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모음



그날 이후로,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리감이 생겼다.


윌리엄은 다시 무기력하던 시절로 돌아가 하루 종일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식사량은 이전보다 줄어들어, 그는 겨우 한 주 만에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 되었다.


그는 딱히 그녀가 자신에게 뭘 하든 신경을 쓰지 않았고, 멍하게 가만히 있기만 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이전보다 오히려 훨씬 자신과의 심리적인 거리가 멀게 보였기에, 나탈리아는 언제나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집 안에는 미소와 웃음이 사라졌고, 봄이 되었음에도 언제나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말을 아예 하지 않는 윌리엄을 보며, 나탈리아는 자신마저 말수가 없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라도 활발하게 움직이며 이전보다 힘을 내 보려 했지만, 이미 음울한 분위기가 내려앉은 저택의 분위기는 그녀 혼자서

는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던 어느 날이었다.


윌리엄을 깨우려 2층의 침실로 올라간 그녀는 윌리엄을 깨우려다 침대 옆의 낮은 서랍 위에서 빛나는 물건을 발견하고 그것을 집어들

었다.


그것은 어젯밤, 식당에서 사라졌던 스테이크 나이프였다.


이게 어째서 여기 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이내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고서 윌리엄이 덮고 있던 이불을 살짝 걷으며 말했다.


“도련님, 일어나셔야 할 시간…”


그녀는 침대에 묻은 피를 보고서 말을 잇지 못했다.


윌리엄의 오른쪽 손목 부근의 이불에는 피가 뚜렷하게 묻어 있었다.


출혈량은 크지 않았지만, 윌리엄의 오른손 손목 안쪽에 그어져 있는 선명한 상처자국들은 그가 어젯밤 스테이크 나이프를 가져가 무

엇을 했는지 알려주었다.


“도련님…”


그녀는 할 말을 잃고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윌리엄은 아직은 조금 차가운 바람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서 서서히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킨 그는 나탈리아가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고서 오른쪽 손목을 등 뒤로 숨겼다.


“…도련님, 손목 이리 주세요.”


윌리엄은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도련님.”


나탈리아는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고, 윌리엄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손목을 내밀었다.


그녀는 손목의 상처가 깊지 않고, 여러 번 난 걸 확인하며 그가 자살하려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왜 이러셨어요?”


그는 대답이 없었다.


“…대답해주세요, 도련님.”


그는 메마른 입술을 살짝 달싹였다.


“-파서.”


“네?”


“…이러면 덜 아파서.”


“덜 아프다뇨, 이러면…이러면…”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어디가 그렇게 아프신 거예요? 의사를…”


“넌 이해 못할 거야.”


그 말을 들은 나탈리아는 그에게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도련님, 도대체 그곳에서…전쟁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그녀의 질문에, 그는 그녀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련님?”


“…이제서야 그 질문을 하는구나.”


거의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그는 입을 열었다.


“왜 이제서야 그걸 물어봐 주는 거야? 내가 이런 꼴이 되어서야 나한테 관심이 생긴 거야?”


“그럴 리가요! 전…그냥 도련님이 그 때의 기억 때문에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서…그것에 대해서 물어 뵌다면 폐가 될 것 같아서…”


“더 일찍 물어봐줬어야지.”


그렇게 말하는 윌리엄의 아랫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더 일찍…물어봤어야지. 아니, 날 뜯어말렸어야지. 내가 전쟁터로 가지 못하도록…”


그는 깊은 숨을 들이쉬더니, 이내 조금 진정된 듯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프랑스의 서쪽에 배속되어 싸우게 되었어. 처음엔 편할 줄 알았지. 책 속에서 묘사하는 전쟁터는 낭만이었으니까. 용감한 군인

들이 서로의 나라를 위해 돌격하고 뜨거운 피를 흘리며 죽는…


그런데 말이야, 죽는다는 건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어. 전쟁터는 절대 편한 곳이 아니었지. 난 하급 장교에 불과했고, 내 역할은 가장 앞

서서 적의 참호로 돌진하는 거였지.


무서웠냐고? 당연히 무서웠지. 적 참호에서 쏘는 수백 발의 기관총 총알들 중 하나라도 맞으면…아니, 하나만 맞을 리가 없지. 기관총

에 맞으면 난 그대로 고깃조각이 되어서 널브러질 걸 알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아냐고? 전장에 도착한 첫째 날에 나랑 가장 먼저 대화

를 했던 병사가 그렇게 죽었거든.


그것만 끔찍했을까? 아니, 그건 시작에 불과했어, 나탈리아.


잘 곳도 제대로 없어서 우린 참호 곳곳에서 불편하게 자야 했고, 식사는 날이 갈수록 궁핍해졌어.


밤이면 밤마다, 낮이면 낮마다 잊을 만하면 날아오는 포격은 내 귀를 먹먹하게 하고, 내 머리를 흔들어 놨어. 그것 때문이었는지는 모

르겠지만, 하루 종일 팔을 제대로 못 가눈 적도 있었어.


그 환경을 못 견딘 병사들은 참호 밖으로 손이나 다리를 내밀었어. 적들이 그걸 발견하고 쏘길 바라면서.


그 병사들은 부상을 입어서라도 집으로 가길 바랬던 거야.


