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이라는 것은 가장 쉽고 안전한 길을 모색하는 최고의 수단이라 여겨집니다. 만약, 가까운 시일 내에 당신에게 다가올 미래를 알고, 악재를 피하고 길재를 취할 명확한 길이 제시된다면, 걷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요?


저에게 예언이란 그런 것입니다. 예언자란 결국, 주어진 운명 하에 다가올 악재들을 피하여, 멸망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를 제시하는 사람. 적어도 저는,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해왔습니다.


그와의 첫만남은 꽤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흐릿한 인상과 능글맞은 태도. 시나리오 초기에, 그와 같은 알 수 없는 사람을 만났다는게 그렇게 기껍진 않았습니다. 그에게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볼 수 없었던 것일까요? 그에게 조금 흥미가 생겼습니다.


그와의 두 번째 만남은, 비공식적으로는 별자리의 연회가 되겠죠. 과거시를 통해 보았던 2회차에서 저는, 유중혁. 그를 배신하였습니다. 저로서는 그의 무력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셀레나 킴을 대신 보냈었는데, 그는 그날을 기억하련지 모르겠습니다.


미식협으로 향하는 길, 우연한 동행으로 그와 정식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일개 화신인 저와는 다른 격을 쌓은 별자리가 되었습니다. 다만, 그가 성좌가 된 뒤 긴 시간이 흐르진 않았기에, 그의 격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던 저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죠. 그와 손을 잡기 위해, 그의 소중한 화신을 툭툭 건드리며 아스가르드로 회유하려 했던 저는, 그가 격을 발하였을 때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기실에서의 대화로 저는, 처음으로 그에게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세계가 과연 지킬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


저는 미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무엇을 그리고, 어딜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그저 그가 적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자리를 뜨고 말았습니다.


그가 저의 계획을 망쳤을 땐 당혹스럽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만 아니었다면, 이리스도 최고의 배후성을 얻어 살아남았을텐데. 돌아가는 길, 분한 마음에 그에게 소리쳤습니다. 그는 저의 행동을 비판하였고, 저는 그런 그가 '성좌'가 되었기 때문에, 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바라는 미래는, 성좌가 없는 세상이었기에 결국 당신과는 적이 되겠거니 생각했습니다.


이후 올림포스에서 마주쳤을 때도, 기간토마키아 시나리오에서도 그는 저를 농락하였고, 저는 결국, 별다른 성과를 이루지 못하여 성운에서 내쳐지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수식언 뺏기 시나리오였나요. 그는 예상치 못하게 피투성이가 된 채 숨어있는 저를 구해주었습니다. 자신의 필요였다 하더라도 성운에서 내쳐진 저를 필요로 해주었습니다. 단순한 변덕이었을까요. 그의 의중이 궁금하였습니다. 조금 우스웠던 건, 구해줄 때부터 쭉 반말을 하던 그였건만, 언제부터 반말을 했냐는 질문에 바로 존댓말을 하던 가증스러운 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은 혼란, 혼란. 혼란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를 끌어들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아스모데우스를 끌어들이고,

같은 마왕을 죽이는 순간.
태연자약하게 마왕을 그만두겠다 말하는 순간. 돌멩이가 되는 황당한 설화로 성좌의 시선을 피하는 순간.
미카엘을 쓰러트리고 신화급 설화를 얻는 순간.

그 모든 순간을 마주하였을 때 그는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황당하고 놀랍고도 신기한 사람이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는 이 세계가 지킬 가치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처럼 얘기하였음에도 이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애쓰고 있었고, 자신의 화신을 겁박하며 회유하려 한 저를 어떠한 이유이든 살려주었고, 제게 뱉은 말을 어떻게든 지켜냈습니다. 그 때문에 틀어져버린 계획, 겪은 수모, 성운에서 내쳐진 순간들. 그가 밉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당신을 미워할 수만은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숨이 여러 개인 것처럼 구는 당신이 못내 안쓰러워, 저는 당신을 살리고자 마음 먹었습니다. 단순히 신화급 설화를 얻어서? 당신이 나를 한 번 구해주어서? 제 마음이 그렇게 움직인 이유를 알 순 없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후 성마대전에서 2회차의 복수를 다짐한 유중혁을 만났을 때, 그가 당신의 영향을 받았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습니다. 과거시로 보았던 제가 지금의 제가 아니듯, 그 때의 유중혁과 지금의 유중혁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원수였던 저를 살려줄 뿐 아니라 지켜주기까지 하였습니다. 김독자, 당신이 명계의 병사를 끌고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곳에서 죽을수도 있었을텐데, 유중혁은 저를 기어코 지켜냈습니다.


