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스 4.”

“허, 여기서 에이스가 나온다고?”


탁, 탁. 에르테가 책상 위 카드를 뒤집었다.

에이스 4가 들어가 있으니 론섬 로드인가?

이건 완전히 졌다. 나는 카드를 뒤집지도 않았다.


“너 혹시 간호사가 아니라 타짜 아냐?”

“환자들이 가르쳐준 거예요.”

“한 판만 물러주면 안 되냐?”

“당연히 안 되죠.”


촤르륵! 에르테가 책상 위에 있던 동전을

몽땅 쓸어 주머니에 담았다.


나름 자신 있는 패였는데, 론섬 로드가 나오면

어지간해선 이길 수 없다.


“아, 제기랄.”

“에르테 누님이라고 부르면 동전 하나 정돈

돌려줄 수도 있는데요?”

“시끄러워, 동전 하나에 자존심을 팔진 않아.”


에르테가 킥킥 웃으며 동전을 내게 던졌다.

쯧, 승자의 동정이란 당하는 사람으로선

참 비참하기 그지없다.


“오, 두 사람 다 뭐하고 있―”


선생이 책상 위를 보자마자 굳어버렸다.

이크, 나는 얼른 카드를 도로 집어넣었다.


“에―르―테―”

“아니, 딱 한 판 했어요!”

“그래도 도박은 안 된다고 아빠가 말했지?!”

“이그으아으으―”


선생이 에르테의 양쪽 뺨을 잡고 쭉 당겼다.

어우, 저건 좀 아프겠는데. 그래도 쌤통이다.


“반즈 군, 자네도 마찬가지일세!”

“켁.”


아야, 그가 가볍게 내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아프진 않지만, 왠지 좀 기분 더럽다.


“아무튼 둘 다, 간단하게 짐을 챙기도록.”

“갑자기요?”

“후후,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모양이군?”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선생이 손을 싹싹 비볐다.


“오늘은 바로 소풍 가는 날이지!”

“아, 저는 귀찮으니까 안 갈래요.”

“나도.”

“그냥 좋아하는 척이라도 해주면 안 되나?!”


어쩔 수 없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끔 한 번은 어울려줘야겠지.


“가자, 에르테.”

“하는 수 없네요, 정말이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에르테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근데 괜찮겠어? 급한 환자가 오면 어쩌려고?”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나?”


거참 무책임한 발언이군.


의사로서의 실력은 좋지만, 선생은 종종

의사가 맞나 싶은 행동을 하곤 했다.


“의사가 그래도 되는 거냐……?”

“아마 괜찮을 거예요. 원래 일요일은 한가한

편이거든요.”

“정 그렇다면야.”


그리하여 우리는 느닷없이 소풍을 가게 됐다.

간단하게 짐과 음식을 챙기고, 걸어서

빈민가 외곽에 있는 동산에 가기로 했다.


“소풍, 소풍이라……어색하네.”

“왜요? 소풍 처음 가는 사람처럼.”

“진짜 처음인데.”


에르테가 못 믿겠다는 듯 눈썹을 올렸다.


“대체 뭘 하고 살면 소풍도 한 번 못 가요?”

“그러게. 너는 이렇게 살지 마.”

“그러는 너도 소풍은 몇 번 못 갔잖니?”


앞서 걸어가던 선생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2번 정도는 갔잖아.”

“뭐야, 나랑 별로 차이도 안 나네.”

“시끄러워요, 미라 아저씨.”

“미라 아니거든?”

“미라 맞잖아요, 꼬우면 붕대 푸시던가.”


아니, 이건 앞으로도 쭉 하고 다닐 거다.

이 빈민가에 있는 동안, 내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나왔다간 대참사가 벌어질 터였다.

물론 에르테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환자를 괴롭히면 안 돼, 에르테.”

“다 나았는데 왜 환자에요? 아, 혹시

못생긴 것도 병이라면 환자겠네요.”

