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


메레디스 백작 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눈 앞에는 꼬질꼬질한 수인 모녀를 데리고 나타난 메레디스 백작이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엇다.


"다시 말해보세요, 백작. 이 모녀를 왜 데리고 왔다고요?"


"왜, 케인이 성 안에는 제 또래가 없다고 쓸쓸해 하지 않았나. 친구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데려왔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화를 내려던 메레디스 부인은 턱하고 말문이 막혀버렸다. 


알 것 다 아는 사람이 대체 왜 이렇게 철이 없을까, 하고.


아들이 이미 유년기를 넘어설 정도로 자라난 메레디스 백작 부부다만, 나이는 생각보다 어렸다.


결혼을 일찍 하기도 했고 아이를 일찍 가지기도 했으니까.


충분히 둘째를 볼 수 있는 나이임에도 첫째, 케인을 낳을 때에 하도 고생을 한 터라 아이를 다시 가지는 것을 꽤나 꺼려하고 있기도 하였고.


메레디스 백작은 그런 부인의 의사를 존중하여 아이를 천천히 가져도 된다고 말했다만, 백작가를 섬기는 이들은 다른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둘째를 보지 않는 이유는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않거나, 부인에게 문제가 있거나, 혹은 메레디스 백작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


그렇다면 그 둘째를 낳는 영광을 우리 가문이 노려보아도 되지 않나? 라는, 출세욕 섞인 소문이 슬슬 돌기 시작하는 때였다.


그런 시기에 난데없이 수인모녀를 백작성 안으로 데려온다?


백작이 사실은 수인이 취향이었고, 이 수인 여성이야말로 메레디스 백작의 진정한 사랑이 아닌가라는 불온한 의심이 성 안에 펴져나가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의심은 물론 메레디스 백작 부인 본인이 제일 먼저 품었었다만, 그 의혹은 저 멀리로 치워버린지 오래였다.


자기 남편이 이런 엉뚱한 일을 생각없이 저지르곤 한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백작이 수인 모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자신과 케인을 볼 때의 시선과 전혀 달랐으니까.


애정이라곤 한 조각도 들어있지 않은, 케인의 7살 생일 때 선물한 망아지를 보는 눈빛. 


무엇보다도 백작 부부는 매일 뜨거운 밤을 보내고 있었기에, 백작 부인은 여자로서 자신감이 가득했다.


"...하아. 알아서 잘 해요. 이상한 소리 안 나오게."


"그럼, 그럼."


백작은 손을 내저었다. 그로서도 부인의 분노를 사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단순히 그의 부인이 후작가의 둘째 딸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부부관계에서 부인의 미움을 사는 건 남편들이 두 번째로 두려워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첫 번째는 자식에게 미움받는 것이다. 아빠 미워! 라는 소리를 들으면 속이 쿵 내려앉고, 또 부인은 대체 뭘 잘못했길래 애가 저렇게 화가 났냐고 남편을 괴롭히기 마련이니깐.


그러니 그로서도 상당히 즉흥적이었던 이 초대를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병사들이나 상점주인들에게 물어봐 평가가 괜찮고, 뒷골목 일들에 종사하지 않으며, 성실하게 살아가면서도 케인과 나이대가 비슷한 딸을 키우는 여인을 데려왔다만.


어디까지나 그건 백작 본인의 생각이었고, 남들의 생각은 백작의 생각과는 다르니까. 


그런 격차를 좁혀주는 것은 늘 부인의 역할이었기에, 이번 초대에 대해서도 한소리 들을 걱정을 할 수밖에.


어찌저찌 잘 넘어갔으니, 다행 아닐까.


백작은 그리 태평하게 넘어갔다. 


*


"...네?"


"오늘부터 네 사용인으로 일할 빅토리아란다."


"네?"


그렇지만 케인은 태평하게 넘어갈 수 없었다.


사용인? 이 꼬맹이가?


물론 남들이 봤더라면 꼬맹이가 꼬맹이보고 꼬맹이라는 꼴이 퍽 우스웠겠지만, 케인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현대 대한민국의 기억을 가진 채 환생한 애늙은이였으니.


"왜, 성 안에는 친구가 없어서 쓸쓸하다고 하지 않았더냐."


"아, 네.."


한껏 으스대며, '나 잘했지'라는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버지에게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분명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긴 하다만, 그건 이 나이의 남자아이답게 철없는 척을 했던 것에 불과하다.


정말로 이렇게 꼬맹이 친구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환생자인 그로서는 할 일이 무수히 많았으니까.


마법도 배워야지, 검술도 배워야지, 귀족으로서의 교양도 쌓아야지, 사교도 해야지...


