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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꿈과 의무 


 

해가 저물고도 오랜 시간이 지나자 공기는 차가워졌다. 그렇기 때문에 보초를 서던 두나이들은 슬금슬금 불 주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난로를 중심에 두고 다들 모여들어 손과 발에 열기를 쬐었다. 한 두나이가 신발을 벗고 발싸개까지 푼 채 불을 쬐자 주위에서 다들 한 마디씩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들 똑같이 발싸개를 풀고 발가락 사이사이까지 데우기 시작했다. 

 

 코가 냄새에 익숙해지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떠들기 시작했다. 모두가 내일 아침에 석관 공사가 시작되고 그러면 이 사고가 마무리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아-52를 제외하곤 이 기지에서 두나이들의 수명이 길어야 6개월 남짓이라는 사실을 몰랐기에 자연스레 이야기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것이었다. 

 

 누군가는 앞으론 옛날처럼 제대로 보급품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 말했다. 그 두나이는 영양실조로 오랫동안 누워 있었다. 초콜릿을 입 안에 넣으며 그 두나이는 다른 두나이에게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냐, 라고.

 

 그 두나이는 인간이 있으니 우릴 이곳에서 내보내 줄 수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며 그 두나이는 벗겨진 얼굴을 쓰다듬었다. 만약 여기서 나가면 무엇을 하고 싶냐고 누군가 묻자 그녀는 정원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옛날에 봤던, 지금은 이미 불쏘시개로 쓰여 사라진 오래된 책에 실린 내용을 다시금 머릿속에서 꺼냈다. 파릇파릇한 잔디가 드넓게 자라나 있는 곳. 곳곳에 있는 덤불들은 보기 좋게 다듬어져 있고 이리저리 구부러진 쇠막대들이 모여 한 폭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 울타리 안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잔뜩 피어 있어 숨을 쉴 때마다 싱그러운 풀냄새와 부드러운 흙의 냄새. 그리고 향기롭기 그지없는 꽃향기까지 맡을 수 있는 그런 정원을 두나이는 꿈꿨다. 한동안 화초들에 취해 거닐다 다리가 피곤해지면 정원 한구석에 놓인 고풍스런 정자에 잠시 앉아 쉴 수 있고 그러면 정자 근처에 조그만 연못이 있어 잔잔한 수면을 보며 몸과 마음 모두를 잠시 쉬게 할 수 있는 곳 말이다.

 

 이젠 이곳 밖이라 해도 그런 곳은 사실상 없을 테지만 말이야. 라고 그녀는 약간 쑥스러워하며 말을 마쳤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말에 다른 두나이들도 잠시 취하기 시작했다. 다들 한때 꾸었던 옛날 한때의 꿈을 자신의 저 한구석에서 찾아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닦아 남들에게 선보이기 시작했다. 

 

 맛있는 음식이 가득 차려진 식탁 앞에 앉아 마음껏 배를 채우는 것 같은 단순한 것부터 운명적인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싶다는 다소 전형적인 것과 산꼭대기나 건물 최상층의 전망대 같은 높은 곳에서 땅을 바라보고 싶다는 약간 추상적인 것까지 각종 꿈들이 나왔다. 누구나 그렇듯 그녀들도 한때 꿈을 꾸었다. 하지만 현실 앞에 어쩔 수 없이 꿈은 잊어야만 했고 잊기 싫었기에 꿈 자체를 부정해야 했다. 누군가가 꿈을 꺼내면 그딴 도움도 되지 않는 걸 굳이 왜 꺼내냐고 질책해야 했고. 

 

 하지만 현실이 나아지자 여유가 생긴 그녀들은 서로의 꿈에 잠시 취해 있을 느긋한 한때 정도는 얻을 수 있었다. 글자 그대로 꿈같은 시간을. 

