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세요.”

남자는 살짝 고개 숙이며 인사한다.

…… 안녕하세요.”

젊지도, 그렇다고 그렇게 나이 들지도 않아 보이는 외관의 여자 또한 어색하게 입꼬리를 씰룩거리듯 올리며 인사에 화답한다.

 

바 안에는 여자의 구두소리가 또각또각 나지막히 울려 퍼진다. 테이블이라고는 바 테이블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 조그마한 공간이었던 탓에 여자의 발걸음은 벽 모퉁이에, 천장에 금세 부딪혀 돌아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거듭 겹쳐 둔탁한 공간감을 머금은 잔향으로 변한다. 바 테이블에 다다른 여자가 조심스럽게 의자를 꺼내 뺀다. 의자 다리에서의 끼이익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선 계속해 나 여기 있노라며 가열차게 자기어필하던 구두소리를 덧칠해 지운다. 수 번의 호흡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실내는 여자가 찾아오기 직전의 고요를 되찾는다. 그 정적은 별안간 지속된다.

저기…… 소문을 듣고, 기억을……”

손님, 그럼 첫 잔은 어떻게 준비해 드릴까요?”

바 안의 무성상태를 깬 것은 양자였고, 동시였다.

……”

전에도 이런 바에 방문해 보셨던 적이 있으신 가요? 아니면 위스키나, 진 같은 걸 전에도 조금 즐겨 드시던 편이셨나요?”

 

소심하고 위태롭게 일렁이며 빛을 발하고 있는 몇몇의 초를 제외하곤 암실에는 그 어떤 조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시계나 시야는 혼탁하고 희미했으나, 그럼에도 남자가 여자에게 질문을 건네며 머금은 미소는 이상하리만치 확고하고 자명했기에, 장맛비가 쏟아지는 날 유기 된 채 잔뜩 겁에 질려 있는 강아지와 같이 위축되어 있는 여자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서느렇게 식어 잇는 여자의 심신에 조금이나마 안정을 가져다 주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전혀……” 여자는 깊게 잠긴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한다. “흐음남자는 조금 어깨를 으쓱한다. 그리고 턱을 가볍게 쓸어 만진다. 아주 조금 고개를 까딱하고, 아주 조금 고개를 갸웃하다 다시 그 산뜻한 미소와 함께 말을 꺼낸다. “그렇다면 제가 첫 잔을 추천해드려도 될까요?” 라고, “…….” 여자는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남자는, 바텐더는 돌아서서 찬장 위에 진열되어 있는 술 병 중 몇 개를 달그락 소리를 내며 집어 들고는 여자의 눈 앞에 늘어 놓는다. , 쿵 하는 소리가 가게 안 공기를 짧고 가볍게 뒤흔든다. 그렇게 바텐더가 분주해지자, 10평 남짓한 공간은 다시금 활기를 띈다. 리드미컬한 소음들이 연속되기를 몇 분, 바텐더는 조심스레, 그리고 진중히 여자의 오른 편에 청량한 기포가 피어 오르며, 짐짓 쾌활하게 찰랑거리는 액체가 커다란 큐브 모양의 얼음과 함께 가득 담겨진 글라스를 내려 놓는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바에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그 바텐더가 어떤 성격의 바텐더인지 가늠해 보기 위한 주문 중, 가장 적절한 주문이 진 토닉을 주문하는 것이다라고 말이지요.”

…… 지금 만들어 주신 것의 이름이 진 토닉……?”

하핫, 진 토닉은 아니고, 진 토닉과 비슷한 음료 중 하나인 진 피즈입니다.”

“……그럼 방금 전 이야기는 왜……?”

, 그냥 농이었습니다. , 조금 긴장하고 계신 것 같아 보여서 말이죠. 저는 제 바가 방문해 주시는 손님들에게 있어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휴식처 같은 곳이었으면 해서…… 아무 말도 없이 딱딱하게 음료만 내어 드리면 더 불편하게 느끼실 수도 있을 것 같아 말입니다. 이렇게 실언이나 말장난 같은 것들을 일삼는 평범한 아저씨다 란 것을 손님께 좀…… 하하

 

바텐더는 띄엄띄엄 대답을 이어가며 횡설수설하였고, 여자는 조금 고개를 돌린 채 입을 손으로 가린다. 이윽고 가린 손 사이로, 손가락 사이로 쿡 하는 웃음 소리가 들릴 듯 말 듯하게 세어 나온다. 흙빛에 가깝던, 흑에 가깝던 표정의 명도가 아주 조금, 아주 조금 높아진다. 여자는 진 피즈를 천천히 입가에 가져다 댄다. 천천히 흘려 넣는다. 천천히 흘러 넘는다. 생경한 목 넘김 소리가 끊기고, 천천히 흘러나오고, 천천히 흘러 넘친다.

 

멍청한 년이었어요. 골빈 년이었어요. 그때는 꿈에도 몰랐지만, 그렇죠. 후회가 치밀어 오를 때는 보통 이미 때가 늦어도 한참 늦은 때이기 마련인 법이니까요. 아니죠. 아니에요. 애당초 처음부터 글러먹었던 거죠. 나란 년은, 언제나 어떻게든 되겠지. 어떻게든 되겠지. 무엇 하나 계획도, 목표도 가지지 않은 채 하루하루 어영부영이었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말이죠. 저로서는 정말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그냥 남 탓을 하려는 게 아니라, 뭐든 원하기만 하면, 가지고 싶기만 하면 다들 하나같이 제 손에 쥐어 주며 관심 한 번 받으려고, 눈길 한 번 받으려고 아둥바둥이었으니까요. ‘예쁘다’ ‘아름답다’ ‘매력적이다갖은 미사여구를 붙여가며 저를 수식했고, 그렇게 떠받들어 줬고, 그래서…… 그래서 저는 그게 정말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게 되버린…… 착각하게 되버린 거죠. 아니 착각이 아니었어요. 학교를 다닐 때 까지만 해도…… 조금 더 정확히는 제가 어느 정도 철들고 난 후부터…. 그 일을…… 그 씨발새끼를 만나기 전 까지만 해도 제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은 추호도 의심의 여지없는, 부정의 여지없는 일종의 물리법칙이나 자연현상에 가까운 것이었죠. 저에게는 그런 감각, 그런 의미였어요. 늘상, 늘상……”

여자의 양 손에 여자의 얼굴이 파묻힌다. 양 어깨의 들썩임이 점차점차 커진다. 그에 따라 새근거리는 흐느낌 또한 점진적으로 커진다. 여자는 이어 나갈 수 없었다. 바텐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시선조차 두지 않는다. 단지 미묘한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글라스와 기물들의 물기를, 미세히 내려앉은 먼지를 훔쳐내기만 할 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