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9일

날씨 맑음


나는 재단의 직원이다. 재단의 E계급 직원이다. E계급이 본래 그렇듯, 원래는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되어버렸다. 사건의 발단은 며칠전에 마검이라는 녀석이 내 앞으로 내려온 것이다. 녀석은 멋대로 날 주인으로 선정했다. 녀석이 내뿜는 소름끼치는 오오라에 압도당한 나는 쉬이 수긍해버렸다. 다른 scp들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오오라였다. 여기까진 좋았다.


헌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녀석의 오오라가 나에게도 조금 묻었던 것이다. 재단에서 감지 못할리가 없었고, 당연히 나의 scp노출이 의심되었다. 나는 이 마검이란 녀석을 보여주려고 했지만 녀석은 어찌된 영문인지 나에게만 보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감지도 안 되었고. 미쳐날뛸 지경이었다. 내가 누구때문에 E계급으로 조정받았는데! 얼마 안 있어 원래 계급으로 돌아가겠지만 이거 강등당하면 감시받는 게 어지간히 짜증나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 와중에 이 마검이란 녀석은 또 자기는 모른다는 듯이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그에 대해서 따져 물었더니 자신은 마검이라 말도 콧노래도 할 수 있다고 태연히 답한다. 그걸 물은 게 아니건만... 


여하간 좋게 생각하는 게 낫겠지 싶다. 일단은 이 마검이란 녀석도 명색이 검이니 사과 정도는 깎을 수 있겠지. 애초에 지금 상황도 영 안 좋기 때문에 더 안 좋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무슨 말인고 하면, 거의 전설로만 전해지던 최상위급의 scp하나가 심술이 나신건지 지구멸망을 택하셨다 이거다. 지금 하늘에 떨어지고 있는 유성우가 바로 그 증거다. 이 유성우는 화성이 지구에 서서히 다가오면서 충돌을 준비하는 과정 중에, 화성의 위성들로 예의상 불리우는 조그마한 우주먼지들이 떨어지는 것이다. 계산상으론 19일이면 화성이 지구와 부딫힌다고 한다. 이 기록을 대체 누가 살아서 볼지 궁금하지만, 누구라도 봐줬으면 한다. 그러라고 일부러 훼손되기 쉬운 일기장이 아니라 인터넷을 쓰고 있는 거니까.


응? 좀 훼손되면 어떻냐고? 그냥 종이에 쓰라고?

...그치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후손쟝... 내게 관심도 없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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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7월 11일

날씨 맑음


안녕 후손쟝? 나야 재단 직원. 또 왔어. 응? 말투가 다르다고? 그 뭐냐, 사실 나도 멸망예정의 때를 안 이후 지금까지 좀 심란했어. 그 왜 알잖아? 죽음을 목전에 두면 사람이 심란해지는 거. 응? 몰라? 아 그래 모를 수도 있겠다. 우리 후손쟝은 아직 살 날이 한참 남았으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심란함은 잠시 접어둬야겠어. 어제 얘기한 마검 혹시 기억하지? 오늘 얘기하다가 알게 되었는데 걔가 초능력 비스무리한 거 쓸 수 있데. 주인이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거야! 놀랍지? 안 믿기지? 그래, 재단을 모르는 친구들이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는 워낙에 불가사의한 일들을 많이 봐서 애초에 그런 감흥은 없더라고.


아무튼 그 다음에 내가 한 일은 뭐일 것 같아? 후손쟝이라면 뭘 빌지 잘 모르겠지만 나라면 저 유성우를 멈추는 소원을 빌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빨리 죽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이 세상에. 게다가 내 나이는 아직 팔팔한 20대라고. 그 마검이란 녀석은 소원을 서둘리 정하기보단 생각 좀 해보는 게 좋은 경우가 많다고 했지만, 우선은 살고 봐야지. 오늘 바로 얘기해볼까 해. 내일의 일기는 아마 밝은 내용일거야. 기대해.


