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에 태울 거 다 태움

이제 좆 같은 글 새로 써야겠다





“앨리스나 다른 사용인들에게 개인적으로 가까이 다가가지 좀 말아요. 공작가랑 혼사도 오고 가신 몸, 어차피 상처만 줄 거 아닙니까.” 백발의 노인이 길다란 손가락을 흔들며 언성을 높였다.


“네, 네, 알겠습니다, 메이드장 마님.” 잭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건성으로 좀 듣지 마시구요. 어리셨을 적에 불 내신 건 기억도 안 나십니까!” 한참 나이가 들었음에도 이 노인은 늙지도 않는지 주인공을 향해 불호령을 퍼부었다.


주름 하나 하나에서 뻗어나오는 압도적인 기운에 잭은 본능적으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아! 생각해보니 2시에 검술 대련을 하기로 한 것 같네? 나머지는 좀 이따 들을게!” 잭은 시계를 보며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에 노인은 툴툴거리며 혀를 끌끌 찼다.


“앨리스 이것은 또 어딜 간 거야? 하여튼, 요즘 어린 것들 하고는... 제대로 일을 하는 사람이 없어요. 늙은 노인만 고생시키고... 에잉...”

노인은 방 한 쪽에 놓인 빗자루를 집어들며 청소를 시작했다.


이리저리 너저분하게 어질러진 잭의 방은 마치 전쟁이라도 벌어진 것만 같았다.


책은 바닥에 떨어져 흐트러지고, 이불은 아슬아슬하게 침대에 걸려있었다.


똑. 그 순간 한 방울의 물이 노인의 어깨로 떨어졌다.


“물이 새나?” 노인이 위를 올려다 보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사다리 없다고 천장 안 고치는 정비공 놈도 똑같아! 에잉 쯧쯧쯧...” 노인은 계속해서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똑. 다시 한 번 노인의 머리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파이프가 고장 난....” 천장을 올려다 본 노인의 몸이 얼어붙었다.


“꺄아아아아아악!” 비명이 저택을 뒤흔들었다.







“그래서, 메이브 부인 말고는 아무도 그 무언가를 본 사람이 없다구요?” 잭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예, 저희가 찾아가봤지만 아무도 없어서...” 가벼운 턱시도를 차려입은 집사가 고개를 푹 숙였다.


“부인이 연세가 지긋하시긴 하지만 그래도 벌써 그런 연세는 아니신데...” 잭은 고민에 잠긴 듯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메이드장은 진정하신 것 같은데요, 주인님의 혼사에 무슨 영향은 없을까 그게 걱정입니다요. 공작가가 주인님 방에서 유령이 나왔다는 소식을 달갑게 받아들일리는 없잖습니까.” 집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앨리스는 뭐 본 거 없데요? 제 방 담당이니까 그 전이나 후에 뭔가를 봤을지도 모르잖습니까.” 잭이 고개를 번쩍 들며 물어봤다.


“그래서 저희도 앨리스한테 몇 가지를 물어봤는데....”

“물어봤는데?”

“메이드장께서 말씀하신 것과 비슷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정작 본인은 유령 같은 건 없다며 아무렇지 않아했지만요. 정말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애입니다.”

메이브 부인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헛것을 보았다고 하기에는 기운이 넘치는 노인이기도 했다.


잭은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메이브 부인이 말했던 생물의 외형은 너무나도 기괴했었다. 만약 그런게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도 자신의 방에...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특히나 이 사실이 공작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겁쟁이로 유명한 그 양반이 이 결혼을 더 이상 밀고 갈 리 없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톰, 당신은... 유령을 믿습니까?”

“둘 다 비슷한 무언가를 봤을 뿐, 그게 유령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집사는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굳게 다문 입술에서 느껴지는 담대함과 기백.


유령 정도는 1대 1로 맞붙을 수 있을 법한 사람이었다.


“알겠습니다, 계속 조사 해줘요. 전 당신만 믿겠습니다.”

“실망시켜 드리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쿵, 집사가 방을 나가자 잭은 힘없이 의자에 몸을 기댔다.


왠지 모를 스산한 기운과 이유 없는 불안감에 잭은 일부러 책상 위에 다리를 올리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갑자기 의자가 푹 꺼지며 시커먼 손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느낌은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미치겠네... 이 나이 먹고 유령이라니...” 잭은 자신의 뺨을 두들겼다. 잡생각이 조금이라도 빠져나가길 바라면서.


