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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채린(29세)

영환기업 재벌가의 막내 딸

영환건설의 전무이사


박준성 (29세)
뉴스트레이스의 PD


.

.

.


<김석훈 side>


"끝났네?"


"네, 끝났네요."


방송국 사무실의 안.

소파에서 준성이와 함께 앉아서 TV를 보던 중이었다.


"잘 나온 거 같냐?"


"글쎄요... 그냥 평범한 느낌인데요."


"...나도 그래."


뉴스트레이스의 본방송이 끝난 후,

시시한 광고로 넘어간 TV의 화면을 껐다.


"네가 맡은 마지막 방송으로는 좀 너무 시시한 면이 있어."


"...좀 그렇죠."


"그러니까, 그만 두는 생각은..."


"아뇨, 그래도 결심했으니까요."


준성이가 소파에서 일어 나, 나에게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에휴."


나도 자리에서 일어 난 후

준성이의 허리를 펴게 만들고, 어깨를 두드렸다.


"후회 안 하겠냐?"

"너 일하는 모습, 옆에서 내가 쭉 봤잖아."

"너만큼 진심인 사람... 이 바닥에 얼마 없어."

"네가 나에게 미안한 마음 때문이라면..."


"선배."


준성이의 표정은 여전히 복잡했지만

나를 부른 그 말투만큼은 확실하고, 단호했다.


"분명 이 일을 동경했었고..."

"선배를 존경했어요, 선배처럼 남들에게 인정 받고 싶었고."

"...그런데 지금은 좀 다른 생각이에요."

"다른 방식으로도, 제가 동경했던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어요."

"꼭 여기 있는 것만이 제 인생에 답은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지금까지는 한 길만 정하고 끝까지 달릴 생각으로 왔는데..."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준성이 녀석도 약간 울컥했는지

입술을 움찔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 딱!


"으악!"


더 듣기가 왠지 간지럽고 불편해서

준성이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그 정도면 됐어."

"이제 선배라고 부르지 마."

"아니, 그냥 연락도 하지 마."

"배은망덕한 놈..."


"..."


준성이가 다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사무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야!"


"어, 네?"


"연락은 장난이야..."

"도움 필요하거나, 경사라도 있으면 연락하자고."


"...네."

"선... 아니, 형."


"아, 결혼 청첩장은 보내지 마라."

"불편하니까... 알지?"


"...네?"


"아냐... 가라."


나름 깔끔한 작별을 위해 던진 농담인데

씁쓸했어도 꽤 후련해 보인 준성이의 표정이

유채린을 암시하는 말을 내뱉자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생각해보면... 나에게 용서와 선처를 빌었던 때 외에는

유채린 전무와 따로 접점은 안 보였던 준성이 녀석이다.


'괜찮으려나...'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유채린 전무, 요즘 입지가 안 좋던데...'

'둘 사이도 요새 별로인가?'

'에이씨... 나 때문인가?'

'피해자는 난데 왜 내가 이렇게 찜찜해야지?'


.

.

.


<유채린 side>


"후우~"


흙바닥 위에서 대충 돗자리를 깔고 앉아

도수가 엄청 강한 양주로 병나발을 불었다.


"...너도 줄까?"


옆에 봉긋하게 솟은 흙무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그냥 마셔라, 이거 맛이 없어서 못 먹겠다."


40도가 넘는 술을 무덤 여기저기에 거침없이 뿌렸다.


"먹고 취해서 죽어라..."

"이미 죽었어도 죽어라... 망할 꼬마."


실컷 험담은 퍼부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괜히 [최시리]라고 적힌 돌조각에 

거무죽죽한 술이 묻은 게 꺼림직해서

손수건을 꺼내서, 그 부분만 나름 정성스럽게 닦았다.


"나 지방으로 인사발령 받았다."

"넌 잘 모를려나? 쫓겨났어... 우리 회장님의 우선순위에서."

"나도 나름 변하려고 여러 노력을 했는데..."

"안 하던 짓... 아니, 하던 짓을 안 하려니까 꽤 힘들더라."