무엇보다 환생한 판타지 세계에서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 행복한 나데나데 생활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자칫하다간 장르를 후피집으로 바꿔버릴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믿음이다.


정체 모를 위협, 미지의 위험에 대하여 대비하는 것이 현명한 환생자 생활의 기본.


그런 상황에서, 이런 정체 모를 꼬질꼬질한 수인 꼬맹이는 짐덩이에 불과하다.


그렇다만...


이런 어린아이가 제대로 씻지도 못해 곳곳에 검댕이 묻어있는 채로 귀족 앞에서 어머니와 떨어져 벌벌 떨고 있는 꼴은.


현대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그로서는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는 광경이었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렇기에 케인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백작은 아들의 반응이 생각했던 것보다 시큰둥했기에 조금 당황했지만, 아들이 워낙 조숙하기 때문이라 결론짓고는 당부의 말 몇 마디를 남긴 뒤 방을 나섰다.


"후우."


케인은 그제서야 어린아이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어른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로 이 꼬맹이를 사용인으로 쓸 생각이었다면 나에게 소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메이드들에게 먼저 교육을 받게 하고, 나와 안면을 트게 한 뒤에야 정식 전담 메이드로 썼겠지.


그렇지 않고 이런 꼴로 자신에게 데려온 것은 아이 둘이 모이면 서로 친구가 되겠지, 라는 안일한 어른의 생각 때문일 것이다.


케인은 답답한 셔츠 맨 위 단추를 푼 뒤,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너도 맞은 편에 앉아."


"제, 제가 감히 어떻게..."


"앉아. 걱정 안 해도 돼. 과자 먹을래?"


"....네."


빅토리아의 다리 사이로 말려들어가 있던 꼬리가 그제서야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귀도 쫑긋거리기 시작했고, 방 안의 냄새도 이제서야 관심있게 맡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서 전생에 키우던 강아지가 생각난 탓에 케인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다시 움츠러들었지만, 그 웃음이 따스함을 품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빅토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꼬리를 세차게 흔들기 시작했다.


그 꼴이 더 귀여워서 케인은 따뜻한 미소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말해 무엇하랴. 그는 강아지에게 굉장히 약했다.


과자를 하나 똑, 반으로 부러뜨려 빅토리아의 손에 쥐어주곤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빅토리아는 머리에 묻은 검댕이 케인의 손을 더럽힐까봐 안절부절했지만,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백작 자제임에도 왠지 아빠 같은 포근함이 느껴지는 탓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그의 손길에 머리를 맡겼다.


*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흘러.


케인은 가문에서 보내온 편지를 뜯지도 않고 벽난로로 던져넣었다. 


투시마법에 통달한 덕에 편지 정도는 뜯어보지도 않고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무슨 내용이에요?"


"매번 똑같은 내용이지. 슬슬 고향에 돌아와라, 결혼할 때가 되지 않았냐, 참한 여인이 있다..."


"헤엥~"


침대에 드러누운 채 과자를 와삭와삭 씹는 빅토리아를 보며, 케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속 메이드랍시고 아카데미에 끼어들어와놓곤 전생에 키우던 골든 리트리버보다 손이 많이 가는 저 개 수인 때문에 속이 답답해져서.


분명히 아카데미 들어간다고 했을 때에는 울고불고 하면서, '제가 잘할게요, 빨래도 열심히 할게요, 버리지 마세요'라며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으면서.


"빅토리아."


"넹?"


"나는 종종 네가 소가주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만."


"에헤헤... 과찬을 또."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늘어지게 침대에 누운 빅토리아는 멋쩍다는 듯 머리를 긁었다. 그 꼴을 본 케인의 속이 더 답답해져온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칭찬 아니다. 대체 어떤 메이드가 주인 앞에서 그런 꼴로 있냐는 말이야."


"부우~ 주인님이 편하게 있으라면서요!"


"셔츠 단추를 좀 잠그고, 머리도 좀 빗고 하라고. 내가 언제까지 네 시중을 들어야하냐 이 말이야."


"이히히... 평생 시중 들어주시면 안 돼요?"


"후우..."


속에서부터 끓어오른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케인은 침대 쪽으로는 관심을 끄기로 마음 먹었다.


책장에 꽂혀있던 마도서를 꺼내들어 구조를 마저 분석하기 시작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는 적어도 7서클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였다.


환생자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역사에 남을만한 발전속도였다만, 자신이 아닌 그 누가 환생을 했더라도 이 정도 경지에 도달했을 것이다.


겸손, 그리고 정진. 그것이 그를 여태껏 이끈 두 가지 미덕이었다.