“내 얼굴 제대로 본 적도 없으면서?”

“치료해줄 때 보긴 했어요. 호박 아저씨.”


나보고 호박이라니, 이걸 콱 그냥.

엄청나게 잘생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디 가서 못생겼단 말도 안 듣는 편이다.


‘킬러한테 그게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킬러는 그만뒀으니, 앞으론 중요하려나.

어차피 얼굴을 까고 다닐 수 없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근데 반즈 씨, 앞으로 뭐하면서 살 건가요?”

“느닷없이 어려운 질문을 하네.”

“그냥 물어본 거예요.”


에르테가 나를 올려보며 말했다.

으음, 앞으로 뭐하면서 살지라―


“힘이 좋으니까 검투사라도 할까?”

“당신이요? 진짜 안 어울려요.”

“그럼 뭐가 어울리는데?”


으음, 에르테가 입술을 긁었다.


“성기사?”

“나 신 안 믿는데.”

“그래도 왠지 어울릴 것 같아서요.”

“허, 신을 안 믿는 성기사라고?”


무슨 불을 안 쓰는 요리사 같은 건가?

어이가 없다. 신이라니, 그딴 걸 믿어서

뭐 좋은 게 있다고. 성가신 일만 생긴다.


게다가 난 지난번에 복수의 성녀한테

죽을 뻔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왼손이 욱신욱신 쑤셨다.


“그런 넌, 신을 믿어?”

“아뇨? 전혀요.”

“너는 수녀가 되면 어울릴 것 같기도 해.”

“전 의사가 될 거에요. 수녀는 무슨, 그딴

시시한 일을 제가 왜 하겠어요?”


그건 그렇지, 나는 피식 웃었다.

나도 성기사가 될 일은 없을 테고, 에르테가

수녀가 될 일도 없을 것이다.


“아, 슬슬 도착했군.”


슬슬 가을이라 그런지, 동산의 나무들은

모두 붉게 물든 상태였다.


바람은 선선하고, 모처럼 맡는 풀냄새도

제법 신선하게 느껴졌다.


“근데 왜 매번 여기로 오는 거죠?”

“응? 왜, 동산이 싫어?”

“싫은 건 아닌데…….”

“그냥 오늘을 즐기는 건 어때?”


나는 에르테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탁, 하고 그 아이가 손을 쳐냈다.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고작 소풍 온 걸로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너 아직 12살 아니냐?”

“흥, 12살이면 충분히 어른이라고요.”


킁, 내 반절밖에 안 되는 덩치로 말해봤자

설득력이 전혀 없다.

어딜 봐도 꼬맹이인데, 무슨 놈의 어른?


“나 때는 12살은 청소년으로도 안 쳐줬어.”

“켁, 꼰대. 늙은이 티 좀 그만 내시죠?”

“나 아직 18살이거든?”

“그 얼굴로 18살? 미쳤어요?”


진짜 한 대 때릴까, 이걸 진짜…….


“자자, 둘 다 그만 싸우고 즐겁게 놀자고!”

“네에.”

“선생, 따님 교육은 다시 해야겠어.”

“당신이나 교육받으시죠? 문맹 주제에.”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나는 글을 읽고 쓰는 게 아직 서툴러서

선생한테 따로 배우는 중이었다.

이 일기를 쓰는 것도 그 공부 중 하나였다.


“아, 반즈 군. 잠깐 귀 좀 빌려주겠나?”

“음?”


선생이 내 귀에 손을 대고 말했다.


“오늘 에르테와 많이 놀아주지 않겠나?”

“갑자기 왜?”

“실은 저 아이, 요즘 고민이 많은 듯하네.”


고민인가……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수 없지. 알겠어, 선생.”

“뭐가요? 또 둘이서 무슨 작당을 했어요?”

“아무것도 안 했거든? 이 의심병 환자 같으니.”

“어쩌라고요.”


에르테가 내게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

……역시 그냥 한 대만 쥐어박을까.