이럴 때가 아니지. 나도 조사라는 걸 해야겠어. 유령인지 뭔지 우리 집 안을 깽판치고 돌아다니게 둘 순 없지.


잭이 방을 나서려는 순간, 문 앞에 서 있던 누군가와 부딪혀 쓰러졌다.


물컹, 우당탕!

“으으...”

그런데... 퍽이 아니라 물컹이라는 건....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바닥에 넘어진 앨리스였다. 느슨하게 차려입은 메이드 복의 특정 부위가 열심히 위 아래로 흔들리고 있었다.


“앨리스? 여기서 뭐해?”

“주인님이 많이 힘들어하신다고 들어서요... 혹시... 저같은 거라도 도움이 되신다면...”

수줍게 웃어보이는 앨리스의 미소 아래로 까만 브라 끈이 시선을 확 뺏었다.


레이스가 달린 가볍게 비치는 속옷.


잭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일단 들어와, 그리고 이상한 거 할 거 아니니까 그런 거 좀 입고 오지 말고!” 잭은 한 손으로 눈을 가리며 문을 열어주었다.


앨리스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잭은 보지 못한 듯 했다.


“그런 거요?”

“너 지금 입고 있는 거!” 잭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조심스레 앨리스의 브래지어 끈을 가리켰다.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어....”

“음....”

“왜 이런 걸 보고 있는 거냐구요 이 변태야!” 앨리스가 경멸하는 시선으로 잭을 쳐다보았다.


“바, 방금 그건 불가항력이라...”

“평소에도 이런 눈으로 보고 있던 거에요?”

“그건 진짜 아니야!” 잭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건’ 아니라는 말은...” 차갑게 식은 앨리스의 두 눈이 잭을 내려보자 그의 어딘가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은 고의였다는 거죠...?”

“잘못했습니다...” 주종관계가 어딘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뭐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잘못했어요?”

“예... 그렇게 됐습니다...”

“그럼,” 앨리스가 의자에 앉았다.


“꿇어요.”

이게 무슨 메이드야, 여왕이지...


하지만 실수였든, 고의였든, 여자의 속옷을 훔쳐본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저항은 없었다.


앨리스의 말 끝에서 느껴지는 냉기가 잭의 무릎을 저절로 구부렸다.


“설마... 지금 이런 상황에서까지 몸이 반응하시는 건가요?” 올려다본 앨리스의 눈빛이 자신의 바지를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잭은 황급히 자신의 아들을 진정시켜보려 했지만 제 2의 뇌는 도저히 말을 듣지 않았다.


“메이드의 속옷이나 훔쳐보고, 무릎을 꿇고도 멋대로 딱딱해지는 이런 구제불능인 물건은...” 앨리스의 까만 구두가 잭의 다리 위로 올라왔다.


굽이 없다고 해서 위협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허공에서 가볍게 흔들리는 발끝이 급방이라도 그곳을 내려찍을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커피색 스타킹 너머로 흘러나오는 은은한 비누 냄새가....


짝! 순간 정신을 뺏긴 잭의 머리 옆에서 앨리스가 두 손을 맞부딪혔다.


“장난이에요, 방금 전까지 무서워하고 계셨다던데, 이젠 좀 괜찮아졌어요?” 다시 밝아진 앨리스의 얼굴에 잭은 왜인지 모를 아쉬움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 그러게, 덕분에 괜찮아진 것 같아.” 잭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딘가에 홀린 듯 움직이던 몸이 다시금 통제를 되찾았다.


그곳만 빼면 말이다.


“이번 일로 우리 주인님이 많이 힘드셨구나...” 앨리스가 서스럼 없이 잭을 끌어안았다.


푹신한 무언가가 얼굴에 닿자 잭은 자기도 모르게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입단속부터 시작해서, 사건도 해결해야 하고...” 그녀가 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메이드답지 않게 부드러운 손이 머리카라에 닿자 간지러운 듯 따뜻한 감각에 잭은 눈을 감고 이 상황에 몸을 맡겼다.


연하의 메이드에게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 사회적으로 옳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건 지금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스산한 기운에 얼어붙었던 몸이 서서히 녹는 기분.


마치 푹신한 이불이 자신을 안아주는 것 같았다.


“언제나 고마워, 앨리스.”

“주인님께서 오갈 데 없는 절 주워주셨잖아요. 그 순간부터 전 언제나 주인님을 위해 존재하는 걸요.”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잭의 머리 위로 앨리스가 웃어보였다.