그렇게 마도서에 집중하고 있으니, 과자를 입에 마저 털어넣은 빅토리아가 슬슬 눈치를 보며 케인에게 다가와 앵기기 시작했다.


"주인님~"


"저리 가거라, 빅토리아."


"화났어? 미안.."


"미안하지도 않으면서 왜 맨날 미안하다고 하는 거냐."


"주인님도 안 괜찮으면서 맨날 괜찮다고 하잖아."


"하아. 안 괜찮다고 말하면 하루 종일 우울해져서 눈치나 보는 주제에. 그 꼴을 보기 싫으니까 괜찮다고 하는 거지."


"우우.. 미안해.."


빅토리아는 의자 뒤에 몸을 붙인 채, 케인의 목덜미에 머리카락을 마구 부볐다. 어릴 적부터 해왔던 그녀 나름대로의 사죄법이었다.


짐승의 털과 인간의 머리카락 그 사이 어딘가, 뻣뻣한 듯하면서도 솜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그녀의 주인님은 좋아했으니깐.


"꼬리 만질래? 만지고 싶은만큼 만지게 해줄게."


"됐다. 털 날려."


"안 날리거든?! 어제 잘 빗었어!"


"흠. 빨래에 금색 머리카락이 몇 가닥 있는지 세볼까? 내기해도 좋다만."


"으우..."


빅토리아는 입술을 내밀며 얄미운 주인님의 얼굴을 꼬리로 푹 덮어버렸다. 


이유는 모르지만, 주인님은 풍성한 꼬리털에 파묻히는 걸 굉장히 좋아했으니까.


보라. 지금도 다른 것이었다면 성질을 내며 밀어냈을 주제에 눈을 지그시 감고 꼬리털의 감촉을 즐기고 있지 않은가.


"히히."


빅토리아는 주인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저 마음이 포근해져서, 이러고 있는 것만으로 가슴이 따뜻해져서.


물론 그 웃음소리를 들은 케인이 한쪽 눈을 치켜떠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이내 다시 눈을 감고 꼬리털의 감촉을 즐겼다.


빅토리아의 꼬리털은 건실한 수도자와 비슷한 삶을 사는 케인이 즐기는 유일한 삶의 낙이었으니까.


*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주~인~님~!"


"음, 빅토리아."


기숙사의 제 방을 정리하고 있던 케인은 갑작스러운 빅토리아의 습격에도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저 멀리 복도에서부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으니까.


"주인님! 졸업 축하해요!!"


"오."


케인은 빅토리아가 내민 꽃다발을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감정이 메말랐다는 소리를 듣곤 하는 그로서는 이례적인 감정 표현이었다.


물론 그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 빅토리아가 제대로 된 선물이라는 것을 한 게 이번이 처음이었고, 또 그 선물에 상당한 정성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여태 준 선물이라고는 '빅토리아 자유이용권' 밖에 없었다. 매해 갈수록 퀄리티가 올라가고 있었고, 매수도 점점 늘어나 그의 올해 생일에만 무려 100매나 받았지만.


백작가의 소가주이자 7서클 마법사, 소드마스터인 그가 빅토리아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귀엽고, 힐링되는 강아지. 그게 빅토리아에 대한 인식이었으니까.


자유이용권 안 쓰시나요? 라고 자꾸 물어오길래 물 떠와라, 빵 사와라 하고 명령하니 또 그건 이용권 없이도 가능하다면서 사오질 않나.


어찌 되었든, 미취학 아동이나 할 법한 선물을 내놓던 빅토리아였기에 들꽃을 하나하나 손으로 뜯어 엮어낸 꽃다발은 케인의 심금을 울렸던 것이다.


"고맙군. 시간 많이 들었겠어."


"에헤헤..."


스윽- 스윽-


늘 그렇듯, 케인은 빅토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빅토리아의 꼬리는 붕붕 세찬 소리를 내며 공기를 이리저리 휘저었다.


"그런데 말이다, 빅토리아. 선물은 고맙다만 주인이 짐을 싸고 있다면 그걸 돕는 것이 메이드의 역할 아닌가?"


"선물 드렸잖아요!"


"...아니, 그래. 말을 말자."


체념한 케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꽃다발을 책상 위에 올려놓은 뒤, 마저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빤히 쳐다보던 빅토리아는 문득 든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요, 주인님."


"음."


"원래라면 졸업한 뒤에 알렌시아 교수님이랑 대수림에 가기로 하시지 않으셨어요?"


"그랬었지."


"그런데 왜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에요?"


"혼담이 들어와서 말이다."


"....혼담이요?"


