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이 사람은 누구야?"


하루는 서아가 손에 사진을 쥔 채 내게 오도도 달려와 나를 당황케 하였다. 서아가 손에 쥔 사진 속에는 나와... 수영이가 웃고 있었다. 최대한 침착하게, 표정 변화 없이 서아에게 설명해주려는 순간


"아빠 왜 울어 울지마..."


하고 덩달아 우는 서아를 보며, 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울고있었구나. 깨닫게 되었다. 눈물을 훔치며, 서아에게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 예쁜 사람은... 서아 네 엄마야. 서아도 엄마를 닮아서 나중에 이렇게 이뻐지겠다!"


나는 서아가 대답해주기 힘든 질문을 할까 겁이 나 어떻게든 이야기를 끝마치려 했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호기심이란 마르지 않는 샘과도 같았고, 내 의도와는 무관하게도 서아는 내가 가장 꺼려했던 질문을 건네왔다.


"아빠는 항상 집에 있는데 엄마는 집에 안 오는 거야? 왜 서아는 엄마를 본 적이 없어?"


하하 이거 참...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가끔 읽어주는 동화책에도 엄마들은 항상 등장하며, 가끔 집에 찾아오는 할머니 역시 나의 엄마이다. 오며가며 만나는 성준이 수연이에게도 이설화가 있다.


주위의 많은 엄마들의 존재는 어린 서아에게 있어 늘 궁금한 존재였을 것이다. 왜 자신은 엄마를 본 적이 없는 것일까? 그런 상황에, 저런 사진을 보게 되었으니 이런 질문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나는,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를 대비하여 생각해둔 멘트들 중 가장 무난한 것을 선택하여 서아에게 말해 주었다.


"으응... 엄마는, 서아를 낳고 몸이 조금 안 좋아져서 멀리 치료하러 갔어. 서아가 건강하게 잘 자라고 말도 잘 들어야 엄마도 건강해져서 빨리 서아를 보러 올 수 있단다. 그러니까 우리 서아 건강해지려면 얼른 푹 자야지?"


엄마가 아프다는 클리셰. 이보다 무난한 변명이 뭐가 있을까. 변명을 하고 있자니 서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웅... 자기 싫은데..."


"서아가 말을 안 들으면 엄마가 아플지도 모르는데?"


서아가 헉 하고 놀라더니 이내 볼을 부풀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빠는 치사해 이런 말이 얼핏 들려오는 거 같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치사한 얘기였기에, 서아를 달래주기 위해 서아의 방에 따라 들어갔다. 서아는 침대에 얌전히 누워있었다.


'그래도 제 엄마가 아픈 건 싫은가 보네. 우리 딸 기특하기도 해라.'


서아에게 미안함, 왠지 모를 죄스러움을 느끼며 이불을 폭 덮어주었다.


이내 새근새근 숨을 쉬는 걸 보니 잠이 든 것 같아 서아의 얼굴을 살포시 감싸 쥐고 이마에 쪽, 입을 맞추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자 서아가 조용히 "아빠.."하곤 뒤척이더니.


"오늘은 같이 자면 안 돼?"


칭얼거리는 게 수영이와 너무도 닮아서 조금쯤 서글퍼졌지만, 딸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는지라 침대에 몸을 뉘었다. 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잠에 들 때쯤 서글프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걱정이 들었다. 엄마의 사랑을 받고 자랄 나이임에도, 그러지 못했으니 엄마가 보고 싶었던 걸까?


"우리 서아 왜.. 왜 울어.. 왜 울까? 뚝 해야지 뚝.."


"엄마는 많이 아픈 거야? 엄마가 나를 낳아서 아픈 거야? 엄마가 그럼 나 때문에 아픈 거야?"


생각지도 못한 서아의 말에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이 작고 어린 아이의 호기심만을 채우기 위한 알량한 나의 생각 때문에, 나도 모르게 상처를 준 것 같았다. 그렇게 받아들이라고 말한 건 아니었는데... 너무나도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사랑스러운 이 아이에겐 많이 부족한 아빠가 아닐까?


"많이 아픈 건 아닌데, 근처에서는 치료할 수가 없어서 그래요. 우리 서아 울지말고 푹 자자! 아빠가 재밌는 얘기 들려줄까?"


서아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주억거리고는 나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소곤소곤 옛날 얘기를 해주었더니, 서아가 금방 잠에 들었다. 서아를 재우다 보니 나도 잠이 몰려와 눈을 붙였다. 잠에 들 때쯤 어둠과 함께 부정적인 감정들이 스멀스멀 어딘가로부터 기어올라왔다. 잠이 든 서아가 깨지 않게 최대한 조용히 심호흡을 뱉었다. 부정적 감정을 호흡으로 뱉어낼 때마다 상념이 조금씩 흘러들어왔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서아에게 말했던 것들은 반쯤은 진실이다. 수영이가 서아를 낳고 몸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한 것도, 현재 치료를 위해 병원에 누워있는 것도 전부 사실이다. 다만, 멀리 있는 것도 아니며 언제 치료가 될지 치료가 되긴 하는 건지조차 불분명하다. 내 아내, 한수영, 그 바보같은 사람은 서아를 낳고, 혼수상태에 빠져 지금까지도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나는 수영이를 생각하다 어느순간부터 그녀에게 전할 말들을 고르고 있었다. 오늘 서아가 너에 대해서 묻더라, 내가 대답을 잘못해서 나도 모르게 서아에게 상처를 준 것 같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들었다. 생각은 생각을 물고 새로운 생각들은 늘 나를 깊은 우울의 늪으로 끌고 내려갔다.


'오늘 잠은 다 잤네...'


감은 눈을 뜨고 곤히 자는 서아를 보니 괜스레 빛나 보여서, 어두운 바다 위에서 등대의 빛에 의존해 나아가는 배가 된 기분이었다. 서아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인 걸까.


참 우습고도 모순적인 것은. 나에게 서아는 희망이자 고문이었다. 서아가 있기에 살아갈 수 있고, 서아가 있기에 항상 네 생각이 난다. 너를 똑 닮은 이 아이를 볼 때마다 네가 생각 나 버틸 수 있고, 네가 생각나 버티기 힘들었다. 이런 죄스러운 마음으로 아이를 키우는 게 잘하는 일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네가 마지막으로 써주었던 편지를 생각하며, 다시금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내일은 오랜만에 너를 보러 가야겠다.


오늘은 서아를 잠시 희원씨네 부부에게 맡겨둔 채, 혼자 거리로 나왔다. 현성씨 희원씨... 잘 돌봐주시겠지? 조금, 걱정은 되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엄마에겐 더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유중혁 그 자식은... 그냥 이유 없이 싫었다. 한수영도 잘생긴 사람만 나왔다하면 유중혁의 뺨을 때리곤 했다. 그런 유중혁이기에 서아의 눈만 높아질까 괜히 걱정이 들었다.


이미 성준이와 잘 지내고 있으니 괜한 걱정이려나.