 

 그리고 모든 꿈들이 그렇듯 깨어나야 할 때 또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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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58은 자신이 각종 중장비를 수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지금 이 순간만큼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일단 이 기지 내에서 가장 손재주가 뛰어난 바이오로이드이고 무려 아자즈 기종에게 기계 다루는 법을 배웠던 만큼(속성 교육이긴 했지만 말이다) 실력 하나는 출중했지만 당장 수십 년 동안 고철에 가까운 발전기 몇 개만 다룬 탓에 머리와 손이 모두 반쯤 녹슨 상태였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대충 반세기도 더 전에 만들어져 보수는커녕 그 긴 세월 동안 방수포로 덮여 있던 게 전부인 유압장치 투성이 거대 로봇을 내일까지 고쳐 놓으라는 게 말이 되는 명령을 받았으니 오죽할까.

 

몇 시간 전에 오르카호에서 몇몇 부품과 도구를 공수 받은 게 약간의 위안거리가 되긴 했지만 페-58은 스패너를 들기 전에 욕설부터 해야 했다. 다행히 옛 솜씨에 낀 녹이 손을 움직일수록 점점 벗겨지기 시작해 몇 시간 만에 그녀는 자신의 옛 솜씨를 되찾았다. 하지만 문제는 이 쇳덩어리는 몇 시간 수리한다고 다시 움직일 만한 녀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욕설과 함께 뜯고 갈아 끼우고 긁어내고 다시 붙이는 것 외에도 수많은 작업들을 이어나가야만 했다.

 

 무기고 한구석에서 밤을 꼴딱 새우고 나서 아침 햇살이 창으로 들어올 때쯤 간신히 그녀는 이 쇳덩어리를 다시 기계로 되돌려 놓는 데 성공했다. 퀭한 눈으로 자신이 이룬 업적을 잠시 지켜보던 페-58은 곧 기계는 공기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기계공에게 있어서 상식과도 같은 사실을 떠올리곤 한숨을 쉬었다. 무거운 드럼통들을 굴려 수없이 많은 펌프질로 연료탱크에 연료를 가득 채운 후 페-58은 이번에야말로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엔 양 팔의 끝에 달린 거대한 기관포가 그녀의 눈에 보였다. 그램이 아닌 킬로그램 단위의 먼지를 마셨다고 생각될 정도로 험난했던 수색 끝에 그녀는 무기고의 아주 외진 곳에 있던 탄약상자의 산을 발견했고 살의를 느끼며 쇠지렛대를 이용해 그걸 전부 열고 내용물을 꺼내 운반했다. 내부 탄약창에 끔찍하게 무거운 열화우라늄 탄까지 가득 채워 놓고 나자 페-58은 글자 그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그나마 그녀가 바이오로이드여서 이 정도지 인간이었다면 손가락은커녕 심장도 다시 못 움직였을 것이다. 한 가지 좋은 사실이라면 이걸로 그녀의 일이 끝났다는 것일까.

 

 먼지와 기름때와 쇳가루로 범벅이 된 몸을 간신히 이끌고 무기고 입구까지 걸어가던 중 갑자기 그녀의 귀에 고막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과로 때문에 허구한 날 앓던 이명이 또 도졌나 하던 그녀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이것이 적습 경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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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적의 위치는?”

 “알파는 프리피야트 남동쪽 18km 지점에, 브라보는 체르노빌 남서쪽 4km 지점에서 확인되었습니다, 양쪽 다 적은 수가 아닙니다. 많지는 않지만요.”

 “현재 우리 병력은?”

 “지상병력은 대부분 키예프에 있습니다. 공중병력은 오르카호에 대부분 있고요, 하지만 양쪽 다 탄약이 심하게 부족합니다.”

 “기동형 바이오로이드와 AGS들의 무장은? 그건 좀 남아 있을 텐데.”

 “네. 하지만 적들이 숲에서 이동하고 있습니다. 전자전 능력을 지닌 개체라도 있는 것인지 제대로 포착이 안 됩니다. 대규모 폭격이라면 제대로 타격할 수 있지만....”

 “대규모 폭격을 할 탄약이 없지. 결국 지상군을 투입해야 하는데....”

 “탄약도 부족하고 방사능 오염지대인 데다 거리도 키예프에서 100km나 떨어져 있습니다.”

 

 나와 아르망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다른 한숨소리가 스피커에서도 나왔다.

 

 [녀석들이 현재 이동속도대로라면 30분 안에 기지에 도착한다고 하셨습니까?]

 “네.”

