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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서아를 잠시 희원씨네 부부에게 맡겨둔 채, 혼자 거리로 나왔다. 현성씨 희원씨... 잘 돌봐주시겠지? 조금, 걱정은 되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엄마에겐 더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유중혁 그 자식은... 그냥 이유 없이 싫었다. 한수영도 잘생긴 사람만 나왔다하면 유중혁의 뺨을 때리곤 했다. 그런 유중혁이기에 서아의 눈만 높아질까 괜히 걱정이 들었다.
이미 성준이와 잘 지내고 있으니 괜한 걱정이려나.
한동안 서아와 함께 있어 너를 그리지 못했던 길을 혼자 걷고 있자니, 네가 오롯이 느껴졌다. 낙엽이 밟히며 내는 바스락거림이, 귓가를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의 속삭임이, 애써 잊고 지냈던 너와의 추억들을 소곤소곤 전달해주었다. 거리에서, 너의 설화로 온전히 채워졌을 때, 우습게도 불안증세가 도져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서아가 소중히 챙겨준 레몬사탕이 손에 걸렸다.
'모녀끼리 이런 걸 닮는구나.'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억지로 들이켰다. 포장지를 벗긴 뒤 레몬 맛을 음미하며 힘겹게 발을 떼어내었다. 그래, 지금은 널 만나러 가는 길이니까. 웃는 모습으로 마주해야지. 설령 네가 나를 볼 수 없다해도.
병원에 도착한 나는 익숙한 얼굴과 인사를 나눴다.
"아. 독자씨. 오랜만이네요!"
이설화.
시나리오가 모두 끝난 지금, 그녀는 병원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수영이의 담당의사를 맡아 꽤나 신세를 지고 있는 편이다.
"독자씨, 밥 잘 안 챙겨 드시죠...? 볼 때마다 수척해지셔서 걱정이에요."
그녀는 수영이에게도 많은 시간과 관심을 할애해주었지만, 나에게도 우려 섞인 잔소리를 많이 해주었다. 직업병일까? 내가 뭐라고 걱정을 해주는지 참 고마운 사람이다.
"수영이는 좀 어떤가요?"
이설화의 안색이 급 어두워졌다. 고개를 저으며
"진전이 없어요. 예전 독자씨 같은 상태에요. 숨을 쉬고는 있지만 죽지도 깨지도, 악화되지도 나아지지도 않는 상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돌아오기 전 일행들이 지낸 지난한 시간들을 한수영을 통해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인마! 이 누님과 동료들이 김독자 하나 살리겠다고 어떤 고생을 했는지 아냐? 평생을 모시며 살거라!]
갑자기 장난스레 으스대던 한수영의 모습이 생각 나 피식 웃음을 지었다.
"독자씨 방금 수영씨 생각했죠?"
어떻게 안 거지.
"네, 뭐... 어떻게 아신 거죠?"
"독자씨 맨날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같은 표정인데, 표정이 좋아질 때가 있더라구요. 절반은 수영씨 생각, 절반은 우리 귀여운 서아 아가씨 생각. 맞죠?"
"현대 의학에는 독심술도 필수과정입니까?"
나는 그녀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수영이가 누워있는 곳으로 향했다. 설화씨는 병실로 향하는 내내 잔소리를 하였다. 듣던 중 놀라운 사실은, 그 유중혁이 내가 수척해진 걸 보고 걱정을 다 했다는 얘기다. 살다보니 유중혁에게 걱정이라는 걸 다 받아본다. 설화씨가 중혁이의 밥을 가져다 준다고 얘기하는 걸 말리느라 애를 먹었다. 무척이나 혹했던 것은 사실이다만, 우리 서아가 그걸 먹게 된다면 내가 조금 곤란해질 것 같았다.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병실 문 앞에 다다랐다.
[한수영/34/여]
너의 이름 세글자가 눈에 아프게 박혔다. 병실 문 앞에 적혀 있는 환자가 된 네 이름을 보고 있자니 그저, 누워서 나이를 먹어가는 네 모습이 그려져 사무치게 마음이 아파왔다.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 억지로 참아냈다. 옆을 보니 설화씨는 착잡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의사라는 사람이 이리 쉽게 눈물을 내비치면 쓰나. 주머니에 넣어둔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닦으세요."
"아... 그게... 미안해요 독자씨... 누구보다 울고 싶은 건 독자씨일텐데..."
눈물을 닦아낸 설화씨가 손수건을 곱게 접어 돌려주었다.
"독자씨. 아까 말씀을 못 드렸는데 비유도 안에 있어요. 혹시나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세요. 저는 내려가 있을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나는 설화씨를 뒤로하고 방문을 열었다. 네가 웃으며 맞이해 줄 것만 같았다. 방금 이설화랑 무슨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었냐며 화를 낼 것만 같았다. 새로 쓴 소설의 초고를 보여주며 이건 어떠냐고 으스댈 것만 같았다. 비유와 함께 쌓아둔 과일들을 먹고 있을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은 그저 바람에 불과했다. 언제나처럼 스쳐지나가는 바람.
문을 열고 받아들인 현실은 제법 냉정했다. 죽은 듯이 누워있는 너,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비유.
"아... 빠 왔구나."