저는, 지난회차와는 다른 유중혁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이런 저라도, 당신의 영향을 받는다면, 운명을 거스르고 이 세계의 멸망을 막을 수 있을까. 예언이라는 것은 정말로, 주어진 운명 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부터가 당신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구원의 마왕이라는 성좌만큼은, 김독자라는 사람만큼은 살려내고 싶다는 주제 넘는 생각을 품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제가 바라는 세상엔 필요없는 '성좌'라는 존재임에도, 당신만큼은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이 마지막 방주에서 도망칠 수 있도록 도움을 건넸습니다. 거절당할 것을 알았지만, 당신에게 방주를 타고 도망가자는 제안도 해보았습니다. 제가 바라는 세상의 유일한 별이 되어달라고 부탁도 해보았습니다.


결국, 당신을 향한 저의 바람은 닿지 않았고, 당신은 제가 원하던 세상에 가까운, 평화를 만들어놓곤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49%라는 기만스러운 아바타를 남기고 말이죠.


저는 어떻게 하고 싶었던 걸까요. 당신을 구하기 위해 집단 회귀를 결심한 일행들을 보며, 내심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도하고 바랐습니다. 제가 바라는 결말에 가까워진 세계를 외면할 수 없었기에, 당신을 되찾겠다는 계획에 동참할 순 없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을 향한 호감이, 그정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만, 당신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어딘가 공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한 호기심인지, 그저, 제가 이룰 수 없었던 일을 이루어 준 당신에 대한 경외였던 것인지. 어쩌면, 이토록 평화로운 세상에서, 제 마음이 공허한 이유는. 당신이라는 유일한 별이 사라졌기 때문일까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세계를 안정화시키는데 노력했습니다. 그들이 새로 이룩한 회차에서는, 어떤 미래가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여 방주를 틈틈이 고쳐두기도 하였습니다.

세계가 안정화 되고, 이 세계에서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쯤에도 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한 번쯤 방주를 타고 그들을 찾아가 보자. 그렇게 결심했습니다.


수많은 시간이 흐르고 회귀했던 일행들이 돌아왔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은  당신을 되찾는 것에 실패하였습니다. 돌아온 것은 제가 알던 당신이 아닌, 어리게 변해버린 당신. 그 모습은 어딘가 슬퍼보이면서도 참으로, 편안해 보였습니다. 이 세계를 지켜내고 평안한 안식을 찾은 것처럼.


<김독자 컴퍼니>는 당신을 닮아 포기하지 않고 끝내 당신을 찾아올 계획을 다시금 생각해냈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도움이 되고자, 그들에게 방주를 건넸습니다. 유중혁은 당신을 구하기 위해 수많은 세계선들을 떠돌며 2년이라는 길고도 지난한 시간을 견뎌냈습니다.


당신이 돌아온 그 순간까지도, <김독자 컴퍼니>에 제가 있을 자리는 없었기에 저는 그저 먼발치에서, 당신들의 행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원의 마왕, 아니 김독자. 우리의 운명은 비록 악연으로 시작했을지 몰라도, 당신으로 인해 저는, 이 세계는 구원받을 수 있었어요. 당신을 향한 이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저 먼발치에서 행복하게 웃는 당신과 <김독자 컴퍼니>의 영원한 행복을 바라는 것이, 제가 당신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일까요.


늦었지만 당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저에게 유일한 성좌. 당신의 영원한 행복을 바라고또 바라봅니다.


[화신, '안나 크로프트'가 새로운 자신의 ■■에 도달했습니다.]
[화신, '안나 크로프트'의 ■■는 세상을 비추는 유일한 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