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yandere/9285823 전편링크

집을 떠나 이 도시로 온 지도 수 년이 지났다. 원래는 여기서의 생활이 안정될 때까지는 본가에 돌아가지 않으려 했지만… 조부님이 너무 적적해 하신다기에 명절마다 본가에 가 보고 있다. 조부님은 오랜만에 나를 보실때마다 눈에 띄게 반가워 하신다. 그렇지만 동생은… 날 미워하겠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는지 인사하러 찾아간 내게 차가운 눈빛과 무시로 일관했다. 평생 싸움 한번 해보지 않은 남매사이였기에, 동생의 원망어린 시선은 다른 사람에게 향해지는 것보다 더욱 날카로운 비수 같았다. 내 잘못이기는 하지만…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 중 하나인 여동생의 그 눈빛은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로에게서 독립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는다.


그런 명절이 몇번씩 지나가고 음악대학의 커리큘럼도 착실히 진행되어 막바지에 접어들었지만 나의 음악적 성취는 아직 미숙한 수준이었다. 피아니스트들의 세계에서는 고등학생 때에 피아노를 전문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난 걸음마나 겨우 뗀 꼬맹이에 불과했다… 어린 나이에 커다란 성취를 이루고 이미 완성된 연주자가 된 다른 학생들을 보며 내가 한 때의 충동에 내 일신을 맡겨 버린 것이 아닐까 후회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피아노를 칠 때 더없이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고, 이만큼 열정을 쏟아 본 일도 달리 없기에 그저 필사적으로 다른 학생들을 따라잡는데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홀로 하루에 십 수 시간을 쏟아부어가며 연습에 매진하던 나는 자연스레 교수님의 눈에 띄게 되었고 날 가상하게 생각하신 교수님은 자신이 가르치며 수재라고 생각했다는 제자를 소개해 주셨다.

교수님이 소개해주신 분은 2년 전에 이곳을 졸업해  최고연주자과정을 밟고 있는 여성 연주자였다.


"아, 네가 교수님이 말씀하신 걔야?"


 교수님께서 주선하신 자리에서 만나본 그녀는 상쾌한 인상의 미인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고 그 인상에 어울리는 호탕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짬이 날 때마다 피아노 개인과외를 하고 있다고, 그리고 자기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꽤나 천재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어깨를 으쓱해 보일 때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 호탕한 성격대로, 레슨을 할 때의 지적도 용서가 없는 그런 직설적인 말 뿐이었다.


"연습을 10시간 씩 한다고? 너 미쳤어? 피아니스트는 손가락이 재산인데 그렇게 무식하게 혹사시키면 너 ㅈ돼!"


"끊어 칠 때는 확실하게 손을 떼! 뭐 이 피아노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잠시도 손을 떼고 싶지 않다 이런거야?"


"자세 똑바로 하라고! 덩치는 꽤 있어가지고 그렇게 구부정하니 앉으면 팔이 똑바로 뻗어지겠어?"


그녀의 지도를 받으면서 내 테크닉이 얼마나 부족하고 미숙한 지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그녀가 쏟아내는 독설과 잔소리는 내 부족한 부분을 아프게 찔러오는 바늘 같았지만… 그만큼 정확하고 필요한 지적이었다.


그렇게 다시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녀에게서 받은 1년의 레슨 동안 난 그 전의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성장을 이루었고, 작은 지역 콩쿨에 출전했다. 아쉽게도 입상은 하지 못했지만, 심사위원에게서 '테크닉은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음악의 심상을 상당히 잘 잡아내는 것 같다. 테크닉은 개발하면 되지만 이런 재능은 가지기가 쉽지 않다.'라는 평가를 들었다.


"그런 말을 들었어? 역시 교수님 눈은 정확하다니까. 물론 내가 잘 가르친 것도 있겠지만!"