한동안 서아와 함께 있어 너를 그리지 못했던 길을 혼자 걷고 있자니, 네가 오롯이 느껴졌다. 낙엽이 밟히며 내는 바스락거림이, 귓가를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의 속삭임이, 애써 잊고 지냈던 너와의 추억들을 소곤소곤 전달해주었다. 거리에서, 너의 설화로 온전히 채워졌을 때, 우습게도 불안증세가 도져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서아가 소중히 챙겨준 레몬사탕이 손에 걸렸다.


'모녀끼리 이런 걸 닮는구나.'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억지로 들이켰다. 포장지를 벗긴 뒤 레몬 맛을 음미하며 힘겹게 발을 떼어내었다. 그래, 지금은 널 만나러 가는 길이니까. 웃는 모습으로 마주해야지. 설령 네가 나를 볼 수 없다해도.


병원에 도착한 나는 익숙한 얼굴과 인사를 나눴다.


"아. 독자씨. 오랜만이네요!"


이설화.


시나리오가 모두 끝난 지금, 그녀는 병원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수영이의 담당의사를 맡아 꽤나 신세를 지고 있는 편이다.


"독자씨, 밥 잘 안 챙겨 드시죠...? 볼 때마다 수척해지셔서 걱정이에요."


그녀는 수영이에게도 많은 시간과 관심을 할애해주었지만, 나에게도 우려 섞인 잔소리를 많이 해주었다. 직업병일까? 내가 뭐라고 걱정을 해주는지 참 고마운 사람이다.


"수영이는 좀 어떤가요?"


이설화의 안색이 급 어두워졌다. 고개를 저으며


"진전이 없어요. 예전 독자씨 같은 상태에요. 숨을 쉬고는 있지만 죽지도 깨지도, 악화되지도 나아지지도 않는 상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돌아오기 전 일행들이 지낸 지난한 시간들을 한수영을 통해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인마! 이 누님과 동료들이 김독자 하나 살리겠다고 어떤 고생을 했는지 아냐? 평생을 모시며 살거라!]


갑자기 장난스레 으스대던 한수영의 모습이 생각 나 피식 웃음을 지었다.


"독자씨 방금 수영씨 생각했죠?"


어떻게 안 거지.


"네, 뭐... 어떻게 아신 거죠?"

"독자씨 맨날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같은 표정인데, 표정이 좋아질 때가 있더라구요. 절반은 수영씨 생각, 절반은 우리 귀여운 서아 아가씨 생각. 맞죠?"

"현대 의학에는 독심술도 필수과정입니까?"


나는 그녀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수영이가 누워있는 곳으로 향했다. 설화씨는 병실로 향하는 내내 잔소리를 하였다. 듣던 중 놀라운 사실은, 그 유중혁이 내가 수척해진 걸 보고 걱정을 다 했다는 얘기다. 살다보니 유중혁에게 걱정이라는 걸 다 받아본다. 설화씨가 중혁이의 밥을 가져다 준다고 얘기하는 걸 말리느라 애를 먹었다. 무척이나 혹했던 것은 사실이다만, 우리 서아가 그걸 먹게 된다면 내가 조금 곤란해질 것 같았다.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병실 문 앞에 다다랐다.


[한수영/34/여]


너의 이름 세글자가 눈에 아프게 박혔다. 병실 문 앞에 적혀 있는 환자가 된 네 이름을 보고 있자니 그저, 누워서 나이를 먹어가는 네 모습이 그려져 사무치게 마음이 아파왔다.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 억지로 참아냈다. 옆을 보니 설화씨는 착잡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의사라는 사람이 이리 쉽게 눈물을 내비치면 쓰나. 주머니에 넣어둔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닦으세요."

"아... 그게... 미안해요 독자씨... 누구보다 울고 싶은 건 독자씨일텐데..."


눈물을 닦아낸 설화씨가 손수건을 곱게 접어 돌려주었다.


"독자씨. 아까 말씀을 못 드렸는데 비유도 안에 있어요. 혹시나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세요. 저는 내려가 있을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나는 설화씨를 뒤로하고 방문을 열었다. 네가 웃으며 맞이해 줄 것만 같았다. 방금 이설화랑 무슨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었냐며 화를 낼 것만 같았다. 새로 쓴 소설의 초고를 보여주며 이건 어떠냐고 으스댈 것만 같았다. 비유와 함께 쌓아둔 과일들을 먹고 있을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은 그저 바람에 불과했다. 언제나처럼 스쳐지나가는 바람.


문을 열고 받아들인 현실은 제법 냉정했다. 죽은 듯이 누워있는 너,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비유.


"아... 빠 왔구나."


비유는 과거의 기억이 돌아온 뒤, 나를 조금은 어색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내 잘못이다. 내가 비유와 보낸 시간이 길지도 않았거니와, 비유는 암흑 단층에서 수련을 하고 유중혁과 세계선을 떠돌며 보낸 시간이 제법 길었다. 또한, 수영이가 이렇게 된 뒤로는 비유에게 간호를 맡겨버렸기에 서로 간의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수영이가 입원한 뒤 나의 관심은 수영이를 많이 닮은 서아에게 집중되었으며, 비유는 그런 나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기 때문에, 어색하고 불편하고 원망스럽게 느끼더라도 난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또 이상한 생각한다."


비유가 정곡을 찔러왔다. 이 병원에 있는 사람들은 사람 마음을 읽는 특성이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 내 표정에서 티가 많이 나는 걸까?


"아빠는 쓸데없는 걱정할 때 꼭 이상한 표정 짓고 있더라. 또 자책하고 있는 거지? 내가 이렇게 엄마를 간호하는 것도, 엄마가 이렇게 누워있는 것도. 다 아빠, 당신의 탓이라고 여기는 거. 맞지?"


맞다.


"미안해 비유야. 너무 고생만 시키는 거 같네."


비유는 어딘가 서글퍼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그럼 다음에 기분 전환할 겸, 같이 놀이공원이라도 가. 영화관도 좋고. 산책도 좋으니 뭐든 하루 정도는 나한테 시간을 써 줘. 약속하는 거야 알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비유를, 사랑스러운 내 딸을 불편하고 어색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나. 아니, 나 혼자 그렇게 여기는 것일 뿐. 비유는 여전히 나를 아껴주고 있었다. 자식에게 위로 받는 부모라니. 오늘도 스스로가 얼마나 한심한지 알 수 있었다.


"집에 가면 현성씨, 희원씨 방에 서아 있을 거야. 비유 너도 그동안 고생했으니 오늘은 서아랑 같이 푹 쉬어. 나랑 교대하자."

"그럼 그렇게 할 게! 오늘은 서아랑 실컷 놀아줘야겠다. 아참, 그리고 아! 아까했던 약속 잊으면 안 돼! 꼭이야 알겠지?"


