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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채린(29세)

영환기업 재벌가의 막내 딸

영환건설의 전무이사


.

.

.


<유채린 side>


"여기가 최선이에요?"


"죄송합니다..."

"그래도 전무님이 너무 자주 찾아오셔서..."

"저희도 매번 좋은 장소를 마련해 드리기가..."


"아, 됐어요."

"그냥 빨리 데려오세요."


"아... 네!"


교도관이 급하게 문 밖으로 사라지자

다급하게 청소를 마친 흔적이 보이는

낡고 딱딱한 방을 대충 둘러보았다.


- 끼이이익


투박한 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 오셨습니까?"


"상사가 왔는데 표정이 왜 그래요, 최비서?"


"지금은 상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말 편하게 하세요."


"...그건 싫습니다."


.

.

.


고급 도시락 가게에서 사 온 찬합을

탁자 위에 정성스럽게 세팅했다.


"또 이렇게... 다 못 먹습니다."


"감옥밥을 안 먹는 한이 있더라도 다 먹어요."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영양보충을 하겠어요?"


마지못해 젓가락을 든 최비서가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재심 근황은 들었어요?"


"네, 제 예상보다 훨씬 잘 풀리는 것 같습니다만."


"이것도 제 기준에서는 엄청 느려요."

"변호사들 받은 돈에 비해 능력이 영..."


파란만장했던 겨울이 지나고, 

다시 새로운 해의 가을까지... 시간이 제법 빠르게 흘렀다.

날씨가 조금 추워지기 시작한 요즘, 작년 가을이 떠오른다.

낯선 마을에서... 낯선 남자를 만나면서...

나라는 사람에 큰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그 날을.


벌써 그의 얼굴을 못 본 지가 

9개월 22일 13시간 05분...


아니, 사실 참을 수 없어서

몰래 그의 얼굴을 멀리서 보거나,

일부러 남겨 둔 cctv 화면을 쭉 감상하거나,

여러 방식으로 대리 만족을 했지만...


"김석훈 씨의 선처가 감사할 뿐입니다."

"출소하면 제대로 다시 용서를 빌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 같이 가자고요?"

"내가 같이 가면 오히려 역효과 날 거 같은데..."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도, 목발로 얼굴 맞을 뻔 했는데..."


"준성 PD님이 꾸준히 전무님을 거들었으니까요."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였으니... 다음은 좀 다를 거라 생각합니다."

"원래 용서는 단번에 하기 힘들지만,"

"시간과 노력이 쌓이면 사람 마음은 꺾이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요?"


최시리... 그 녀석과의 치졸한 싸움을

말도 안 되는 거래로 간신히 끝을 낸 이후였다.


방송국과의 부당 청탁, 준성이의 부당 해고 공모,

김석훈에게의 협박과 

불법 정보수집 및 타인에게 무단 양도

그로 인한 살인 교사까지...


사회적으로 규정된 내 죄들을 공개하고 부딪힐 생각이었지만

두 가지... 예상하지 못 한 변수가 발생했었다.


하나는 최비서의 자수.

그녀는 모든 증거를 들고 경찰서로 가서

자신이 위의 모든 짓을 직접 했다고 진술했다.

나를 보호하겠다는 이유로...


그 다음 변수는 준성이다.

최시리와의 거래를 떠올리면, 준성이가 나를 피하는 것은 물론

내 이름을 다른 곳에서 언급조차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시리 나름의 배려일까?

나와 최비서가 김석훈에게 찾아가기 전에

이미 준성이가 자신의 책임이 크다고 말하면서

우리에 대한 용서를 빌었다고 들었다.

처음엔 완강하게 거부를 하며, 준성이에게도 상당히 분노했다고 들었지만

결국, 방송국 윗선들도 깨끗하지 않았다는 증거와

본인도 협박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나와 비밀거래를 했다는 사실이 있기에

여러 면에서, 김석훈이 져주는 느낌으로... 

형식적으로라도, 차근차근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나도 김석훈을 만나서 제대로 사과를 할 수 있었고...

물론, 당시 김석훈은 날 괴물 보듯이 쳐다보면서 길길이 날뛰었지만...

이것도 감지덕지라고, 스스로 생각할 양심 정도는 있다.


허나, 이 모든 과정에서도

나와 준성이는 서로를 마주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김석훈의 일, 최회장의 일, 그리고 내가 만든 스캔들까지,

우리 사이에 이미 너무 많은 접점이 있었음에도

교묘하게 서로 맞물리는 일 없이, 평행선을 걷는 느낌이었다.


'쓸데없이 철두철미하기는... 최시리 그 년...'

'끝까지 놀아나는 기분이라서 짜증 나.'


"잘 먹었습니다."


잠시 다른 생각에 빠진 사이에

최비서는 이미 빈 찬합을 싹 정리한 상태였다.


"여전히 잘 먹네요... 그런데 왜 자꾸 튕겨요."


"저한테 필요 이상으로 잘 해주시는 모습이 좀... 그렇습니다."

