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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후세인/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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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위 문서 : 사담 후세인
1. 유년기2. 젊은 시절3. 정치 활동
3.1. 학생 운동3.2. 시리아로 망명하다3.3. 라마단 혁명, 그리고 내부 분란3.4. 7·17 혁명과 집권
4. 바트당 정권
4.1. 바크르 정권의 '악역'이 되다4.2. 바트당의 2인자
5. 23년간의 문민독재
5.1. 이란-이라크 전쟁5.2. 장기 독재와 공포정치5.3. 걸프 전쟁5.4. 20세기 말
6. 이라크 전쟁7. 체포 이후
7.1. 두자일 학살 재판7.2. 안팔 학살 재판
8. 최후

1. 유년기 [편집]

사담 후세인은 1937년 살라주 티크리트 부든 알-아우자 마을 농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후세인 압둘 마지드는 사담이 태어났을 때는 이미 고인이었고, 어머니 수브하 탈파는 목동인 이브라힘 하산과 재혼해 3명의 자녀를 낳았다.

하지만 이브라힘 하산은 사담을 가정 폭력하기 일수였고, 빽이 없는데 공부도 못하고 고아라는 이유로 많은 따돌림을 당하다 이를 견디다 못해 집을 떠나 평소에 자신이 존경하던 이라크 왕국군 육군 소위 출신인 교사 외삼촌 하이랄라 탈파의 집으로 향했다.

2. 젊은 시절 [편집]

사담 후세인 / Saddam Hussein
젊은 시절의 후세인.
하이랄라 탈파는 1941년 라쉬드 알리 반란에 참여했다가 군에서 면직되어 5년간 투옥된 경력이 있었다. 하이랄라 탈파는 후세인을 맞아들여 교육을 시켜주었다.

사담의 적에 굴하지 않는 성격과 민족주의적 범아랍주의 사상(와타니야)은 외숙부의 영향이라고 한다.

1955년 18세 때에 중앙정부의 교육장관이 된 하이랄라와 함께 바그다드로 올라와, 2년 뒤 바트당에 입당한다. 1950년대의 아랍 제국에서는 아랍 민족주의가 고조되어, 사담도 이집트의 군사 지도자인 가말 압델 나세르에 영향을 받았다.

3. 정치 활동 [편집]

3.1. 학생 운동 [편집]

1958년 이라크에서는 군부에 의해 7·14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누리 알-사이드의 친영(親英) 왕정이 축출당하고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파이살 2세를 살해하고 정권을 잡은 압둘 알-카림 카심은 아랍 민족주의에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바트당은 1959년에 카심 수상 암살미수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에 실행범으로서 관여한 사담은 카심의 경호원으로부터 총격을 받아 다리를 다치지만, 면도칼로 다리에 박힌 총알을 파낸 뒤, 체포를 피하기 위해 유목민으로 변장해 티그리스강을 헤엄쳐 시리아에 망명하고, 후에 이집트로 도피했다.

3.2. 시리아로 망명하다 [편집]

이후 시리아로 망명했는데, 시리아 체류 중 바트당의 창시자 미셸 아플라크의 총애를 받았다.

망명 중 이라크에서 열린 궐석재판에서 사담은 사형 선고를 받았고, 사담은 다시 이집트에서 망명 생활을 보내면서 고등교육을 받아 카이로 대학 법학부에 다녔다.

3.3. 라마단 혁명, 그리고 내부 분란 [편집]

1963년에 압둘 살람 아리프 장군이 라마단 혁명을 일으켜 카심 정권을 붕괴시키자, 사담은 귀국해 바트당의 농민국장이 되었다. 이 해에 사지다 탈파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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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라마단 혁명 치하의 이라크 정부는 바트당과 나세프파가 성향 차이로 갈등을 빚었고, 11월 18일 아리프 대통령은 군부의 지지를 받아 바트당을 내각에서 축출했고, 나세르파 정권을 탄생시켰다.