나도 총에 맞아본 적이 있었어. 기관총이었냐고? 아까 말했잖아. 기관총에 맞았으면 난 여기가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어딘지도 

모를 땅에 묻혀 있었을 거야.


 


어느 날은 이런 질문이 나왔어. ‘우리는 도대체 왜 독일 놈들과 싸우고 있는 겁니까? 도대체 우리가 독일한테, 독일이 우리한테 뭘 했

는데요?’


여러 명의 의견과 지식을 모은 결과 답이 나왔어… 사라예보 사건…그래,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저격당한 사건 말이야. 신문에서 본 적 

있지? 어쨌든, 그 사건으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굴복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답이 나왔어.


독일이 왜 우리와 전쟁을 하는지는 아무도 몰랐어. 우린 무엇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 지도 모르는 멍청이들에 불과했던 거야.


그럼에도 난 버티고 버텼어…집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면서, 전쟁이 끝나기를 말이야.


하지만 1년 정도면 끝난다던 전쟁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지. 난 휴가를 겨우 한 번 나올 수 있었고. 어쩌다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

겠어.


 


…그러다 1918년이 됐지. 난 운 좋게도 그때까지 살아남았지만 지쳐 있었고…아니, 사실 모두가 지쳐 있었지.


그날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하루였어. 아침엔 포격이 쏟아졌고, 우린 점심을 먹고서 소화도 되기 전에 돌격해야 했지.


난 언제나 그랬듯이 앞서서 돌격했어. 


참호와 참호 사이의 공간…우린 그걸 무인지대라 불렀어. 무인지대를 건너 적의 참호로 돌진하는데, 난 평소와는 다른 감각을 느꼈어.


그리고 그걸 느끼고서 발을 뗐는데…그대로 무언가가 터졌지. 난 허공으로 날아갔고, 포격으로 인해 생겼던 구덩이 안으로 떨어졌어. 

그 덕에 날아오는 총알들에 맞지 않고 안전할 수 있었지.


웃기지, 나를, 우리를 죽이려 했던 포격 때문에 생긴 구덩이가 날 살린 거야…죽을 뻔하긴 했지만.


발 밑에 감각이 없어서 거길 내려다보니까…내 발이 없어져 있었어.


난 그대로 몰려오는 고통에 잠겨 의식을 잃었지.


 


눈을 떠 보니까, 난 야전병원에 와 있었어.


난 발목 지뢰를 밟았고, 그건 제 성능을 다해서 내 다릴 완전히 망가트렸어.


의사 말로는 난 다신 걸을 수 없을 거라고 하더라고.


난 거기서 치료를 어느 정도 받다가, 다리가 어느 정도 나아진 뒤에 열차에 태워져서 고향으로 보내졌지.


 


…있잖아, 나탈리아, 밤마다 그 때의 기억들이 떠올라.


꿈 속에서, 난 홀로 그 전장에 다시 떨어져 있어. 그리고 적들의 참호로 달리고 있지…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난 저항할 수가 없어…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러다 깨어나고 보면…시간은 얼마 지나 있지도 않지. 난 꿈 속에서 너무나도 괴로웠는데.


그리곤 잠에 들 수가 없어. 다시 그 때의 꿈들을 꿀까 봐…


 


“…그렇게 괴로우셨으면…왜 진작 말씀을 안 하셨던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나탈리아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전쟁터에 나가시기 이전에도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저에게 기대셨잖아요, 어째서 저에게…”


“…내가 어떻게 그래. 혼자서 날 따라와서 그렇게 고생하는 너한테…어떻게 내가 기댈 수가 있겠어?”


네가 고생하는 걸 보기가 힘들었다며, 그는 말했다.


“…내가 너랑 가까이 있으면, 네가 힘들 것 같아서…나 혼자 별장으로 내려가 있겠다고 했던 거야.”


“왜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제가 얼마나 도련님을…도련님을 그리워했는지 아세요?”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를 위한 게 아닌 이기적인 배려를 하려 했다는 걸 알아. 너가 나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수도 없이 입었다는 것도, 그리고…네가 

날 사랑하고 있는 것도. 그게 내 착각이 아니길 빌게.”


그의 담담하지만 왠지 모르게 슬픔이 묻어나는 말투를 들으며, 나탈리아는 불안함을 느꼈다.


“…나탈리아.”


그는 수척해진 얼굴에 슬픈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사랑해.”


그녀는 그녀가 그에게서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이기적이라서 미안해.”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무척이나 수척한 손이었음에도, 그녀는 따듯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대로 그녀를 살짝 끌어당겼고, 그녀는 저항하지 않고 그의 품에 안겼다.


“이런 꼴로 돌아와서 미안해.”


그의 품 안에서, 나탈리아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반면에, 그녀를 품 속에 안은 윌리엄은 슬픔을 품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겐 널 사랑할 자격이 없-“


나탈리아는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아무 말도…아무 말도 하지 말아주세요, 지금만은…”


그녀의 간절한 부탁대로,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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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안 끝났음. 아마 앞으로 두 편 정도 분량이 남았음.


주인공 정신 상태도 어느 정도는 해결해야 하고...야쓰도 해야지...


오늘도 부족한 글 읽어 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