"저에게 빚을 졌다는 식으로 생각은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자기 멋대로 냉큼 자수했으면서..."

"어떻게 내가 가만히 있어요."


처음 그녀가 자수했을 때는

감사와 미안함보다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최시리와의 약속과는 별개로

스스로의 죄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는데...

이 여자가 멋대로 나선 후에, 나에게 한다는 말도 이상했다.


.

.

.


'제가 전무님께 은혜를 갚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엉뚱한 소리 말고 빨리 나와요, 내가 꺼내줄 테니까.'

'당신이 멋대로 이러면... 내가 아버지랑 다른 점이 뭐에요!?'

'기껏 좀 달라질려고 했는데...'


'다릅니다.'

'회장님도 분명 청렴한 분은 아니시죠.'

'법의 그물도 항상 잘 빠져나가셨고...'

'그치만 회장님은 타인에게 돈을 보상으로 죄를 떠넘겼을 뿐입니다.'

'당신은 다릅니다.'

'순수히 제 의지로, 당신을 돕고 싶었을 뿐입니다.'

'끝까지 이해할 수 없다면... 제가 이제서야 당신에게 은혜를 갚는다...'

'뭐,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은혜요?'

'아까부터 무슨 소리야? 대체 당신이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그런 게 있습니다, 그냥...'

'누군가는 전무님을 위해, 이런 희생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만큼 전무님이라는 사람이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는 사실만...'

'그것만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여기서 자유를 속박 당하는 시간은 그냥 형식일 뿐입니다.'

'그럴 시간에 전무님은 좀 더 중요한 것에 몰두하세요.'

'그리고 제가 출소하면...'

'다시 전무님의 비서로 책임져주시면 그만입니다.'


'...약속할게요.'

'내가 어떻게든... 당신 형량 최대한 줄일 테니까.'


'그렇다고 또 불법행위를 저지르시면...'


'안 그래요!'


.

.

.


그렇게 과거를 회상하다 보니... 

다시 궁금한 점이 생각났다.


"아, 최비서."

"이제 그냥 빨리 시원하게 말해요."

"대체 은혜니, 뭐니... 무슨 말이야?"

"당신 나랑 다른 접점이 있었나? 난 전혀 모르겠는데?"


"...아직도 모르십니까?"

"이상하네요, 기억을 못 하는 건 그렇다치고..."

"제 과거를 조금만 조사하면 금방 아실..."


"아, 그렇게 말하니까 왠지 오기가 생기잖아요, 그런 방식은 싫어요!"

"그냥 당신이 나한테 털어놓거나, 내가 기억이 나거나..."

"그렇게가 아니면 그냥 싫어요."


"...쓸데없는 고집이 생기셨습니다?"


"그러게요..."


그렇게 최비서와 이야기를 나눈 후에,

면회 시간이 끝나서, 교도관의 안내를 받으며

최비서를 남겨 두고 감옥 밖으로 나왔다.


.

.

.


- 치이이익


유채린의 배려 덕분에, 수감실로 돌아가기 전에 담배를 피는 최비서.

그녀는 담배를 음미하면서 창문 밖의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


그녀는 눈을 감고, 학창 시절을 머리 속으로 그렸다.


.

.

.


한 여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1학년까지는 남 부러울 점이 없었다.

돈 많은 집, 명문 고등학교, 좋은 성적, 수려한 외모까지.

그렇게, 모든 것이 완벽했던 그녀의 삶이

어느 날 갑자기,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업이 망해서 가정이 무너졌다. 

그 과정에서 좋지 않은 사건까지 겹쳤다.

여학생의 아버지가 채권자를 살해했다는 소식이 퍼졌다.

진실을 알 방법은 당시에는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사망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잠적을 했기에

어떠한 반박도 못 하고 사회의 질타를 받았고

그런 소식에 민감한 명문 고등학교에서

그녀는 멸시와 조롱, 괴롭힘을 받았다.

그녀는 그렇게, 밑바닥의 돌맹이가 되었다.

심심하면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차이는, 동정도 받지 못 하는 돌맹이가...

그런 돌맹이의 앞에... 다른 여학생이 찾아왔다.


자신보다 훨씬 엄청난 집의 막내 딸.

가히 대한민국 최고 가문을 배경으로 둔 그녀.

그렇기에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도

다른 대우를 받으며 독보적인 길을 걷는 그녀의 모습은

항상 남의 위에 오르고 싶어 하는, 다른 학생들의 표적이 되기 쉬웠다.

하지만 그녀는 함부로 막 건드릴 수 없는,

절벽 위의 꽃 같은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를 향한 모든 시기, 질투, 분노를 모두

돌맹이가 대신 전부 몸으로 받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너네들 뭐야?'


밑바닥 돌맹이가 늘 괴롭힘을 받던 으슥한 장소로

절벽 위의 꽃이 도도한 걸음으로 나타났다.


'우와... 너네 짐승이야?'

'얘가 뭘 잘못했다고... 사람을 이렇게 괴롭혀?'