그래서 1964년 가을, 사담은 아리프 대통령의 암살을 계획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 투옥당했다가 2년 뒤 그는 간수를 속여 탈옥해 지하 투쟁 활동을 벌였다.

그러다 압둘 살람 아리프 대통령이 비행 사고로 사망하자 살람 아리프의 형 압둘 라흐만 아리프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그리고 그는 국정 운영 방향에서 군부와 크게 갈등을 빚었고, 1966년에는 쿠데타 미수까지 벌어지며 이라크에는 다시 혼란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3.4. 7·17 혁명과 집권 [편집]

1966년, 아흐메드 하산 알-바크르 장군은 사담을 비롯한 바트당 세력과 군부를 규합해 아리프 대통령 축출을 목표로 한 쿠데타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968년 7월 17일, 바트당의 쿠데타 세력이 국방부, 발전소, 방송국 등 주요 시설을 점령하고 정부 전복을 선포한 뒤 아리프를 비행기에 태워 국외 추방함으로써 무혈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는 바트당이 정부 내의 알-나이프와 이브라힘 다우드와 미리 내통, 직위를 약속하며 쿠데타에 참여하도록 전향시켜 둔 덕에 성공하였는데, 이 둘은 쿠데타 이후 숙청되어 국외로 추방당하였다.

이 결과 바트당 정권이 수립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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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바트당 정권 [편집]

4.1. 바크르 정권의 '악역'이 되다 [편집]

사담은 바크르 정권에 입각 하진 않았지만, 치안기관에 종사해 바크르 대통령의 권력 강화에 협력했다.

당시 아랍 문화권에서는 피의 복수 관습[1]으로 인해 치안첩보를 전담하는 '일반사무국'의 수장 자리는 아무도 맡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 사담 후세인이 '악역을 맡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일하겠다'고 공언하여, 그가 일반사무국, 즉 첩보치안기구의 수장이 된다.

그렇게 사담은 바크르 대통령의 신임을 얻게 되고, 그 결과 1969년에 혁명 지도 평의회(RCC) 부의장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사담은 이라크 바트당을 시리아 바트당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범아랍주의를 주창하면서도, 숙부 하이랄라가 주창한 이라크 민족주의를 국가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사상에 대해 그는 '이라크 인민은 문명의 발상지인 고대 메소포타미아 백성의 자손이다'라고 말했다.

1973년 6월에 시아파인 나짐 카자르 내무치안장관이 바크르와 사담의 암살을 계획하지만 사전에 비밀이 유출되어 실패했고, 관련자 전원이 사형에 처해졌다.

4.2. 바트당의 2인자 [편집]

사담 후세인 / Saddam Hussein
부통령 시절의 사담의 모습.
옆에 있는 인물들은 당시 시리아 대통령 하페즈 알-아사드
당시 알제리 대통령이었던 와우아리 부메디엔,
그리고 당시 알제리 외교부 장관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2]이다.
그는 혁명 지도 평의회(RCC) 부의장에 임명된 이후 이라크를 적극적으로 개혁하며 이라크의 국력을 강화했다.

사담의 가장 큰 업적으로는 IPC(이라크석유조합)의 국유화를 들 수 있다. 이라크 석유조합은 서방 석유화학기업의 이라크 유전개발 조합으로서, 이라크 유전의 수익은 모두 그들이 나눠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독립 이후 계속해서 국유화 여론이 등장했으나, 오랜 기간 동안 이라크 정계가 쿠데타로 정신이 없던 탓에 전면 국유화는 계속해서 미뤄지던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 사담은 서구권의 반발을 IPC의 국유화를 단행하면서,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여 소련이나 폴란드 등의 공산국가들, 프랑스 등의 일부 국가를 새로운 수출고객으로 준비해놓고, 서구의 위협에 대응하여 소련의 지원을 약속받는 등 매우 주도면밀하고 다방면에서 철저한 준비를 했다. 당시 전문가들조차도 놀랄 만큼 세부적인 면까지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결과 석유 완전 국유화는 대성공으로 끝났고, 기존의 고객에 새롭게 사담이 포섭한 고객들이 더해지며 수출처가 확대되었고, 이라크의 재정 수입은 엄청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담은 이렇게 벌어들인 오일 머니를 대규모 인프라 투자 사업에 이용했는데, 대표적으로는 문맹 퇴치, 고속도로와 전기 사업, 전화 보급, 여성의 사회 참여 강화, 의무 교육 확대, 과학 기술 발전, 명예 살인 등 악습 폐지 등의 정책을 펼쳤다.

