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방패의 전설 모음집(계속 업데이트) - 창작문학 채널 (arca.live)

-------------

28화, 노전사


아인은 눈을 떴다. 천막이 눈에 들어오고 곧이어 오크 여자-머리카락이 짧아 남자라고 생각 했으나 어금니가 짧고 여성스러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와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더 보기 위해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 아인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에 다시 자리에 누웠다. 이런 몸상태로 누워있는 것이 이번이 몇 번째인지 머릿속으로 샘하는 동안 잔과 마누엘, 샌디가 들어왔다. 셋의 설명에 따르면 아인은 그 전투 이후 이틀동안 자고 있었으며 이곳은 샌디의 천막이고(아까 전의 오크 여자는 샌디의 아내라고 한다.) 다른 일행들은 그 이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으며 마누엘은 아예 오크들이 노획해 온 드워프의 손대포를 다시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아인, 몸이 좀 나아지면은 레드암스님께 가봐라. 레드암스님이 니 몸이 나으면 바로 자기한테 오라고 해뒀다.”


샌디의 말에 아인은 좀 더 누워있기로 했다. 아직 몸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몇시간 뒤, 아인은 옷을 입고 샌디와 함께 레드암스에게로 다가갔다. 놀랍게도 가는 길에 만나는 오크들 마다 며칠 전 포로로 끌려왔을 때 적대하던 것과 달리 가볍게 인사를 하거나 심지어 경의를 표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인 역시도 웃으면서 화답해 주었다. 어느새 둘은 레드암스의 왕궁 앞에 오게 되었다. 레드암스의 왕궁은 다른 오크들의 천막에 보다 좀 더 큰 천막이었다. 가죽으로 만든 덮개를 씌운 레드암스의 왕궁은 프리움피한이나 화염의 산에 있는 황궁에 비하면 움막에 가까웠지만 계속해서 황무지를 떠돌아다니는 오크들을 생각해보면 이쪽이 더 어울렸다. 특히 왕궁 입구의 양쪽에 놓인 황무지의 괴물, 황야 곰의 해골은 레드암스의 힘을 보여주는 데에 충분했다. 아인과 샌디가 왕궁으로 들어서자 황야 곰의 가죽으로 만든 카펫과 아인도 모르는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큼지막한 트롤의 해골로 등받이 양 옆을 장식한 의자에 앉아있는 레드암스와 그 옆의 노전사가 눈에 들어왔다. 둘은 아인이 들어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서로 말을 주고받더니 아인을 보고는 급히 말하던 것을 멈추었다. 레드암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인을 반겼고 노전사는 무언가 불만족스러운 듯 자리를 피했다.


“Welcome Ein. Come here.”


레드암스는 아인을 자리에 앉히고는 자신도 앉아 하인에게 무언가를 요구했다. 하인이 자리를 떠나자 레드암스가 입을 열었다.


“ah… 어서오게 아인… 아직 dinner은 하지 않았지?”


레드암스는 어디서 배웠는 지 모를 서툰 인간· 드워프어를 구사했다. 아인은 조금 놀라며 그의 말에 답했다.


“네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샌디가 바로 레드암스에게 전했다. 아마도 레드암스는 인간· 드워프어를 알아듣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잠시 후, 하인들이 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아인은 음식들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고기류 말고도 아인이 생전 처음보는 것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레드암스는 고기를 뼈 채로 잡더니 아인에게 먹으라는 손짓을 했다. 아인은 오크의 음식들을 맛있게 먹기 시작하였다. 특히 노란빛이 도는 하얀색의 음식은 특유의 냄새를 제외하면 아인이 생전 먹어본 그 어떤 음식 보다도 특이한 맛을 자랑했는데, 샌디의 말에 따르면 소의 젖을 가죽 포대에 계속 치대서 나온 부산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름은 왜 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식사를 한 후, 레드암스는 아인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아인,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나와 형제의 의를 맺지 않겠나?”