“매번 무섭다고 뒷담화는 깠지만, 메이브 부인이 없으니 집 안이 조용하네.” 잭이 침대에 누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메이드장이 일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간지 겨우 이틀째였지만 확실히 저택 안 분위기는 변해있었다.


그것이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언가 바뀐 것은 틀림없었다.


잭은 몸을 뒤척였다.


손에 잡힌 배게를 만지작거리자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앨리스... 되게 부드러웠지...” 옷도 딱 이 배게 커버 같은 느낌이었....


“아냐! 내가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정신 차려, 이 새끼야.” 잭이 황급히 배게에서 손을 떼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삐걱.


천장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잭은 가만히 멈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밖에서 들려오는 물 소리, 문으로 들어오는 바람 소리, 그리고....


삐걱, 다시 한번 천장이 소름끼치는 소리를 토해냈다.


잭이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다락도 없는 이 저택의 천장에서 소리가 날 이유가 없었다.


잭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칙, 성냥의 불꽃이 양초로 옮겨갔다.


저택 안은 조용했다. 개미새끼 한 마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촛등으로 천장을 비췄다.


한쪽 끝부터 반대쪽 끝까지.


단단하게 붙은 천장용 벽지와 굴곡 하나 없는 천장의 판자들.


쿵! 그 순간 문 밖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거기 누구야!” 잭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잭의 외침에 다른 방문들이 함께 열렸다.


“무슨 일이에요?” 옆 방에 있던 앨리스가 말했다.


잭은 말없이 등잔을 들고 복도를 살폈다.


복도는 고요했다.


도둑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메이드와 집사들 말고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괜찮으신 거죠?” 앨리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아, 내가 바람 소리를 잘못 들었나봐.” 잭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어보이자 다들 방 안으로 돌아갔다.


무릎에 먼지를 잔뜩 묻힌 한 사람만 빼고.







“그래서....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을 좀 해볼래?” 잭이 얼척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앞에는 잠옷을 입은 앨리스가 배게를 들고 서 있었다.


“말씀드린 대로, 주인님의 잠자리를 지켜드리기 위해 저 앨리스가 이 방에 출장을 명 받았습니다!” 앨리스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차렷 자세를 취했다.


“누가 명령 한 건데?”

“메이드장이요! 시골로 내려가시기 전에 주인님한테 무슨 일 없게 잘 부탁한다고 말씀하셨답니다!”

“메이브 부인이 너한테 나랑 같이 자라고 말씀하셨다고?”

“설마요, 그냥... 주인님이 잠을 통 못 주무시는 것 같아서, 제가 보초도 설 겸 재워드리려고 왔죠.” 앨리스가 당당하게 말했지만 잭은 영 못 미더운 표정이었다.


전에 장난을 치다 그녀의 호신술 실력을 톡톡히 맛보긴 했지만, 저 몸매를 볼 때마다 싸움 실력에 일가견이 있다고는 믿기지 않았다.


“침대는 안 가져와?” 잭은 반쯤 포기한 듯 말했다.


“여기 있잖아요?” 그녀가 두 눈을 깜박거렸다.


이 방에 침대는 하나 뿐이었다.


잭이 사용하는 퀸 사이즈 침대.


“너 진심이야?”

“제가 언제 진심 아닌 적 있었어요?”

많지 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잭은 앨리스가 던지는 이불에 깔려 침대 위로 쓰러졌다.


“주인님 잠자리는 제가 지켜드릴 테니 좀 주무시라구요.” 그녀는 자신의 배게를 침대에 내려놓더니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왔다.


손에 들린 한 자루의 단검과 함께 말이다.


“야, 너 아까부터 뭔데! 주머니에 왜 그런 걸 넣고 다녀!” 상상을 초월하는 앨리스의 행동에 잭은 넋을 놓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호신용이에요, 호신용. 그러니까 주인님은 아무 걱정 말고 푹 주무시면 된답니다?” 앨리스가 잭의 옆으로 다가오자 그녀의 몸에서 비누 냄새가 그를 확 덮쳐왔다.


얇은 잠옷을 입은 예쁜 (그것도 그 부분이 상당히 돌출된) 여자가 자신의 옆에 단검을 들고 누워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잠에 들까 라는 생각이 가득한 잭이었다.







“어때요? 꽤 잘 잤죠?” 아침에 눈을 뜨자 앨리스가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녀는 어느새 메이드복으로 갈아입은 후였다.