또한 그는 사막화 되어 가던 이라크 국토를 다시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옥토로 부활시키고자 대형 프로젝트를 기획했고, 시아파와 쿠르드족에 대한 사회 간접 자본 우선 보급을 위한 이라크 민족 통합 정책을 펼쳤다. 이런 파격적인 정책으로 사담은 전세계에 극찬을 받으며, 서구권 국가들은 이라크를 다시 보게 되었고, 현대까지도 사담이 고평가 받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비록 말년에 추해지기는 했다만 티토에 버금갈 정도로 개념 있는 지도자였다는 것. 괜히 이라크의 박정희, 티토란 평가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특히 의무 교육과 문맹 퇴치 운동은 성황리에 마무리 되어, 이라크는 문맹률이 최저인 국가가 되었고, 유네스코에서 극찬을 받으며 상을 수상 받기도 했다. 이 결과 쿠데타와 잦은 내부 분란으로 바람 잘날없었던 이라크의 정국을 안정시켜 이라크의 1인당 국민소득을 중상위권 국가로까지 성장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파격적인 조치로 사담의 인기가 점차 올라가자 바크르는 위기감을 느끼고,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잡고자 했는데, 이 시기부터 바크르는 시리아하페즈 알-아사드 대통령과 접촉하며 이라크-시리아 통일 국가 형성을 주도하고자 했다.

바크르는 하페즈를 포섭하기 위해 하페즈를 통일 국가의 1인자로 삼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했는데, 하페즈는 이 제안이 성사될 경우 이라크가 압도적인 국력과 인구수로 시리아를 집어 삼킬 거라 경계하며 협상 결렬을 선언했고, 사담도 이 계획이 성사될 경우 자신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반대 의사를 표했다. 그리고 통일 논의는 결렬됐다.

이후 사담은 바크르에 대한 퇴임 압박을 하기 시작했고, 정부 내각도 사담을 지지하며 끝내 바크르는 사임하게 된다. 이 당시 바크르가 건강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는 점도 감안하긴 해야 되지만.

5. 23년간의 문민독재 [편집]

사담 후세인 / Saddam Hussein
대통령 시절의 사담.
대통령 취임 후 사담 후세인은, 반대파들의 반역 모의를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바트당 당회의를 먼저 소집했는데, 보잘 것 없는 홀에서 삼엄한 경비 속에 열린 당회의에는 1천명의 당 간부들이 소집되었는데, 바트당 지도자 압둘 후세인이 당 중진 4명과 함께 시리아의 지령을 받고 후세인을 암살코자 했다는 자백문을 읽어내렸다.

이후 사담은 68명의 이름을 읽어내리며, 반역자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약속했고, 앞서 말한 68인의 바트당 고위 당원을 숙청하며 바트당의 당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5.1. 이란-이라크 전쟁 [편집]

