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링크 - https://arca.live/b/yandere/8639767?target1=all&keyword=%EB%84%88%EB%A5%BC&p=1


유동때 쓴 글인데 어차피 이어 쓸 참이라 아이디 하나 만들어뒀음


내가 쓰는 글은 호흡이 좀 긴편이다. 재밌게 읽어주기를 바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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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생각했다.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는 시간은 약이 오를 정도로 더뎠다. 1분, 1초가 먼 길을 막아서는 장애물이었고 소녀가 인내해야하는것이었다. 시간은 저절로 흘러가지 않았고 그 흐름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여태까지 이런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지금껏 물살에 떠밀리듯 시간을 보냈다면 이번에는 그 반대로 헤엄을 치고 있었다. 어쩐지 그 끝에 남성이 서있는것 같았다. 무질서한 시간이 흐르는 방향을 정해주는것. 그 방향이 무언가로 향해있는것. 흐름을 온전히 느끼고 힘을 들여 나아가는것.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것. 사람들은 그것을 기다림이라고 불렀다. 물론 소녀는 알지 못했다.


소녀는 남자를 생각하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밤새 자신을 지켜봤다는 사실이 떠올라서이다. 무방비로 누워있던 제 모습이 궁금해졌다. 소녀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을 한번 보았다. 거울 속에 두 눈동자는 생기가 없었다. 그걸 보니 기운이 빠졌다.

소녀는 혹시 몰라 입고 있던 옷을 벗어보았다. 다시 본 거울에는 야위고 몸 이곳저곳에 흉이 진 여자가 서 있었다. 불타는 숲에서 빠져나온 짐승처럼 추레하다. 소녀는 거울을 보면서 제 몸에 새겨진 흉터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이 흔적들은 시간이 지나며 늘어난것이다. 이런게 있었는지, 왜 생겼는지도 잊어버린 흉터들. 이건 살다보니 저절로 생긴 성장통과도 같았다. 소녀는 지금껏 시간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몸을 맡겼다. 그게 어디로 가는지,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몰랐다. 소녀는 세월이 야속하다고 생각했다. 이 흉터들, 이 야위고 볼품없는 몸, 만약 누군가 본다면 눈살을 찌푸릴텐데. 되돌릴수 있다면, 지금같은 감정을 느꼈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거야. 소녀는 다시 한번 남성을 떠올렸다. 어느 순간 생각이 그를 기준으로 삼았다. 


소녀는 상처를 되짚어가던 중 향기로운 샴푸냄새를 맡았다. 적어도 씻기는 했구나. 소녀는 다시 입으려고 옷을 집어들었다. 아. 잠깐만. 샴푸냄새 ? 소녀는 자기 머리를 한 움큼 짚어 코에 대보았다. 봄의 따스한 햇살과 꽃의 향기가 났다. 그러고보니 손에서 느껴지는 감촉도 부드럽다. 긴 생머리가 움직일떄마다 찰랑거렸다. 어어 ? 이상해. 밖에서는 씻을수가 없었는데. 소녀는 다시 거울을 보았다. 조그만 얼굴에 당황한듯 동그랗게 커진 눈. 잘보니 몸이 야위고 흉터만 있을뿐 얼굴은 불그스름하니 앳돼보였다. 설마.... 소녀는 옷에도 코를 대보았다. 깔끔하고 기분좋은 냄새다. 설마 그 사람, 나를 벗기고 씻긴거야 ?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꾹 다문 입술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화장실 앞에 앉아있던 까미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볼품없는 제 몸이 생각나서 창피하고, 자신의 과거가 알려졌다는 생각에 수치심이 들었다. 갑자기 까미가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철컥거리면서 열쇠를 꽂는 소리가 난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왔다.


" 까미야, 잘 있었어 ? "


소녀는 까미를 쓰다듬어주는 남성 앞으로 갔다. 두 다리를 단단히 세운채, 팔짱을 꼈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소녀를 쳐다보았다.


" 일어나셨네요 ? 밥은 드셨어요 ? "


남자가 그녀의 몸을 피해 고개를 내밀었다. 그릇이 비어있자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 저기...당신! "


" 네 ? "


목소리를 높였다고 생각했는데 끝에서 힘이 빠져버렸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


" 그....그게... "


소녀는 말 끝을 흐렸다. 우물우물, 입술이 떨리는걸 참느라 부자연스런 표정을 지었다.


" 아니....아니에요... "


소녀는 잔뜩 쪼그라든채 뒤를 돌아 걸었다. 그녀는 다시 침대로 가 이불을 끌어안았다. 처음과 같이 눈과 정수리만 빼꼼 내민 모습이다. 남성은 그걸 보고 웃음을 짓더니 등을 돌려 신발끈을 풀었다. 끈을 풀면서 그가 말했다.