이 사실을 내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는 그녀에게 말 해 주었더니, 자기가 더 기뻐하는 느낌이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는데… 내게 있는 잔소리 없는 잔소리 다 뱉으며 가르치고 있지만 사실 내가 그만두겠다고 하면 어쩌지 하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던 모양이다.


내가 그만두는 게 뭐가 아쉬운 걸까? 그런 의문점을 질문했더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좋아하니까 그렇지, 바보야."


여의치 않은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자기 꿈을 그리는 내 모습이 맘에 들었다는 모양이다.


정말 의외였지만 정말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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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피아노를 가르쳐주는 그녀와 ㅡ이제 '누나'라고 부르게 되었지만ㅡ 교제하게 되니 매일매일이 충실해지는 듯했다.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일을 하는 나날이 어찌 행복하지 않을까?  그렇게 몇개월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명절이 다가와 다시 본가에 들를 때가 되었다. 조부님께 오랜만에 좋은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을 것 같다.


"본가에 가 본다고? 아, 할아버지 밑에서 컸다고 했지. 그러면 나도 인사드리러 가야 되는 건가?

…흐흐, 농담이야. 그래도 언젠간 나도 같이 가자."


그렇게 배웅해주는 그녀와 잠시 작별하고 본가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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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에서 내리자 아저씨가 나를 마중하러 나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봐와서 익숙한 자동차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저씨 뿐 아니라 동생의 얼굴도 눈에 들어온다.


"안녕하십니까, 작은 도련님."


"아, 오랜만에 보네요… 그런데 동생이 왠일ㄹ…"


"아기씨도 슬슬 반려가 될 상대를 찾으신 모양입니다. 경쟁사의 후계자 되는 남성분과 요즘 자주 만나시고는 합니다… 이번에도 그분과 만나고 오시는 길입니다."


"그렇군요… 잘됐네요. 마침 저도 교제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뭐!?"


나와 아저씨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동생이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이쪽을 쏘아본다. 아니, 동생아. 내가 여자친구가 생긴 게 그렇게 놀랄 일이니… 너도 만나고 있는 사람 있다며…


"뭘… 뭘 그렇게 놀라. 내가 더 놀랐네."


"오라버니, 이제 나같은 건 진짜로 안중에 없는 모양이구나."


"…회포는 댁에 가서 푸시지요. 출발하겠습니다."


나와 동생 사이의 어색한 기류를 참다 못했는지 아저씨는 우리의 대화를 끊고 차를 출발시켰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동생의 얼굴은 그 어느때보다 차가웠고 차 안에서는 어떤 말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고 조부님께 인사를 드린 후 근황보고를 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시계를 보니 대화를 시작한 지 벌써 1시간이 지났다. 오랜만에 조부님을 뵈니 드리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던 탓일까. 피아니스트로서의 전망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부터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것까지 전부 말씀드리고, 조부님은 동생이 경영대학에서 천재적인 면모를 보여 조기졸업을 하고 회사일에 손을 대보고 있다는 걸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그러던 와중 갑작스레 조부님의 업무용 휴대폰의 벨이 울렸다.


"잠시 전화좀 받으마, 어. 자넨가. 무슨 일인가. 그랬었지.

…뭐라고? 알았다. 금방 가지.

미안하다. 이만 일어나 봐야겠구나. 급한 일이 생겼다."


무슨 일이시길래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나가시는지 궁금해하면서 잠에 들었지만, 조부님은 다음날까지도 돌아오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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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은 회계비리와 탈세에 관련해서 경찰조사를 받으시는 중입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한에서는 투명한 운영을 계속해 오신 분인데…"


이튿날 아침까지 돌아오시지 않은 조부님의 현 상황을 아저씨에게 듣고 나는 노령의 몸으로 밤새 조사를 받으신 조부님이 걱정되어 어쩔 수 없었다.  원체 정정하신 분이라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여도 조급한 마음은 전혀 진정되지 않았다.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방에 있는 피아노를 쳐보려 했으나… 내 방의 피아노는 건반이 산산조각 난 상태 그대로였다. 저번에 왔을 때 분명 고쳐져 있던 것 같은데, 착각이었나?