사담 후세인 / Saddam Hussein
흔히들 사담의 이란-이라크 전쟁을 뻘짓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사담이 이란에 전쟁을 일으킨 건 호메이니의 이란 혁명 이후, 이라크의 시아파에 가해지던 시아파 혁명 선동과 그에 따르는 온건 시아파 성직자 모하마드 바키르 알-사드르[3]의 반정부 항쟁 등에 대해, 내부적으로는 치안첩보의 강화를 통해 대처함과 동시에, 혁명 선동의 본거지인 이란에 대해 군사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정치, 외교적 우위를 명백히 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결행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나름의 합리적인 근거를 갖고 추진한 것이었다. 당시 이라크는 고유가로 국력을 착실히 키워 경제적으로 개도국의 수준을 충분히 넘어 이제는 어느 정도 잘 먹고 잘 사는 국가가 되었고,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력도 충실히 키웠지만 그럼에도 이란에 비하면 인구와 국토가 턱 없이 적은 나라였다. 그러다 보니 이란이 제대로 마음 먹고 부국 강병을 추구할 경우, 이라크가 뒤쳐질 수밖에 없다는 불안감이 컸다. 루홀라 호메이니란 인물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만큼, 초반에 이란의 기를 꺾어서 이란을 수그리게 할 의도도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원래, 이란과는 팔레비 왕조 시대부터 국경을 흐르는 사트 알-아랍 수로의 영유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었으며 역사적인 이라크의 반(反) 이란 감정도 전쟁 분위기에 한 몫 했다.

그렇게 사담은 이란을 선제 타격하며 이란-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중동 전역에 파급하는 것을 무서워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권은 이라크를 지원하기 위해 1983년 12월 19일에 도널드 럼즈펠드 당시 특별 교섭인을 특사로 이라크에 파견해 사담과 90분간 회담하였다. 1984년에는 이라크와 국교를 회복해, 1988년까지 거액의 무기 공급 및 CIA에 의한 정보 제공을 실시했다.

이 시기 중동에 석유 이권을 가지는 영국이나 프랑스, 그리고 캅카스를 중심으로 많은 무슬림 국민이 있던 소비에트 연방 역시 이란 이슬람 혁명의 파급을 우려해 이라크에 무기 원조를 시작으로 하는 지원을 실시하였다. 또한, 이라크로 화학 병기·생물병기의 원료가 미국, 영국, 프랑스, 동독, 네덜란드의 기업으로부터 수출되었다.

개전 초에는 이라크가 우세했지만, 차츰 물량이나 병력이 우수한 이란이 반격해 이라크 영내에까지 침입한다. 또, 북부에서는 이란과 동맹을 맺은 쿠르드인 세력이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어 무장투쟁을 개시했다.

호메이니는 수그리기는 커녕 되려 페르시아 민족주의로 이란인들을 단결시키며, 이 결과 이란과의 전쟁은 양측의 소모전이 되어버린다. 또한 양국이 서로 전비를 댈려고 석유수출량을 경쟁적으로 늘리는 바람에 유가가 점차 하락세에 접어들면서 이란과 이라크 양국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되었다.

결국 수니파 국가들의 지원을 등에 업어서 간신히 버티고 있던 사담과 당시 이란 혁명으로 인해 국제적으로 고립이 심화되고 특히 전쟁 말기에 벌어졌던 도시간 탄도 미사일 공방전에서의 열세로 인해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바닥난 이란과의 이해타산이 맞으면서 종전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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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장기 독재와 공포정치 [편집]

사담 정부, 특히 1980년대의 사담은 공포정치를 시행했는데, 내각 관료들은 그와 차를 마실 때에 절대로 먼저 차를 마셔서는 안 되었고, 그가 말하기 전에는 함부로 입을 놀려서도 안 되었으며, 항상 정자세로 경청을 해야만 했으며, 나갈 때에는 등을 보이지 않고 뒷걸음질로 나가야만 했다. 심지어 국회 연설 중 한 의원이 동료 의원에게 쪽지를 건네는 모습을 보고서, 음모를 꾸민다며 즉석에서 그 의원을 총으로 사살해버렸다. 그러자 국회는 한순간에 공포에 휩싸였고, 겁에 질린 의원들의 두려움 섞인 박수소리가 이어지자, 사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연설을 계속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정부에게 지지를 표하지 않는 모든 집회를 법적으로 금지시켰고, 우상화도 착착 진행해 이라크 전역에 자신의 동상을 세웠고 관공서나 집집마다 자신의 사진을 걸도록 했다.