추신. 일이 잘 풀리면 내일부턴 맛집소개를 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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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다음날

날씨


어제 쓴 사람이다. 뭔가 후손님의 놀란 눈이 보이는 듯한데, 동일인물 맞다. 마검 주운 재단직원이다. 먼저, 경과를 보고하겠다. 소원의 내용을 말했더니 마검이 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그러니까... 저 화성이 떨어지는 걸 멈추어서 지구멸망을 막아달라고? 그거 어렵겠는데"


이게 뭔가. 소원의 스케일은 상관이 없다고 해놓고 이게 뭔가.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하며 화냈더니 그 녀석이 "옛날이면 모를까, 지금은 힘이 부족해서 그렇게 스케일이 큰 건 안 돼. 예전에는 크툴루랑도 싸울 정도의 힘이 있었거든. 심지어 이건 자연재해도 아니고 scp가 저지른 거라며?"라고 했다. 이렇게 인류는 멸망하는 것인가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희망도 주었는데,


"아, 힘 보충이면 방법은 있는데"


라고 한 것이다. 기뻐서 눈물이 나올듯한 말이었다. 그 다음에 한 말은 슬퍼서 눈물이 나올 말이었지만.


"피 좀 보면 됨"


...피를 본다는 건 당연히 마검으로 사람을 찌른다는 뜻이었다. 마검은 검으로서의 스펙도 출중하기에, 찌르기만 하면 손쉽게 죽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걸 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난 모기하나도 죽이지 못하는 성격인데 사람을 어떻게 찌른단 말인가. 게다가 당장 주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날 감시하고 있는 선배뿐인데. 어떻게 찌를 수가 있겠나...


참고로 선배는 내가 제단에 처음 들어와서 어버버거리고 있었을 때 날 챙겨주신 고마우신 분인데, 임무 후에 우울해지면 곧잘 상심한 날 데리고 맛집을 가주시는, 상냥한 분이시다. 가끔 천사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면 이 사람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내가 실수해도 별로 크게 혼내지도 않고. 하튼 그러한 분이시다. 절대로 찌를 수 없다.


역시 다른 방법은 없냐고 한번 물어봐야겠다. 있어야 할텐데...


추신. 마검이 말하길, 자신이 나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이 한계라고 한다. 그후엔 다른 곳으로 이동될 것이라고. 시간 계산해보니 7월 16일 오전 10시 20분까지이다. 종말로부터 대략 3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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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날씨 맑음


1.선배가 나 고생한다며 고기를 사주셨다. 감시역이 이래도 되는 건가 싶지만 뭐 어때.

2.가까이에서 자세히 본 선배의 고민하는 얼굴을 감상할 수 있었다. 심쿵했다.

3.화성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이제는 달이랑 비슷한 크기 같다. 아니, 아직 더 작나?

4.어제 밤에 원래 계급으로 복귀했다. E계급에 이리 오래 있던 건 재단으로써도 흔치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5.다른 방법은 없다고 한다. 망할. 그래도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고양이나 다른 동물을 죽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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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 14일

날씨 비 (다만, 유성우에 의한 이상현상일 수도)


동물 죽이기는 실패. 내 마음의 망설임도 있었거니와, 마검이 말하길, 그런 거로는 포인트(?)가 그리 차지 않는다고 한다. 지성체의 피 일수록 좋다고 한다.


이래서야 멸망뿐인가 진짜로 멸망뿐인 것인가 나 선배 좋아했는데 진짜 멸망뿐인가


그냥 길가는 사람이라도 묻지마로 찔러버릴까? 아니야 그건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될 일이다. ...하지만 내가 찌르지 않아서야 인류는 끝일텐데. 그렇게 되면 전인류를 내가 죽인 셈이 되지 않나. 그럼 어느쪽이든 난 사람을 죽인 게 되니까 차라리 한 명을 죽이는 게 낫지 않나?


모르겠다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다. 아니, 이성으로야 답을 안다. 하지만 싫다. 알고 싶지 않다. 인정하고 싶지도 않다. 받아들일 수 없다.

