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꿈을 꿨다. 그 꿈 속에서 너는 이현성의 어깨를 밟고 올라 팔짱을 끼며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고, 부대끼는 바람에 네 무한 아공간 코트는 펄럭이고 있었다. 나는 꿈 속에서 네 얼굴을 보지 못했다. 일행들이 내 얼굴을 뚜렷이 보지 못했던 것처럼, 네 얼굴을 검은 그림자에 드리워 있었다. 지금은 현실 속에서 언제라도 볼 수 있는 그 얼굴이, 대체 무엇이 달랐기에 그리 검게 칠해져 있었는지.


 "형. 독자 형, 일어나요."


 낮잠을 자던 나를 깨운 것은 다름아닌 이길영이었다. 피부로 전해오는 나른한 기운. 대충 시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 길영아. 왜?"


 나는 눈을 비비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형, 아무리 '김독자 컴퍼니' 대표라고 해도 너무 놀고 먹는거 아니에요? 사람이 어떻게 먹고 자고, 먹고 자고만 반복해요. 티타노도 그것보단 부지런 하겠다."


 ……이 자식이.

나를 먹이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걱정해주는 건지,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 말이 참 많아졌다.


 "그래서 왜?"


 "수영 누나가 불러요. 전망대로 오라는대요?"


 "수영이가 갑자기? 걔 지금 강의하고 있을 시간 아니야?"


 나는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 그러자 이길영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큰 거실에는 오로지 나 뿐이었다. 환기 겸 열어 놓은 창으로 바람에 부딪히는 낙엽 소리가 들려오고, 저 멀리 자동차의 배기음이 들어왔다. 괜한 공허함에 마음이 울적거렸다.


 ……나 가을 타나?


 기지개를 펴고, 소파에서 아예 몸을 일으켰다. 몸을 잔뜩 구부리고 잤는지, 뼈마디가 지끈거렸다.


 '에휴, 부르면 가야지 뭐.'



.

.

.



 큰집과 공단의 전망대까지 거리는 그다지 멀지도, 가깝지도 않았다. 딱 기분 전환 겸 산책을 할만 한, 그러한 거리였다. 

울창한 가로수길, 그 위로 바스라지는 낙엽, 차분히 나뭇잎들의 틈새를 찾아 들어오는 햇살, 그 너머의 하늘. 너무 비현실적인 것들이었다. 아름답다고 말하기에는 화려하지 않지만, 대신에 수려함으로 가득찬 가을의 풍경이었다. 너무도 이상적인 것이었다.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로.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현실이 꿈인지, 꿈에서 보았던, 1863회차의 너를 마주한 그 순간이 실은 현실이었는지, 그 경계가 일순간 일그러질 정도였다. 스며오는 바람도, 공기도, 향기도 모두 새롭다고 느껴질 정도의 그러한 현실 속에서, 나는 무의식중의 불안함을 느꼈다. 무언가의 극치는 그 반대라는 말처럼,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 속에서 나는 미약한 불안함을 가지고 있었다.


 돌계단으로 한 발, 통나무 계단으로 한 발. 짧은 사색에 잠긴 동안 나는 벌써 작은 언덕을 올라 전망대에 이르렀다.

공터같이 꽤 넓게 펼쳐진 평지와, 그 너머로 가려진 지상, 그리고 하늘. 아마도 유상아 씨가 기획 했던 전망대였지. 꽤 괜찮은 기획이었던 것 같다.


 풍경과 전망대의 경계를 긋는 나무 울타리. 나는 그곳에 팔을 기대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 곳에 온 목적을 잊은 채, 잠깐동안은 그 시간에 잠겨 있었다.



 "왔냐?"


 훅 풍겨오는 담배냄새에 나는 두어 번 마른 기침을 내뱉었다. 시나리오가 끝나고, 지하철에서 돌아온 이후로 이설화와 유상아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금연을 당했으니, 담배 연기가 어색할 법도 했다. 게다가 실제로는 일만 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담배를 피지 않은 것이나 다름 없으니…


 "너 담배 폈었냐?"