5.3. 걸프 전쟁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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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라크 전쟁 직후 바트 이라크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주변국들한테 큰 빚을 지게 되는데, 종전 이후 쿠웨이트를 비롯한 다수 아랍 국가들은 이라크에게 빚을 갚으라며 압박에 나섰고, 특히 쿠웨이트는 전쟁 후반부부터는 내정 간섭에 돌입했다.

이에 사담은 고갈된 재정을 매꾸기 위해 쿠웨이트를 침공하며 쿠웨이트의 풍부한 석유를 차지하고자 했다. 또한 쿠웨이트를 이라크로 병합할 시, 이라크의 지리적 약점인 좁은 해안선을 해결할 수 있었다.

걸프 전쟁 개시 이틀만에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쉽게 점령했지만, UN은 침공을 국제법 위반으로 규정하고 이라크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한다. 사담이 이를 무시하자 미국을 주축으로 35개국이 참가한 다국적군이 세계 4위 규모였던 이라크군을 무참히 패퇴시킨다. 이라크는 결국 쿠웨이트에서 철수하고 UN의 엄격한 제재를 받아 경제가 붕괴된다.

사담의 철권 통치가 패전으로 흔들리자 곧바로 이라크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걸프전 종식 다음날인 3월 1일 바스라에서 귀환하던 군인들이 후세인의 초상화를 포격한 것을 시작으로 시아파가 주로 거주하던 남부 지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관공서와 교도소, 바트당 지부가 공격당한다. 탈영병, 이슬람주의자, 공산주의자, 일부 수니파, 바트당 내 반 사담 세력까지 참여하면서 대부분의 도시들이 장악되지만 이들은 사담 타도 외에는 공동의 목적도 전략도 없었다. 북부 지방에서는 3월 5일 쿠르드족도 "이라크에는 민주주의, 쿠르드족에는 자치"라는 구호로 반란을 일으켜 모술을 제외하고 모든 주요 도시들을 전투도 없이 장악한다. 이들도 이념에 따라 여러 정파로 나누어져 있긴 했지만 남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조직되어 있었고 목표도 명확했다.

반란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18개 주들 중 14개가 반란군 손에 넘어갔지만 후세인은 곧 반격에 나선다. 수도 바그다드는 반체제 세력의 기반이 약했기에 시아파가 거주하는 빈민가 사담시티에서 쉽게 제압된 봉기를 제외하면 정부가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친위대인 특수 공화국 수비대는 여전히 사담에 충성하고 있는데다 반란군의 주축인 이라크군 탈영병들보다 무장이 잘 되어 있었다. 특히 고정 익기를 금지한 종전협정에서 미국이 전후 복구를 위해 헬리콥터 사용을 허가한 것을 악용했다. 파괴된 도로를 대신한 교통 수단으로 헬리콥터 허락을 받았지만 반란군 점령 도시에서 무차별적 사살하는데 이용했다. 3월 말에는 도시 지역은 모두 정부군이 재장악한다.

미국이 남부를 비행금지구역으로 설정하자 사담은 미사일로 1994년까지 전투를 계속한다. 북부는 산지에서 전투가 이어지다 4월 미국이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고, 10월까지 전투가 이어진 끝에 양측의 협정으로 쿠르드족 자치 지역이 형성된다.

사담은 정권을 유지했지만 그 대가는 컸다. 180만명의 난민이 발생하고 25,000명에서 180,000까지 대부분 민간인인 인원이 사망했다.

5.4. 20세기 말 [편집]

걸프전 이후에는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었고, 이 때문에 나라 자체가 가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2000년대 이후로는 다시 서방과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려 했다.