"음."


무뚝뚝한 케인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빅토리아의 마음은 철렁 내려앉았다.


읽지도 않고 벽난로에 편지를 집어넣던 그가 혼담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는 데에서부터 이전과는 다르리란 것이 느껴졌으니까.


"공작가 영애가 편지를 매일 보낸다고 고향에서 아우성이라."


"....그 여자가요? 왜요?"


"글쎄다. 한 번 구해준 것이 인상에 깊게 남았나보지."


"사교 파티 때 암살자 막아준 그거요? 고작 그거 때문에 홀딱 반했대요?"


"모르지. 타리온 공작은 심계가 깊은 사람이자, 소드마스터기도 하니까. 내 실력을 꿰뚫어보고 딸을 내게 붙이려는 것일수도."


"하, 잘, 잘난 것도 피곤하네요..."


평소라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그의 애정을 갈구하는 여자들을 비웃었을 것이다. 신발의 굽이라도 핥기 위해 더러운 진창에 제 몸을 누이는 여인들을 경멸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제 발 밑에 무엇이 깔리든, 무엇이 앞을 가로막든, 제 갈 길을 묵묵히 나아가는 고행자였으니까.


그에게 있어 애정이란 그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렇기에 그 편린이라도 얻을 수 있는 이 자리에 만족했다.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숨긴 채,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서, 결혼하실 거에요?"


"글쎄다. 일단 만나보긴 해야지."


마지막 남은 짐을 상자 안에 정리해넣은 뒤에야 케인은 의자에 앉아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공작가의 영애라면 그리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상대도 아니고, 결혼을 아예 하지 않는 건 의심을 살테니까."


"....."


"가문을 생각하면 결혼은 언젠가 하긴 해야 되겠지. 그 상대는 누구든 상관없어."


그저 가문을 위하여, 자식을 원하는 백작 부부와 봉신들을 위하여. 


"공작 영애 정도라면 말이 통하긴 하겠지. 자식을 낳은 뒤에 알아서 살자고 말해도 순순히 받아들일 것이고."


후르륵-


아공간에서 꺼낸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케인은 말을 이어나갔다.


"어찌 되었든, 나는 그런 안락한 삶에 안주할 수 없으니까."


빅토리아는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아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세계는 그를 필요로 한다. 케인이 열아홉의 나이에 7서클의 대마법사이자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더라면, 적어도 세상의 절반은 멸망했을 것이다.


위협을 사전에 찾아내고, 근원을 제거하고, 예방하는 것. 그야말로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용사였으니까.


그러나 그런 무게감에 짓눌린 그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 무게를 버텨내기 위하여 많은 것들을 버려야 했던 인간.


친구를, 가족과의 관계를, 행복을, 사랑을.


그 모든 것들은 악의 앞에서는 너무나 연약했으니까.


케인은 그 사실을 아끼던 것들이 바스라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바스러진 것들을 손에 쥔 채로 흐느끼던 그는, 바스러질 바에야 제 손으로 버리는 것을 택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를 제외하곤.


자신은 그런 용사의 유일한 이해자이자, 휴식처였으니까.


그 사실은 앞으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빅토리아는 그렇게 애써 자신을 달랬다.


소드마스터인 타리온 공작의 둘째 딸이 아무리 5서클 마도사라고 해도, 제국 전력의 3할을 차지하는 가문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해도, 제국 제일검인 타리온 공작의 딸이라고 해도.


그 여자는 케인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겪어온 비참한 사태들, 인간의 이기심이 낳은 말로와 그 상처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함께 그 시간을 겪어온 자신 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케인의 말을 들어본다면, 자식을 낳는다고 해도 케인이 자식이나 가문, 공작 영애에게 그리 관심을 가질 것 같지도 않았다.


가문을 위해 낳는다, 가문을 위해 결혼한다는 생각이 강했으니까.


그러니까 결국, 또 돌고 돌아 자신과 케인 단 둘 뿐이었다, 세상에서.


유일한 이해자, 유일한 대피처. 자신은 그거면 됐다. 가문도 없고, 출신도 비천한 자신이 메레디스 백작의 선택을 받아 이 자리까지 온 것만 하더라도 감사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가슴이 이렇게 뜨끈해지는 걸까,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까, 목이 메이는 걸까, 눈물이 흘러나오는 걸까.


'싫어.'


그가 다른 여자를 안는 것이. 


'싫단 말이야.'


가문을 위해서라고 해도, 다른 여자가 그의 아이를 낳는 것이.


그가 여태껏 내어주지 않았던 입술을 내어주는 것이, 그것이 연기라고 하더라도.