그 말에 투그릭은 물론 구석에 가만히 서있던 노전사 까지도 크게 놀랐다. 노전사가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Chieftain, what’s say? He is human. We aren’t sworn brother with not Orc.”


샌디도 이것만큼은 안된다는 듯 거들었다.


“He’s right sir. To me, Ein is excellent man. But He is human. Other Orc are opposed this decision.”


레드암스는 한숨을 쉬더니 노전사에게 말했다.


“Ah… Geviali, I do not refuse your saying…”


그 옆의 노전사 게비알이 조용히 답했다.


“I know. But that is tradition.”


레드암스는 한 번 더 한숨을 쉬더니 샌디에게 손짓을 했다.


“가자 아인, 레드암스님이 물러가시라 한다.”


아인은 레드암스의 천막을 나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까 그 늙은이…(샌디가 엄청나게 놀라며 그렇게 부르지 마라고 엄포를 주었다.) 게비알은 어떤 경위로 부족의 노전사 자리에 오르게 된 겁니까?”


“노전사님은 20년 전에 너거들이 영토 수복 전쟁이라 부르는 그 전쟁의 영웅이었다. 레드암스님도 마찬가지지. 그 때 레드암스님은 21살이고 노전사님은 50살이었는데 두 분이 목숨 걸고 싸워가 우리가 빼앗았던 영토를 조금이나마 보전할 수 있었지. 그 중에서도 대륙의 서쪽 ‘먼지의 평원’에서 우리 오크 병사 수백명이 인간과 엘프 병사 수천에게 포위 당했었는데, 레드암스님이 위기에 처했을 때 노전사님이 수십의 병사들로 포위망을 뚫고 레드암스 님을 구해준기다. 그때부터 노전사님은 우리 부족의 전사가 되었지. 젊었을 적에 부족을 잃고 떠돌아다니던 노전사님에게도 부족의 중심축을 찾던 레드암스님에게도 좋은 일이었으니까.” 


투그릭은 먼 산을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내는 인간의 노예로 태어났다. 아버지도, 아버지의 아버지도 그렇게 태어났지. 130년 전이다, 우리 조상님이 속해 있던 부족이 인간들 손에 멸망한기. 살아남은 내 조상님은 노예가 되었제, 그런 나를 레드암스님이 구해주었고 노전사님의 동의 하에 이렇게 당당한 부족의 일원으로 살게 된기다.”


샌디는 미소를 지었다. 아인은 샌디의 그리 좋지 못한 과거를 들으며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때, 둘이 걸아가는 방향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두 명이 상황을 알기 위해 발걸음을 빨리 하는 순간, 강한 눈보라가 불기 시작했다. 엄청난 바람에 둘은 몸을 제대로 가누는 것조차 못하고 낑낑거렸다. 아인이 소리쳤다.


“어떻게 된 겁니까, 샌디! 지금은 여름이잖아요!”


샌디도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바람을 버티고 있었다.


“샌디! 피해요!”


아인의 외침과 함께 둘은 양 옆으로 몸을 던졌다. 집의 잔해가 방금까지 둘이 있던 위치로 날아들었다. 오래지 않아 바람은 잦아들고, 아인은 몸에 쌓인 눈을 털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아인은 순간 자신의 몸을 파고드는 한기를 느꼈다. 눈보라로 인한 추위는 아니었다.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피부로 전해지는, 마치 몸 내부에서 피부를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한기는 추위 따위가 아니라 아인의 정신이 몸에게 알리는 경고 같았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무언가 느낀 아인은 칼과 방패를 들었다.


“조심하세요. 샌디, 굉장한 놈이 옵니다.”


“뭘 말하는 기고?”