본래 후세인 정권은 친소였으나 친소에서 친미로 돌아섰고 이후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이란과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의 성과는 사실상 없다 싶이 했고 빚만 제대로 늘어난 건 물론, 근처 사우디나 쿠웨이트 등 이란-이라크 전쟁 때 이라크를 지원해줬던 국가들이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내정 간섭을 하자 끝내 걸프전을 벌이면서 제1세계 제2세계 모두한테 버림 받고 최종적으로는 제3세계로 넘어간 상황이었다.

6. 이라크 전쟁 [편집]

사담 후세인 / Saddam Hussein
무너지는 후세인 동상.
사담 후세인 / Saddam Hussein
미국의 공습으로 폐허가 된 바그다드의 이라크 대통령 궁.
그러던 중, 2001년 9.11 테러가 발발하며 전세계가 분노하던 와중, 사담은 '신의 천벌을 받았구나'라며 미국을 도발하는 정신 나간 행보를 보였다.

물론 사담 역시도 마냥 미국을 적으로 돌릴 생각은 없던지라, 뒤로는 '우리 이라크도 테러로 고생하는데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협조할 용의가 있다.'며 미국과의 물밑 접촉을 시도했으나, 하필 상대가 조지 W. 부시네오콘들이었던 탓에 사담 정권은 알-카에다를 지원한다는 누명을 쓰고 2003년 미군의 전면 침공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결국 미국에 의해 한 달만에 이라크 수도가 점령당하면서 사담 후세인의 독재도 막을 내렸다.

사담은 지하 저항 세력으로 전환해 저항을 이어갔고, 지하 땅굴에서 머물렀지만 12월 13일, 미군 특수부대의 레드 던 작전으로 미국과 누리 알-말리키 총리가 이끄는 시아파 정부에 의해 체포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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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체포 이후 [편집]

사담 후세인 / Saddam Hussein
체포된 후세인.
사담 후세인 / Saddam Hussein
체포 이후 교도소에서 회담하는 사담과 찰라비.
체포 이후 사담은 미국 가수 메리 J 블라이즈의 노래 ‘패밀리 어페어’를 즐겨 들었고, 아침엔 늘 오믈렛-머핀-과일 먹었는데, 은근히 까탈스러워서 오믈렛이 찢어졌을 경우엔 먹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간수들의 평가에 따르면 예의 바른 남자였다고 평하는데, 한 의무병이 친형제가 죽었다고 하자 사담이 그를 끌어안더니 “내가 너의 형제가 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교도관들은 사담을 할아버지처럼 대했고, 사담이 사형됐을 때 진심으로 슬퍼했다. #

7.1. 두자일 학살 재판 [편집]

사담 후세인 / Saddam Hussein
두자일 학살에 대한 전쟁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는 피고인들.
직후 사담과 그의 측근들은 두자일 및 안팔 학살에 대해서 재판을 받게 되는데, 두자일 지역의 시아파를 탄압하고 잔뜩 살해한 혐의로 사담 후세인을 비롯한 8인(사담 후세인 · 바르잔 이브라힘 알-티크리티 · 타하 야신 라마단 · 아와드 하메드 알-반다르 · 압둘라 카젬 루이드 · 미제르 압둘라 루이드 · 알리 대엠 알리 · 무함마드 아자위 알리)이 기소되었다. #

이 재판에서 사담 후세인은 혐의를 부인했으나 끝내 모든 혐의가 인정되어 사형에 처해졌고, 후세인의 이복동생이자 측근, 동시에 정적이었던 바르잔 알-티크리티도 끝내 사형을 선고 받고 사형에 쳐해졌다. 바르잔은 재판 과정에서 여러 차례 강하게 항의하며 혼란을 일으켰고, 이 때문에 여러 차례 퇴장당하기까지 했다.

부통령 타하 야신 라마단은 본래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으나 검사가 항소해 항소심이 열리게 됐고, 2심에서 사형으로 형이 뒤집히며 끝내 사형을 선고받았다. 여담으로 라마단은 본래 쿠르드족 출신이지만 쿠르드족을 탄압한 후세인 정권에 협력했고, 그 죄로 같은 쿠르드족인 쿠르디스탄 애국 동맹에게 붙잡혀 사형당했다.