'뭐야, 넌 상관없으니까 그냥 가.'


'상관없기는...'

'여기 위가 바로 도서관이잖아.'

'너네들 징그러운 목소리가 거슬려서 죽겠거든?'

'다 꺼져, 사람이 공부하라고 만든 곳에서 왜 짐승들이 소란을 피워?'


'...뭐?'

'야! 네 아빠 빽 믿고 나대냐, 지금!?'


'뭐, 나도 때리게?'

'감당 가능하겠어?'


'...이게!?'


'야... 그냥 가자.'

'괜히 쟤랑 엮이지 마, 귀찮잖아.'


'에이... 씨발...'

'야, 너.'

'네 아빠만 믿고 나댄다고 능사가 아니라는 거...'

'내가 똑똑히 보여줄게.'


학생 무리가 자리를 떠나자

졀벽 위의 꽃이 혀를 찼다.


'지랄을 한다.'

'학생이라고 저런 쓰레기들을 아무렇게나 방치하니 원...'


'저기...'


바닥에 가만히 누워 있던 돌맹이는 꽃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하지만...


'응? 뭐, 왜?'


'고... 고마...'


'...고맙다고?'


'으... 응...'


'왜?'


'아니... 도... 도와줘서...'


'도와줘? 내가? 널?'

'그딴 식으로 생각하지 마.'

'그냥 답답해서 짜증났을 뿐이야.'

'너도 그래, 평소에도 말투가 패배자 같잖아.'

'듣기만 해도 거슬리니까, 계속 바닥에서 구르고 싶지 않으면...'

'그 말투부터 고쳐.'


진심으로 짜증난다는 태도로, 꽃이 돌맹이를 쏘아붙이고 자리를 떠났다.


그런 소란이 있은 후에, 둘은 학교에서 유이한 왕따가 되었다.

물론 그림은 많이 달랐다.

너무나 높이 있기에, 질투가 나서 괜히 흉만 보는 괴롭힘과

밑바닥에서 구르는 돌맹이를, 재밌다고 차는 괴롭힘의 차이...

그러나 돌맹이가 괴롭힘을 받을 때마다,

절벽 위의 꽃은 도도하게 내려와서 항상 이목을 자기가 다 가져갔다.

꽃이 그렇게 매번 나서서, 학교 내에서 공공의 적이 된 덕분에

밑바닥의 돌맹이는 간신히 매일을 버틸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왕따를 주도하던 학년의 여왕이자 리더인 아이가

기어코 그 절벽 위의 꽃에게 직접 폭력을 가했고

그 때문인지 왕따 주모자 여학생은 강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그 이후로 밑바닥 돌맹이는 평화롭게, 간신히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을 한 이후로 돌맹이의 삶은

신기할 정도로 다시 원래의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결국 살아서 돌아왔다.

다른 채무자의 칼부림에 휘말려서 채권자가 사망했고

같은 현장에서 그녀의 아버지도 큰 중상을 입어서

외딴 마을에서 의식을 잃고 지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의 결백이 증명되고, 가정이 조금씩 복구되면서

돌맹이는 다시는 꺾이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제련했다.


신체를 단련하고, 공부도 계속 하면서

돌맹이는 날카로운 보석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 후, 그녀는 경호원 일을 시작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조건이 좋았다, 흥미도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하다보면, 그 꽃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나름 적성에 맞는 일을, 몇 년간 계속하던 도중에

그녀는 결국 우연인지 운명인지

절벽 위의 꽃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학생 때보다 훨씬 아름다워졌고,

위험한 가시까지 품은 듯 보이는 한 송이의 꽃을


'이름이... 최XX씨?'


'네, 그렇습니다.'


'음... AA고등학교 출신이네요?'


'네.'


'뭐, 딱히 관심은 없고요.'


'...네.'


꽃은 그녀를 전혀 알아보지 못 하는 듯 보였다.

참 그대로다... 라는 생각을 했다.


'최근 z사의 박이사님 경호원으로 일 하셨죠?'

'박이사님이 지난 주에 방문한 박람회에 나도 있었어요.'


'그렇습니까.'


'거기서 잠깐 소란이 있었죠?'

'그 때 당신이 눈에 띄었어요, 대처가 꽤 좋더라고요.'

'단순 경호원만 하기에는... 대학도, 성적도, 기타 경력까지...' 

'여러모로 스펙도 꽤 괜찮네요?'


'감사합니다.'


'좋아, 당신 내가 채용하죠.'

'내가 뭐 관상론을 아주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

'뭔가 얼굴만 딱 봐도 탐이 나는 인재라서요.'

'제 경호만이 아니라, 여러 잡무를 맡는 개인비서로 둘 생각인데...'

'자신 있으세요?'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대답 마음에 드네요, 말투도 내 스타일이고.'


.

.

.


감았던 눈을 뜬 최비서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미소를 지었다.


"변하려고 너무 애쓰지 마."

"넌 원래... 그리 나쁜 녀석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