비유는 자신과의 약속을 잊지말라는 당부를 수차례 반복하었다. 이내, 만족스런 표정으로 배시시 웃던 비유가 나를 꼭 안아주었다. 잠시였지만, 큰 위로가 되었다. 힘든 삶을 버티게 하는 버팀목이 한 그루 더 심어진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비유를 신경써주지 못한 자신에 대한 혐오가 스멀스멀 기어올라올 때쯤 비유의 작은 손이 내 이마로 다가와 꽁- 소리를 내었다.


"이상한 생각 금지."


비유는 으름장 놓듯 얘기하며 아까 깎아둔 과일들을 내게 내밀었다.


"과일 다 먹고, 끼니도 거르지 말고 설화 언니한테 물어보고 검사할테니까!"


그러고는, 다시 나를 꼭 안아주고 병실을 떠났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비유가 섭섭해하지 않도록 잘 챙겨줘야겠다. 나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다.


비유가 깎아 놓은 과일들을 먹으며, 너의 손을 어루만진다. 아직 살아있음을 증명하듯 너의 손에는 온기가 남아있었다. 너의 몸 여기저기 온기가 있음을 확인하자, 그제서야 아직 네가 살아있구나. 안도할 수 있었다. 과일 접시를 한 곳으로 밀어둔 뒤, 네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천천히 꺼냈다.


서아가...

네가 많이 보고 싶은가 봐 

어제는 서아한테 나도 모르게 상처를 줬다?

왜 진부한 클리셰 있잖아? 드라마나 소설 속의.
혼자 자식을 키우는 부모가 아이들에게 변명으로 자주 하는 말.

아파서 멀리 치료하러 갔다는 말.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상처가 됐나 봐.

어린 녀석이 누굴 닮았는지 똑똑하고 눈치도 제법 빠른 게, 네가 아파서 멀리서 치료받고 있다는 내 말을 다 믿어줄지 걱정이네.

서아가 참 성숙하고 배려심도 깊고 그래. 어제, 네 사진을 보니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막 나는데 서아가 울지말라고 도리어 달래주더라. 너무 기특하지 않냐 우리 서아?

...

우리 서아, 내 사랑만큼, 네 사랑도 필요할 때잖아. 빨리 일어나서 보러 가야지...

 그러니까 제발 눈 좀 떠주라. 장난이었다고, 지금이라면 몰래카메라였다고 말해도, 화 안낼테니까, 웃으면서 안아줄테니까...


그러나, 늘 그랬듯이 나의 간절함은 하늘에 닿지 않았고, 날 비웃는듯 냉랭한 현실만이 이곳에 있다.

너의 손을 꼭 잡고 침대에 몸을 기대 눈을 붙였다. 잠시 곁에 있는 느낌이 들어, 조금은 쉴 수 있었다. 잠시만, 잠시만 이렇게 누워있자. 잠시만, 잠시만 네게 기대자.

그렇게 눈을 붙이고 누워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을 때, 깨어나고 싶지 않은, 달콤한 꿈을 꾸었다. 그곳엔, 웃고 있는 너와 내가 있었다.



"야, 김독자! 갑자기 멈춰서 뭐 하냐?"


눈 앞에.

내가 그토록 그리던

웃고있는 눈부신 네가 서 있었다.


"야, ㅁ...뭐... 뭐야 뭔데...? 왜 우는데? 뚝. 울지마. 오늘 좋은 날이라고 나왔잖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나오고, 네가 나를 달래주었다.


"...었어..."

"뭐라는 거야?"

"웃고 있는 네 모습이 보고 싶었다고."


나는 환하게 웃으며 수영이를 와락 끌어 안았다. 내 품에 안긴 한수영은 당황하는 것 같다가도,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하여간 알 수 없는 애네."


한수영이 나의 볼을 콕하고 꼬집고 그제서야 나는 어렴풋이 눈치를 챌 수 있었다.


'꿈이구나.'


"멈췄다가, 울다가, 웃다가, 표정이 나빠졌다가. 가지가지하네. 볼 꼬집는 게 그렇게 싫었냐?"

"아냐... 그런 거"

'이 꿈에서 깼을 때, 널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속마음을 감춘 채 씨익 웃어보이며 수영이의 손을 잡았다.


"가자. 오늘 좋은 날이잖아."


기억 난다. 너와 함께 이 길을 걸었던 날, 화창한 날씨. 내가 답답했는지, 네가 먼저 결혼하자 얘기해준 날. 나의 생일.

아마도 이 달콤함에 취하는 순간, 나는 차가운 현실을 맞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은 간사한지라 나는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만끽하고 싶어졌다. 오늘, 꿈 속의 너에게, 그리고 힘들었던 나에게 행복한 하루를 선물해주어야겠다.


우리는 손을 잡고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강변에 누워 강가를 바라보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시 산책로에서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다.

너와 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나는 이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으나, 시시콜콜한 말들로 침묵을 깼다. 하루 종일 너를 업고 다닐 수 있다는 나의 말에 너는, 평소에 안하던 짓을 왜 자꾸 하냐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크게 웃어버렸다. 내 웃음을 본 순간 네가 나에게 달려든다. 너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풀밭에 넘어진 우리의 그림자가 이내 가까워진다. 한참을 누워있던 우리는 마주보며 웃었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근처의 벤치로 자리를 옮긴다.


"수영아."

"왜?"

"사랑해."

"뭐야 갑자기..."

"나랑 결혼해 줘."


나의 말을 곱씹다 놀란 너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눈물을 글썽였다. 너의 입이 벌어져 무어라 말을 건넨다. 내게 안긴다. 점점 너의 목소리가, 너의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익숙한 향이 내 코를 자극하고, 몸에서 점차 뻐근한 감각이 느껴졌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어둠 속에서 환하게 웃던, 놀라서 울던, 행복해보이던 네 모습이 아직 선명하게 비친다. 눈을 떴을 땐, 어둠이 걷히고 밝은 빛이 네 모습을 빼앗아 갈까 두려워 눈을 뜰 수 없었다. 비참하다. 내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너는 이렇게 누워있는데, 난 행복했던 때의 너를 그리며, 지금의 너를 바라보기 두려워하는 내가 너무 싫어졌다.


한참을 그렇게 엎드려 있다 이내 고개를 들고 너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수척해진 얼굴, 관리하지 못해 자라난 머리카락.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는 편안해 보이는 너. 꿈 속의 너와 대비 돼 어둡게 보였다. 그저 내 마음이 어두워진 걸지도 모르겠다. 너를 보고있자니,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네게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네가 볼세라 성급히 눈을 가렸다.


더이상 자리를 지키기 힘들었던 나는, 비유가 깎아두었던 과일을 다급하게 챙기고는 설화 씨를 불렀다.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이 되었던 설화씨는 빠르게 병실로 와주었다.


"설화 씨. 죄송합니다. 제가 몸이 너무 안 좋아진 것 같아 가보려고 하는데, 혹시 수영이... 곁을 좀 지켜주실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할게요... 걱정 마시고, 본인 몸부터 챙겨요 꼭. 수영 씨도 많이 수척해지긴 했지만, 독자 씨는 더 심해요. 꼭 건강 관리 잘 하세요..."