아와드 하메드 알-반다르는 두자일 지역에서의 사법 살인을 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외의 압둘라 카젬 루이드, 미제르 압둘라 루이드, 알리 대엠 알리, 무함마드 아자위 알리는 바트당 지역 관계자 출신으로, 앞선 세 사람은 15년형, 무함마드 아자위 알리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여담으로 미제르는 카젬의 아들.

재판 이후 얼마 안 가 2011년 카젬이 감옥에서 옥사했으며, 알리도 2015년 감옥에서 옥사했다. 무죄 판결을 받은 아자위 알리도 얼마 안 가 의문사했다. 미제르는 15년간 감옥에서 복역하다 2021년 석방됐다.

7.2. 안팔 학살 재판 [편집]

사담 후세인 / Saddam Hussein
안팔 학살에 대한 전쟁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는 피고인들.
또한 안팔 지역에서 발발한 쿠르드족 탄압 및 학살 사건을 처벌하기 위해 2003년 안팔 재판이 열리게 된다. 해당 재판도 사담 후세인을 비롯한 7인(알리 하산 알-마지드 · 술탄 하심 · 후세인 라시드 알-티크리티 · 파한 주부리 · 사베르 압델 아지즈 알-두리 · 타허 타우피크 알-아니 · 사담 후세인)을 기소했다. 다만 후세인은 두자일 재판 직후 바로 사형당해 실질적으로는 이번 재판을 받지 않았다.

이 재판은 앞선 두자일 재판이 후세인을 사형시키기 위한 재판이었듯, 이쪽은 '케미컬 알리' 알리 하산 알-마지드를 사형시키기 위한 재판이었는데, 화학 무기를 남용해 쿠르드족을 학살했고 이것 말고도 다양한 전쟁 범죄에 엮여 있어 재판 시작 전부터 반드시 사형시키겠다고 엄포를 둔 상황이었다.

당연히 케미컬 알리 본인은 모든 혐의를 부인함과 동시에 탄원서 제출조차 본인은 죄인이 아니기 때문에 안 한다며 거부해 법원이 그를 대리해서 탄원서를 썼고, 쿠르드족 마을 내에서 이란의 스파이가 많았다고 주장하며 판사와 여러 차례 대립했으나 끝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여담으로 재판 과정에서 찢재명 마냥 쌍욕을 해대면서 쿠르드족 전부 죽여버리겠다 하는 녹취록이 공개되기도 했다.

반면 술탄 하심과 사베르 압델 아지즈 알-두리의 경우에는 대중들의 반발이 컸는데, 이 쪽은 나름대로 후세인 정부 내에서도 상식인이었고 능력도 있었으며 대중들의 여론도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술탄 하심은 이라크의 가장 유능했던 군 사령관으로 평가받았고, 사베르 압델 알-두리는 본인이 주지사로 일했던 카르발라 지역 주민들이 대놓고 반발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증거물을 제출하기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무죄를 입증하고자 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술탄 하심은 사형, 사베르 압델 알-두리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다만 술탄 하심 같은 경우에는 사형을 선고 받고도 당시 이라크 대통령 잘랄 탈라바니가 대놓고 옹호해주면서 사형 집행까지는 피해갈 수 있었고[4], 여러 차례 사면 논의가 나오기도 했으나 2020년 감옥에서 옥사했다. 사베르 압델 알-두리는 2022년 기준으로도 여전히 복역 중.

후세인 라시드 알-티크리티와 파한 주부리는 이라크군 장교였는데, 각각 사형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다만 후세인 라시드는 복역 중 나이가 70세를 넘기면서 사형 집행은 되지 않았다. 파한 주부리는 2013년에 지병으로 사망했고, 후세인 라시드는 2022년 기준 현재까지 복역 중.