 바람이 꽤 강하게 불어, 네 머리카락이 두서없이 흩날렸다. 내 물음에 너는 미약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담배를 쭉 빨았다.


 "뭐야, 무슨 일 있어?"


 바람이 그치고, 너는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쓸어 넘겼다. 그리고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난간에 기대 나를 올려다 보았다.


 "무슨 일 있긴. 별일 없지."


 "그럼 왜 불렀는데? 뭐 할 말이라도 있냐?"


 "그냥. 뭐, 잘 사나 해서."


 "뭐야 갑자기 뭔 소리야? 또 술 마셨냐?"

 

 이상한 태도를 보인 네 모습에 전한 대답을 듣고, 너는 킥킥웃으며 계속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노골적인 그 시선에 왠지 부끄러운 마음이 생겼지만, 나는 애써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대신 네 손을 붙잡았다. 사귀기 시작한 지도 벌써 몇 달이 됐는데 손 정도야.

 

 조금 붉게 물드는 네 뺨을 보며, 나는 싱긋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런 대화도 없이 꽤 긴 시간 동안 공단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가을의 하늘은 유난히 조용하다. 거리는 쓸쓸했고, 찰나조차  고요했다. 그 시간동안 네 감각들이 놀랄 정도로 온전히 전해져 왔다.

맞잡고 있는 손의 촉감은 차가웠다. 언젠가, 일행들과 술자리를 가지면 너는 꼭 네 그 차가운 손을 내 목덜미에 집어 넣어 나를 괴롭히고는 했었지. 차분히 밀려오는 샴푸 냄새도 향기로웠다. 네 몸에서 미약하게 옮기는 온도도, 숨결도, 그리고 떨림도.


 나는 그 무상함이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사소한 것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애써 자극을 느끼려 들지도 않고, 밀려오는 것들만 머리 속에 담아 골라내면 되는 일이었다. 


 너 역시도 그 순간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눈을 슬며시 감고 흐릿하게 웃으며 머리 속에 찰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 얼굴 아래로, 익숙한 흰색의 옷깃이 보였다.


 시나리오가 끝난 이후로 즐겨 입지는 않지만, 옷장 한 가운데 고이 모셔둔 옷이었다.


 "야, 그거 내 무한 아공간 코트 아니냐?"


 "응? 아닌데. 내거야."


 "뭐가 네거야. 요즘 애들이 하도 몰래 입으려고 하길래 숨겨 놨었는데, 대체 어디서 찾았어? 지혜 같은 짓을 골라서 하냐…"


 너는 내 말을 듣고는 내내 은은히 지었던 미소를 허물고, 차가운 인상으로 거리를 내려다 보았다. 

 불쑥 들어온 네 표정은 무언가 아쉬운 것 같기도, 후련한 것 같기도 하였다.


 "그래서 내 소설은 잘 읽었어?"


 너는 말을 하는 와중에도 나를 보지 않고, 계속 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응? 무슨 소설. 너 '레몬맛 사탕의 추억' 연재한다고 해놓고 플롯 짠다고 벌써 1년 날렸잖아."


 그러자 너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에휴, '멸살법'말이야 이 등신아."

 

 "뭐야, 새삼스레 그런건 왜 물어봐. 너 오늘 좀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너 강의는 어쨌어. 수영아, 네가 교수인데 농땡이를 치면 어쩌자는……"


 한수영은 귀찮다는 듯, 허공에 손을 휘휘 저으며 내 말을 끊었다.


 "아 시간없어. 질문에 대답이나 해, 어땠냐고. 나 그거 들으러 온거야."


 너는 평소처럼 장난기 가득한 모습이 아닌, 마치 처음 만났을 때처럼 왠지 진지하고 냉랭해 보이는 태도였다.