"노력해 볼게요. 아, 그리고 제가 요즘 잠을 잘 못자서 그러는데, 적당한 약좀 처방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그렇게 해드릴게요. 어서 쉬세요."


설화 씨는 내 손에 처방전을 쥐어주시고, 나를 배웅해주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병원을 떠나는지 알았다면, 저렇게 나를 걱정해주었을까? 의미 없는 생각이다. 나는 약국에 들러 약을 받은 뒤, 모두가 사는 곳이 아닌, 개인 자택으로 몸을 옮겼다. 지금 모두를 만나면 무너질 것 같았다. 받아온 약을 먹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곧 졸음이 내 정신을 앗아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눈을 떴을 때, 내 눈엔 집의 천장이 아닌 우아한 장식이 곁들어진 천장이었다. 요즘 꿈을 꾼 적이 없는데, 오늘만 벌써 두 번째다. 불길한 생각이 들어 곁을 둘러보았을 때,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는 네 모습이 보였다.


"일어났냐?"

"..."


이건 그 때의 기억. 눈이 내리던, 2월 15일의 기억. 너를 다시 보니, 또 한 번 눈물이 왈칵 쏟아져내렸다.

"어?야, 너... 울어?"


놀란 녀석의 눈동자 위에 내 얼굴이 비친다.

그 때와는 다른 기억, 다른 전개. 그럼에도 상냥한 너는, 나를 달래줄 것이다. 언제 챙겼는지 모를 호주머니 속 사탕을 꺼내 내 입에 물려주겠지. 나는 다시 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전했다.


"보고 싶었어."


이 말 역시, 그 때와는 다른 말. 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 됐지만. 네 모습을 볼 때마다. 난 진심으로 얘기할 것이다. 보고 싶었노라고.


너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당황하다 피식 웃으며 나의 볼을 꼬집었다.


"귀엽기는, 울 정도로 내가 보고 싶었냐? 울지말고 이거라도 먹어."


장난스러운 얼굴로 레몬사탕을 건네던 너는 이내 사라지고, 주변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잠시 후 나는 잠에서 깨었다. 우울함이 나의 몸을 지배했다. 미칠 것 같았다. 맨정신으론 슬픈 마음을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다급히 약을 삼켰다. 어딘가에서 어렴풋이 진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진동을 무시한 채 잠에 들고자 노력했다. 아니, 행복하게 웃고 있을 네가 나오는 꿈을 꾸기 위해 노력했다.


꿈은 계속해서 바뀌었다. 내가 다시 돌아온 날. 행복했던 네 표정이 보였다. 큰 집을 계약하고 김독자 컴퍼니 모두를 불러 모은 날. 너는 나와 함께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너와 처음으로 데이트했던 날.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커피를 마시며, 온종일 너와 소설 얘기를 나눴었다. 네가 웃으며, 내게 써 줄 소설의 초고를 보여주었다.

"너만 보여주는 거야."

손에 꼽을 정도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시간이 흘러, 너와의 첫키스. 너와의 첫경험. 관음증이 도진 달은 밤새 우리의 시간을 훔쳐보았다. 너와의 결혼. 조촐한 자리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축복해주었다. 드레스를 입은 너는, 너무나도 눈부셨다.


서아를 가질 때쯤부터 너는 갈수록 허약해졌다. 너는 몸 속의 서아가 잘못될까 두려워 약도 제대로 챙겨먹지 않고, 몸을 돌보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약해지는 너를 보기 힘들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우리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되새긴다. 추억들은 늘어진 테입처럼 조금씩 흐려지고, 갈라졌다. 선명했던 꿈은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무색의 꿈 속에서 네가 내 양 볼을 잡고 뭐라고 외치고 있었다. 너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너의 입 모양을 자세히 보았다.

[... 려... 자!]

잘 들리지 않던 말들이 서서히 제 색을 찾아가고,

[정신차려 김독자!]

너의 말이 명확히 들려왔다.

너의 호령에 눈이 번쩍 뜨인 나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내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내 곁에는 침대에 누워 울다 지쳐 잠든 서아와, 나를 힐난하듯 노려보는 <김독자 컴퍼니>가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울다 잠든 서아의 모습만이 내 눈에 담겼다. 그 순간만큼은 <김독자 컴퍼니>의 누구도 눈에 들어 오지 않았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저 멍하니 서아를 바라보았다. 하나뿐인 우리 딸. 순간, 무거운 돌덩이가 심장을 짓뭉개듯 가슴이 아파왔다. 무언가 샘을 자극한 것처럼, 마를 것만 같았던 눈물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독자야..."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표정은 복잡해보였다. 질끈 깨문 입술, 충혈된 눈. 억지로 울음을 참고계신 듯했다. 나는 감히 한마디도 입을 열 수 없었다. 오늘의 내 모습은 아마, 당신의 가슴 속 대못이리라. 머릿속에는 오직 한 문장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모두들..."


우지끈- 하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희원 씨가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현성 씨가 필사적으로 그녀를 말리고 있었다.


"아니, 이거 잠깐만 놔 봐요 현성 씨. 죄송할 짓을 왜 해? 독자 씨 때문에 내가 화병으로 죽겠어요!! 무슨 사람이 그렇게 책임감이 없어요?"


그녀의 분노가 가슴을 찔러왔다.


"독자 씨는 그렇게 하면 좋아요? 네? 대답을 해 봐요! 연락도 안 받고, 이렇게 숨어서 누워있으면... 그렇게 상처를 주면 좋냐고!!"


희원 씨가 씩씩 대며 이내 분노가 치밀었는지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현성 씨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한 번 힐끗 바라보더니 희원 씨를 따라 나갔다.


"김독자."

"유중혁..."

"네놈은, 내게 삶을 살라 했다. 이 번 회차를 포기하지 말라 말했다."

"..."

"근데 네놈은 대체 뭐지?"

유중혁의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난, 여전히 네놈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니다. 네놈만큼 신뢰하고 있는 자도 드물지. 그러나, 네놈은 이미 한 번 우리들을 기만했다. 알량한 네 자존심으로, 우리들이 지난한 시간을 견디게 만들었다."

"네놈은, 그렇게 누워있을 자격이 없다. 동료들이 힘들었던 만큼 네놈도 그 값을 치뤄야겠지. 죽을 때까지 편히 쉴 생각하지 마라. 이 번이 네놈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다."


쿵-

유중혁은 할 말을 마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사실관계의 여하를 떠나, 이들 눈에는 내가 삶을 포기한 것처럼 비추어질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신차리라는 수영이의 말을 듣지 못했다면, 서아를 두 눈에 담지 못했다면, 난 아마 영원히 꿈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할 말이 없었다. 잠시나마 현실을 외면한 것은 사실이었다.


"아저씨, 난 오글거리는 말은 못하지만, 동료들이 힘든 건 사양이야. 아저씨가 골골대는 것도 사양이고. 빨리 기운차리라고."

