐먹기나 하라고!” 벌레를 보는 듯한 싸늘한 눈이 다시 남자를 향했다. 역겹다는 표정과 그 차가운 눈빛에 남자는 어딘가 딱딱해진 걸 숨기려 허리를 굽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너 옷에 얼룩 엄청 묻혀놨던 거 알아? 최소한 잠복을 할 거면 깨끗하게는 지내야 할 거 아냐?” 선배는 장장 한시간을 매도하고도 아직 말할 게 남은 것 같았다.


“내가 그거 다 세탁소에 맡겨놨으니까, 나중에 다 청구할 거야, 알겠어?” 여자는 지갑에서 영수증을 꺼내 휙휙 흔들었다.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얼핏 보인 목록 속 옷은 분명 자신의 옷이었다.


“아 알았다구요..... 이제 좀 칭찬 한번 정도는 해줄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옷 관리도 똑바로 못 하는 주제에 칭찬은 무슨 칭찬이야?” 순간 두 사람의 눈길이 교차했다. 남자는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 있었다. 저번에 술에 진탕 취한 다음 날 아침, 걸어놓았던 옷들이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선배와 이웃들이 찾아준 옷 몇 개가 아니었다면 매일 같은 속옷을 입을 뻔 했었다.


그 날 이후 선배는 뭐만 하면 이 일로 남자를 쪼아댔던 전적이 있다.


아니야, 선배의 성격을 생각하면 남들 앞에서 ‘파란 스판 팬티’ 라는 별명으로 부르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


“아니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옵니까? 그리고 그건 그냥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렇다니까요? 제가 막 제 속옷을 밖에 던져놓고 그러진 않는다구요!” 남자가 항변했지만 여자는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니가 그러니까 주변에 여자가 없는 거 아니야, 지구대 여자들도 너 변태라고 다들 싫어하는 건 알지?” 여자는 날카로운 손끝으로 남자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손가락보다도 선배의 뼈 있는 말들이 더 아프게 다가왔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요즘 들어 주변의 여자들이 자신을 피하는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번 잠복 끝나면 괜히 여자애들한테 작업 걸어볼 생각하지 말고 똑바로 지내, 알겠어?” 여자의 말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인지, 아직도 불끈거리는 무언가 때문인지 몰라도, 아직도 남자는 도저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8월 19일]

“하, 오늘도 안 보이네.....” 남자가 졸린 눈을 비볐다. 잠복을 하면 할수록 수명이 짧아지는 느낌이었다.


“시체가 여기 근처에서만 나오는 거 보니까 분명 여기 근처가 맞는데....” 남자는 허전한 차 안을 돌아보았다. 15분 전 휴대폰을 보더니 급하게 뛰쳐나간 선배의 당황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선배.... 급한 문자셨나.....” 휴대폰 화면을 훔쳐봤다가는 그날로 고자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훔쳐보진 못했으나 뭔가 좋은 내용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늘 진지하고 섬세하던 사람이 그렇게 당황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진짜 좋은 사람인데.... 가슴도 크고....” 남자는 운전석 앞에 잔뜩 떨어져있는 단추들을 주워 선배 주머니에 넣어 놓았다. 축소수술을 한다 한다 했지만 결국 하지 않은 그 커다란 흉부가 아른거렸다.


남자는 순간 자신이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고개를 저었지만 쉽기 떨쳐지지는 않았다.


“기억력도 좋고, 배려심도 많단 말이지.... 저 성격만 아니었음 남자들이 달라붙었을 텐데.” 남자가 남아있던 빵을 한 입 베어물었다. 그가 좋아하는 빵 중 하나였다. 분명 말은 험하게 하지만 늘 뒤로는 잘 챙겨주는 츤데레같은 모습에 알면 알수록 미워할 수 없는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오늘도 선배가 주고 간 커피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먹기엔 아까운 커피였다.


‘일 다 끝나면 집에 가서 마셔야지.’ 남자는 이렇게 생각하며 의자에 몸을 뉘였다.


