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시스 왕국의 국민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죽여라! 피해입은 영혼들의 원한을 우리가 갚아줄 때이다!"
엠모사 켈레인 당시 대령의 지시였다. 이미 상업도시 퀘루르에서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던 카그란 제국 군인들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을 때였다.
프레드가도 그 군인들 중 하나였다. 당시 신입이었던 소위 프레드가는 그 말을 듣고 보급품인 총검을 꺼내들었다.
카그란 제국의 군인들은 모두 흩어져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다. 프레드가도 어서 그렇게 해야했다. 그러나 프레드가의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눈에 비친 카그란 제국의 군인들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민간인 학살을 즐기는 괴물들이었다.
"뭐해? 적들에게 심판의 시간을 내려야지."
그걸 보던 엠모사 대령이 다가와 말했다. 프레드가 소위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움직였다. 눈에 띄게 떨려하며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다. 그런 그의 모습이 엠모사 대령의 눈에 좋게 비칠리가 없었다.
"자네 지금 뭐하는 건가?"
"아닙니다! 할 겁니다!"
프레드가 소위가 엠모사 대령의 엄포에 화들짝 놀라며 다시 총검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총총걸음으로 도시 한 쪽 깊숙이 들어섰다.
프레드가 소위가 멈춰선 곳은 어느 마을이었다. 이미 그곳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대학살을 즐기고 있었다.
프레드가 소위는 총검을 꽉 쥔 손을 벌벌 떨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똑바로 보자니 고뇌가 밀려들었다. 지금 여기서라도 죽이지 않으면 엠모사 대령에게 반발하는 것이 되는 셈이었고, 그렇다고 죽이자니 그에게 있어서는 평생 트라우마로 남고도 모자랄 일이었다.
프레드가 소위는 어쩔 수 없이 선글라스를 가방에서 꺼내서 썼다. 이는 그의 본심을 가리기 위함이었다.
그는 대상 하나를 정하고 총검을 단단히 잡은 채로 뚜벅뚜벅 나아가 벽으로 몰아세웠다. 그는 다리가 풀리더니 이내 뒤로 기어가듯 도망가며 군인과 최대한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벽에 닿아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는 상태. 그 남자는 죽음을 직감하고 겁에 잔뜩 질린 표정을 했다. 그의 얼굴의 액체가 나올 수 있는 모든 구멍에서 눈물이니 콧물이니 침이니 하는 것들이 절로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프레드가 소위는 입술을 물고 눈을 질끈 감고 총검을 그의 어깨를 향해 푹 찍었다. 시선을 회피한 상태였지만, 찌르는 소리와 손에 피가 닿는 따뜻한 촉감과 피해자의 곡소리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프레드가 소위는 한순간에 얼굴이 파랗게 질려 바로 총검을 그 남자에게서 빼내었다.
프레드가 소위는 자신이 저지른 광경에 헛구역질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의 눈은 지진했지만 선글라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총검에 찔린 남자는 죽는 것과 죽이는 것에 대한 원망에 가득찬 눈빛으로 군인을 쳐다보았다. 프레드가 소위는 빠르게 뒷걸음질 치더니 사실을 부정하며 그 자리를 서둘러 빠져나갔다.
'아니야, 괜찮아. 중상만 입히고 죽이지는 않는다면 명령한 범위 내에서는 안정권일거야. 빗맞았다고하면 되니까. 아니야, 안 괜찮아! 민간인이라고! 이게 어딜 봐서 괜찮아보인다는 거야?'
프레드가 소위는 달리고 또 달렸다. 계속 달리다보니 주변이 점점 흐릿해졌다. 이윽고 하늘에서 소리가 나더니 그 장면은 완전히 사라졌다.

"안 일어나냐?"
이센그린이 잠들어있는 프레드가를 깨우며 말했다. 프레드가는 벌떡 일어나 손을 굽혔다 펴기를 반복했다. 총검은 당연히 없었고 피도 느껴지지 않았다.
"또 그 꿈이야."
프레드가가 매우 고통스러운 듯 앉은 자세에서 다리를 몸쪽으로 끌어 웅크리는 자세를 하며 말했다.
"또 퀘루르 마을 일이냐? 그게 그 정도로 오래갈 일이야?"
프레드가는 이미 이런 악몽에 몇 번이고 시달린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센그린은 그 꿈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당연하지. 너는 그게 도저히 인간이 할 수 있는 짓이라고 생각해?"
프레드가가 거의 분노에 가까운 말로 이센그린을 쏘아붙였다. 이센그린이 워워하며 가라앉혔다.
"그래도 그 뒤로 7년이나 지났다고. 그 전쟁은 이미 끝났고, 이제 그럴 일은 없어. 그 엠모사 대령이라는 분이 너를 학살은 안 해도 되는 곳으로 병력을 돌렸잖아. 그래서 지금 포로납치 정도만 하고 있고."
"그래, 그게 그나마 낫지. 학살보다는 인질로 삼으려고 포로 잡는 게 낫지."
프레드가의 혼잣말에 가까운 그 말에는 생기란 느껴지지 않았다.