이지혜도 할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 나를 걱정스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저씨."

"아저씨는 지금도 제 배후성인 구원의 마왕인가요?"

나는 잠시 유승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맑고 큰 눈에선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물이 고여있었다.

"유승이 넌 내 하나 뿐인 화신이야."

유승이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떨어졌다.

"아저씨의 감정이, 저한테 느껴질 때도 있어요. 아저씨가 얼마나 힘들지 모르는 것도 아니에요. 그래도 아저씨는 혼자가 아니잖아요. 아저씨는 홀로 외롭게 빛나는 별이 아니에요. 주변에 우리가 있잖아요. 힘들면 저희한테 기댔으면 좋겠어요. 혼자 이겨내려 하지말고."

유승이의 진심어린 걱정이 나의 마음을 적셨다. 유승이의 말이 맞았다. 난 이들이 있어 돌아올 수 있었다. 소중한 서아 역시 이들 덕분에 만나게 되었다. 난 그런 동료들에게 또다시 상처를 준 셈이었다.

"가볼게요 아저씨."
"푹 쉬세요. 독자 형."

눈물을 흘리며 나가는 유승이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나가는 길영이가 보였다.


"독자 씨."

"설화 씨..."

"몸조리 잘 하시라고 누누이 말했잖아요."

"죄송합니다."

"독자 씨. 약 받아가시고, 2일이나 연락이 안 됐어요. 알고계시나요?"

2일이라는 시간 동안 잠만 내리 잔 것일까.

"2일... 입니까?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 몰랐습니다."

"네, 2일이요. 연락도 안 되고 집에도 안 계셔서, 다들 걱정 많이 했어요. 서아가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도착해서도 왜 안 일어나냐고 서럽게 울길래 중혁 씨가 재워놓은 거구요."

"...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나는 잠든 서아를 품에 안아들고, 머리를 쓸어넘겨주었다.

"우웅.."

서아는 내 손길을 느꼈는지, 내 품에 더 깊게 파고들어 잠을 청했다.


"독자 씨는."
"본인을 돌볼 줄 모르는 사람 같아요. 짐이 무거워도 홀로 모든 걸 감당하려고 하시는 것 같아요. 독자 씨는 그런 방식으로 일행들을 지켜냈다고 생각하시지만 틀렸어요. 그런 생각들은 언젠가, 독자 씨 자신에게, 그리고 독자 씨의 일행들에게 큰 상처가 될 거에요. 예전처럼요.

누구도 잃고 싶지 않은 독자 씨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에요. 저 역시도 같은 걸요. 더이상 홀로 외로울 필요 없잖아요. 동료들을, 당신을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사람들을 믿고 기댔으면 좋겠어요.

제가 말이 너무 길었네요. 저는 이만 병원으로 돌아가봐야겠어요. 언제든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설화 씨는 빙긋 웃어보이곤 자리를 떠났다. 내 방엔 어느새 나와 가족들만이 남았다. 우리 사이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않았다.


툭- 투둑-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비유의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들이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약속."
"지키기로 했으면서..."
"이렇게 외면해버릴 약속이었으면 대체 왜 그런 약속한 건데?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는 알아? 여기로 달려오는 한걸음 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알아? 내가 느꼈을 죄책감이 얼마나 컸을지 아냐고!"

"..."



쏟아내듯 소리지르는 비유의 말을 묵묵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아빠가 얼마나 힘든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아빠를 믿는 사람들, 아니 하다못해 나한테라도 털어놓을 수 있던 거잖아..."


비유가 내 어깨에 고개를 박고 기대어 흐느꼈다.


"당신을 믿는 사람들을 조금은 믿어보란 말야."


비유의 말이 나를 아프게 찔러왔다. 서아, 비유, 어머니, 유중혁, 설화 씨, 희원 씨, 현성 씨, 길영이, 유승이, 지혜... 내가 걱정되어 한걸음에 달려와준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기대지 못했고, 또 그들에게 걱정을 끼쳤다.


내 행동들이 옳지 않았다는 걸 모르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슬픔을 공유하기 싫었던 것 또한 아니었다. 그저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라 여겼고, 동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라 생각했다. 내 최선은 동료들에게 최악이 되었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마음이 씁쓸해졌다. 머리가 아팠다.


"독자야."


"...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단다. 그렇기에, 네가 홀로 살아가는 독자가 아닌, 책을 읽는 독자(讀者)가 되길 바랐고. 모든 것을 홀로 감내할 필요는 없다. 네게는 너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기대고 싶지 않다면 기대지 않아도 상관 없어. 네 동료들은 네가 기대든 기대지 않든 널 도와줄 사람이니까."


어머니는 나와 내게 기대어 있는 두 아이를 보며 싱긋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그렇게 있으니 참 보기 좋구나. 나도 이만 가 볼테니 몸조리 잘 하렴."


어머니의 뒷모습이 천천히 멀어졌다. 그리 넓지 않은 당신의 등이, 한 없이 넓어보이는 이유는 왜일까. 비유와 서아를 품에 그러안고 누워 어머니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네 동료들은 네가 기대든 기대지 않든 널 도와줄 사람이니까.'


막연한 말이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이길래 나를 위해 그렇게까지 해주는 것일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내 생각과 행동들이, 동료들에게, 가족에게 상처가 되었다는 것이다. 네가 봤다면, 날 다그치고 혼냈겠지. 품에서 곤히 잠든 비유와 서아를 보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정답은 없다. 나의 최선이 남들에게 역시 최선인 것 또한 아니다. 상처받은 일행들과 비유, 서아, 어머니, 그리고 너에게 속죄하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아직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단지, 나는 독자(獨子)이자 동시에, 독자(讀者)이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대화를 통해 그들 마음 속의 활자들을 꺼내 읽어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하나 둘 씩 읽다보면 최선에 가까운 정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렇게 속죄하는 삶을 살다보면, 언젠가 네가 웃으며 돌아와, 잘했노라고 말해줄 것 같았다. 그저 그뿐이다.


비유와 서아가 일어나 눈을 뜨면 서아에게 너를 보여주어야겠다 다짐하며, 잠시 눈을 붙였다.


잠결에 잠시 꿈을 꾸었다.


의식은 뚜렷했지만, 그와는 상반되게 내 몸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꿈 속에서 나는 사랑하는 딸들과 함께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던가...'


나는 행복해보이는 가족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이내, 웃으며 우릴 지켜보는 수영이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자신이 원했던 광경이듯, 자신이 원했던 결말인듯 행복한 표정을 짓는 너를 보니, 괜히 심술이 나 딸들의 볼을 꼬집어 보려 해도, 몸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꿈속의 나는 몸을 일으켜 네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 너를 품에 꼬옥 안았다. 네가 내 귀에대고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아 최대한 집중하고 너의 얘기를 들었다.


[조금만 기다려 김독자.]