“지금 몇 시야..?” 잭은 아직도 잠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9시요. 10시에 식사 약속 있던 거 아니었어요?” 앨리스가 물에 젖은 수건을 가져다 주자 잭은 대충 얼굴을 닦고 황급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여기요.” 앨리스가 건네준 옷을 받으려던 찰나 잭은 자신이 잠옷 바지를 반대로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행히 앨리스의 반응을 보니 눈치는 못 챈 것 같고, 이걸로 또 하루 종일 놀려대는 꼴을 보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오늘이 공작가 따님이랑 첫 만남인데... 이 옷은 좀 수수한 것 같지 않나? 다른 것 좀 찾아봐줄래?” 잭이 옷을 도로 내밀었다.


“어... 앨리스...?” 그녀는 옷을 받지 않았다. 초점 없는 눈으로 잭 너머의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 있다는 식사 약속이, 케이트 그 년이랑 하는 거였어요?”

“그 년이라니.... 말이 좀 심하...”

“사람이 묻잖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운 듯 뜨거웠다.


말 끝에 살벌하게 서 있는 날이 금방이라도 잭을 베어버릴 것 같았다.


그녀의 눈빛이 싸늘하게 타올랐다. 얼굴에 진 그림자가 얼굴 전체를 뒤덮었다.


“앨리스?”

“아, 죄송해요. 순간 다른 사람이랑 헷갈렸나봐요.” 방금 전 느껴졌던 살기는 어디로 갔는지, 앨리스는 밝게 웃어보이며 잭이 건넨 옷을 받아들었다.


“그,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녀의 살기에 딱딱하게 굳었던 몸이 이제야 움직였다.


“음... 앨리스? 톰한테 천장 좀 살펴봐달라고 부탁했는데, 오늘은 청소 안 해도 되니까 그것 좀 도와줄래?” 잭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웃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 한 마디 잘못 놀렸다간 어제 봤던 그 칼날에 베여버릴 것만 같았다.


앨리스가 말한 ‘케이트’가 누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전의 분위기로 봐서는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일단 죽이고 볼 법한 모양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잘 다녀오세요, 주인님!”

쪽, 그녀가 잭의 볼에 입술을 맞추자 잭의 심장과 함께 긴장감이 사르르 녹아버렸다.








똑, 똑, 똑.


방문을 두드리자 늦은 시간 저택 복도에 공허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작은 주인님께서 고민이 생기신다면 언제든 찾아오셔도 좋아요.’ 복잡한 머릿속에서 한줄기 떠오른 사람.


철컥, 문이 열리며 보안용 체인 뒤로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 어?” 여자의 뺨은 문 밖의 상대를 보자마자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당황한 듯 문을 쾅 닫아버렸다.


“자, 잠시만! 지금 방이 정돈이 안 돼서!” 떨리는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잠시 방 안에서 요란한 소동이 벌어졌다. 속옷이라도 치우는 건가.


“오래 기다리셨죠? 들어오세요!” 그녀가 문을 열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 안으로 안내하는 그녀의 모습은 방방 떠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죄송해요, 공작가 아드님이 앉으시기엔 조금 좁죠?” 

“아냐, 괜찮아.”

“그런데... 오늘 늦게 오셨네요...?” 앨리스는 방 한쪽에 있는 찬장으로 걸어갔다.


“처음엔 밥 한 끼만 먹고오려 했는데, 얘기를 하다 보니 좀 길어져서.” 잭은 좁은 방 안에 유일하게 앉을 만한 곳인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으로 얘기해보시니 어떠세요?” 앨리스가 난로 위에 주전자를 올렸다.


“다들 예쁘다길래 그냥 입 발린 소리인줄 알았는데, 와... 진짜 미쳤더라...” 아직도 그 얼굴이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는지, 잭은 허공을 보며 말했다.


“말 나온 김에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잭이 대답 업슨 앨리스의 뒤에 대고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여자들은 어떤 선물 좋아해?”

“음... 사람마다 다르겠죠?”

“그래도, 넌 여자잖아. 어디 간 건지도 모르겠는 톰을 찾아 물어보는 것보단 너한테 물어보는게 제일 좋을 것 같아서.”

“글쎄요, 전 잘 모르겠는걸요? 저한테 선물이라고 하면 독특한 한 가지 밖에 없어서요.”

“흠... 케이트의 성격 상 보석을 좋아할 것 같지는 않고...” 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편지랑 꽃은 어떨까? 아직 알아가는 단계이기도 하고, 부담스러운 선물 보다는 이런 가벼운 게...”

“저도 잘 모르겠다고요!” 앨리스가 소리를 질렀다.


