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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피주머니로 떨어지기까지  - 01. 혈향



바람에 흩날리며 햇빛을 반사하는 찬란한 금발은 마치 점령지에 우뚝 세워진채 나부끼는 승리의 깃발과도 같았다. 그러나 주민들은 그 머리칼에서 밀밭을 떠올렸다. 나부끼는 바람에 파문을 그리며 숙여지던 널따란 밀밭은 이제 푸성귀만 자라고 있었고, 오직 공주의 머리카락만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주민들에 대한 식량 배급이 끝나고, 공주 일행은 마을 여관에 머물게 되었다.

곧 밤이 된다. 인간의 시간이 넘어가고, 마물의 시간이 찾아온다.

병사 일부는 마을의 목책을 점검하며 수호 임무를 수행한다. 전쟁 이후로, 마물의 습격이 잦아졌다.

인간끼리 모여서 불과 빛으로 어둠을 쫒던 시대에 마물은 인간의 손에 하나 둘 쓰러졌다. 그러나 오만에 찬 인간이 그 창끝을 서로에게 향하자, 마을은 하나 둘 어둠에 잠겨 사라졌다. 인간의 손에 죽을 각오를 다졌는데, 갑작스레 인외의 손에 죽은 이들은 원귀로 남았고, 이는 약해져가던 마물들이 다시 일어설 기회로 남았다.

그렇기에 공주의 임무는 그저 후방을 돌며 식량배급이나 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기근과 마물의 습격으로부터 민가를 보호하고, 필요시 위험 무리의 소탕까지 수행해야 한다. 

그래도 격전지의 잔혹함에 비하면 그리 어려운 임무는 아니다. 무리를 이룬 인간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그 만큼의 또 다른 무리일 뿐, 큰 무리를 이루지 않는 마물들은 그저 소탕 대상일 뿐이었으니. 

그럼에도 마물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비록 무리를 이루지 않더라도, 단일 개체의 마물은 마치 무리와 같은 거대한 공포를 휘두른다. 그리고 땅거미가 진 마물의 시간, 하나의 거대한 공포가 관속에서 눈을 뜬다.


핏빛 달빛이 세상을 비추던 어느 밤, 공포는 오래된 고성에 자리잡고, 수백년간 변치 않는 젊음을 뽐내왔다. 망월의 밤이 지나면 마을의 한 집은 반드시 피비린내에 절여져 있었다. 지역 주민들은 혈향으로 점칠된 공포에 굴복했고, 제수와 신앙을 바치며 자신들이 습격에 희생당하지 않도록 기도해왔다.

신을 섬기는 교회의 숨겨진 예배당. 태피스트리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수놓아져 있다. 은사와 명주실로 정성을 들인 가녀리고도 아름다운 여인. 집을 불태울듯 용솟음치는 장발의 붉은 머리칼. 등 뒤에서부터 뻗어나온 날개는 검붉은 박쥐의 날개. 환하게 웃는 얼굴에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뱀의 눈동자.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빛나는 송곳니. 

역동적인 그녀와 대비되도록 그 발치에는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창백한 인간들만이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었다. 

아름다우면서도 잔혹한 뱀파이어 아이리스는 왕성에는 알려지지 않은 이 지역의 숨겨진 공포이며 신앙이었다.

그녀가 향기로운 마력의 잔향에 눈을 뜬다.


얼마만인가

아직 퇴마의 힘을 채 받아들이지 못한 미숙한 마력이다

그럼에도 깨끗하게 정제되어 참으로 청량하구나


질리도록 맛봤다

풋풋한 처녀의 피는 그 자체로도 별미이다

거기에 청량한 마력까지 섞여있으니 백년에 한번 맛볼 진미로다


온 몸에 피가 끓는다.

창백했던 뱀파이어에 얼굴에 홍조가 떠오르고, 얼굴에는 환희가 넘쳐 흐른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순진한 마력을 느끼자 무심코 몸을 떨고 만다.


"하윽"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꼬으며 몸을 비튼다. 드레스 트임 사이로 뻗은 다리 역시 붉게 충혈되어 선정적이다. 다시 한번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스읍… 하아….."


가슴이 쿵쾅대며 턱이 덜덜 떨린다. 피가 돌며 그곳이 충혈되는것이 느껴진다. 손이 멋대로 여체의 돌기로 향한다.

손톱을 세우며 매끄런 벨벳드레스 너머로 잔뜩 충혈된 돌기를 간질인다. 다시 한번 숨을 들이쉰다.


"하흐읏!"


손톱으로 몸을 찔러버렸다. 피가 살짝 베어나온다. 아프지 않다. 오히려 더욱 흥분된다. 풋풋하기 그지없는 잔향이 코끗에서부터 목을 타고 머리까지 퍼져나간다. 거기에 몸을 찌를 쓰라린 자극을 더한다. 풋내나는 기운에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피비린내를 섞는다. 어느새 다리 사이는 흥건히 젖어있다. 몸 속에서 흘러나온 액체의 퇴폐적인 향기가 청량했던 잔향을 진득하게 섞어나간다. 더 이상 순진하기만 하지 않은 그 향기를 다시 한번 들이쉰다.


"하, 하아아"


아아, 온몸이 떨린다. 당장 그 깨끗한 목덜미를 찟고 송곳니를 박아넣고 싶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을 날개의 피막으로 뒤덮고 느끼고 싶다. 매끄러운 피부를 쓰다듬으며 그 순진한 혈관을 진득한 침과 마력으로 범하고 싶다.

그 얼굴은 또 어떨까, 혓바닥으로 어께부터 목선, 턱을 타고 올라가서 귓볼을 입에 넣고 장난치고 싶다.

그리고 귓바퀴를 깨물어 그 피를 햩고, 손톱으로 피부를 찢어 긁어내고싶다.

팔뚝 깊이 손톱을 박아넣으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대로 깊게 긁어내어 살점을 크게 떼어내면 어떻게 비명지를까, 도망치는 발목을 잡아 으깨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허벅지를 깨물어 살점을 씹으면 어떻게 발버둥을 칠까, 채찍으로 피부를 때리면 어떤 향기가 퍼지며 어떤 문양이 새겨질까, 거기에 혀를 대고 핥으면 어떤 감촉이 느껴질까, 너는 과연 얼마만에 내게 복종하게 될까, 귀여운 아기고양아?


환희에 가득찬 마물은 관에서 빠져나와 날개를 펼친다. 달빛을 받으며 밤하늘로 날아오른다. 드레스 끝자락으로 액체들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며, 자신만 맡을 수 있는 온갖 향기를 퍼뜨리며, 흩어져가는 미약한 혈향을 쫒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