머리를 울리는듯한 너의 목소리에, 나는 꿈에서 깨었다. 혹여나 자고 있는 아이들이 깰까 봐 누운 채로 숨만 몰아쉬었다. 내가 조금 꿈틀거리자 기척을 느낀 비유가 비몽사몽 눈을 떴다.


"아빠아아..."


비유가 응석을 부리며 품에 안겼다. 그런 비유의 행동에 약간 놀라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문득 꿈 속에서 보았던 비유의 행복한 표정이 생각났다. 꿈 속 만큼은 아니겠지만, 지금부터라도 비유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비유를 지긋이 바라보다 비유를 품에 꼭 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우리 딸."


나는 지금까지 비유에게 전하지 못했던, 어쩌면 비유가 원했을지도 모를 마음을 전하였다. 어쩐지 비유의 얼굴이 조금은 붉어진 것 같았다. 가슴에 고갤 묻고 있던 비유는 이내 행복한 표정으로 다시 잠에 들었다.


잠깐 정도는... 괜찮겠지


"서아야, 이리로 와서 자."


"우웅..."


지금 느끼는 이 행복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자 서아와 비유를 나란히 팔에 눕힌 뒤, 새근새근 잠든 딸들이 눈을 뜰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네가 없더라도 일상 속에서 행복을 찾아갈 수 있을까? 아직은 자신이 없다. 그렇지만, 더이상 나를 포기하고 주변을 포기하진 않을 생각이다. 그렇게 지내다보면, 언제라도 네가 돌아와 날 안아주리라고, 고생했노라고 말해줄 것 같았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다시 한 번 사과를 드려야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딸들을 바라보다 졸음이 몰러와 다시 눈을 붙이고 잠을 청했다.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잠에서 깨었다. 품에서 잠들어있던 비유와 서아가 보이지 않는 것이, 아이들이 내는 소리 같았다.


'그나저나, 며칠 만에 푹 자보는 거지?'


요 근래 깊이 잠들어 본 적이 없었던 걸 생각해보면, 이렇게도 개운한 날은 처음인 것 같다. 가끔은 딸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보니 자매가 아웅다웅 다투고 있었다. 정확히는 비유가 서아를 혼내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아앗!! 서아야! 언니가 건들지 말랬잖아!"


"그치만! 나도 돕고 싶단 말야!"


사이 좋은 자매인걸까? 뒷머리를 긁적이며 바라보다 웃으며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어쩐지 소란스럽더라니...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아이들이 기특해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어딘지 부끄러워보이는 비유와 내 손길을 즐기는 서아가 이렇게 사랑스러운지 몰랐는데... 아이들이 기특하기도 하고, 같이 시간을 보낸 적이 많이 없었던 것 같아 소매를 걷어붙이고 말했다.


"같이 만들까?"


"내가 해주고 싶었는데..."


"나도나도! 서아도!"


"생각해보니까 이렇게 셋어서 뭘 같이 해본 적이 많이 없는 것 같아서. 아빠가 미안하기도 하고... 추억도 쌓는다 생각하고 같이하면 좋지 않을까?"


나의 설득에 비유가 놀란듯이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좋아!"


어쩐지 꿈 속에서 보았던 비유의 표정과 많이 닮아있어 괜스레 기분이 더 좋아졌다.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준비하고 아침을 먹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화였다. 문득, 네가 함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나를 좀먹었지만 비유와 서아를 보며 잡생각들을 몰아냈다. 추태는 한 번으로 족했다. 더이상 못난 아빠가 되고 싶진 않았다.


설거지를 마친 뒤 서아에게 그동안 말해주지 못 했던 얘기들을 해주려고 하였으나,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나를 비유가 격려해주었다. 서아는 착하니까. 아빠가 힘든 걸 누구보다 싫어하는 아이니까. 아빠를 누구보다 좋아하는 아이니까. 다 이해해줄 것이라. 그렇게 나를 응원해주었다. 용기를 내어 서아를 조심스레 불러 입을 떼어내었다.


"저기 서아야..."

"응!"


서아의 해맑은 대답에 잠깐 죄책감이 느껴졌다.


"오늘은 비유 언니랑 엄마가 있는 곳에 갈 거야."


"... 그럼 멀리 가? 아빠도 안 돌아오는 거야?"


서아가 울먹이기에 다급하게 서아를 안아들고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야. 사실 엄마는 집 근처에 있어. 많이 아파서 그런지 오래도록 눈을 못 뜨고 있어. 어린 서아에게 상처가 될까 봐 그동안 말하지 못했는데, 서아도 엄마가 많이 보고 싶을 거고... 응..."


서아는 커다란 눈을 요리조리 굴리며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서아가 나를 미워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그럼 나도 가는 거야? 서아도 엄마 볼 수 있어?"


서아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이 어린 아이가 엄마를 얼마나 보고 싶었을지 나에 대한 원망, 나를 미워하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엄마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기대감과 궁금함만이 눈동자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볼 수 있지. 우리 서아. 엄마가 서아 왔다고 못 반겨주고 누워있기만 할지도 몰라. 그래도 울거나 그럼 안 돼. 알겠지?"


서아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왠지 모르게, 저 어린 서아가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서아를 씻기고, 채비를 한 뒤 비유와 서아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양손에 비유와 서아의 손을 쥐고 천천히 거리를 음미해나갔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너와 걷던 거리를 걷다보니 뜬금없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기억이라는 건 하나의 그림이 아닐까. 지우려 해도 자국들이 흐릿하게 남아 못내 다 잊지 못하는 그런 그림.


너를 잊어보겠다는 그런 얘기는 아니다. 이 길들은, 너와 내가 손을 잡고 웃으며 걷던 길들은, 내가 죽는 그 날까지도 잊을 수 없을테니까. 다만, 너라는 그림 한 켠에 비유와 서아를 그려 넣고, 이곳저곳에 자그마한 행복과 추억들을 조금씩 더해가면, 네가 없는 삶에서도 어느새 추억이라는 그림은 다채로워질 것이다. 그렇게 그린 내 추억들은 내가 살아갈 힘이자 이야기가 되어줄 것이다.


네가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내가, 이제는 네가 없이 살아가야할 미래들을 생각하는 것이 조금은 고역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버티다보면 언젠가 네가 돌아올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은 채, 너를 기다리면서 살아가겠지.


"서아. 비유."


"응!"
"응?"


"조만간 아빠랑 여행이라도 다녀오자."


"여행 좋아! 신난다!"
"응! 좋아!"


나의 행복을 차치하더라도, 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에게 행복을 주는 게 이리도 쉽다는 것을, 이제서야 안 내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피식 웃으며 길을 걸어가고 있으니 비유가 "놀이공원도 잊으면 안 돼...!"하고 귓속에 속삭였다. 비유는 어딘지 부끄러워 보였는데 그런 모습조차 사랑스러웠다. "그럼." 하고 비유의 귀에 속삭여주자 서아가 왜 둘이서만 얘기하느냐고 다그쳐왔다.