다른 여자에게 순결을 내어주는 것이, 비록 그 순결에 아무런 마음이 담겨있지 않더라도.


다른 여자가 그의 아이를 낳는 것이, 그가 아이와 어미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싫었다.


나만 이해할 수 있으니까. 나만이 경험했으니까. 나만이 기억하니까. 나만이 남아있으니까. 나만을 남겼으니까.


그러니까, 나에게만 자격이 있으니까.


피가 흘러나올 정도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입술을 파고들어 픽, 하고 피가 튀듯이 흘러나왔다.


그마저도 보이지않게 입술로 덮은 탓에 비릿한 쇠맛이 입 안을 가득 채운다.


'아이.'


공작 영애가 아니더라도, 가문을 이어나갈 아이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 아이를 낳는 것 정도는 자신이 할 수 있지 않을까.


고작해봐야 자식일 뿐이니까.


*


"흠."


메레디스 백작은 서서히 하얗게 변해가고 있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골몰히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런 그의 앞에, 훌쩍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빅토리아가 앉아있었다.


평소라면 그렇게 우는 빅토리아를 달래주었을 메레디스 백작 부인이었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메레디스 백작과 비슷한, 그렇지만 훨씬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빅토리아를 바라볼 뿐이었으니까.


이윽고 생각에 잠겨있던 백작이 입을 열었다.


"좋다."


"백작님!"


"쉿."


백작 부인의 앙칼진 목소리에 백작은 진중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백작 부인은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빅토리아, 네 뜻은 잘 알았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거라. 이건 네가 타리온 공작 영애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저울질해 내놓은 결과이니까."


"백작님, 아니, 여보. 이건 너무 위험해요."


"그 아이는 가문에 아무런 뜻이 없지 않소. 타리온 영애가 그 아이에게 품은 마음을 생각했을 때, 그저 연심 수준에서 이번 일을 끝내는 게 좋겠소."


"연심을 품었을 때 결혼까지 밀고 나가야죠. 아무리 빅토리아가 우리 딸 같은 아이라도 타리온 공작가와 메레디스 백작가의 결합보다 가치 있다고 보긴 어렵다니까요."


"결합이라. 결혼이 파국에 도달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그 역풍을 어찌 감당하려 그러오."


"...."


백작 부인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타리온 영애와 케인이 결혼을 한다고 해도, 그 결말은 이혼이나 별거일 것이 명백한 상황.


그것도 양 쪽의 합의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케인의 일방적 통보로 인한 것이라면, 그 정치적 역풍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특히나 타리온 공작이 애지중지하는 둘째 딸이라면 더더욱.


연심을 그저 사교 수준에서 의레 있곤 하는 인사치례 정도였다, 로 무마하는 것이 결혼한 부부가 한 쪽의 귀책으로 인하여 파국으로 치닫는 것보다 나았다. 


그것이 메레디스 백작의 판단이었다.


"대신 빅토리아."


"네, 네 백작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차가운 한 마디에는 수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네 어미가 죽었을 때 장례를 치뤄준 것이 우리 가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길거리에서 굶던 모녀를 거둔 것이 우리 가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네가 충성을 바쳐야 하는 것이 이 가문의 미래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네가 케인의 씨앗을 품는 것을 허락한 것은 이 가문의 미래를 위해서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명심해라. 너는 그저 메레디스 백작 가문의 미래를 위한 모판에 불과하다.


그 말이 가슴에 차갑게 꽂히면서도, 동시에도 아릿하게 행복했다.


상관 없었으니까.


그저 사모하는 주인님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으니까.


아이를 낳고 나면 주인님은 그 누구와도 사랑을 연기할 필요가 없다. 자식을 낳고, 가문을 이어갈 필요가 없었다.


여태껏 해왔던 대로,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세계를 지키면 됐다.


그의 자식을 낳고, 기르고, 키워서 가문을 이어나가게 하는 건 그녀가 하면 되니까.


빅토리아는 눈물을 글썽이는 채로,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며 의미심장하게 제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 꼴을 방 안에서 보고 있던 백작 부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가문이 대체 뭐길래, 이런 결정마저 내려야하는가.


제 아들과 딸처럼 여기던 빅토리아에게 아이를 내놓으라는 말을 해야 하는가.


가문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자식을 낳으라는 말을 해야 하는가.


그러나 귀족에게 가문은 전부였다. 가문이 있음으로써 본인들이 존재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차마 메레디스 백작을 말리지 못했던 것이다.


"....후우."


백작 부인은 답답한 속을 달래기 위해 연신 한숨을 내뱉었지만, 꽉 막힌 가슴이 개운해지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