모술 주지사, 바트당 이라크 북부 사무총장 등에 재임한 타허 타우피크 알-아니는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됐다. 이후 행방은 불명이지만 일단 살아있기는 한 듯.

8. 최후 [편집]

사담 후세인 / Saddam Hussein
재판을 받는 사담.
이후 사담의 신상은 두자일 학살 및 안팔 학살에 대한 재판으로 넘어간다.

재판 과정에서 사담은 생각보다 자신을 잘 변호했는데, 사담은 나름대로 일관된 신념을 보여주며 자신을 잘 변호했다. 특히나 재판 과정 자체가 혼란의 연속이었는데, 사담 측 변호사가 시아파 구역에서 살해되거나 사담이 재판을 거부하고 단식을 선언하는 등 온갖 개판이 벌어지면서 재판이 1년간 질질 끌렸다.

그러나 사담은 변호인단의 조언을 뿌리치고 자신은 예나 지금이나 오직 단 한 명뿐인 이라크 대통령이며 지금의 대통령은 가짜라는 발언을 하며 이라크 정책의 모든 책임자임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는 바람에 재판부는 사담 유죄 입증의 가닥을 잡았고, 결국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미국은 사담을 포섭하여 이후 사담 지지세력의 저항을 예방하기 위해, 도널드 럼즈펠드를 보내서 사담과 살아남은 가족들의 안위를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협상을 제시했지만, 사담은 럼즈펠드를 비웃으며, "죽은 국민들 목숨을 돌려주면 생각해보겠다."라고 협상을 사실상 거부했다. 그는 럼즈펠드에게 "대량살상무기는 찾았냐?"라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사담 후세인 / Saddam Hussein
사형 당하기 직전의 사담.
이후 3일 만에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이는 사담의 나이가 70대에 가까워지고 있단 점 때문이었다. 이라크 형법상 이슬람 율법에 따라 70세 이상의 사형수에게는 사형을 선고하지 못 하게 되어 있는데, 당시 사담의 나이는 69세였고 이틀[5]만 있으면 70세가 되어버린다는 것. 이 때문에 재판이 끝나자마자 목이 사형대에 매달리게 되었다.

사담은 사형을 당할 때도 추하게 뒤진 독재자들과는 달리 나름대로 최후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는데, 용수를 거부하고 오히려 총살형을 요구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사담 처형 직후 2007년 1월까지 전세계에서 그의 교수형을 모방하다 죽은 어린이가 속출하기도 했는데, 2007년 1월 9일 기준으로 사망자는 12명에 달했다. 추가적으로 누구의 소행인지는 몰라도 사담의 사형 장면이 유출되어 국제 사회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사담 사후 사담의 재판에 대한 7개국(한국, 스페인, 멕시코,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미국) 국민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국민은 75%가 재판이 공정했다고 평가했으나, 한국 국민은 20%만이 공정했다고 평가해 조사한 국가 국민들 중 가장 평가가 박했다. #
[1] 부족사회인 아랍인들 사이에서는, 부족의 구성원이 살해당하면 그 살해범에게 반드시 보복을 해야만 부족의 명예를 유지할 수 있다는 관습이 굳건했다. 이런 보복을 면하려면 정당한 이유가 있든지, 사죄와 보상이 함께 이루어져야만 했다.[2] 훗날 알제리 대통령에 집권해 20여년간 독재 정치를 펼치게 된다.[3] 알-사드르 일가는 이라크 시아파 공동체의 주요 인사들로, 호메이니와 함께 이라크에 이슬람주의를 퍼트리는 데에 한몫했다. 모하마드 바키르 사후에는 친인척인 모하마드 사데크 알-사드르와 그의 아들 무크타다 알-사드르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4] 잘랄 탈라바니는 술탄 하심이 여러 차례 후세인에게 협박을 받았다는 점을 들어 그를 옹호했는데, 실제로 이라크 전쟁 시기에는 후세인과 대립한 죄로 가택연금에 쳐해져 있었다.[5] 사형 집행일이 2006년 12월 30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