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그런 이야기야? 아니라니까. 걘 그냥 친구라고"


남자는 여자에게 질린다는 듯 이야기한다.


"그냥, 질문일 뿐이야. 진짜 일어난 일이 아니잖아?

 대답해 줘"


여자도 물러서지 않는다.

남자의 여성 소꿉친구... 그러니까... 

방금까지 밖에서 남자랑 이야기를 나누던 존재.


남자의 여자친구에게

자신이 불편한 존재인것을 알고

여자에게도 많은 배려를 해주는 속이 깊어보이는 사람.


남자의 말대로

남자가 그 사람을 대하는 모습을 보아도

딱히 '사랑'이란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어 보인다.


자신에게만 보내는 눈빛

연인으로서 가지는 서로간의 신뢰

행동, 말투, 우선순위.


그 모든걸 보아도 남자는 자신을 사랑한다.

소꿉친구라는 그 사람을 경계하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어쩌다보니 알음알음 인사도 나누고 있고

친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남자를 주제로 한 두시간정도는 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오히려, 자신은 잘 알지 못하는 남자의 어린시절에 대해서

묻고싶은게 한가득이다.


"하아...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니?"


남자는 여자를 바라본다.

으례 이런 질문에 정답은 없다.

무엇을 대답해도 여자의 마음에 들지 않으리라.


'이성간에 친구사이는 없다.'


그런 논리를 가지고 옳은가 그른가를 따지는게 아니다.

그녀석도 그녀석 나름대로 남자친구가 있고

자신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있다.


오랫동안 알고지낸 사이일 뿐이고

서로의 애인들에게 오해나 방해가 되지 않도록

충분히 신경쓰고 배려하고 있다.


알이 없어서 불친구다.

연애? 사랑? 

그래. 서로 성이 다른 이성이니까 걔랑 사귀라면 사귈 수는 있겠지

세상에 사람이 그녀석과 나 둘만 남거나

괴한이 입 속에 총을 들이밀고 협박을 한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하지만.


보통 그런상황이라면 동성이라도 사랑하게될걸?


"해야겠어. 대답해. 나랑 그사람, 둘중에 누굴 구할거야?"


여자는 단호한 눈빛으로, 남자에게 질문한다.


"당연히 자기를 먼저 구하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내 눈앞에 있는 사람 단 한명이야.

 알잖아?"


"알아. 안다고. 아는데..."


충분히 만족할만한 대답이거늘

여자는 테이블 아래 가려진 두 손을 꼭 쥔다.

손톱에 눌린 손바닥에 상처가 나고 피가 나올 지경이다.

두 눈이 파르르 떨리고, 눈물을 흘린다.


"자기야. 왜그래.. 울지말고. 응?"


"나. 당신 의심하는거 아냐.

 당신이... 나 사랑하는거 충분히 알고

 그 사람이랑도 그냥 친구뿐이란거 알고 있어..."


"근데 왜 자꾸 그래. 당신도 알잖아."


"그게...싫어"


"어?"


"당신. 정말로 나랑 그사람중에

 물에 빠지면 나먼저 구하러 올거란거 알아.


 근데 웃긴게 뭔지 알아?

 당신이랑 나랑, 그리고 친구라는 그 사람이랑

 셋이서 물가에 놀러간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연스럽단거야."


"자기야, 말도 안되는 소리좀 하지마. 뭐라는거야?"


남자도 슬슬 짜증이 난다.

남자는 여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 친구라는 분도, 남자친구가 있다는거 알아.

근데...

근데....


당신이 그 사람을 내버려두고 날 구하러 올거라는 상황 자체가 싫어.


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내가 '여자친구'라서.

그 운동 잘한다는 친구분은 어련히 물에서 살아 나올거니까

나를 구하러 올거란 생각 밖에 안들어.


지금 당장 당신 핸드폰에 그 친구분 연락이 와도,

받지도 않을거고, 나한테만 신경써줄거 알아.


그게 미쳐버릴거 같아.


나는 조금만 신경쓰지 않아도, 멀어질거 같으니까 보듬어주는데

그 사람은 한 번쯤 무시해도, 관계가 틀어지지 않으니까.

그 사람보다 날 신경써주는거잖아?"


"그런거 아니야.

 하아... 나 당장 걔랑 연락 하지 말라 그래도

 아무 문제 없어. 걘 그냥 친구일 뿐이라고.


 무인도에다가 걔랑 나 단 둘만 떨어져도

 아무 일 없이 각자 캐스트어웨이 한 편 찍고 기어나와서

 자기한테 달려갈거라니까?"