눈을 감으면 떠오른 것은 당연히 선배의 모습이었다. 평상시의 엄한 모습과 몇 시간 전 보여줬던 그 모습 사이의 갭이 묘한 보호본능을 불러왔다.


솔직히 말하건데, 포니테일로 머리를 질끈 묶은 선배의 가느다란 목선이 드러나면 그 어떤 남자들도 안 홀릴 수가 없었다. 그는 이번에 운 좋게 선배와 같은 조로 잠복을 하는 것이 축복이라면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벌레 취급과 욕도.... 나쁘진 않은 것 같았다.


 

 

 

한참을 누워있던 남자의 눈이 확 떠졌다. 커피 없이 빵만 잔뜩 먹었더니 목이 안 탈 수가 없었다.


남자는 비닐봉지를 뒤졌다. 그의 손에 처음 잡힌 것은 영수증이었다.


“선배한테 혼 안 나고 마실 만한 게.....” 남자의 말이 멈췄다.


“이게.... 왜 여기 있지....?” 남자가 집어든 영수증은 근처 편의점 영수증이 아니었다. 여기서 최소한 5km는 가야 있는 세탁소의 영수증, 그것도 이주일이 넘은 것이었다. 내용은 남자 셔츠 하나, 분명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


가장자리에 살짝 구겨진 자국, 은근한 석유 냄새. 땅에 떨어져있던 것을 누군가 주워서 비닐봉지안에 집어넣은 것이 틀림 없었다.


‘아무리 경찰이라지만 굳이 바닥의 쓰레기까지 이렇게 주우셔야겠습니까.... 선배는 경찰이지 환경미화원이 아니라구요.....’

“많이 늦으시네...” 남자는 봉투를 뒷좌석에 툭 던지며 말했다.


쾅!

그 순간, 차 뒤쪽에서 무언가 날아와 부딪혔다.


“시발! 뭐야!” 남자는 깜짝 놀라 차에서 뛰쳐나왔다.


촥! 차도에 피가 떨어졌다. 남자는 반사적으로 경찰봉을 집어들었다.


“거기 누구야!” 남자가 소리쳤다. 대답은 없었다. 그냥 푹 찌르는 소리만 들려왔을 뿐.


그가 달려가서 목격한 것은 칼에 찔려 방금 막 숨이 끊긴 한 여성의 시신이었다. 배가 갈라져 지금 무슨 일을 한다고 해도 살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남자는 미친 듯이 주변을 살폈지만 분명 늦은 시간의 어두운 골목엔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닥친 상황에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눈 앞에서 죽은 시체와 사라진 살인자. 무엇을 해야할 지 감도 오지 않았다.


경찰이 되겠다고 했던 모든 이유가 진짜 상황 앞에서 무너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야! 팬티! 무슨 일이야!” 자동차 반대편에서 선배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머리에 잔뜩 맺힌 땀방울을 보니 처음 남자가 질렀던 비명만 듣고 달려온 듯 했다.


“여, 여기...! 사, 사람이...!” 남자는 시신을 가리켰다.


“뒤로 가, 이 새끼야!” 여자는 남자를 뒤로 밀쳤다. “니가 피 웅덩이 밟기라도 하면 현장 보존 어떻게 할 건데!” 선배는 침착하게 무전기에 대고 상황을 설명했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멍한 정신을 후려치는 기분이었다.


선배는 침착했다. 차에 들어있는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근처에 남아있는 발자국은 없는지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넌 꼼짝말고 여기 지켜!” 여자의 말에 남자는 딱딱한 자세로 시신을 쳐다보았다. 반쯤 뒤집힌 눈과 점점 까맣게 변해가는 손발이 너무나도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복부의 끔찍한 상처를 보자 속이 울렁거렸다. 먹었던 모든 것을 게워내고 싶었다. 선배가 옆에 없다는 것이 이렇게 크게 느껴지는 것인지 남자는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서, 선배.... 무서워 죽겠으니까 빨리 좀 와줘요!’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경찰차가 도착하는데 걸린 15분의 시간 동안, 남자는 처음 만나는 긴급 상황 앞에서 얼어붙어 있어야만 했다.