한편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방문이 훌쩍 열리며 매우 명랑한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에스텔라! 나 왔다!"
너무 갑작스럽게 들어와서 프레드가는 하마타면 거의 소총을 집어 공격할 뻔했다. 그러나 이신다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심하고 경계를 늦추었다.
이신다는 언제 다 챙겼는지 옷매무새가 말끔한 상태였다. 옷차림은 푸른 색의 근대(한국으로 치면 개화기 시절) 풍 원피스와 챙이 있는 모자였다. 이신다가 한바퀴 돌아보이면서 말했다.
"어때? 나름 신경쓰고 고른 건데."
"어, 예쁘네."
이센그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더 달려들 것임을 직감했고, 잘 어울리는 건 사실인지라 적절히 좋은 말을 내뱉어주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엄청난 순정의 소유자인 이신다는 그 말에 배시시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폭풍같은 시간이 흘렀다. 메가데레인 이신다를 상대하느라 이센그린과 프레드가는 혼이 빨리는 느낌이었다. 이센그린이 신사복을 입자마자 엄청난 반응을 보이며 애정을 쏟아내었고, 아침을 간단히 차려먹으려 했을 때는 그녀가 무리해서라도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리려던 걸 있는 힘껏 막아 최소화시키느라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었던가.
이신다는 집 밖을 나서 경찰서로 데려가는 동안에도 계속 이센그린의 곁에 붙어있었다. 이신다 특유의 애정공세는 관대한 성격의 프레드가마저 슬금슬금 거리를 벌릴 정도로 심히 대담했다. 이센그린은 그런 이신다를 보며 자신이 에스텔라가 아님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생객하며 측은해하기도 했고 불쌍히 여기기도 했다.
이센그린은 타이밍을 잡고 한 번 도주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속 일편단심으로 그만 바라보는 이신다는 그가 나가려고 하자마자 본의 아니게 그녀 특유의 수다본능과 애정공세로 그 기회를 날려버렸다. 결국 이센그린은 도망가는 것을 포기했다. 프레드가도 전우를 배신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끝까지 경찰서로 따라가기로 했다.

"실종자 찾아왔습니다!"
이신다가 경찰서를 문을 밀자마자 아주 행복한 표정을 머금고 무지막지한 성량으로 외쳤다. 프레드가는 그런 그녀를 보며 벽 한구석으로 시선을 회피했다. 선글라스라도 있는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경찰들은 그런 이신다를 보며 대체로 놀라는 눈치였다. 몇 명은 큰 소리에 놀랐고, 일부는 또 저런다 하면서 골치아파해했다.
"어때, 어때? 무려 에스텔라 가미지라고! 내 첫사랑이자 끝사랑!"
이신다가 바로 앞에 있던 형사과 동료 여경인 켐브리 말로크에게 자랑하듯 사랑스럽게 말했다. 그 여경은 같이 에스텔라 수색을 담당했던 경찰들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이 중에서 가장 눈에 띄게 놀랐던 경찰관이었다.
그러나 켐브리는 그 놀라움을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켐브리는 기계적이고 사무적인 말투로 이신다에게 대답했다.
"그래? 그거 잘 됐네."
이신다는 그 대답에 나름 만족하면서 다시 이센그린 쪽을 돌아보며 사랑의 눈빛을 퍼부었다. 그리고 잠깐 기다리게 하고 경찰복으로 순식간에 갈아입고 나왔다. 그러고는 이센그린의 손목을 잡아 이끌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동했다. 이센그린은 영문을 모른 채 따라갈 뿐이었다.
이센그린이 도착한 곳은 사람 두 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방이었다. 이센그린은 여기가 무슨 방인가 싶어 그곳을 둘러보았다. 평평하고 둥근 무언가가 바닥과 천장에 하나씩 있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방 밖에는 기계가 하나 있었다.
"여기는 신원확인실이야. 행방불명 상태를 끝내기 위한 절차! 꼭 해야되는 절차이고 귀찮겠지만 금방 끝날 거니까 걱정 마!"
이신다가 열렬히 기대하는 듯한 어조로 이센그린에게 말했다. 이센그린은 이 대목에서 아차 싶었다. 동일인물이 아기 때문에 결과가 나오면 끌려가서 죽을 예정이나 다름없었다고 헤아렸다. 이센그린은 그저 그의 오판을 탓할 뿐이었다.
프레드가는 그걸 보면서 기겁했다. 이센그린이 결과가 뜨면 너라도 어떻게든 도망가라고 신호를 보냈다. 프레드가는 알겠다고 하면서 미리 소총을 난사할 준비를 해두었다. 어차피 사방이 민간인이 아닌 경찰이었기 때문에 프레드가는 전투가 시작되면 매우 진지하게 임할 각오였다.