"하...하하..."


여자가 우는 와중에도. 

남자가 치는 농담에 웃음을 짓는다.


"그치? 당신이 생각해도 웃기지?

 절대 그런사이 아냐..."


"하하하하. 웃겨? 

 당신이 왜 그사람이랑 무인도에 떨어져?"


"....뭐?"


"나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싫은거라고!!!


당신이 가진 저울에 

나랑 그사람을 양쪽에 매달아 놓고서

내 쪽으로 추가 기운다고 좋아라 할 등신으로 보여?!


내가 왜 그사람이랑 저울에 재어져야하는데?!

내가 당신한테 고작 그정도 깜냥이야?!


나는 가진 무게추가 당신 하나뿐인데

당신은 왜 나를 그 저울에 올리려고 하는건데에!!!"


"...."


"당신, 내가 무슨말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저...그게 있잖아."


"변명이나 할거면 그냥 입 다물어!

당신, 오늘 그사람이랑 며칠만에 만난거야?"


"한달 반쯤 ...전에?"


"연락은"


"연락도 그때쯤.."


"웃기네 정말. 내가 봤을때 어땟는지 알아?

당장 어제도 만나고 나서, 오늘 또만나는 것처럼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모습이였어.

 

연락? 내가 하지 말라면 당신은 절대 그사람한테 안할거야.

근데. 나랑 헤어지자마자 그사람 불러다 술 쳐마시면서 하소연을 할거잖아?

10년 20년만에 만나도. 반가워하면서 오늘처럼 어색하지도 않을거잖아?


난 당신 하루만 못봐도 보고싶어서 미쳐버릴거 같은데!

매일매일 당신 보는 모습이 새롭고 멋져셔 부끄럽고 어색하기만 한데!"


"...."


"당신이 준 반지 이거 보여?"


"내가 자기 생일 선물로 준 반지잖아"


"이거, 그 친구분이랑 고른거지?"


"....맞아"


"내가 이거 볼때마다 무슨 생각이 드는지 알아?

 당장이라도 변기에다 넣어서 버려버리고 싶은데

 너무나 소중해서 손가락에서 뺄 수도 없어.

 

차라리 당신 혼자서 고른것마냥

센스 빵점에 못생기고 이상한 반지였으면 좋겠어


딱 봐도 여자가 고른 것처럼 화사하고 예쁜게 아니라.

누가 봐도 저런걸 왜 끼고 다니나 할 정도로

볼품없고 못생긴거면  볼때마다 행복할텐데....


이 반지는

너무나 예쁘고 화사에서 

눈에 보일 때마다 사람 미쳐버릴거 같은데

너무나 소중해서 씻고 잘때도 꼭 끼고있어"


"그..그만하자. 응?

 내가 걔랑은 이제 상종도 안할거니까

 반지도. 응? 오늘 당장 새로 사러가자.

 

내가 직접 골라줄테니까.

맘에 안들면, 자기가 직접 골라도 되니까

알았지?"


"하아....당신. 정말....."


"나 정말 자기만 사랑한다니까.

 내 말 못믿어?"


"정말 내가 하는 말 하나도 이해 못했구나?"


여자는 남자의 핸드폰을 빼앗는다.

능숙하게 남자의 핸드폰 비밀번호를 풀고

전화번호부에서 '그 친구'의 별명을 찾는다.


별명이 멸칭인것과 상관없이

이성의 존재가 이름이 아닌 

다른 명칭으로 저장돼 있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번호를 누르고. 전화를 건다.

제발...부디....


이 망할 소꿉친구가 전화를 받지 않았으면


[야. 왜. 여친 만난다며. 뭔 일있어?]


....여자는 핸드폰을 꼭 손에 쥔다.

착신음이 울린지 2번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 소꿉친구란 사람이

남자의 전화를 제깍제깍 받는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안녕하세요"


[어머 안녕하세요! 여자친구분 이시죠?

 오랜만이에요! 어쩐 일이세요?]


"잠시 드릴 말씀이..."


"자기야, 왜 이래.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남자가 자신의 핸드폰을 든 여자친구에세 손을 뻗는다.

핸드폰을 돌려받고 상황을 무마시키고자 여자의 손목을 잡아챈다.



"놔! 나랑 헤어질거 아니면, 이 손 당장 놓으라고!!"


여자는 남자에게 소리친다.

물론, 헤어져줄 생각은 없다.

죽음만이,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겠지.