" 오늘은 좀 정신없었죠 ? "


당연하죠. 소녀는 마음속으로 답했다.


" 어제 일찍 퇴근해서 오늘 잔업이 좀 있었어요. "


왜요 ? 혹시 저 떄문에 그런거에요 ?


" 보니까 밥도 다 드신것 같고, 아직 말은 좀 힘들어도 이상은 없는것 같네요 "


아뇨. 문제 있어요. 그리고 저 말 할줄 알아요. 입에 담기 힘든 문제라 그렇지.


그 다음으로 남자는 말이 없었다. 소녀는 침묵하며 다음으로 들을 말을 기다렸다. 아. 남자는 짧은 탄성을 지르고 끈을 잡던 손을 멈췄다. 어떤 말을 하려다 속으로 삼킨듯 했다. 다시 나오지 않을것 같았으나 그는 끈을 마저 풀면서 말했다.


" 실례되는 말 일수 있지만, 어디 따로 갈곳은 있나요 ? 죄송해요. 혹시나해서 물어보는거라. "


소녀는 침을 한번 삼켰다. 그런건 없어요. 당신도 알잖아요 ? 내 몸에 남은것들을 알면서. 그것들을 보면 어떻게 살았는지 아실거 아니에요. 없어요. 여길 나가면 옛날과 똑같아요. 여기가 유일해요. 소녀는 처진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남성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녀가 한 말은 속에서 맴돌뿐 나갈수는 없었다. 물론 전하고는 싶다. 그와 대화하고 싶다. 말들은 닫혀있는 문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돌아 온 말은 다시 밖으로 나가려다 또 한번 돌아왔다. 말은 가슴에 부딪혀 상처를 남기고 슬픈 메아리를 만들어냈다. 남성은 그걸 몰랐다. 그는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 일단 경찰에 신고는 해뒀어요. 내일 같이 가봐요. 다시 살던곳으로 가야죠 "


" 뭐라고요 ? "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다. 소녀는 혼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신발을 벗은 남자가 돌아봤다.


" 말 할줄 아시네요. 내일 경찰서로 같이 가요. 이미 다 말했어요 "


" 아뇨, 싫어요 안갈래요 "


소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안간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 "


소녀는 마주한 남자를 보면서 망설였다. 입을 몇번씩 달싹거리다, 그녀가 말했다.


" 안갈거에요. 밖에 나가기는 싫어요 "


" 나가는게 싫은거에요 ? "


" 아뇨, 저..... "


소녀는 작은 목소리로 이었다.


" 여기 계속 있고싶어요.... "


남성은 소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이가 없는건지, 막막한건지 표정을 읽을수 없었다. 소녀는 눈을 내리깔고는 시선을 피했다.


너무 무리한 말이었다. 그녀 스스로도 안다. 자신은 밖을 떠돌다가 죽을 운명이라는것을. 평생을 떠돌던 그가 평범하게 살수 없다는것을. 본래는 어젯밤 죽었어야할 몸이다. 하지만 무슨일인지 그녀는 살았다. 그때 저 남자가 소녀의 삶으로 들어왔다. 그것으로 정해진 운명을 이미 거부했다. 잠깐의 탈선이었고 언젠가는 돌아가야한다. 계속 거부하다간 큰 화를 입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건 싫다. 다시 나가는건 너무 두렵다. 예전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저 남자와 떨어지면 다시 그떄로 돌아갈거라는 불안감이 들었다. 물론 서투른 오기에 불과하다. 어린아이의 억지와도 같다. 아무 연고도 없는 남자가 자신을 거둬줄리가 없지 않은가. 소녀의 팔에 힘이 풀리더니 안고있던 이불을 놓았다. 소녀의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안에 떨리는 눈동자가 있다. 많은 감정이 담긴 눈이었다. 남성은 그 눈을 쳐다보았다. 그가 말했다.


" 일단 알았어요. "


소녀는 놀라서 고개를 치켜올렸다.


" 근데 저도 확실하게는 말씀 못 드려요. 잠깐 대화 좀 할수 있을까요 ? 말 하시는걸 통 못 봤었네요 "


남성이 부드럽게 말했다. 소녀는 그가 판단을 미룬것에 실망했다.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는것에 위안을 받았다.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아차, 싶어 짧게 네 라고 대답했다. 남성은 옅은 웃음을 지었다.


까미가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다. 놀아달라는 표시로 한번 울음소리를 냈다.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까미는 시시해져서 드러누웠다. 아직 밤은 길고 둘이서 오고 가는 말은 한참이 남았을거다. 말 못하는 동물은 그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오늘은 놀기 글렀다는 생각에 까미가 길게 하품을 하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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