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통제된 수치, 통제되지 않는 생명
"문을 열어라, 생도."
E1의 덤덤한 명령에 A2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후송 기지 제어반의 강철 레버를 당겼다. 육중한 대피소의 철문이 고장 난 톱니바퀴 소리를 내며 열리자, 안쪽에 웅크리고 있던 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왔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 착륙장에서 엔진을 공회전하며 대기 중인 수송선 '펠리칸-1' 의 열린 해치였다.동시에 분대의 전술 패드 상단에 붉은색 카운트다운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후송된 시민: 0 / 30]
"깡통 새끼들이 몰려온다! 사방이 적이다!"
새로 증원된 T4가 제식 소총을 고쳐 잡으며 소리쳤다. 시민들이 대피소 밖으로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바릴리아 V의 핏빛 하늘을 가르며 오토마톤의 대형 드롭쉽 부대가 기지 사방에 내리꽂히기 사작했다. 강철들의 총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위치 고수해라. 한 발도 물러서지 않는다."
지휘탑 상단에 자리를 잡은 E1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의 딜리전스 지정사수소총이 불을 뿜을 때마다, 드롭쉽에서 내리던 오토마톤 보병들의 붉은 안구 센서가 정확히 깨지며 고철로 화했다. 거대한 장갑을 두른 헐크가 전기톱을 치켜들며 진입로를 압박해오면, E1은 어깨에 멘 무반동포를 꺼내 그대로 꽂아넣었고 굉음과 함께 헐크의 상체가 통째로 날아갔다.
"이게 바로 네놈들에게 안겨줄 자유의 선물이다!"
정문 진입로는 L3의 독무대였다. L3는 유탄발사기를 미친 듯이 난사하며 적들의 진격 경로를 거대한 불바다로 만들었다.
등 뒤의 보급 배낭을 철컥이며 끊임없이 탄을 채워 넣는 그의 입에서는 광기 가득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 압도적인 화력의 우산 속에서 A2와 T4는 시민들의 이동 경로 사각지대를 필사적으로 엄호했다. A2는 동기를 제 손으로 죽였다는 죄책감을 씻어내려는 듯, 다가오는 광신도 보병들을 향해 리버레이터를 난사했다.
12... 18... 25... 29...시민들이 빠르게 셔틀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이제 단 한 명. 마지막 한 명만 타면 이 지옥 같은 임무도 끝이었다.
"엄마! 같이 가!"
그때, 빗발치는 포화 속에서 한 모녀가 착륙장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뒤쪽에서 오토마톤 보병의 수류탄이 터졌고, 그 충격으로 일곱 살 남짓 해 보이는 어린 소녀가 진흙탕 위로 거칠게 넘어졌다.
"내 딸! 내 딸이 아직 안 탔어요!"
소녀를 뒤돌아보기엔 적들의 칼날이 너무 가까웠다. 공포에 질린 엄마는 본능적으로 펠리칸-1의 해치 안으로 먼저 몸을 던졌다. 그리고 그 순간, 셔틀의 센서가 탑승 인원을 인식했다.
[후송된 시민: 30 / 30]
철컥! 콰아앙—! 수치가 채워지자마자 펠리칸-1의 강철 해치가 자비 없이 닫혔다. 안에서 문을 두들기며 울부짖는 엄마의 비명은 셔틀의 육중한 엔진 소음에 완전히 묻혀버렸다. 정원이 찬 수송선은 지 지상에 홀로 남겨진 소녀를 버려둔 채, 가차 없이 궤도를 향해 수직 이륙했다.
"……?!"
A2는 이 기계적인 관료주의의 비정함에 넋을 잃었다.그런데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수송선이 대기권을 향해 날아오르자, 기지를 포위하고 있던 오토마톤 대군이 일제히 헬다이버들을 향한 공격을 멈췄다. 그들의 연산 장치 속에서 지상에 남은 인간들은 이미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기계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어 하늘로 날아가는 수송선을 향해 무기를 돌려 대공포화를 퍼부으며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하늘이 온통 붉은 포화로 뒤덮였지만, 수송선은 빗발치는 레이저를 뚫고 안전하게 대기권 밖 궤도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네 사람의 전술 패드에 황금빛 문구와 함께 웅장한 승전음이 울려 퍼졌다.
[주 임무 완수: 시민 후송 완료]
기지 주변은 기괴할 정도의 적막이 찾아왔다. 기계 군단이 수송선을 쫓아 일제히 북쪽으로 철수하면서, 피비린내 나던 전장에는 매연과 유압유 냄새만이 진동했다. 그리고 그 진흙탕 한가운데, 엄마를 잃은 어린 소녀 한 명만이 홀로 남겨져 흐느끼고 있었다.
무장을 해제한 채 멍하니 서 있던 A2가 헬멧을 긁적이며 E1을 바라보았다.
"어…… 제독님. 주 임무는 완수 처리됐고 탈출 셔틀은 가버렸는데…… 얘를 어쩌면 좋죠?"
L3 역시 유탄 발사기를 만지작거리며 당황한 듯 머리를 감싸쥐었다. 시스템의 사소한 오차로 발생한 '민간인 잔류' 라는 규정 외의 상황. 그때, 내내 침묵을 지키던 슈퍼 구축함 '자유의 선봉장' 의 민주주의 장교 '저지' 의 서늘한 목소리가 통신망을 두드렸다.
"상황은 확인했다. 신원 조회 결과 그 아이의 부모는 슈퍼 지구 공헌도가 높은 A등급 시민이다. A등급 시민 한 명 정도는 '기록 오차' 처리를 해서 무마할 수 있으니, 다음 탈출선에 태워 복귀시켜라."
대원들이 안도하려던 찰나, 저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단, 너희가 다음 복귀 셔틀을 호출하려면 해결해야 할 전술 목표가 남아 있다. 우리 뒤를 이어 이 행성에 진입할 SEAF(슈퍼지구 방위군) 본대의 안전을 위해, 이 구역의 오토마톤 핵심 전초기지들과 대공 방어시설들을 완전히 파괴해야 한다."
전술 패드에 지옥 같은 붉은 경고등이 다시 들이닥쳤다.
최고 등급 시민의 구출, 그리고 후속 부대를 위한 소탕전. 명분이 서자 E1의 헬멧 속 푸른 센서가 다시 차갑게 빛났다.
E1은 딜리전스의 조준경을 다시 고쳐 잡으며 소녀에게 다가갔다.
"보고할 필요 없다, 저지. 지원만 빠방하게 해주면 돼."
E1은 울고 있는 소녀를 한 팔로 가볍게 안아 들었다. 그리고 낡은 황금빛 견장을 철컥이며 신병들을 돌아보았다.
"생도들, 무기 챙겨라. 진짜 작전은 지금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