이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벨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누나♡'


전화를 받자 그녀의 유쾌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다.


"어제밤엔 잘 잤어? 지금 본가에 있는 거지?"


심란한 내 마음에 그나마 활력이 되어주는 그녀의 활기찬 목소리를 듣고, 난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났구나 싶어서 조금 눈물이 나왔다.


"매일 보다가 하루 안 보니까 벌써 보고싶네. 그래서 전화했어. 그러고보니까 너 아직 나한테 이 말 안해준거 알아?"


그러고보니 교제를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났는데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사랑을 표현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낯간지러워서 이런 말은 잘 못하는데…


"사랑해? 음, 나도 엄청 사랑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어버린 그녀. 나한테 먼저 시킨건 그쪽이면서 자기가 부끄러워 진 듯 하다. 이런 면이 정말 귀엽다.


"오라버니, 나한텐 그런 말 한번도 해준 적 없으면서 여자친구한테는 그리 쉽게 해주는구나."


혼자서 헤실헤실 웃고 있자니 뒤에서 여동생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요근래 몇년간 먼저 말을 걸어온 적이 없었는데?


"너 언제 거기ㅇ…"


그런 의문을 담은 나의 말은 끝맺음을 맺지 못하고 목구멍 속으로 말려들어갔다. 내 코와 입에 수상한 액체로 젖은 천쪼가리가 덮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내가 오라버니를 자꾸 무시하니까 내 관심을 끌려고 여자를 만든거지? 축하해. 대성공이야, 너무… 분해서… 분하고 분하고 분해서, 참을 수가 없잖아…! 오라버니이이!!!"


몇년 전 이 집을 떠날때 들었던, 여동생의 눈물과 원망이 섞인 비통한 외침을 마지막으로 내 의식은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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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 보니 내가 있는 곳은 내가 쓰러지기 전에 있었던 나의 방이었다. 시간이 지나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없어졌다는 것만 빼고는 의식을 잃기 전과 똑같은 광경이 나를 반겼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어나…려고 했지만 내 팔다리가 침대에 억센 가죽끈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오라버니, 잘잤어?"


"뭣 하러 날 이리 묶어놓은 거야…"


그리고 침대의 머리맡에는 여동생이 앉아 있었다. 옛날 내가 이 집을 나가겠다는 다짐을 처음 말했을 때처럼 속이 살짝 비쳐보이는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는 동생. 살결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는 것까지 그때와 같았다.


"내가 할아버지가 부정을 저질렀단 증거를 조작했던거고 검찰은 할아버지를 기소할 거라고 했어. 할아버지는 훌륭한 기업인이시지만… 정이 너무 많으셔서 탈이야. 내가 대놓고 수작질을 부리는데도 날 추궁하려는 생각조차 안 하시더라니까? 아무튼 이 말 듣고 오라버니가 화 낼 것 같아서. 좀 묶어 놨어."


"동생아… 그게 무슨…"


"할아버지가 조사받으시는동안 회사를 장악하려는 거지."


"네가… 어떻게 조부님께 그런 짓을…?"


"할아버지 걱정은 안 해도 돼. 이 나라가 어떤 나란데, 돈으로 안 되는게 어딨겠어? 그치만 나오셨을 때는… 상황 종료지."


동생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따라갈 수가 없다… 아니, 뇌가 처리를 거부하는 느낌이다. 내 귀여운 동생이 이런 짓을 했다고? 대체 왜?


"이번에야말로 오라버니는 영원히 여기서 사는거야. 아무 데도 못가. 오라버니가 이 집에 없는 몇년간 죽을 것만 같았어… 나 지금까지 오라버니만을 위해서 살았는데, 그런 오라버니가 사라져 버리니까…"


"내게 불만이 있었다면 내게 말했어야지. 조부님껜 왜 그런거야!"