 [애들 무장 시키겠습니다. 현장은 작업 다 끝내서 최소한의 인원만 있으니 지난번과 다르게 전투인원을 최대한으로 동원할 수 있습니다. 무기도 지원받아 나름 있고 말이죠.]

 

 아-52는 담담하게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정상적인 상태로도 브라우니 이하의 전투력을 가진 그녀들이 지금과 같은 몸으로 철충 집단을 상대하는 건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다소 무기를 지원받긴 했으나 그래도 승산은 희박했다. 당장 지난번에도 방어진지를 끼고 싸웠음에도 알바트로스의 지원이 오기 전에는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었다. 하물며 지금은....

 

 [남쪽 방어선을 최대한 활용하며 싸우면 어떻게든 될 겁니다. 그쪽은 토치카에 전차포, 대공포 같은 중화기도 제법 있으니 싸워 볼만 합니다. 무전기 가지고 갈 테니 앞으론 그쪽으로 연락 주십쇼.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저도 싸워야죠.]

 “미안해. 최대한 빨리 지원군을 보낼게.”

 

 불행하게도 알바트로스와 로크는 누적된 방사선으로 인해 둘 모두 수복실에 들어가 있었다. 핵무기의 직격에 견디는 것이지 지속적인 방사선 피폭에 견디도록 설계가 되진 않았으니까, 라고 닥터가 말했었다. 에이다는 현재 프리피야트에 위성 포격을 요청할 수 없는 궤도에 있었다. 우리가 현지에 있는 만큼 에이다는 다른 곳들에 대신 눈을 돌려줘야 했다. 그나마 방사선에 멀쩡한 둘이 전투 불능 상태니 결국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이 방호복을 입고 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작업도 아니고 전투 도중에 방호복이 파손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이 그나마 무장 상황이 나은 기동형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방호복을 입혀 전투배치를 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병력지원의 전부였다. 이렇게 무력해지는 건 처음이다.

 

 “적의 습격이 하루만 늦었어도....”

 

 내 바람과는 다르게 수송선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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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52는 잠시 뒤를 돌아봤다. 그녀가 본 건 다들 결의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바이오로이드들이었다. 그녀들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576명 전부가. 그것이 현재 최대한으로 동원 가능한 인원이었다. 나머지는 대부분 싸우기는커녕 걷기도 힘든 상태였다.

 

 아직 손에 익지 않은 새 총을 잠시 확인한 아-52는 잠시 헛기침을 한 후 크게 소리쳤다.

 

 “자매들! 적들은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다. 그 수는 우리보다 많고 우리의 무기는 낡거나 그 수가 부족하다. 지원군이 오긴 하겠지만 확신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묻겠다. 아니, 명령한다. 지금 싸우기 싫은 녀석들은 모두 빠져라.”

 

 단순한 권고가 아닌 명령으로 그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52는 오른쪽 얼굴이 조금 욱신거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멋진 미소를 지어내보였다.

 

 “한 마디만 하지. 지금껏 같이 있어서 영광이었다! 전원, 기지를 사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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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가 개시되었을 때 지휘를 할 수 없었다. 정확하게는 지휘가 불가능했다. 통신 수단은 부족했다. 그나마 있는 것도 무전기 몇 대가 고작. 500km 밖에서 출격 준비를 서두르라고 말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총성이 들렸다. 비명소리 또한 들리기 시작했고. 그리고는 하나 둘 무전이 끊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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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두나이는 괴성을 지르며 대공포의 방아쇠를 쥐어짰다. 눈앞이 전부 적이었기에 대충 겨누어도 총탄은 모두 적에게 맞았다. 그녀를 괴롭게 하는 건 욱신거리는 손목이었다. 원래부터도 그리 상태가 좋진 않았지만 최근 몇 주간 매일같이 한 작업에서 피폭되었는지 가만히 있어도 손목이 아리고 시큰거렸다. 하지만 그 손목은 어마어마한 반동을 그대로 받아내야 했다. 당연히 아팠고,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손목에 더 강하게 힘을 줬다. 저 멀리서 불꽃이 튀며 철충이 부서질 때마다 자매들이 한명씩 덜 죽는다고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미 기지의 모두가 살아남고도 남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적은 계속해서 쳐들어왔다. 