[여보세요? 무슨일이야 정말...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 상대방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다.

둘이 싸우는것 같긴 한데...

자신은 그 남정네와 그렇고 그런 사이도 아니고

지금도 자신은 사랑하는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알이 없어서 불친구인 그녀석의 여자친구에게

책잡힐 일이나 행동이나 생각따윈 하지도 않았고

아무리 통화라지만, 이런 취급이나 수모를 당할 필요도 없다.


제발...사랑싸움은 니들끼리 하세요

나는 내사랑 찾아갈테니까.


"하아...내가 통화하는동안, 가만히 있어.


여보세요. 친구분?"


[네.]


"제가 실례인거 아는데."


[말씀하세요. 괜찮아요. 같은 여자로서 이해하니까]


소꿉친구는 최대한 자제심을 담아서 대답한다.

나중에 사태가 잘 진정이 되면

이 불친구 녀석한테 치킨이라도 한마리 사라고 해야겠다.


"같은 여자로서 이야기하는데

 다시는 제 남자친구 인생에서

 얼굴 코빼기도 보여주지 마세요"


[...네? 무슨... 말씀이세요?]


"당신, 존재 자체가 거슬려요.

 사랑? 당신이 제 남자친구를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쯤 알아요.

 그게 맘에 안들어서 그래요.

 

당신 때문에, 

내 멋진 남자친구를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마냥 막대하는

당신때문에


내가 질투한다는 사실도 엿같아요.

 

지금도, 나중에 제 남자친구한테

밥이나 한끼 사달라고 생각이나 했죠?

저 때문에 제 남자친구가 당신한테 책잡혔으니까.


책 잡힐것도 없고

앞으로 상관할 것도 없으니까..."


[야. 그녀석 여자친구라고 보자보자하니까

 말 다했어? 뭐야?

 니들 사랑놀음에 내가 왜 놀아나야 하는데?

 어디서 못배워먹은게 막말이나 하고 말이야...]


"닥치고, 제 말 끊지 마세요. 아직 할 말 남았으니까.

앞으로 상관하지도 말고

연락도 하지말고.

혹여나 옛날에 둘이서 찍은 사진이라도 있으면 다 버리세요.

아니, 저한테 보내세요. 제가 태워버릴려니까.


앞으로 제 인생에서, 제 남자친구의 인생에서

당신같은 사람 보고싶지 않아요.

고려대상에 올라가는 것 조차 참을 수 없어요."


[그 못난이 뼈다귀새끼 평생 물고 빠세요.

 난 하나도 관심 없으니까.]


"하아.....씨발. 못생긴게 정말"


[야!! 말 다했어?]


"다 했고. 끊습니다."


여자는 통화 종료를 누르고

그대로 핸드폰을 바닥에 집어 던진다.


바닥에서 튕겨 오르는 스마트폰을 발로 밟는다.

신발의 뒤꿈치 굽으로, 온 체중을 실어 으깬다.


철저하게, 안에 있는 유심, 데이터 한 조각마저 살릴 수 없도록.


"손님? 매장에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별안간 큰 소리에, 카페 점장이 한달음에 달려온다.


"하아...하아...죄송합니다. 저희가 치우고 나갈게요."


여자는 으깨진 핸드폰을 들어서. 그대로 쓰레기통에 집어넣는다.


"자...자기야."


처음으로 보는 여자친구의 분노한 모습

정나미가 떨어진다?

짜식는다?


아니, 무섭다.

이 여자친구란 존재가 사랑이란 것 때문에

자신에게 어떠한 짓을 해올지 무섭다.


"스읍....하아...

속이 다 시원하네.


이제 갈까?

반지는 요 앞에 금은방 가서 팔아버리자.

대신에 싸구려 은반지라도 좋으니까, 우리가 직접 고르자.


당신 핸드폰 새로 사야겠어. 내가 사줄게.

통신사도 바꾸고, 번호도 새로 만들자.

뒷번호는 나랑 똑같이 하면 좋겠다. 그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여자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 어떠한 모습보다

시원한 표정으로 웃음을 짓는다.


왼손 약지에 끼우고 다니던 반지를 호기롭게 빼버린다.

순전히 힘으로 뽑아버린 장신구에

살이 찢어지고 피가 흐른다.


솟구치는 아드레날린 때문인지

아니면 고양감 때문인지

여자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행복한 감정만이 가슴을 채우고도 넘쳐버릴 것 같다.


지금 이 마음이 폭발해버리지 않도록

억누르고 있는게 고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