"사업도 결국 경쟁이야, 피 튀기지 않는 전쟁이고."

"늘 다른 사람들을 짓밟고, 내 마음대로 휘어잡으면서 살았는데..."

"어줍잖게 행동하니까 이도저도 아닌 느낌이야."

"그러다보니, 회장님 눈 밖으로도 나고..."

"이런 약한 모습으로는... 준성이한테도 못 찾아가겠고."


차가운 가을 바람이 불면서

내 볼에 낙엽 한 장이 거칠게 던져졌다.


"에이 씨..."

"나 심각하거든?"


벗어 둔 구두를 집어서 무덤 옆의 흙을 괜히 내리찍었다.


"평생 그렇게 살았는데... 이제와서..."

"시작하기 전에는 나도 쉬울 줄 알았는데,"

"어쩌면 난 평생... 아버지의 그늘을 못 벗어나지 않을까...?"


다시 또 바람이 쌩하고 불면서

이번에는 얼굴을 덮을 정도로 큰 낙엽이

내 이마에 걸려서 기분 나쁘게 펄럭거렸다.


"...아오!"


벌떡 일어나 무덤을 향해 괜히 소리를 질렀다.


"너 솔직히 말해!"

"괜히 그냥 가기 심술이 나니까, 이런 짓을 꾸몄지!"

"준성이에게 도움이 되는 여자가 되라고?"

"뭘 어떻게 되라는 거야!?"

"내가 또 다가가면... 또 힘들어 할 거 같고..."

"또 내가 곤란하게 만들고, 위험에 빠지게 할 거 같고..."

"어떻게 내가 다시... 자신을 가져야 해?"

"그냥 익숙한 방식으로, 준성이를 꽁꽁 묶어두면 안 돼?"

"이번엔 더 잘 할 테니까... 그러면..."

"그러면... 또..."

"또 나는... 어떻게... 흑..."


양주 한 모금만으로도 치명적이었는지

감정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무덤의 풀을 쥐어뜯으면서 하염없이 울다가...


- 띠리리링~


"스읍... 뭐야?"


눈물과 콧물을 겨우 밀어 넣으면서

발신자를 제대로 확인도 못 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받았네요? 안 받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술이 확 깨면서, 온몸이 싸늘하게 굳었다.


"...어쩐 일이시죠?"


[우리가 뭐 오래 통화할 사이는 아니고...]

[용건만 전달할게요.]


김석훈의 목소리에 싫은 티가 팍팍 나는 동시에

나를 향한 아주 약간의 배려가 느껴졌다.


[준성이 오늘 떠났습니다, 고향으로 갈 거에요.]


.

.

.


- 띡


전화를 끊고, 잠시 멍하니 생각을 했다.


"...야, 최시리."

"내가 이제부터 할 행동마저 맘에 안 들면..."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픽 쓰러지게 만들거나 뭐... 맘대로 해라."

"그래도 난... 이렇게 해야겠으니까."


자리에서 박차고 뛰어가며,

밖에서 기다리는 수행원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지금 급하게 갈 곳 있으니까, 준비하세요."

"그리고 여기 무덤까지 와서 내 물건이랑, 주변 잡초까지 싹 정리하세요."


.

.

.


"후우..."


박준성이 차 안의 모든 짐을 확인한 후에

운전석에 타서 몸을 기댔다.


"..."


복잡한 눈빛으로 자신의 휴대폰을 만지는 박준성.

무언가를 계속 망설이는 기세를 보이다가

결국, 휴대폰을 놓고 운전대를 잡았다.


- 부르릉


하고 시동이 걸린 자동차가 골목을 떠나려는 순간...


- 끼익!


"으왓!"


갑자기 검은색의 고급 승용차가 박준성이 나갈 골목을 막아섰다.

그 차의 뒷좌석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위태로운 발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어?"


여인이 손짓을 하자, 검은색 차는 빠른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골목 저편으로 사라졌고,

홀로 남은 여인이 조심스럽게... 박준성의 차량으로 다가왔다.

