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말기, 혼란한 중국 대륙을 피해 타국으로 떠나는 화교들이 많았는데 구한말 조선으로 온 사람들도 있었음.

1910년대에 들어서면 도시노동자와 농촌노동자 중 화교 비중이 매우 높아짐.

화교들은 특유의 조직력을 통해 자체적으로 파견된 각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했고, 기술력이 좋으며 임금도 싸서 고용주들에게 인기가 많았음.

결국 1910년대에 조선총독부는 각 기업과 농장이 되도록 화교보다는 일본제국 자국민(조선인, 일본인)을 고용토록 했지만 업주들의 화교 선호는 날로 늘어났음.





1920년대에는 이미 경성, 인천, 평양, 부산, 전주, 신의주 등 주요도시에는 차이나타운이 크게 형성되어 있었음.  

특히 20년대는 도시와 산업의 발달로 농촌에서 일자리 찾아 올라온 도시 빈민들이 많았는데, 비슷한 시기에 중국이 군벌로 인해 혼란하니 화교들이 엄청나게 밀려들어오기 시작함. 

어느 정도냐면 한 도시에 한달간 들어오는 화교수가 수천명이었음.   


이는 당연히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조선인들의 눈엣가시였고 혐중이 뿌리깊게 자리잡기 시작함.

더불어 국제 정세상으로는 중국 국민당이 북벌을 통해 만주의 영향력을 되찾으며 그쪽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일본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일본제국 국민이던 조선인들이 쫓겨나기 시작함.  


이러한 사회 분위기 때문에 당시 조선인계 언론사였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적나라한 혐중 표현을 보도했고 사회의 혐중 분위기가 심화됨.




결국 1927년 인천에서 대규모 화교배척폭동이 일어남.

이는 군산, 전주, 경성 등 서부지역 도시로 번짐.  

많은 화교들이 테러를 당했고 재산을 잃었음.  

규모가 워낙 커서 경찰의 대응도 실패했음.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제국과 중화민국의 국제문제가 촉발되었음ㄷㄷ

당시 일본 경찰과 총독부는 '중화민국이 만주의 우리 국민을 탄압하고 쫓아내서 일어난 일'이라며 책임을 중국 측에 돌렸고, 결국 사건의 진상과 해결이 제대로 되지 않음.





몇 년 후인 1931년, 길림성 만보산에서 조선 농민들이 수로를 파 인근 중국인 농민들이 반발하여 싸우는 사건이 발생함. 

이 작은 싸움이 크게 번져 중국 정부와 주 봉천 일본공사관이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알력다툼을 한 사건이 일어남.

이를 ‘만보산 사건’이라고 함. 




중국 본국에서는 별로 화제가 안 되었고 그냥 적당히 마무리되었지만,

당시 동아일보와 경쟁을 벌이던 조선일보가 만보산사건에서 조선인이 사망했다는 과장 오보를 내고 호외까지 뿌리며 조선인들의 반중감정이 극에 달하게 됨.




폐허가 된 평양 차이나타운. 


결국 같은 해 7월 4일 조선인 3명이 화교 2명을 구타하고 중국요리집 동승루를 습격한 것을 시작으로 

6일까지 평양에서 대규모의 화교 학살이 일어남.  


사람들은 경찰의 제지를 듣지 않았으며, 차이나타운과 화교 가옥을 죄다 불태우고 

화교 여자의 유방을 산채로 자르는 등 굉장히 끔찍한 방법으로 학살을 자행함.  

규모가 어느 정도였냐면 평양에서는 전차 운행이 중단되고 도시가 아비규환이 됐을 정도였음.


조선에서 경성 다음으로 큰 도시에서 이런 참사가 일어남.  130명 넘는 화교들이 사망했고 재산피해도 엄청났어. 




이 사건에 대한 당시 중국 언론의 풍자화.



당시 중국 언론들은 일본이 조선인들의 만주 이주를 장려하여 그들을 이용해 만주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넓히려고 한 것이 원인이며

수 년간의 화교 배척 움직임에도 해결을 미루다가 결국 평양에서 화교 학살 사건이 일어나게 했고 대응도 못 했다며 일본제국 정부에 그 책임을 돌림. 


중국 민심은 분노로 들끓었고 국제문제가 커지자

당시 평양경찰서장과 평안남도 경찰부장 등이 대규모로 사퇴해야 했어.  

이후 많은 화교들이 결국 중국, 특히 만주로 피난감.  


얼마 후 일제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만주를 노골적으로 침략했고 

일본의 만행과 조선인들의 화교학살에 분노한 만주군벌 장쉐랑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수많은 만주 거주 조선인들을 탄압하고 살해함.  

나중에 윤봉길 등 독립운동가들이 국민당과 함께 일제에 맞서면서 중국의 지지를 얻을 수 있게 되지만

그 전에 조선인들은 중국에서 일제의 앞잡이라는 인식이 강했음.    




이는 우리 역사의 부끄러운 사건이고, 만주사변과도 관련이 있는 내용인데 가르치지 않고 알려져있지도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