비유는 과거의 기억이 돌아온 뒤, 나를 조금은 어색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내 잘못이다. 내가 비유와 보낸 시간이 길지도 않았거니와, 비유는 암흑 단층에서 수련을 하고 유중혁과 세계선을 떠돌며 보낸 시간이 제법 길었다. 또한, 수영이가 이렇게 된 뒤로는 비유에게 간호를 맡겨버렸기에 서로 간의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수영이가 입원한 뒤 나의 관심은 수영이를 많이 닮은 서아에게 집중되었으며, 비유는 그런 나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기 때문에, 어색하고 불편하고 원망스럽게 느끼더라도 난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또 이상한 생각한다."
비유가 정곡을 찔러왔다. 이 병원에 있는 사람들은 사람 마음을 읽는 특성이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 내 표정에서 티가 많이 나는 걸까?
"아빠는 쓸데없는 걱정할 때 꼭 이상한 표정 짓고 있더라. 또 자책하고 있는 거지? 내가 이렇게 엄마를 간호하는 것도, 엄마가 이렇게 누워있는 것도. 다 아빠, 당신의 탓이라고 여기는 거. 맞지?"
맞다.
"미안해 비유야. 너무 고생만 시키는 거 같네."
비유는 어딘가 서글퍼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그럼 다음에 기분 전환할 겸, 같이 놀이공원이라도 가. 영화관도 좋고. 산책도 좋으니 뭐든 하루 정도는 나한테 시간을 써 줘. 약속하는 거야 알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비유를, 사랑스러운 내 딸을 불편하고 어색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나. 아니, 나 혼자 그렇게 여기는 것일 뿐. 비유는 여전히 나를 아껴주고 있었다. 자식에게 위로 받는 부모라니. 오늘도 스스로가 얼마나 한심한지 알 수 있었다.
"집에 가면 현성씨, 희원씨 방에 서아 있을 거야. 비유 너도 그동안 고생했으니 오늘은 서아랑 같이 푹 쉬어. 나랑 교대하자."
"그럼 그렇게 할 게! 오늘은 서아랑 실컷 놀아줘야겠다. 아참, 그리고 아! 아까했던 약속 잊으면 안 돼! 꼭이야 알겠지?"
비유는 자신과의 약속을 잊지말라는 당부를 수차례 반복하었다. 이내, 만족스런 표정으로 배시시 웃던 비유가 나를 꼭 안아주었다. 잠시였지만, 큰 위로가 되었다. 힘든 삶을 버티게 하는 버팀목이 한 그루 더 심어진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비유를 신경써주지 못한 자신에 대한 혐오가 스멀스멀 기어올라올 때쯤 비유의 작은 손이 내 이마로 다가와 꽁- 소리를 내었다.
"이상한 생각 금지."
비유는 으름장 놓듯 얘기하며 아까 깎아둔 과일들을 내게 내밀었다.
"과일 다 먹고, 끼니도 거르지 말고 설화 언니한테 물어보고 검사할테니까!"
그러고는, 다시 나를 꼭 안아주고 병실을 떠났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비유가 섭섭해하지 않도록 잘 챙겨줘야겠다. 나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다.
비유가 깎아 놓은 과일들을 먹으며, 너의 손을 어루만진다. 아직 살아있음을 증명하듯 너의 손에는 온기가 남아있었다. 너의 몸 여기저기 온기가 있음을 확인하자, 그제서야 아직 네가 살아있구나. 안도할 수 있었다. 과일 접시를 한 곳으로 밀어둔 뒤, 네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천천히 꺼냈다.
서아가...
네가 많이 보고 싶은가 봐
어제는 서아한테 나도 모르게 상처를 줬다?
왜 진부한 클리셰 있잖아? 드라마나 소설 속의.
혼자 자식을 키우는 부모가 아이들에게 변명으로 자주 하는 말.
아파서 멀리 치료하러 갔다는 말.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상처가 됐나 봐.
어린 녀석이 누굴 닮았는지 똑똑하고 눈치도 제법 빠른 게, 네가 아파서 멀리서 치료받고 있다는 내 말을 다 믿어줄지 걱정이네.
서아가 참 성숙하고 배려심도 깊고 그래. 어제, 네 사진을 보니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막 나는데 서아가 울지말라고 도리어 달래주더라. 너무 기특하지 않냐 우리 서아?
...
우리 서아, 내 사랑만큼, 네 사랑도 필요할 때잖아. 빨리 일어나서 보러 가야지...
그러니까 제발 눈 좀 떠주라. 장난이었다고, 지금이라면 몰래카메라였다고 말해도, 화 안낼테니까, 웃으면서 안아줄테니까...
그러나, 늘 그랬듯이 나의 간절함은 하늘에 닿지 않았고, 날 비웃는듯 냉랭한 현실만이 이곳에 있다.
너의 손을 꼭 잡고 침대에 몸을 기대 눈을 붙였다. 잠시 곁에 있는 느낌이 들어, 조금은 쉴 수 있었다. 잠시만, 잠시만 이렇게 누워있자. 잠시만, 잠시만 네게 기대자.
그렇게 눈을 붙이고 누워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을 때, 깨어나고 싶지 않은, 달콤한 꿈을 꾸었다. 그곳엔, 웃고 있는 너와 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