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몇 시지?”


얀붕이는 하늘에 밝은 만월이 뜬 뒤에야 정신을 차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회중시계를 꺼냈어. 소녀가 나가고 집에 자신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후에야 마침내 조선어를 쓰기 시작했지.


“오후 6시? 아... 대체 몇 시간이나 지난 걸까.”


회중시계를 열어 확인한 시곗바늘은 오후 6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지. 몇 시간이나 지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한참 동안이나 알지 못하는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며 얀붕이는 천천히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어.


탁자 위에 놓인, 고급스러운 도자기로 된 주전자와 컵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천천히 복도로 나와 불을 켠 후 주방으로 가 천천히 컵을 닦았어. 이미 싸늘하게 식어 버린 홍차에서는 처음 끓였을 때와 같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향기는 느껴지지 않았지.


‘연회가 즐거울수록 회장을 정리하는 일은 쓸쓸하다’ 라는 말을 얀붕이는 떠올렸어. 하지만 조선에서 살 때에 집에서는 연회를 자주 열었지만 얀붕이는 초대받지 못한 채로 이십 평 넓이의 방에서 그저 바깥을 구경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없었기에 ‘즐거운 연회’ 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지. 애초에 두 명이서 대화를 나눈 것을 연회라고 하기에는 사람의 수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얀붕이는 주방을 떠났어.


“그 소녀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야기를 한 걸까.”


얀붕이는 다시 조용히 중얼거리며 방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었지. 어제 입었던 형태와 똑같은 유카타를 입고선 다시 방 밖으로 나와 2층의 발코니로 향했어. 


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나 긴 시간 동안 정신이 팔려 있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얀붕이는 의자에 걸터앉아 난간 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을 바라보았어. 밝고 강한 빛을 찬란하게 내뿜는 만월을 바라보며 방금 전의 일을 다시 떠올렸지.


소녀는 내지인이었어. 조선인인 얀붕이와는 결코 이어질 수도 없으며 이어져서도 안 될, 철저히 분리되어 살아가야 할 사람이었지. 그런데도 소녀는 결코 거짓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진실되게 얀붕이에게 이야기하며 다음에 또 만나자고 했지. 조선인들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하는 얀붕이를 얀순이는 처음으로 받아 주고 싶다는 말을 해 준 것이었어.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걸까.”


부모조차도 얀붕이를 사랑하지 않았고, 조선인들은 자신을 착취하는 친일파 가문의 자식이라며 얀붕이를 증오하였고, 내지인들조차 자신들과 다른 주제에 같아지려 한다는 이유로 얀붕이를 멸시하였지만 처음으로 소녀는 얀붕이에게 호감을 내 비친 인물이었지. 얀붕이는 조용히 읇조리며 달을 바라보았어.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망가져 버린 거지?”


‘망가져 버린 것’ 이란 다른 누구도 아닌 얀붕이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었어. 부모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을 과연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을 제대로 된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얀붕이의 논리로 그것은 전혀 맞지 않는 말이었어. 하지만 내가 이렇게나 망가져 버린 것과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는 18년 동안이나 알 수 없는 채 난제로 남아 버린 채였지.


언젠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부 - 유시향(柳始香) - 가 자신에게 선물했던 ‘자명금(自鳴琴)’ - 얀붕이는 그것을 책에서 오르골이라는 이름으로 알게 되었고 - 이 망가져서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게 되었을 때 얀붕이가 그렇게나 슬프게 울었던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지.


본래 고급스럽게 마감된, 흑갈색 단풍나무 상자에 달린 금색 태엽을 돌리면 상자 안쪽의 - 맨 위의 유리 뚜껑으로 비쳐 보이는 - 바늘이 여기저기에 붙은 금색 원통 음계판이 돌아가며 금속판을 튕기면서 아름다운 소리가 났던 것을 얀붕이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어.


그 오르골을 튼 채로 침대에 누우면 정말로 깊이, 따뜻하게 잠에 들어 다음날 아침에 상쾌한 기분으로 깨어날 수 있었고 연회나 손님 때문에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할 때 오르골을 틀고 책을 읽으면 시간을 금세 때워 버릴 수 있었어. 게다가 그렇게 해서 읽은 책은 내용이 머릿속에 더 오랫동안 남아 얀붕이의 성적에도 지대한 도움을 주었고. 얀붕이는 처음으로 받은 선물을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어.


하지만 어느새 시간이 지나 오르골이 망가졌을 때 - 더 이상 이전의 아름다운 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저 태엽이 돌아가는 소리만이 나올 뿐이었지 - 얀붕이는 처음에는 그리 슬퍼하지 않았어. 망가졌더라도 고치면 된다고, 고치면 다시 옛날의 아름다운 음색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기에 오르골을 챙겨 종로 거리까지 달려가, 오르골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상점에 들어가 자신의 소중한 물건을 고쳐 주기를 부탁했어.