“그럼 난 적당한 곳에 세팅하고 있을 테니,

둘이서 잠깐 산책이라도 하고 오지 않겠나?”

“반즈 씨랑요? 우웩.”

“여차하면 그냥 갖다버려야겠군.”


하는 수 없이 나는 에르테를 데리고 동산을

조금 돌아다녔다.


‘이렇게 동산에 온 것도 처음이구나.’


산에 온 적은 많았다. 훈련한답시고 맨몸에

산에 버려져서 몇 주나 버티곤 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놀려고 동산에 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오, 저기 보세요. 다람쥐네요.”

“그러네.”


우린 나뭇가지 위에 앉아있던 다람쥐를 봤다.

다람쥐……추억이 많은 동물이다.


“참 귀엽지―”

“참 맛있는 동물이지, 영양가 있고.”

“아니 미친, 다람쥐를 잡아먹었어요?!”


음? 그게 무슨 문제라고? 독도 없는데?


참고로 다람쥐 고기는 꽤 쫄깃쫄깃한 편이었다.

지방도 적고, 맛도 그럭저럭 좋은 편이다.

아마 도토리만 먹고 살아서 그런지 향도

고소하니 간식거리로 딱 좋다.


“다람쥐는 먹어도 돼, 에르테.”

“보통은 안 먹죠! 저렇게 귀여운데!”

“귀여워? 그냥 털 달린 쥐새끼잖아?”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아, 도망쳤다. 다람쥐가 후다닥 달려갔다.


“잡아먹는다고 하니까 도망갔잖아요!”

“어차피 말도 못 알아듣는 축생인데.”

“그래도요! 씨이, 귀여웠는데.”


나하하, 나는 웃으며 에르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 치워요, 전 꼬맹이가 아니라고요.”

“아이고 그러시겠지.”


우리는 조금 더 산길을 걷다가, 어느새

누군가가 만든 놀이터에 도착했다.


“이런 곳에 놀이터가 다 있네.”

“옛날에 이 산 주인이 만들었다고 해요.

손자를 위해 만들었는데, 아쉽게도 그

손자는 완공되기 전에 죽었다나 뭐라나.”


별로 알고 싶지 않은 배경이었다.

뭐― 세상에 그런 비극이야 워낙 흔하니

별 감흥은 없다.


“타볼래?”

“제가요? 하, 저는 어른이라니까요?”

“어른은 놀이기구 타면 안 되는 거냐?”


영차, 나는 의자에 앉은 뒤 몸을 흔들었다.

줄 달린 의자라, 참 묘한 기구다.


“오오, 신기한데. 이걸 뭐라고 부르더라?”

“그네요. 그네 정도는 타봤잖아요?”

“아니, 안 타봤는데.”

“당신 어디 수도원에 갇혀 살다 왔어요?”


그 대신 미친 애비 밑에서 죽어라 구르면서

살았다. 차라리 수도원이 나을 지경이다.


“잘 보세요, 그네는 이렇게 타는 거라고요.”


에르테가 그네에 앉은 뒤, 몸을 앞뒤로

흔들어 붕붕 날아다녔다.


“오호, 그렇게 타는 건가.”

“봤죠? 이 정도는 기본이라고요.”

“근데 너무 낮게 타는 거 아니냐?”


나는 에르테의 등을 힘껏 밀었다.


“꺄아아아악!?”

“어이쿠, 너무 세게 밀었네.”

“자, 잠깐만요! 너무 높아요! 으아아아!?”

“뭐 어때? 재미있지 않아?”

“하나도 안 재미있어요, 씨발!!”


와, 12살에 욕을 이렇게 하네.

에라이, 벌이다. 나는 더 힘껏 에르테의

등을 밀었다.


“그, 그만! 내려주세요! 망할 그만하라고요!”

“까불어서 죄송합니다, 반즈 님이라고 하면.”

“좆까!!”


너무 심했나, 나는 밧줄을 잡아 멈췄다.