이신다의 말에 따라 이센그린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센그린은 속으로 이제 여기서 죽는구나 하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마지막 전투부터 계속 운이 꼬이더니 이 지경이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프레드가는 이신다가 기계를 조작하는 것을 보며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갈 지 궁리하였다.
그런 와중에도 신원확인실의 설비는 그들의 심리에도 아랑곳 않고 담담이 작동하였다. 천장과 바닥에서 둥근 마법진이 펼쳐지더니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이센그린의 몸을 꼼꼼히 체크하였다. 마법진 2개가 계속 교차했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하였다.
이센그린은 앞으로 다가올 죽음을 두려워했다. 또한 이신다가 자신이 속았음을 깨달았을 때 보여줄 슬픔과 분노를 떠올리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러면서 이센그린은 기계의 결과가 다가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순간은 기계적으로 찾아올 뿐이었다. 그는 현실을 도피하고 싶어 최대한 듣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리고 기계는 마침내 검사결과를 출력하였다.
'생명반응 일치율 100%.'
이센그린은 순간적으로 뇌가 정지되는 느낌을 받았다. 도망가려던 준비를 하던 프레드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는 결과를 믿지 못하고 선글라스를 벗어 다시 확인하였다.
'마력일치율 50%. 기억 일치율 0%. 검사 종료.'

요란하게 움직이던 마법진들이 기계음과 함께 다시 바닥과 천장으로 사라졌다. 기계에서 해당 결과들이 자동으로 타자기에 쳐져 나왔다. 이신다는 그걸 보고 역시나 하며 하늘을 찌를 것 같은 기쁨을 느꼈다.
이센그린은 너무 충격을 먹어서 나올 수가 없었다. 이센그린은 순간 이숨브라스 중령이 항복을 종용하면서 말한 문구가 떠올랐다.
'아직도 제국의 거짓에 속아 놀아나고 있는가! 그대, 이센그린 가드너 대위는 본래 우리의 국민의 일원. 그러나 마지막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니, 이제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이센그린은 머리가 정지한 느낌을 받았다. 어디부터 진실이었고 어디부터 거짓이었던 것인가. 아니, 애초에 그의 기억은 어디서부터 조작되었던 것인가. 중개무역자 에스텔라 가미지가 어째서 다른 나라의 육군 대위가 되었던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이신다는 방에서 나오지 않는 이센그린을 와락 끌어안으며 최고의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신다에게는 지금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이 확인된 가장 의미있는 재회의 시간이었다.
한편 프레드가의 머리도 복잡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주욱 카그란 제국의 사람이라고 믿어왔던 이센그린 대위는 사실 레스톡 왕국의 사람이었다. 한쪽 눈이 레스톡의 보라색 눈이었을 때 진작에 알아봤어야 했던 것이었다.
설마 나의 기억도 조작되지는 않았을까, 설마 나의 지금까지의 모든 삶도 다 가짜였을까 하는 걱정과 불안이 프레드가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흔들며 아닐거라고 애써 위안했다.

한편 이신다는 케스 수르그 경찰서장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러 총총걸음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케스 서장님! 에스텔라 가미지의 신원확인을 완료하였습니다! 기억조작이 행해진 듯 하니 특수반을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케스 서장은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나오는 고음에 놀랐고 뒤이어 에스텔라의 발견 소식에 놀랐다. 케스 서장이 물었다.
"그게 참말이냐?"
"예! 진짜입니다! 신원확인까지 완료했습니다!"
이신다가 책상에 검식 결과가 담긴 종이를 탁 하고 내려놓았다. 평소에도 무례와 예절의 사이에서 약간의 줄타기를 했던 이신다였지만 오늘은 정도가 훨씬 더한 것 같았다.
케스 서장은 잠시 사색에 잠겼다가 결론을 도출한 듯 고개를 들어 말했다.
"지금 당장 특별반을 불러오겠다. 올 때까지 밖에서 대기하도록."
"예썰!"
이신다가 과장된 몸짓으로 거수경례를 하며 서장실 밖으로 나갔다. 케스 서장은 그걸 보고 전화기 버튼을 돌려 연락을 취했다.
"오프토 케이타르 국장님, 중요한 소식이 있습니다. 에스텔라 가마지가 돌아왔습니다. 네. 진짜입니다. 그 이센그린 가드너 맞습니다. 기억조작이 확인되었으니 전문요원 파견을 부탁드립니다. 네. 당연하죠, 기밀은 확실히 지켜지고 있습니다. 에스텔라를 데려온 경찰을 포함해 아무도 모릅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이신다가 경찰서장에게 보고하러 한달음에 달려간 동안 이센그린 대위와 프레드가 중위는 그들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게 대체 뭔 일이냐?"
이센그린이 겨우 방에서 나와 입을 떼면서 말했다. 프레드가는 계속 뜸을 들이다가 힘겹게 말했다.
"그러게..."
"내가 레스톡 사람이라니, 이게 말이냐 되냐고."
"그러게..."
"즉석에서 지어냈던 거짓말이 사실은 진짜였던 게 뭔 꼴이냐고."
"그러게..."
"이숨브라스 중령이 했던 말이 사실이었던 거였냐고."
"그러게..."
"아니, 그러게라고만 하지 말고 뭐라도 좀 말 해봐."
이센그린이 정신적 혼란에 휘말려서 말을 제대로 못하는 프레드가를 은근히 나무랐다.
"그래서 이제 날 어떻게 할 생각이야? 잠깐, 또 그러게라고 하면 가만 안 둔다."
프레드가가 이번에도 그러게라고 하려고 했던 걸 이센그린이 중간에 말을 끊으며 말했다. 프레드가는 멈칫하더니 이제서야 정상적인 사고를 시작하며 말했다.
"일단 상황을 지켜봐야지. 적인지 아군인지 지금 엄청 헷갈리니까."