"할아버지는… 오라버니랑 나의 사랑의 장애물밖엔 되지 않으니까? 이제 궁금한 건 다 알았어?"


말을 마친 여동생은 입고 있던 새하얀 원피스를 내리기 시작했다. 원피스 너머로 비쳐보이던 동생의 우윳빛 살결이 눈에 들어온다. 동생이 숨을 점점 거칠게 내쉬며 속옷만 입은 채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나는 내 팔다리를 고정하는 가죽끈을 풀어보려 발버둥을 쳤다.


"동생아, 난 네가 바라는 걸 줄 수 없다. 난 네 친오빠인데… 흡!!"


"오햐허니… 햐랑해… 츄웁… 쪽…"


"으븝!! 으으읍!"


이건 안 된다. 내가 이미 임자 있는 몸이라는 걸 떠나서, 이건 좀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하아, 하아아… 첫키스라서 조금 서툴지도 모르겠네. 오라버니, 여자친구랑 키스 했어? 섹스는?

…한 적 없구나~~~~~? 아, 어떡해. 나 너무 기뻐. 난 언젠가 오라버니랑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오라버니, 오라버니이…"


"잠깐! 네가 만나고 있다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야!"


"아, 그거? 좀만 홀리니까 바로 홀딱 빠져서는… 비자금만 좀 빨고 버렸어. 아무래도 사람 부리는데는 돈이 많이 들어가잖아?

이제 이 집엔 오라버니랑 나 말고는 아무도 없어… 아저씨도 해고했으니까. 처음엔 죽여버릴까 생각했는데 어릴 때 정을 생각해서 내쫓기만 했어. 나 잘했지, 오라버니?"


안돼. 이 아이는 내가 알던 그 순수한 동생이 아니야. 어쩌다 이렇게 됐지?

…나 때문이겠지. 이기적인 내가 동생의 애원을 뿌리치고 떠나버렸기에 동생이 이렇게 망가져 버렸다. 하지만 내가 꿈을 이루는 데에 다른 방법이 있었을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의 여자친구를 만날 수 있었을까?


"네가 이렇게 나와봤자 난 언젠가 여길 떠날 거야. 조부님도 나를 못 막으셨잖아."


"흐, 오라버니. 할아버지가 진짜로 오라버닐 막으려 했으면 오라버니는 이 집에서 한 발짝도 못나갔어. 그리고 난 할아버지처럼 무르지 않아. 거기, 문 밖에 너. 밑에서 뼈톱 가져오라고 해. 의사도 부르고."


"ㅌ…톱? 너 뭘 하려는…"


"그 가증스런 피아노를 다시는 못 치게 해줄게. 아, 그래도 난 착한 여동생이니까 오른손은 남겨 줄 생각이야. 아니, 왼손을 자르면 결혼반지를 못 끼는데… 역시 오른손을 잘라…?"


"동생…동생아, 그건 정말 아니야. 널 버리고 가서 정말 미안해. 그렇지만 손을 자르겠다는건…"


"오라버니는 내가 평생 돌봐줄 테니까 불편하게 살 걱정은 안 해도 돼?"


"으, 이거 풀어! 안돼, 손만은 안돼!"


공포심에 이리저리 몸부림을 쳐보지만 문 바깥에서 나는 발소리는 계속 가까워만 온다. 이내 의료용 뼈톱을 든 남자와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온다.


"우리 오라버니 안 아프게 마취 확실히 해. 오라버니가 조금이라도 아파하면 네 손도 잘라버릴 거야. 마취 없이."


"그 톱 치워! 손은 안된다고! 동생아, 제발 다시 생각해줘. 부탁이야…"


"오라버니는 내가 제발 가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을 때 들어줬어? 너, 준비 다 됐으면 빨리 시작해."


팔에 차가운 약물이 들어오자 밀려오는 부유감에 나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 흐려지는 시야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건반이 모두 박살나 있는 피아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