동시에 에르테가 내려오자마자 내 정강이를

마구 걷어찼다.


“아야, 아프잖아.”

“시끄러워요! 나가 죽어요 그냥! 카아악!”

“성질머리하곤. 그러면 남자한테 인기 없다?”

“어쩌라고요! 노처녀로 죽으면 되겠네요 뭐!”


선생이 들으면 눈물 흘릴 소리를 다 하네.

노처녀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사는지 알면

그런 소리는 죽어도 못할 거다.


“자자, 그만하고 더 놀자고. 시간은 많으니까.”

“하나도 재미없거든요.”

“그런 것치곤 신나보이는데?”

“아,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에르테가 투닥투닥 날 때리면서도, 얼굴에선

웃음기를 지우지 못했다.


‘거봐, 결국 애잖아.’


고작 12살 먹은 여자아이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고된 일을 하며 사는 건가.


“또 그 눈빛으로 보네. 변태 같으니.”

“뭐? 너는 내 취향이 아니야, 멍청아.”

“하! 제가요? 나중에 크면 당신은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예뻐질 텐데요?”

“근데 꼬맹이라서 하나도 안 꼴릴 거 같아.”

“카아악!”


나는 달려드는 에르테를 피해 달아났다.

그리고 웃고, 또 웃었다.






“……벌써 저녁이네요.”

“그러게.”


너무 신 나게 놀았나, 벌써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었다. 이제 곧 밤이 될 터였다.


“소풍 와서 뛰어다니기만 했네요.”

“뭐 어때? 재미있으면 그만이지.”

“그렇긴 한데요…….”


에르테가 왠지 모르게 울적한 표정으로

노을을 보았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그런 표정 안 지어.”


우리는 나란히 앉아 노을을 보았다.


“……반즈 씨, 언제쯤 떠날 거예요?”

“왜?”

“그냥요. 궁금해서요.”


그건, 나도 아직 모르겠다.

언젠간 여길 떠나야 한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언제 어디로 떠날지는 정하지 못했다.


“왜, 내가 여기 쭉 있어주면 좋겠어?”

“…….”


에르테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외의 반응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결국 환자들하고 친해져도, 결국엔 다

떠나니까요. 당연한 일이지만…….”

“그게 싫어?”

“네.”


그런가.

아무리 당차고 의젓한 아이라도, 결국엔

여자아이일 뿐이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는 매일 숨도 못 쉬게

바쁘다. 형제자매도 없고, 친구를 사귈 틈도

없이 일해야만 한다. 그게 이 아이의 현실이다.


“당신은, 그래도…….”

“좋아, 알겠어.”


나는 에르테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럼 쭉 있을게, 여기에.”

“네?”

“싫어? 어차피 갈 곳도 없고, 그냥 여기

쭉 있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거든.”

“하지만, 그건, 그래도……되나요?”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르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즈 씨, 진짜에요? 약속할 수 있겠어요?”

“뭐, 약지라도 걸까?”

“네. 좋아요, 그렇게 해요!”


에르테가 얼른 내 약지를 잡아 손가락을 엮었다.


“쭉 같이 사는 거에요, 아시겠죠? 약속이에요!”

“알겠어, 알겠다고.”

“후후.”


그래, 이런 삶도 나쁘진 않겠지.

이 두 사람을 내 손으로 지키는 거다.

나의 행복을, 우리의 행복을.


나는, 그걸 지키기 위해 태어난 것이었다.






―나는 어둠 속을 떠돌아다녔다.

이유는 몰랐다, 목적도 몰랐다.

다만 그저 무언가를 부수고 싶었다.


“그만, 그만―”


나는 누군가의 위에 올라타 목을 졸랐다.


죽인다. 죽이겠다, 죽여 버리겠어.


“반즈, 씨, 그만―”

“아.”


그 순간, 나는 얼굴을 보았다.

내가, 에르테의 목을―

내가, 내가―


“우와아아아악!!”