 

 

 

‘선배, 나 진짜 이 일 안 맞는 것 같아요.’ 여자는 남자의 톡을 읽으며 환한 미소를 띄웠다. 빛이 반사되지 않는 눈은 마치 죽어버린 것 같았다.


잠복 담당을 교대하고  돌아온 집은 난장판이나 다름 없었다.


희생자들의 사진이 한쪽에 붙어있는 벽은 사진 위에 그어진 X자로 뒤덮힌 지 오래였다.


“그러게.... 처음부터 다른 여자들 만나는 일은 안 했어도 됐잖아.....” 여자는 벽에 걸린 보드를 뜯어버렸다. 마치 더럽다는 듯 사진들을 모아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그녀는 방 한쪽의 커튼을 들췄다.


“이렇게 귀찮은 일도 안 해도 되고 말이야. 잠복하는 척 사람 죽이고, 내가 제일 먼저 온 척 증거 다 치우는게 쉬운 일인줄 아나....” 커튼 뒤에는 피 묻은 밧줄과 이빨 자국이 가득한 재갈이 망가진 채로 떨어져 있었다.


“오늘 도망치길래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 하필 오늘 커피도 안 마셨는데....” 여자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이 사이에서 부러졌다.


“박 순경처럼 곱게 죽으면 얼마나 좋아.” 여자는 밧줄과 재갈을 ‘소각용’ 이라 쓰인 작은 상자에 집어넣고 침대 아래 밀어놓았다.


“벌레 따위에 우리 자기 멘탈 박살나는 바람에 더 이상 같은 차에서 자지도 못하게 됐잖아.....” 주먹을 쥐자 손이 하얗게 질렸다. 악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빵으로 간접키스 할 때마다 얼마나 두근거렸는데......” 악문 여자의 이가 부러질 것처럼 미끄러졌다.


“자고 있는 입술에 키스할 땐 더 두근거렸지만!” 여자는 갑자기 빨개진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근데 왜 커피는 안 마신 거야.... 왜 안 마신 거야.... 왜 안 마신 거야.... 왜.... 내가 준 건데.... 내가.... 다른 여자도 아니고 내가 준 건데.... 내가 준 건데....!” 다시 여자의 표정이 급변했다. 생각 한번에 감정이 180도 달라지는 듯 했다.


“그래도..... 플랜 B 대로 흘러갔으니 더 이상 나 빼고 뭔가 하려는 생각은 못 하겠지? 그래, 자기는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거야. 자기가 나 빼고 뭔가 할 수 있으면 안되지. 자기는 내 거니까...!” 여자가 바라보는 것은 노트북에 띄워진 블랙박스 영상이었다. 화면 속 영상에선 자고 있는 남자의 코앞까지 여자가 달라 붙어있었다.


여자의 벨소리가 울렸다. 화면엔 커다란 하트 하나만 떠 있었다.


“여보세요?” 여자가 말했다.


“선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온 몸이 가볍게 떨렸다.


“저 지금 선배 집 앞인데, 잠깐 선배 만나러 가도 돼요?” 순간 여자는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을 지를 것만 같았다. 여자는 입을 틀어막고 방방 뛰었다. 바닥이 얼마나 쿵쿵거리던 상관 없었다. 아래층에 있던 여자는 지난 주에 남자한테 말을 걸었다는 이유로 죽여버렸으니까.


“응, 당연히 와도 되지! 준비하고 있을게, 천천히 와!” 여자는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부여잡고 책상 위의 수면제를 냉장고 안쪽 깊숙한 곳에 쑤셔넣었다. 커피 안에 집어넣을 때 쓰던 작은 소도구들도 마찬가지였다.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해둔 남자의 옷들은 전부 자신의 속옷 아래 숨겨 놓았다. 남자의 취향에 대한 메모들은 전부 책상 서랍에 차곡차곡 쌓아 자물쇠를 걸어버렸다.


띵동! 집의 초인종이 울렸다.


여자는 집을 한번 둘러보았다. 의심할 구석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귀여운 자기를 자기한테 의존 시키겠다는 완벽한 계획을 방해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래 기다렸어? 들어와.” 여자는 다시 차가운 목소리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