“얼마면 되나요? 제발 고쳐 주세요. 돈이라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어요!”


얀붕이의 지갑에는 수많은 지폐와 동전이 꽉 차 있었어. 지금까지 받았던 용돈 - 얀붕이의 부모는 지출이 늘어나는 것을 몹시 싫어했지만 얀붕이가 차라리 돈을 모아서 집을 나가면 그 돈들을 전부 메우고 벌레 같은 자식까지 치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 을 전부 긁어모아 찾아간 것이었지. 얀붕이는 부모가 항상 돈의 이야기를 하루에도 수천 번은 넘게 말하기에 돈이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고, 그거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어.


“죄송하지만... 이 오르골은 더 이상 유통되는 부품이 없어 수리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돈을 가지고 찾아가도 그 오르골을 고칠 수는 없었어. 가게의 직원은 같은 곡의 오르골을 구매할 것을 권했지만 얀붕이는 거절하고 가게를 빠져나왔지. 자신의 소중한 선물은 그 어떤 것도 대신하지 못할 물건이었으니까.


“왜 이렇게 망가져 버린 거야?”


얀붕이가 집에 돌아와, 방 안으로 들어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그것이었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하녀와 하인들은 저마다 얀붕이가 왜 저러나며 방 밖에서 비밀스럽게 수군거리기 시작했지.


“주인 마님께 혼난 거 아니야?”

“아니야, 뺨이나 다리에 맞은 자국이 없는걸.”

“대체 왜 저러시는 거지?”


얀붕이는 그 묘하게 기분 나쁜 수군거림도 전혀 들리지 않았어. 너무나도 슬펐으니까. 자신의 소중한 것이, 사랑했던 것이 이제는 망가져 버린 데다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슬퍼서 얀붕이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어. 돈을 가져가도 고칠 수 없었던 것과, 종로까지 헛걸음을 했던 것은 상관없었어. 그저 자신의 소중한 것이, 처음으로 자신에게 도움을 주고 자신에게 소중했던 것이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다는 것만이 너무나도 비통했어.


더 이상 옛날처럼 오르골의 아름다운 음색을 듣는 것은 불가능했어. 책을 읽으며 오르골을 듣는 것도, 오르골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는 것도, 조금이나마 즐거웠던 옛날로 돌아가는 것도 이제 더는 할 수 없었지.


“나는 이제 무엇으로부터 위안을 받아야 해?”


자신에게 가장 큰 위안을 주던 것이 큰 슬픔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어렸던 얀붕이는 알지 못했어. 사라진 것을 되살리는 일은 너무나도 어렵고, 얀붕이에게 버거웠으며 새 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빈자리가 너무나도 커 채울 수 없었고 새 것이 들어올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지.


결국 얀붕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사흘을 굶으며 방 안에서 하루 종일 슬퍼하며 울 뿐이었어. 방 밖으로 나온 뒤 2주 동안은 눈이 텅 비어 있었고, 책을 읽어도 눈에 글자가 들어오지 않았지. 결국 얀붕이의 슬픔을 해결한 것은 시간이었어. 어느새 시간이 지나자 빈 자리는 잊혀졌고 더 이상 오르골 때문에 슬퍼하며 괴로워하는 일은 없어졌지.


하지만 빈 자리를 잊어버렸을 뿐 채우는 방법을 얀붕이는 알지 못했어.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누구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할 지 알 수 없듯이, 얀붕이도 이 빈 자리를 어떤 것으로 어떻게 채워야 할 지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몇 날 며칠을 찾아도 알 수 없었기에 얀붕이는 그것을 무시하고 지내기로, 어떻게든 모른 척을 하기로 결심했어.


“채워진 걸까. 아주 약간만이라도...”


하지만 지금, 얀붕이는 조금이나마 빈자리가 채워 진 듯한 묘한 감각이 들었어. 달이 지고 다시 초승달이 떠오르며 시간이 지나 만월이 된 것처럼, 어쩌면 이 빈자리도 채워질지 모른다는 묘한 감각이 뇌리를 스쳤지.


얀붕이의 볼을 물 한 방울이 적시고 턱에서 떨어졌어. 빈자리를 다시 의식하기 시작한 것 때문이었을까, 이번에는 이것이 땀이나 수증기 따위가 아니라 눈물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어. 하지만 얀붕이는 이제 옛날처럼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슬퍼하는 일은 하지 않았지.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어떻게 채워야 할지 약간만이라도 알았으니 된 걸까.”


얀붕이의 두 눈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만월이 비치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