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최근 수정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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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박정희대통령묘소 |
본관 | |
가족 | |
학력 | |
종교 | |
신체 | 164cm, A형 |
재임기간 | 제5대 대통령 |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 |
제6대 대통령 | |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 |
제7대 대통령 | |
1971년 7월 1일 ~ 1972년 12월 26일 | |
제8대 대통령 | |
1972년 12월 27일 ~ 1978년 12월 26일 | |
제9대 대통령 | |
1978년 12월 27일 ~ 1979년 10월 26일 |
1. 틀 [편집]
ㄴ이 틀의 주인공. 원래는 이승만이었다.
2. 개요 [편집]
"내 一生 祖國과 民族을 爲하여."박정희를 상징하는 말.
3. 평가 [편집]
3.1. 공 [편집]
3.2. 과 [편집]
3.3. 결론 [편집]
근현대사에서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집권 초기의 순수했던 박정희는 대한민국을 진심으로 잘먹고 잘사는 나라로 만들고 싶어서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를 외치며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갈수록 흑화해 헌법 고쳐가며 출마한 대선에서[10] 온갖 공작을 동원해 김대중을 상대로 승리하긴 했지만, 정말 아슬아슬한 승리였기에 이때부터 박정희는 본인의 리더십을 의심하게 되고, 결국 권력에 맛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된 그는 유신 헌법을 선포하고 만다. 이는 그에게 너무나도 큰 악수가 되었고 부마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박정희는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무력 진압을 논의했고 간신배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백만 명 죽였는데 우리가 1,2백 죽인다고 별 거 있겠습니까' ㅇㅈㄹ 하는 와중 김재규는 갈수록 광기에 침식되는 박정희를 저지하려 총을 든 결과, 박정희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단명하고 말았다. 환갑을 막 넘긴 나이였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그의 비리와 과는 70년대에 집중되어 있기에 유신 헌법을 선포하지 않고 물러났더라면 호화로운 여생을 보내며 좌우 가리지 않는 구국의 영웅, 영원한 민족의 영도자로 추앙받았을 것이다.
근데 닭대가리 딸 때문에 욕 먹는건 좀 억울한 감이 없지는 않다.
닭 이 썅년은 아비 후광 아니었으면 정계에 발도 못 들였을 년이 아비 평가까지 깎아먹으면서 존나 깝쳐댄다...
그러나 그는 갈수록 흑화해 헌법 고쳐가며 출마한 대선에서[10] 온갖 공작을 동원해 김대중을 상대로 승리하긴 했지만, 정말 아슬아슬한 승리였기에 이때부터 박정희는 본인의 리더십을 의심하게 되고, 결국 권력에 맛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된 그는 유신 헌법을 선포하고 만다. 이는 그에게 너무나도 큰 악수가 되었고 부마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박정희는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무력 진압을 논의했고 간신배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백만 명 죽였는데 우리가 1,2백 죽인다고 별 거 있겠습니까' ㅇㅈㄹ 하는 와중 김재규는 갈수록 광기에 침식되는 박정희를 저지하려 총을 든 결과, 박정희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단명하고 말았다. 환갑을 막 넘긴 나이였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그의 비리와 과는 70년대에 집중되어 있기에 유신 헌법을 선포하지 않고 물러났더라면 호화로운 여생을 보내며 좌우 가리지 않는 구국의 영웅, 영원한 민족의 영도자로 추앙받았을 것이다.
근데 닭대가리 딸 때문에 욕 먹는건 좀 억울한 감이 없지는 않다.
닭 이 썅년은 아비 후광 아니었으면 정계에 발도 못 들였을 년이 아비 평가까지 깎아먹으면서 존나 깝쳐댄다...
4. 여담 [편집]
- 틀딱들에게 이승만과 함께 신격화되는 대통령인데 정작 이 둘의 사이는 매우 안 좋았다. 김구 수준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꽤 오른쪽이었던 이승만은 남로당에 한때 몸담았던 박정희를 좋게 볼 리가 없었고 박정희를 사형시키려고 한 적도 있으며 계속 과거 행적을 들먹이며 박정희의 진급을 수차례 누락시켰다. 또한 박정희의 형 박상희를 재판도 없이 총살시켜버린 것도 이승만이다.
이후 박정희는 5.16을 일으키고 헌법에 아예 '불의에 항거한 4.19 정신'을 박아넣는 등 이승만을 권력에 눈먼 무능한 노친네로 깎아내리며 그의 라이벌격이었던 김구를 치켜세웠다.
다만 5.16을 같이 일으켰던 김신 장군이 김구의 아들이었기 때문인 것도 없지는 않다.
[1] 직강공파 29세손, 혁거세 65세손 ◯희(熙) 항렬.[2] 전처 김호남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3]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4] 제2공화국의 계획안이지만 이걸 실행에 옮긴 건 매우 큰 공이다[5] 국군은 엄청난 속도로 현대화되었고 실전 경험도 쌓아 아주 좋은 경험이 되었다. 젊은이들의 피 값으로 이뤄진 나라 발전이다. 참전용사 분들을 항상 잊지 말고 존경하자.[6] 이건 역효과도 있다. 이촌향도 현상 심화, 농촌 고령화 심화 등[7]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서울 지하철 등[8] 삼권분립을 완전히 박살냈었다.[9] 동아일보 기자 출신의 언론인 김충식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이 나중에 김영삼에게 '미안하게 되었다'며 우회적으로 사과했다고 언급했다.[10] 바로 박정희 때 대통령 나이 제한 40세가 생겼다. 다만 정말로 경쟁자를 배제하기 위한 목적이었는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