당황한 잭이 뭐라 위로해보려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머리 한쪽을 부여잡고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죄송해요, 오늘 일이 좀 피곤해서.” 그녀는 자신의 잔을 들어올렸다.


“아무리 그래도 주인님한테 소리지르는 건 아니었는데, 진짜 죄송해요.” 앨리스는 차 한 모금을 마시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아냐, 내가 미안해... 피곤한 사람 붙잡고 있는 내 잘못이지...” 잭은 머쓱한 듯 영혼없이 웃어보이고는 앨리스가 준비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둘 사이에 침묵이 오고 갔다.


잭은 이만 갈까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눈 앞에 있는 앨리스의 이런 모습을 보고 그냥 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자신 때문에 신경을 돋은 그녀를 건드리는게 맞는가.


그건 또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잭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건넨 차를 마시는 것 뿐이었다.


한 모금, 두 모금.


침묵 속에서 천천히 잔이 비어갔다.


어느새 잔은 바닥을 보이고....


쿵.


잭의 눈 앞이 흐려지는 순간,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그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선물에 감사할 줄 모르는 그딴 년한테 주인님은 너무 아까워요.” 손발을 덜덜 떠는 잭을 앨리스가 일으켜 세웠다.


“전 주인님만 있으면 되는 걸요.” 앨리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주인님도 저만 있으면 행복하실 거에요. 제가 다 맞춰드릴게요. 식사를 드시는 것부터 잠자리까지 전부.”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터널 너머에서 말하는 걸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몸이 붕 떠오르고, 눈 앞이 하얘졌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꿈 속에서, 앨리스가 속삭이는 말들만이 울려퍼졌다.


그녀의 손이 잭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버렸다.


“어젯밤에 한번 해둬서 다행이에요... 그년한테 더럽혀지기 전인 주인님을 맛볼 수 있어서...” 그녀의 숨결이 목덜미에 느껴졌다. 화끈거리는 감각이 목부터 몸 아래로 점점 타고 내려왔다.


“다시 깨끗하게 해드릴게요. 오늘 그년이 더럽힌 것까지.”

몸은 뜨거운데도 등을 따라 소름이 쫙 돋았다. 잭은 허리가 쥐어 짜이는 느낌과 함께 정신을 잃어버렸다.







“아, 아니지...? 그럴 리가 없잖아...” 잭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침 신문을 붙들었다.


그의 손 안에서 신문이 찢어져버렸다. 갈기갈기 찢긴 종이 조각이 무릎 위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신문지 조각에는

‘이 지역 후작가의 집사로 알려진 ‘톰 블레이크’ 의 시체는 공작가의 정원 한쪽 끝에서 발견되었으며, 방화를 저지르고 도망치려다 본인도 불길에 휘말린 것으로 추정된다.’

라고 쓰여있었다.


“톰이 케이트를...? 왜...? 도대체 왜....? 그럴 이유가 전혀 없잖아...” 잭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책상에 머리를 박아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갑작스럽게 들어닥친 파도와 앞 뒤가 맞지 않는 얘기에 미쳐버리기 직전이었다.


손 발이 제 멋대로 떨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손이 책상을 긁었다. 몸도 머리도 말을 듣는 것이 없었다.


“저번엔 유령이고... 이번엔 이거야? 왜... 왜 나한테....” 잭이 손톱을 물어뜯었다.


“주인님!” 앨리스가 방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잭은 앨리스의 등장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계속해서 손톱을 물어뜯으며 홀린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괜찮아.” 그녀가 잭을 끌어안았다.


의자에 앉은 그의 몸이 따뜻하게 데워지자 충격에 뒤로 밀려나있던 설움이 북받쳐올랐다.


“주인님이랑은 관련 없는 일이라고, 주인님한테는 아무 처벌 없을 거라고 방금 듣고 오는 길이에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펑펑 울음을 쏟는 잭의 머리를 앨리스가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왜... 다들 나한테 이러는 건데...”

“괜찮아요, 주인님. 다 괜찮아 질 거에요...” 그녀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잭을 꼭 끌어안았다.


“여긴 저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 울고 싶은 만큼 울어버리셔도 돼요.” 앨리스의 몸에서 전해져오는 온기에 잭의 울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다들 좋은 사람들인데... 왜...” 앨리스가 잭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걱정 마세요. 전 늘 주인님 곁에 있을 거에요.” 잭을 쓰다듬는 앨리스의 주머니엔 단검에서 옮겨 묻은 톰의 피가 두 방울 묻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