그 순간, 샌디 역시 아인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곳의 모두가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이제 막 세상을 알게 된 아이도, 혈기 넘치는 젊은이도, 수많은 전투를 넘나든 전사들도 끔찍한 공포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하늘색 비늘과 가죽, 얼음이 수정처럼 나 있는 등, 숨을 쉴 때마다 나오는 얼음의 안개, 또다시 아인의 앞에 용이 나타났다.


“이번에도 또 용이냐!”


아인은 터져 나오려는 듯한 분노를 간신히 억누른 채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공포에 질려 있던 오크들도 무기를 들며 용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인은 조용히 그 용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 까, 용은 그 어떠한 공격도 하지 않은 채 지표면에서 약 3미터 정도 위에 떠 있었다. 마침내 아인은 용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Wait!”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아인은 순간적으로 칼을 멈추고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노전사, 게비알이 용을 포위한 오크들을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지팡이를 든 게비알은 용을 쳐다보더니 지팡이로 아인의 머리를 때렸다.


“Stupid! Don’t attack he!”


“아인! 용을 공격하지 말라하신다!”


아인은 지팡이로 맞은 머리를 만지며 그에게 항의했다.


“왜 그러죠? 저건 용입니다! 위험하다구요!”


“멍청한 놈! 너희 같은 것 들에게나 위험하지! 내가 그와 이야기할 것이다! 오로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놀랍게도 유창한 인간의 말을 한 게비알은 용에게로 다가와 아인은 알 수 없는 언어로 용과 대화하기 시작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게비알은 모여든 오크들에게 말했다.


(“용이 우리에게 말했다! 우리의 땅과 정령들을 위해 바쳐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그의 말에 오크들은 술렁거렸다. 투그릭의 통역에 아인도 의아해했다. 분명 오크들은 정령을 위해 바치는 것들-이를테면 짐승의 피나 고기 같은-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마을 한쪽에 있는 신당에 바치는 것이지 용이라는 실존하는 무언가에 바치지는 않았다. 한차례의 술렁거림이 지나자 게비알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은 바로…! 외부인 여자 둘이다!”)


그의 말에 오크들은 아까보다도 더 크게 술렁였다. 아인조차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오크들은 상대를 전장에서 죽이면 죽였지 인신공양을 하는 전통은 수백 년도 더 전에 사라진 데다 그보다도 외부인 여자 둘은 바로 아인의 동료, 잔과 마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What? What’s you saying?”


뒤늦게 달려온 레드암스조차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게비알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게비알은 레드암스의 면전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대며 위협했다.


(“잘 들어라 부족장, 나는 노전사이고 우리 부족은 너를 지지하는 자들만큼 나를 지지하는 이들도 많다. 부족이 또다시 전쟁의 불길에 뒤덮이기를 바라나?”)


샌디가 통역해준 그의 말에 아인은 순간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에 몸서리 쳤다. 레드암스조차도 그의 말에 틀린 것이 없었는지 한숨을 쉬며 부하들에게 둘을 잡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미안하네, 아인…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네…”


레드암스는 낮은 목소리로 아까보다 조금 더 유창하게 아인을 위로했다. 그러나 아인에겐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분노한 아인은 무려 레드암스의 멱살을 잡았다.


“그까짓 노전사가 뭐라고! 그딴 늙은이의 말에 순종하는 거야!”


그의 말에 샌디 레드암스는 물론 게비알 마저 크게 놀라 굳어버렸다. 아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이들도 이방인이 감히 족장의 멱살을 잡았다는 것에 놀라 굳어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 금세 호위병들이 아인을 그에게서 때어 놓았다.


“레드암스! 당신은 전통이라는 그늘 아래 속고 있어! 너는 너만의 믿음 대로 가야해!”


“Drag and go.”


노전사의 분노한 듯한 말과 함께 병사들은 아인을 감옥으로 끌고갔다. 아인은 저항하지 않고 얌전히 레드암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레드암스는 자신이 감히 멱살을 잡혔다는 것과는 다른 충격에 휩싸인 표정을 하고는 우두커니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