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전

 한국 여름 특유의 후덥지근한 습기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방은 서너 명이 함께 지내도 좋을 만큼 충분히 넓었지만, 창문 밑으로 놓여있는 침대와 옷장, 그리고 작은 책상 하나를 제외하면 방은 텅 비어있었다. 잠결에 내뱉은 목소리가 벽을 따라 부딪쳐 작은 메아리가 되어 다시 울릴 수 있을 만큼. 침대의 바로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는 책상 위에는 작은 스탠드등 하나와 각종 볼펜, 그리고 이런저런 내용들이 잔뜩 적힌 서류들이 올려져 있었다. 


 그는 가만히 앉아 서류들을 내려다보았다. 흰 종이 위에 적힌 검은 글씨들을 차분히 눈으로 훑었다. 단어 하나하나 꼼꼼히, 문장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며, 혹시나 오독한 부분은 없는지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리고 나서는 앉아있던 의자를 뒤로 젖히고, 읽은 내용을 곱씹어보며 생각했다. 한참이나 고민한 끝에서야 그는 한 가지 간단하고 명쾌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3일 후, 세상이 멸망한다.


 재단은 오래전부터 이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세상은 알지 못했다. 재단은 이것을 막아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막지 못했다. 세계가 멸망하기까지 고작 3일밖에 남지 않은 이 순간까지, 그들은 멸망을 막거나 피할 수 있는 어떠한 수단도 떠올리지 못했다. 재단 사령부는 오늘, '신뢰할 수 있다고 평가된 이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멸망이 필연적이고 불가피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몇가지 자료와, SCP재단이라는 단체가 세상에 처음 나타났을 때, 그 누군가가 외쳤던 문구와 함께.


 우리는 햇볕이 들지 않는 음지에서 싸워야 한다, 다른 이들이 양지에서 눈을 감을 수 있도록. 그는 눈을 감은 채 다시금 차분히 떠올려보았다. 그가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는지, 해야만 하는 일들은 무엇이 있을지. 멀리 떨어져 있는 몇 없는 가족들을 찾아갈 수도 있을 테고, 영문도 모른 채 죽어나갈 이들을 위해 기자회견을 열고 이 사실을 널리 공표할 수도 있었다.그는 다시 눈을 떴다. 의자에서 일어난 그는 옷장의 문을 열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에 몸을 눕혔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하는 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2일 전

 토요일, 그는 주말임에도 사무실에 앉아 이사관으로서의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는 온갖 초자연적이고 기괴한 내용이 담긴 서류들을 꼼꼼히 살펴보며 자신이 내려야 하는 결정을 내렸다.


냉장고에 들어가면 폭발하는 케이크들을 비어있는 격리실로 보내고, 사람을 잡아먹는 동굴의 진상을 밝힌 특무부대원들에게 격려와 함께 충분한 보상을 지급하고, 실수로 재단에 재직한다는 사실을 들켜버린 신입 연구원의 주변인들에게 기억소거 대응반을 보내고, 예술이란 이름으로 연쇄살인을 저지른 이를 혼수 상태로 만드는 것을 허가하고...


그러던 도중, 이사관 직통 연락망을 통해 화상 전화가 걸려왔다. 그와는 평소 친분이 있던 다른 지부의 사령관이었다. 그가 통화 승인 버튼을 누르자, 다급한 표정의 사령관의 화상이 공중에 나타났다. 


"자네, 사령부로부터 연락을 받았겠지? 전례가 없는 상황일세, 곧 SCP-001이 발생한다더군. 세상이 멸망하기 일보직전이야!"


"받았네만," 그는 차분히 틈을 두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의 말이 끝나자 사령관은 거의 울먹이는 표정으로 펄쩍 뛰었다. "무슨 일이라니! 재단 사령부가 이런 거짓말을 할리가 없잖는가! 분명 문서에 적힌 대로 이틀이면 세상이 멸망할 걸세, 전세계 사람들이 한 순간에 죽는 일이 벌어질 거라고! 분명 고위직들에게만 전달했을 걸세. 헌데 어째서인지 아무도 별 반응이 없더군. 분명 연락을 받고도 남았을 박사들마저 시큰둥했어. 혹시 자네는 다른 내용의 연락을 받았나?가령, 이 사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벙커라던지..."


"그런 연락은 없었네, 자네가 받은 내용 그대로야."


"그러면 자네는 왜 그렇게 태연한가! 세상이 멸망한다잖나, 분명 자네라면 무슨 대비책이 있을 것 같았네.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태연하다는 건 뭔가 수가 있다는 의미 아닌가? 자네는 어린 딸도 있잖는가."


"해야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그는 차분히 대꾸했다. 


"해야할 일이라니 뭔가! 사령부에게서 다른 지시를 받은 모양이지? 그렇다면 부디 내게도 알려주게. 다른 이들에게는 결코 발설하지 않을테니, 내가 도울 수 있을 걸세."


"방금, 자네가 입술을 떼고 말을 끝마치는 동안 이 지구 상에서 몇 명의 사람이 죽었는지 아나?"


"무슨 소린가?"