이런 소란스러운 외출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너를 보러 가는 마음은 무겁지만, 잠시 이 행복을 즐기고 싶어졌다.


[거 봐, 내 말이 맞지?]


네 목소리가 들린듯 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착각이였나? 문득, 이 행복에 네가 함께 할 날이 올 것만 같은 그런 꿈 같은 기대감을 느끼며, 너와의 추억 위에 서아와 비유를 덧대어 그렸다.


병원으로 향하는 길이 조금은 짧게 느껴졌다.



"오늘은 서아도 왔네요? 서아는 여기 처음 오지?"


"네!"


병원에 도착한 우리 가족을 본 설화 씨가 조금은 걱정스럽게 나를 보았다. 어린 아이에게 슬픔을 주고 싶지 않아, 지금껏 보여주지 않았던 수영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


세상에 정답이란 것은 없었고, 이 선택 역시 옳고 그름은 없을 것이다. 단지, 지금 서아에게 세상에서 가장 예쁘지만, 병약한 아내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 같았고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기에 서아를 데리고 천천히 병실로 향했다.


병실로 내딛는 걸음이 조금씩 무거워졌지만, 옆에서 어깨를 토닥이며 빵긋 웃음짓는 비유를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고마워.'


비유에게 고맙다고 속삭인 뒤 웃음을 지어보였다. 비유는 그런 내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똑같이 웃음을 지어주었다.


"보기 좋네요 독자 씨."


설화 씨가 웃음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괜히 부끄러워져 시선을 피했다.


"별 말씀을요. 감사합니다."


"정말 보기 좋아요. 몰랐거든요. 독자 씨가 그렇게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라는 거. 웃고 사세요. 얼마나 보기 좋아요. 웃을 일이 없어도 자식들 보면서 좀 웃고 그래요. 저렇게 이쁘고 귀여운 딸이 둘이나 있는데 우중충하고 침울한 표정만 좀 짓지 말고."


설화 씨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문득 어머니가 해주었던 말이 생각났다. 내가 충분히 사랑 받고 있음을,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설화 씨. 진심으로요."


설화 씨는 그저 빙긋 웃으며, 별다른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진심이 느껴져 코 끝이 찡해졌다. 병실 앞에 다다르자 설화 씨는 자리를 비워주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찾으라는 말을 남기고 업무를 보러 가는 듯했다. 항상 자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수영/34/여]


병실 앞 이름표를 두어 차례 손으로 쓸어보았다. 너를 마주하는 일이 힘들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럼에도 조금씩 견뎌보려 한다. 네 자리는 평생 비워지지 않겠지만, 네가 없이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버티고 버티다보면 네가 돌아올 거라는 헛된 희망이라도 품고 살아가려 한다. 남몰래 그런 결심들을 하고선 서아를 보며 최대한 슬퍼보이지 않게 웃어보였다.


"우리 서아. 엄마 보러 갈까?"


서아는 긴장이 되었는지 조용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병실 문을 열고 네가 누워있는 자리로 향한다. 너는 여전히 이불을 덮고 죽은 듯 고요히 누워있다. 서아는 그런 너의 볼을 만져보기도 하고 머리를 넘겨보기도 하고, 신기한듯 너를 바라보았다. 너를 보며 서아가 무슨 생각을 할까, 어떤 얘기를 할까, 눈물을 보이진 않을까. 서아가 울면 서아를 어떻게 달래주어야 할까. 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긴장으로 식은땀이 조금씩 흘러내릴쯤 서아가 입을 떼었다.


"우리 엄마. 예쁘다."


예상 외의 말에 나와 비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내, 지금껏 꽉 쥐어왔던 긴장의 끈을 놓고, 세상에서 가장 헤프게 웃어보였다. 무표정인 너와는 대조적으로 웃고있는 나를 보며 비유도 웃음이 터지고, 서아 역시 꺄르르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에는 전염성이 있다고들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인듯 수영이의 병실에 웃음소리가 번져갔다. 웃긴 것 하나 없이 웃고 있는 우리들이 언뜻 무서워 보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최선을 다해 발버둥쳤다. 네가 깨어날 때까지 보란 듯이 행복하게 살아볼 것이다. 네가 보지 못하더라도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웃음으로 보여줄 것이다.


웃으면 복이 온다고 했다. 이곳의 우리들은 세상의 모든 복들을 다 끌어담을 듯 한참을 웃었다. 어쩐지 우리들의 웃음소리가 조금은 구슬프게 느껴졌다.


한참동안 슬픈 웃음소리가 이어지다 이내 잦아들었다. 우리는 모두 수영이의 침대 앞에 도란도란 모여앉았다. 나는 서아에게 그동안 감추기 바빴던 옛날 얘기들을 해주었다. 너와의 만남. 첫 번째 사도였던 너, 동료가 된 너, 어린 서아가 듣기에 조금 부적절한 내용들은 적당히 각색해가며 얘기해주었다. 서아는 어떨 때는 흥미진진하게, 또 가끔은 눈물을 흘려가며 내 얘기를 들어주었다. 이야기를 이어갈 때마다, 그 때의 네모습이 아른거렸다. 나는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쳐내고 너의 머리를 한 번 쓸어넘긴 뒤, 서아에게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아이에게 하기엔 다소 무거운 얘기들이었으나 어찌저찌 잘 각색하여 이야기를 끝마쳤다. 서아는 할머니가 해주는 옛날얘기처럼 재밌게 들어주었다. 서아는 얘기를 듣는 내내 수영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어린 녀석이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엄마가 많이 보고 싶었던가 보다. 그런 서아가 기특해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아와 비유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문득, 가족끼리 외식한 번 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슬 식사할 시간도 되었고, 아이들에게 맛있는 음식이라도 사먹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유야 서아야 이제  밥도 먹어야 할 거 같은데. 맛있는 거 사줄테니까 밥 먹으러 갈까?"


"외식이다!"


서아가 꺄르륵 웃으며 방방 뛰었고, 그런 서아를 못말린다는듯 비유가 바라보았다.


사르륵-


바람이 한 줌 불어와 창가의 커튼들을 밀어내고, 너의 머리카락을 몇가닥 헝클이고 간다. 나는 아이들을 먼저 내보내고 너의 머리를 정리해준 뒤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너의 이마에, 입에 입을 맞추었다. 웃는 네 모습이 아직도 많이 보고 싶지만, 이렇게라도 참아보려 한다. 그 때 문득, 베갯잇 속에 종이 같은 것이 보여 꺼내서 펼쳐보았다.


[04010215-노트북]


급하게 휘갈겨 쓴 듯 한 쪽지. 수영이의 생일과 내 생일, 노트북이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수영이 노트북 번혼가? 근데 못 보던 종인데 이런 게 여기 왜 끼어있지? 수영이가 정신을 차렸던 적이 있으면 설화 씨가 아셨을텐데...?'