그 때 경찰 켐브리가 그들에게로 왔다. 여전히 사무적이고 기계적인 감정이 없는 어조였다.
"따라오세요. 추가조사가 필요하거든요."
이센그린과 프레드가는 내면의 혼란을 뒤로 한 채 그녀를 따라나섰다.
켐브리는 경찰서를 나서더니 한 블록 가서 건물 사이로 들어갔다. 인적이 없고 황량하기 짝이 없는 골목길이었다. 어디까지 가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녀를 따라갈수록 점점 인적이 드물어졌다.
켐브리가 멈춰선 곳은 동네의 한 시장이었다. 5일장이 끝나고 인적이 없어서 매우 을씨년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그곳에서 켐브리가 갑자기 싸늘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오른쪽 눈은 갈색 맞죠, 이센그린 대위?"
이센그린은 당혹스러웠다. 자신의 정체를 가리고자 안대로 가렸는데 그걸 단번에 알아맞추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네, 맞습니다."
이제 안대는 필요 없다고 생각한 이센그린이 안대를 풀어서 모든 눈을 켐브리에게 보여주었다. 왼쪽에는 보라색이, 오른쪽에는 갈색이 선명했다.
"그래서 그건 언제 깨달았죠?"
켐브리가 표정변화도 없이 연달아 말했다.
"그거라면 뭘 말하는 거죠?"
이센그린은 요구가 명확하지 않아 알아듣지 못했다. 켐브리가 다시 질문했다.
"기억 없어진 건 언제 깨달았냐고."
켐브리의 말투가 갑자기 반말로 바뀌었다. 이센그린은 또다시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어, 그건 사실... 그러니까... 실은..."
이센그린이 말을 질질 끌며 적절한 말을 짜내려고 했다. 그러나 켐브리의 반응을 보고 모든 사고가 정지하였다.
"안 불겠다? 그럼 즉결처분하는 수 밖에!"
켐브리가 품에서 빠르게 권총을 꺼내 이센그린을 향해 탕 쏘았다. 대위 출신인 이센그린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치명상을 피했다. 그러나 실탄은 이미 어깨에 맞은 상태였다. 첫발이 공포탄이 아니라 실탄인 것을 보아하니 진짜로 죽일 셈이었구나 싶었다.
"이게 뭐하자는 겁니까?"
이센그린이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켐브리는 권총을 계속 쏴갈기며 말했다.
"죽어야 할 때 고이 죽지 쓸데없이 도망쳐서는."
이센그린이 그의 몸에 반 쯤 들어있는 마법의 힘으로 겨우 방어진을 형성했다. 그러자 총알이 튕겨져나갔다.
"설마 카그란 제국의 사람?"
"맞다. 그래서 죽어야 할 때 죽지 않은 너희들을 처분해야겠다. 레스톡이 데려가서 정보 캐가는 것보다는 낫겠지."
이센그린과 프레드가는 순간 요동했다. 카그란 제국은 그들이 죽는 것을 원했다. 그러나 제국의 병력을 살리기 위해 후퇴를 명령하고 퇴각하다 실패해 중상을 입었을 뿐 목숨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센그린과 프레드가의 머릿속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사건들이 들어맞았다. 진짜로 전투를 할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보병도 없이 기계화중대를 적진 한가운데에 놓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카그란 제국은 그들을 죽이기 위해 일부러 적에게 포위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남아 레스톡에 남았다. 경찰, 아니, 카그란의 공작원이던 켐브리가 그렇게 놀랐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