그런 여인을 보자, 박준성은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감쌌다.


"..."


그럼에도 그는, 고개를 저으며 두통을 어떻게든 떨친 후

문을 열고 나와서 여인의 앞에 섰다.


"..."


둘은 서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해가 서쪽으로 점점 사라지면서

둘을 비추던 빛이 그림자에 삼켜지자

여인... 유채린이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에 말을 꺼냈다.


"나 지방으로 인사발령을 받았어."

"영환의 자회사 중 한 곳의 대표를 떠맡게 될 거야."

"후계 싸움에서 많이 불리한 입장이지만..."

"그래도 우리 아버지가 내 능력이 아까웠는지,"

"나름 큰 규모의 업체로 보냈더라."

"그래서 난... 다시 올라갈 생각이야."

"시간이 좀 많이 걸리겠지만..."

"그래서 인재가 필요해."

"규모도, 체계도 여러 면으로 다 괜찮은 곳이지만..."

"홍보전략이 너무 부실해서, 영환 자회사치고는 너무 네이밍 파워가 없어."

"그러니까... 유능한 PD출신 사람이 날 도와줬으면 좋겠어."

"나랑 같이... 동등한 입장에서..."

"내가 또 어긋나지 않도록, 견제랑 감시도 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필요해."


유채린이 박준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와... 줄래?"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손을, 박준성은 조용히 쳐다보기만 했다.


"...오랜만에 하는 말이, 좀 갑작스럽네."


"그치만..."

"사과는 이제 지겹고..."

"또 감정만 쏟으면, 내가 너무 변한 점 없이 그대로라... 한심해서 싫고..."

"그렇다고 번지르르한 말로만... 나 변했다... 예전의 내가 아니다..."

"그러기에는 또... 사실이 아니고... 난 여전하니까."

"그래서... 아마도 나는..."


눈물을 힘겹게 삼키면서 말을 이어가는 유채린.

어느새 해가 사라져 어둠이 깔리자,

그녀의 얼굴에서 미처 참지 못 한 눈물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네가 이 제안을 거절해도, 난 또 똑같이 포기하지 않을 거야."

"또 질척거리고, 집착하고, 뒤를 밟고, 감시하고..."

"그게 잘못이라는 걸 알아도..."

"내가 결국 이 모양이라서... 다른 방법을 모르니까..."

"그치만... 그치만!"

"억지를 부리지는 않을게... 계속 기다릴게..."

"10년이고... 20년이고... 네 자리를 계속 비워둘 테니까..."

"부담없이... 거절해도 좋아... 이건 내가 맹세할게."

"나라는 인간이 근본부터 망가져서..."

"널 계속 눈 안에 담아둘려고 발악하겠지만..."

"선은 넘지... 않을... 게..."

"믿어... 줄래?"


유채린의 발등에만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박준성은 청록빛의 비구름을 아련하게 쳐다봤다.


"믿지 못 하겠어."


박준성이 꺼낸 말에, 유채린의 온몸이 돌처럼 굳기 시작했다.


"나는 널 잘 아니까..."

"아니, 그 전에... 너 자신도 계속 확실하지 않다고 하는 말을..."

"어떻게 믿겠어."

"그러니까..."


손수건을 꺼낸 박준성이, 유채린의 얼굴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거절하지 않아, 내가 네 옆에 있을게."

"네가 어긋나지 않게 잡아 줄게."

"단순히 널 돕고 싶은 마음 그 이상으로..."

"널 도와야 나도 완전해질 수 있을 거 같아."

"그러니까..."


박준성의 말이 끝나기 전에,

유채린이 그를 끌어안으며 오열을 했다.

그의 어깨가 소나기에 젖는 반면, 

그의 표정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가을의 밤바람이 차가운 손길로 골목을 더듬자

가로등이 잠에서 깨며 하나씩 오렌지색 불을 켰다.

그 중에서, 두 사람을 비추는 가로등의 조명만이

백금색에 가까운 아름다운 빛을 뿜어내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