왜 내가 찔러야 하는 거지? 왜 내가 주인인 거지? 왜 나지? 왜 찔러야 하는 거지? 왜 나지? 전 지구의 사람이 70억이라는데 그중에 왜 하필 나인거지? 70억분의 일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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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날씨 비


오늘 선배에게 고백했다. 이 비상시국에 무슨 얼빠진 짓이냐고 하겠지만 난 그렇게 하고 싶었다. 안하면 너무 늦어버리니까. 지금밖에 답이 없었으니까. 헌데 선배는 받아 들여주었다. 그것도 기쁘게 받아 들여주셨다. 심지어는 1일 기념이라며 내일 공원에 있을 콘서트로 데이트가자고 해주셨다.


그래, 무슨 말인지 짐작했으리라 믿는다. 난 찌를 거다. 차마 이대로 세상을 끝낼 수는 없다. 이제 전인류의 목숨 같은 건 상관없다. 하면 선배가 살고 안 하면 선배가 죽는다. 그뿐이다. 할 거다. 마침 내일 콘서트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내일 찌르고 소원을 빈다고 생각하면 지구멸망 3일전에 무마시키는 형국이 된다. 내일이 마검의 사용기간의 만료일이기도 하니, 어찌어찌 세이프이다.


내일 할 것이다. 진짜로 할 것이다. 어린 애들도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할 것이다. 많은 사람에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한다. 인간을 버리게 될 것이다. 그래도 한다. 내가 안하면 지구와 함께 선배는 끝나니까.


추신.

차라리 재단의 D계급 직원들을 죽일까도 생각해보았다. 그 녀석들은 본래가 사형수니까. 허나 그것이 허용될 거 같지가 않다. 저지당할 게 분명하다. 하려면 기습. 재단의 눈이 안 닿을 기습. 즉 일반인 밖에 없는 것이다. 무섭지만... 이젠 그것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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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날씨


찔렀다. 오늘 있을 거라는 공연은 어느 유명 아이돌의 콘서트였다. 거기서 나는 제일 먼저 보이는 10대 아이를 찔렀다. 찔러 넣어버렸다. 나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찌르는 순간의 피부를 가르는 느낌이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감각도, 어떻게든 살려고 버둥대는 그 애의 발악도, 주변의 패닉과 선배의 충격받은 표정도,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맹렬한 기세로 피를 뿜는 상처부위도. 어느 것 하나 머리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 공포의 광경속에서, 난 단지 반쯤 정신이 나가서는 '죄송해요'를 반복하며 주저앉아 바지를 적시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더 큰 공포가 있었다. 마검... 그 X끼가 피를 보며 흥분해서 뭐라 떠드는 바람에 정신이 든 나는, 어떻게든 정신줄을 부여잡으면서 소원을 말했다. 그러나...


"응, 그거 못해"


이게 무슨 소리야... 니가 찌르면 된다고 했잖아... 라고 하자 그 자식은


"얼레? 내가 하나면 된다고 했던가? 한명 피론 좀 부족한데"


그 자식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떠났다. 일주일이 지났다고 하면서. 이제 모든 게 끝났다. 나는 사람을 찔렀고, 그걸 제일 보이기 싫은 사람에게 보였으며, 그런 짓을 하면서까지 관철하고 싶었던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반나절은 절규밖에 안나왔다. 그리고 울음에 지쳐 기절하듯 체력이 방전되었다가 일어나서 쓰는 게 지금 이 글이다. 이 글을 마치고 난 생을 끝낼 것이다. 죽인 그 순간의 소름끼치는 기억과 그후의 상실감이 나를 초단위로 괴롭혀서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있을 수가 없다. 그런 내가 나 자신에 대한 살의를 억눌러가면서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혹시라도 살아남았을 누군가를 위해서이다.


혹시 네 앞에 말하는 검붉은 검이 떨어진다면 

절대로 그 것이 하는 말을 믿지 말아라.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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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창작문학 채널에서 '마검'을 주제로 현재 릴레이소설 이벤트를 개최중인데, 여기서도 이벤트 하는 듯해서 벼락같이 하나 엮어봤음다. 창문챈 많이 놀러오세용. 참고로 창문챈에 올린 버전은 이쪽

2.재알못이라서 재단 설정에 맞을런지는 잘 모르겠음다. 아쉬운 대로 꺼무위키 참고만 했음.

3.그냥 완전 자유로운 분위기인 거 같아서 엮긴 했는데... 창문챈이나 여기 완장님들이 화내시면 즉각 내리겠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