 

 "진심으로?"


 "그래, 진심으로."


 너는 나를 올려다 보았고, 나는 너를 내려다 보았다. 너는 내 품에 안긴 듯, 나에게로 깊숙이 들어와 내 옷자락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까. 평소라면 그냥 '내용은 쓸데없이 장대하고, 불필요한 서술이 가득한 아마추어의 글이었어.'라며 장난을 쳤을 테지만, 왠지 농담을 할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너에게 스며든 1863회차의 자아가 지금 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고민했다. 진심으로. 

내가 일행들의 구원이었다면, '멸살법'은 내 구원이었다. 그 이야기 속에서 나는 유중혁을 자처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평생 엑스트라로 살아올 것만 같았던 내가, 멸망한 세계에서 주인공의 역할을 하고, 원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결국 결말에 도달한 것. 그 모든 것이 '멸살법'의 덕분이었다.


 마침내 찾아온 고민의 끝은 생각보다 초라했다. 그냥 내 진심을 전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네 이야기로, 나는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어."


 내 말이 기어코 너에게 닿았을 때, 너는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일순간 일그러진 그 얼굴은 분명히 그 감정을 전하고 있었다.


 "그래, 그 말이 듣고 싶었어."


 내 품에 안긴 것만 같았던 너는, 나에게로 더 깊숙이 들어와 안겼다.

 그리고 조그마한 얼굴을 들어, 나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내가 그 이야기를 쓴 것도, 오로지 너 때문이었어."


 "그럼, 잘 알고 있지."


 그 순간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고, 세상의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품이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너를 감싸 안은 내 팔이 방향을 잃은 듯 공중에서 나부끼고 있었고, 너는 흐릿한 인상으로 계속 나를 올려다 보았다.


 "마지막 순간에는 너를 보고 싶었는데, 꼭 너를 봐서 이 세계의 비극이 너 때문인 것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왜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잠깐이지만, 함께 있었던 모든 순간에서 너는 알아차릴 빌미를 내주었는데.


 "어지간히도 보고 싶었나봐? 영영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는데, 기어코 꿈까지 꾸고."


 '가장 오래된 꿈'의 꿈은 곧 현실이다. 그것이 꼭 이 세계선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꿈은 분명 또 다른 어떤 세계에 분명한 영향을 끼친다.


 "결말이 시시해서 마음에 안 들었냐? 하여간 깐깐해가지고는. 원래 열린결말이 주는 여운이 더 많잖아. 이해해."


 나는 사라져가는 네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가지마, 가지마… 가지마—"


 너는 대답 대신 씩 웃었다. 아니, 울었다. 모르겠다. 이젠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희미해진 네 존재가 나를 가로막고 있었다.


 드문드문 생각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너를 만나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네 이야기로 나는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가끔 소설 전개가 느려지면, 댓글 창으로 투덜댔던거 미안하다고.

 그 이야기는 내 세계였고, 나는 그 버러지같은 삶 속에서 세계를 꿈꿀 수 있었다고.

 나는, 나는 너를—


 처량하게 밀어 나가는 바람과 함께, 너는 사라졌다.

 내가 사랑하는 한수영의 기억 속으로, 어쩌면 이야기의 지평선 너머로.


 [설화,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이야기"가 이야기를 끝마칩니다!]


 마치 꿈에서 깬듯, 상쾌한 기운이 전신에 맴돌았다.

 어쩌면 이것조차도 꿈이었을까.


 아직도 손에 남겨진 감각이 생생했다.

 나는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 그 손을 꽉 움켜지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오랜 억겁을 살아온 나는, 그 세월의 반절을 너를 생각하는 데에 보냈다.

 이 이야기의 작가를, 그리고 이 이야기를 집필한 너의 의도를.

 전해져왔던 고마움도, 미안함도 모두 아득히 넘어설 형형한 감정을.


 나는 너를 사랑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