정신을 차렸을 때, 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내가 에르테를 죽이려고 했다.

꿈이었지만, 분명히 그랬다.


‘안 돼, 점점 욕망이 강해지고 있어.’


나는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시간이 지날수록 살인 욕구가 강해진다.

점점 작은 일에도 분노하고, 마음에 안 드는

놈이 보이면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내가 있었다.


이대로 가면 정말 누군가를 죽이고 말 것이다.


억눌러야 한다, 이제 그만. 더는―


“반즈 씨.”

“에르, 테.”


에르테가 방에 들어와, 나를 보았다.

그리고 바로 내게 달려들었다.


“에르테?”

“괜찮아요, 이제 괜찮아요.”


그 아이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왜 울고 있는 거에요?”


울어? 내가? 그럴 리가―

그때, 나는 내 뺨에 묻은 물방울을 만졌다.


“괜찮아요, 울지 마세요. 이제 괜찮아요.”


에르테가 내 귀에 속삭였다.

그 말을 듣자, 떨림이 점차 수그러들었다.


‘이런 아이를, 내가.’


꿈이었다지만 용서할 수 없었다.

이대로 가면 정말 에르테를 해칠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그런 사태만은 막아야 한다.


“괜찮아. 악몽을 좀 꾼 것뿐이야.”

“정말요? 괜찮은 거 맞죠?”

“괜찮다니까. 별거 아니야.”


나는 에르테를 두고 1층으로 내려갔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새벽 5시쯤 될 것 같았다.


원장실은 열려있었고, 선생은 이런 시간에도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반즈 군, 무슨 일인가?”

“선생. 나 좀 도와줘.”


나는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선생이 수염을 긁적였다.


“과연, 무슨 뜻인지 알겠네.”

“방법이 있을까?”

“물론이지.”


선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찬장을 열었다.

그 안에는 온갖 종류의 약병이 들어있었다.


“이건?”

“내가 모아둔 약일세. 종종 자네처럼 특수한

환자에게 쓸 수 있는 약도 모아뒀지.”


선생이 내게 갈색 약병을 건네줬다.


“안정제일세. 매일 밤마다 그걸 복용하면

그 살인 욕구를 억누를 수 있을 걸세.”

“정말 효과가 있을까?”

“공격성 그 자체를 억누르는 거니, 아마도.”


그때, 나는 찬장에 있는 독특한 약병을 봤다.

보라색 약병에 무슨 액체가 들어있었다.


“이건 뭐지?”

“아, 그거? 그건 좀 특수한 건데.”


선생이 약병을 꺼내 들며 말했다.


“이건 말일세, 기억을 지우는 약일세.”

“기억을 지운다고? 그런 약을 대체 어디다

쓴다는 거지? 치매에 걸리는 약이라니.”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선생이 허허 웃으며 손을 저었다.


“정확히는, 이 약은 특정한 기억만을 골라서

지울 수 있는 특수한 약이지.”

“특정한 기억……?”

“가령, 특정 인물에 대한 기억을 지운다거나

특정 사건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거지. 

이건 끔찍한 일을 당한 사람의 기억을 지워

정신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는 약이네.”


별 특이한 약이 다 있군.

선생이 약을 도로 찬장에 넣었다.


“아무튼 그 안정제를 먹으면 괜찮을걸세.”

“고마워, 선생. 또 신세를 졌어.”

“효과가 있으면 좋겠군.”


아니, 있어야만 한다.

만약 이 약이 효과가 없다면…….


‘그땐 여길 떠나는 수밖에 없으니까.’


나는 좀 더, 쭉 여기 있고 싶다.

이곳에선 킬러가 아닌 나로 살 수 있으니까.


에르테와 선생과 함께, 평범한 삶을.


그것만이 내가 바라는 유일한 행복이었다.
















이제 훈훈한 거 나오는 건 끝났다...

드디어 후회 피폐...마참내...!

난 역시 주인공이랑 히로인이 고통받는 게 너무 좋은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