의문들은 잠시 미뤄둔 채로 병실을 정리한 뒤 밖으로 나왔다. 서아와 비유를 데리고 식당으로 가, 그동안 먹지 못했던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서아와 비유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지금은 잠시 이 행복을 만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는 의문들을 고이 접어 한 켠에 둔 채 아이들과 같이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 후, 비유와 서아를 집에 데려다 주고, 수영이의 물건을 정리해둔 자택으로 향했다. 비유와 서아가 걱정하지 않도록 행선지를 미리 알리고, 혹시라도 늦으면 연락을 주겠노라 안심시킨 후에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네가 그렇게 된 뒤로, 한 번도 들어오지 않았던 이 방문을 열게되는 순간이 오게 될지 몰랐는데. 아련한 생각이 들었다. 너의 노트북을 찾아 꺼냈을 때, 먼지가 덕지덕지 묻은 모습에 괜히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노트북을 깨끗이 닦아낸 후에야 충전기를 꽂고 전원을 켤 수 있었다.


'앞으론 수영이 방도, 물건도 정리를 해 놔야겠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곧이라도 네가 돌아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전원이 들어온 노트북은 비밀번호가 걸려있었고, 역시 04010215는 이 노트북의 비밀번호였다.


'노트북 비밀번호가 우리 생일이라니...'


고마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너무 단순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수영이답다면 수영이다운 행동인가?


노트북엔 네가 정리했을 폴더들이 이것저것 있었다. 네가 쓴 소설의 초안이 담겨있을 폴더. 김독자 컴퍼니의 단체사진. 근데...


독자♡


이 폴더는 대체 뭐지...?


호기심에 폴더를 열어보았다. 어디선가 야!하고 소리지르는 네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으나 기분탓이라 여겨버리고 폴더 속의 파일들을 확인했다. 대부분 낯부끄러운 사진들이었다. 단체사진에서 내 사진만 잘라서 꺼내놓았다든지, 자고있는 내 모습을 찍었다든지. 아쉬운 건 같이 찍은 사진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너를 볼 시간이 많았다고 생각한 건지. 너와의 사진이 많지 않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라렸다.


부끄럽고, 창피하다. 이런 생각들보다도, 네가 나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폴더였기에 마음 한 켠이 무거워졌다.


'다시 돌아오면, 그 때가 언제가 됐든 같이 사진 많이 찍자 수영아.'


나는 다짐하며, 폴더를 끄고 노트북을 더 뒤져볼까 생각하다 너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전원을 끄려다, 바탕화면에 못보던 메모장을 하나 발견했다.


'분명히 이런 건 없었는데?'


나는 홀린 듯이 메모장을 확인해보았다.


[야, 김독자.

기다리는 게 쉽지 않지? 나 없다고 밥도 잘 안 먹고, 너는 내가 돌아가면 혼날 줄 알아.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아서, 이렇게 메모장으로 할 말 남긴다.

나 없다고 끼니 안 챙기는 것도.
나 없다고 서아 제대로 안 키우는 것도.
그렇다고 서아만 신경쓰고 비유를 안 챙기는 것도.
힘들다고 내려놓고 편해지려는 것도.

어떤 것도 용서 안 해 줄 거니까. 내가 돌아갈 때까지 아빠답게 잘 버티고 있으란 말야. 알겠냐?

울고 싶을 땐 나 찾아와서 울고, 내가 듣든 못 듣든 나한테 하소연 하고 가도 되니까. 힘들다고 밥 안 먹고 그러지마라. 이 누나 마음이 아플 거 같다.

김독자... 어련히 알아서 잘하면 이런 잔소리도 안 할텐데. 하여튼 손이 많이 간다니까 너도? 울지말고 잘 지내고 있어.












                                                                                                                                                    고생많았어.]


네가 남긴 글을 보며 눈물이 흘렀다. 노트북을 잡고 하염없이 울다가 마음이 추스러질 때쯤, 의문이 들었다.


분명 이 편지의 시작은, 내가 기다린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있었다. 그렇다면, 수영이는 이 편지를 쓸 때 적어도 본인이 '죽지않는다'는 것을 알고서 남겼을 확률이 높다. 즉 자신이 아픈 이유 혹은, 추후에 자신이 어떻게 될지 알고서 이 것을 남겨두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지만 내 생각이 맞다면 수영이는 자신이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예상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의문은 고생 많았다는 한참 뒤에 쓰여진 듯한 말이다. 이 글은 분명 수영이가 병실에 눕기 전에 쓰여진 듯한 뉘앙스의 글이었다. 고생 많았다는 무슨 이유로 넣어논 것일까? 단순히 고생 많을테니 넣어둔 것일까? 비약같기도 하지만, 나중에 작성된 것이라면?


마지막으로 그 쪽지와 이 글이 왜 지금 시점에, 내게 보인 것일까? 쪽지도 메모장도 분명히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러나, 당장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기에, 고민을 덮어두고 자리를 정리했다. 방을 조금 정리하고, 청소를 해둔 뒤 옛 자택을 나섰다. 비유와 서아가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향하는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설화, '예상 표절'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게...


[설화, '퇴고 전문가'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설화, '거짓 구원자'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빠르게 네가 있을 병실로 달려갔다. 핸드폰의 진동이 느껴졌지만 전화를 받을 정신이 없었다. 다급히 도착한 병원 입구에서 설화 씨가 나를 반겼다.


"독자 씨!!!! 수영 씨가!!"


"먼저 올라가보겠습니다!"


수 많은 생각들이 머릿 속을 헤집었다. 닦아내도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들이 그저 잠깐의 환상이라면... 나는 생각을 멈추고  병실로 달려갔다.


병실의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을 때, 열려진 창문과 커튼 사이로 너의 실루엣이 보였다. 불현듯, 창문 틈 사이로 바람이 한 줄기 들어왔다.커튼이 살짝 걷히며 그토록 보고 싶었던 너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보고 싶었어.."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 앉아 하염 없이 눈물을 쏟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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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25,000자가 넘는 글을 써 본 적이 없는데 모아두니까 25,000자가 조금 넘는 거 같다. 글 자체를 폰으로 써서, 오타나 맞춤법 오류가 있을 수 있는데 양해하고 읽어준 사람들 고맙고,

모든 이야기의 끝은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의미로 이번 시리즈의 제목을 에필로그로 지었다. 던져둔 떡밥들은 어떻게 잘 정리해서 다음에 쓸 프롤로그에서 정리할 거고... 부족한 필력, 감정 표현임에도 읽어준 김독자들아 고맙다.

질문이 있겠냐만은 질문 있는 사람들은 남겨놓으면 답해줄라니까 남기든 말든 맘대로 하고.

중간에 손목 터널 증후군때매 고생좀 했다. 4때쯤부터 손목이 맛가서 힘들더라 프롤로그 쓸 땐 컴퓨터로 쓰려고한다. 전반적인 시놉은 다 짜놨다. 2차창작이라 별로 짤 것도 없드라

암튼 긴 글 읽느라 수고 많았고 다음 글에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