"서류를 읽어봤다면 알겠지. 재단 사령부에서 SCP-001을 눈치챈 게 언제인지 아나? 못해도 40년 전일세. 그 40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동안, 재단은 멸망을 막을 방법을 강구했다마는 별 성과는 없었네. 다행히도, 재단이 할 수 있는 게 아주 없지는 않았지. 재단이 아주 오래 전부터 해왔던 것처럼,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루하루 잠들 수 있도록... 숨기는 것."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결국에는 이 날이 오고야 말았는데. 이젠 사람들에게 숨겨봐야 별 소용없네. 곧 있으면 전세상이 알게 될 거야. 재단은 실수한 거라고."


"글쎄, 그 사실을 세상이 알았더라면, 지금쯤 세상은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꼴일테지. 쉽게 떠올릴 수 있지 않나, 멸망을 앞둔 사람들, 삶이 다짜고짜 끝난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저질렀을 끔찍한 일들을. 지금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죽어가고 있어. 누군가는 수명이 다해서, 누군가는 병으로... 양지의 방식으로."


"재단의 일은 양지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지키는 거야. 누구 하나 알아서는 안되네. 최선을 다해 숨기고 가려야지. 단 한 명이라도, 단 한 명이라도 세상이 멸망한다는 사실을 알지도, 이를 빌미로 다른 이를 해치지 못하도록. 양지에서 살아온 이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양지에서 잠들 수 있도록."


사령관은 아연실색한 모습이 되었다. "나는... 나는 받아들일 수 없네.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 세상이 멸망한다는 이런 소식을 듣고도 모른 척한다니, 그런 짓은 할 수 없어. 원통하고 비통하네. 비록 재단에 있으면서 별의 별 일들을 다 겪어봤지만, 도저히 이것만큼은..."


"마찬가지야." 그는 벽에 걸린 시계를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 


"왜 안 억울하겠나, 하루 아침에 세상이 멸망한다는데... 어쩌면 나는 모든 일을 그만두고 가족을 찾아가서는, 아무도 찾지 못할 지하 벙커로 숨어들을 수도 있었어. 어쩌면 남은 돈을 탈탈 털어 지금껏 못한 사치스런 일들을 마음껏 해볼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어. 그래선 안되니까. 다른 누구 하나도 마지막을 앞둔 내 모습에 아주 약간의 의아함마저 느껴서는 안되니까. 평소와 같이 차분하고 침착하게, 올라오는 서류들을 검토하고 내려야하는 결정들을 내렸어. 세상의 어느 누구 하나도, 세상이 멸망한다는 사실을 알면 안되니까. 지금 저 밖에서 복도를 거니는 모든 재단 직원들도." 


"하지만 우리는, 우리는 알고 있잖는가, 세상이 멸망한다는 걸."


"재단의 기본 강령이 뭔지 알테지, 두 가지는 지키지 못했지만, 최후의 순간까지 마지막 하나만큼은 지킬 수 있을 테니."


"SCP, 확보, 격리..."


"보호. 그게 우리가 하는 일이지. 이만 끊겠네, 처리해야할 서류가 아직 남았거든."


그 날, 그는 해야할 일들을 조금의 실수도 없이 마무리했다. 그는 적당한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침대에 누워 적당한 순간에 잠이 들었다. 그 일련의 행동에는 한 치의 조급함도, 두려움도 없었다.


1일 전

그는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이상하게 몸이 가벼웠고,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또렷했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니, 몇몇 가구를 제하고는 텅 비어있던 방에 온갖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 있었다. 곧 그는 깨달았다.


'...아.'


그는 주변에 피어난 꽃들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바닥에서부터 피어난 꽃 하나하나가 선명하고 다채로운 색을 뽐내고 있었으며, 그 모습도 제각각이어서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건물 여기저기에 피어난 꽃들에게 시선을 옮기며, 건물 밖으로 걸어나갔다. 마침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그는 그 자리에 한참동안이나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늘은 아직 검었지만, 밝은 달빛이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그 너머로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의 은하수가 하늘을 덮고 있었다. 그 밑으로는 온갖 사람들이 나와 화려한 꽃들 사이에서 서로 웃고 떠들고 있었다.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는 서류로만 봐왔던 D계급 인원 몇몇이 연구원들과 함께 비둘기들을 날려보내고 있었다. 주황색 작업복을 입고 죽상을 지은 채 끌려가는 사형수들의 모습이 아닌, 비로소 사람다운 모습이었다.


그는 앞으로 나아갔다. 보이는 이들마다 그에게 살가운 인사를 건넸다. 그는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뉴스에서는 이런저런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평소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비밀들을 비로소 입밖에 내는 이들의 소식이 있는가 하면,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법한 인물이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는 소식도 있었다. 이들 모두가 곧 세상이 멸망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계속해서 웃었다. 남겨진 이들과 떠나간 이들을 위한 마지막 인사를 남기며, 마음 속에 품어왔으나 해보지 못한 일들을 마음껏 해보며, 누구 하나 다치거나 아프지 않고 행복한 모습으로, 그들은 최후의 순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재단은 멸망을 막아내진 못했지만, 이들의 웃음만큼은, 마지막 날에 피어난 수 천, 수 만 개의 꽃만큼은, 지켜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