 

 총신이 달아오르고 있었지만 그런 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대신 그녀는 반동이 멈췄다는 걸 자각한 후 즉시 외쳤다.

 

 “재장전! 재장전!”

 

 실제로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철충들이 밀려드는 속도가 배로 빨라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약수는 자꾸 머뭇거리며 제대로 탄약을 장전하기는커녕 부품과 탄약이 부딪히며 생기는 쇳소리만 내고 있었다.

 

 결국 참다못한 그녀는 고함을 지르며 옆을 돌아봤고, 총탄에 양 눈 모두가 터져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손으로 겨우 더듬어대며 무거운 탄약들을 어떻게든 대공포에 쑤셔넣으려고 하는 두나이를 발견했다. 그녀는 바로 눈이 먼 두나이의 손에서 탄약을 잡아채 자신이 직접 장전했다. 탄약은 피투성이었다.

 

 “못 하겠으면 빨리 후방으로 꺼져! 지금 당장!”

 

 무언가가 속에서 치솟아 올랐지만 그녀는 억지로 무시하며 다시 손잡이를 잡고 총탄을 쏘아냈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손목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게 그녀를 힘들게 했다. 이 두나이는 그렇게나 보고 싶어하던 정원을 절대 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그녀를 괴롭게 했다. 

 

 무언가 외치고 싶어졌기에 그녀는 크게 외쳤다. 무어라 말하는지는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지만 어째선지 자꾸 그녀의 눈앞이 흐려졌다. 

 

 그렇게 울면서 싸우던 두나이의 조금 앞쪽에 포탄 한 발이 직격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지 못하던 그녀도 눈앞의 우그러진 기관포와 그 곁에서 뒹굴고 있는 자신의 다리를 보고선 겨우 상황을 이해했다. 뭐라 말하려던 그녀는 기묘한 상실감을 느끼다 저 앞에서 떨어져 굴러간 자신의 아래턱을 발견하곤 힘없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젠 진수성찬이 바로 눈앞에 있어도 못 먹겠네.

 

 총탄 한 발이 배불리 먹는 것이 꿈이던 두나이의 미간을 파고들어 억지로 꿈에서 깨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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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58은 잠시 무기고 한구석을 뒤진 후 원하던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수십 년 전에 놔둔 거라 먼지가 두껍게 달라붙고 안의 내용물도 반 넘게 증발해 있었지만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들이키자 바로 술기운이 올라왔다.

 

 “이걸 마시게 될 줄이야. 마지막 술로 간직하려고 죽 아껴오던 건데.... 그래도 마실 만한 상황이잖아?”

 

 텅 빈 무기고 안에는 그녀 말고 아무도 없었지만 그녀는 묵묵히 중얼거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밖에서 들려오는 폭발음에 미쳐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지 내 유일한 기계공이었던 만큼 페-58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기지에 남아 있었지만 첫 번째 총소리가 들리고 5분만에 피투성이가 된 채 현저히 적어진 숫자로 돌아오는 자매들을 보고도 사태를 짐작하지 못하지는 않았다. 기지 북쪽에 위치한 이 무기고에도 전장의 소음이 들릴 정도면 이미 뻔한 결말이었다.

 

 수십 년 묵은 독주도 독주였지만 모든 것이 마지막이라는 아주 명백한 분위기 때문에 페-58은 아주 제대로 취했다. 그래서 그녀는 누군가가 무기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정비는 끝났나?”

 “...에? 누구야...다 끝났는데 좀 내버려 두면....”

 

 혀 꼬부라진 소리로 무성의하게 대답하던 그녀는 눈앞의 은색 방호복을 알아본 순간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연료와 탄약은 채웠나?”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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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52...지금 막 지원군이 도착했어. 그런데....]

 “보입니다. 이것 참...뭐 같네요.”

 

 아-52는 피식 웃으며 하늘을 쳐다봤다. 하늘에는 그저 떠다니고만 있는 오르카호 소속의 기동형 바이오로이드들이 있었다. 적의 공세가 생각보다 강했고, 두나이들은 어쩔 수 없이 방어진지를 포기하고 기지 내부로 퇴각했다. 결국 일종의 시가전처럼 변해 버린 상황에서 지원군이 도착했다. 하지만 문제는 적과 아군이 여기저기 뒤섞여 버린 상황이었다. 이대로 폭격을 했다간 두나이들도 휘말리게 된다는 것이 뻔히 보였다. 그 탓에 바이오로이드들은 화내면서도 기지 상공을 하염없이 돌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기지 외곽은 소규모로 폭격을 하긴 했으나 그 바람에 철충들이 기지로 더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 

 

 “엘-756 부반장? 지금 어디냐?”

 [식당 쪽입니다. 적이 너무 많습니다. 게다가...으악! 이 자식들이!]

 

 무전기에선 한동안 콩 볶는 소리만 들렸다. 다시 목소리가 들렸을 때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옆구리가 뚫렸습니다. ...아프네요. 총탄도 다 떨어졌습니다. 반장님. 영광이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무전이 끊어졌다. 잠시 후 식당 쪽에서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식당 쪽에서 철충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52는 한 철충의 동체에 야전삽이 깊숙이 박혀 있는 걸 보았다. 그 야전삽에는 아직 피가 흐르는 팔이 손잡이를 꽉 움켜쥔 채 매달려 있었다. 아-52는 말없이 성호를 그은 후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총을 쏘던 아-52는 무언가가 옆에서 총을 세게 후려치자 그만 총을 놓쳤다. 바닥에 떨어진 총을 주우려고 하니 오른손의 모양이 이상했다. 자세히 보니 손가락 몇 개가 뜯겨나가 있었다. 그녀는 주저없이 왼손으로 총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총은 노리쇠가 우그러지고 총열이 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총을 내려놓은 그녀는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대부분 철충들이었다. 아-52는 무전기를 집어들었다.

 

 “아-52입니다. 들립니까.”

 [사령관이야. 들려.]

 “진내폭격 요청합니다.”

 [....]

 “더는 가망이 없습니다. 함께해서 영광이었습니다.”

 

 아-52는 무전기를 내려놨다. 하늘 위의 바이오로이드들의 움직임이 달라지는 것이 그녀의 눈에 보였다. 아-52는 살짝 미소 지으며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그녀의 귀에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폭발음이 들렸다.

 

 “...?”

 

 무언가 이상했다. 폭격이라면 이 정도에 그칠 리가 없는 데다 너무 시기가 빨랐다. 또한 육중한 속사포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는 위가 아닌 옆에서 들리고 있었다. 게다가 들릴 리 없는 엔진 소리와 쇳소리. 매연 냄새까지.

 

 아-52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을 보았다. 거대한 기게장치가 반파된 무기고에서 걸어 나오더니 달려드는 철충들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 직후 그 앞에 있던 철충들은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포탄에 찢겨나가며 폭발해 산산조각나며 그 잔해가 사방으로 튀었다. 한 철충이 어떻게 가까이 접근하자 그 기계는 바로 그 철충을 짓밟아 고철로 만들어 버렸다. 그 후에는 다시 사격을 개시해 철충들을 파괴했고 기지 내에서 철충은 순식간에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주나.”

 

 양팔의 40mm 기관포로 철충들을 갈아버리고 있는 저 기계는 주라블리 기종의 장비인 T-82가 틀림없었고 이 기지에서 저 T-82의 조종권이 있는 건 오직 한 바이오로이드뿐이다. 아-52는 다급히 무전기를 집어든 후 외쳤다.

 

 “공습 중지! 반복한다! 공습 중지하라! 주라블리 기종이 교전을 시작했다!”

 

 그 말을 연신 외치던 아-52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 눈물은 아주 뜨거웠다.

 

 “주라블리, 주나가 전투에 나섰다!”

 

 마치 그 외침에 답하듯, 주나는 눈앞의 모든 철충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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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령관이 직접 지휘한 게 아니니 어떻게든 말이 되지 않을...까요?


 '희망 바로 앞에 서 있다가 그 희망이 사라지는 걸 느끼며 죽어가는 이름 없는 누군가들'이라는 소재를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