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운 어느 주말.

학업에 흠뻑 절여지다 영혼이 가출하기 직전에 주말이란 달콤한 휴식을 얻게 된 지훈은 한가롭게 책을 읽는 중이었다. 


지훈이 최근 가장 좋아하는 판타지 소설이었다.

여주의 집착이 너무 심하다는 이유로 메이저에 올라가지 못하고 배척받은 비운의 작품.

평범한 표지에 그렇지 못한 내용은 지훈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재밌기만 하구만. 뭘." 


침대에 기대 좋아하는 노래와 함께 주말을 보내는 것.

아아, 이것이 여유라는 것이다. 


심지어 잔소리하는 부모님은 드물게 여행을 다녀온다며 집을 비운 상황이었으니.

지훈의 입가에 피식피식 미소가 피어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띵동 


최적의 비율로 탄 커피를 홀짝이던 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새의 지저귐과 자동차의 분주함을 뚫고 들리는 날카로운 음이었다. 


"올 사람이 있나?" 


택배야 문 앞에 둘 테고, 딱히 올 사람도 없을 텐데. 


초인종은 약간의 간격을 두고 또 울렸다.

역시나 날카로운 소리다. 


-똑똑. 


"계시나요? 선배~" 


곧이어 들려오는 날카로운 초인종 소리와 대비되는, 부드러운 여성의 음성이 들린다. 


작게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지훈이 몸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있었던 탓에 허리가 비명을 질렀다. 


나도 늙었나 보네.

하긴 18살이면 충분히 늙었지. 


기만이라고?

뭐 어때, 듣는 사람도 없는데. 


"에구구." 


허리를 콩콩 두드리며 책갈피를 끼운 지훈은 현관으로 향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옷차림을 슬쩍 본 지훈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핺다. 


"뭐, 괜찮겠지." 


쟤를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벌써 10년 이상의 징글징글한 인연인데. 


후줄근한 잠옷 차림에 대충 머리띠로 넘긴 앞머리.

성의 없는 모습이었지만 꾸미기엔 시간도 없고, 무엇보다 귀찮았다. 


-철컥. 


지훈이 문을 열자, 뭐가 그렇게 소중한지 네모난 용기를 두 손으로 꼭 붙잡은 여자가 활짝 웃은 채 서있었다. 


앳된 얼굴이 절대 성인의 느낌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지훈과 한두 살 차이일까. 


"안녕하세요~" 


"존대는 무슨 존대야. 편하게 해." 


가식으로 똘똘 뭉친 간드러진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이 여학생의 이름은 김세희.

코찔찔이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1년 연하의 아는 여동생이다.

좋든 싫든 오랫동안 엮인 인연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럴까? 아 맞다, 오빠. 이거 엄마가 가져다주래." 


"어? 어. 일단 들어..." 


"실례합니다~" 


들어오란 말도 안했는데.

세희는 신난 얼굴로 신발을 벗고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총총 뛰어가는 뒷모습이 마치 토끼를 연상케 했다. 


...어차피 들어오라고 할 생각이었지만, 너무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모습이 괜시리 열받는 건 왜일까. 


"커피면 돼?" 


"웅." 


자리라도 맡아놓은 듯 지훈의 방으로 쌩 들어간 세희는 인형을 꼭 끌어안은 채 지훈의 침대에 기댔다. 


뭐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훈은 신경 쓰지 않았다. 


"...여...깄..." 


저 인형, 10년 전에 자기가 선물했던 곰인형이다. 


생일선물이라며 들이밀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저럴 거면 왜 줬대.' 


올 때마다 지가 꼭 끌어안고 있을 거면서. 


생일선물을 준 사람이 받는 사람보다 더 많이 쓰는 이상한 장면을 보며 지훈은 커피를 내렸다. 


"여기." 


초딩입맛에 맞게 달달하게 우유와 캐러멜을 섞은 캐러멜 마키아토를 건넸다.

따뜻해서 그럴까, 달달한 캐러멜 향보단 우유의 고소함이 더욱 짙게 느껴지는 커피였다. 


곧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파인 지훈은 뜨거운 커피도 이해가 안됐지만, 우유를 넣는 것은 더더욱 이해가 안됐다. 


뭐, 올 때마다 만들었다 보니 이젠 눈감고도 만들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이게 다 저 자식 때문이다. 


"마시면 가." 


"섭섭하게 왜그랭." 


어느새 인형을 다시 제자리에 조심히 올려둔 세희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이번엔 베개를 끌어안은 모습이었다.

얼굴을 반쯤 베개에 파묻어 두 눈밖에 보이지 않았다. 


불청객에게 침대를 뺏긴 지훈은 책상에 대충 덮어둔 책을 집었다.

의자를 뒤로 젖히고 몸을 뉘인 지훈은 읽던 부분을 다시 펼쳤다. 


"어? 그거..." 


"응? 알아?" 


지훈이 '오타쿠 문화에 전혀 물들지 않고 현실을 살아가는, 인싸라고 불리는 이 녀석이 이 책을 알다니!'라는 눈빛을 띠었다. 


"알긴 알지, 그거 여주가 집착 엄청 심하잖아. 무서울 정도로." 


스토킹은 기본이요, 도청에 납치, 감금, 조교, 세뇌, 타락 등등 무서운(지훈에겐 흥분되는 것뿐이었지만) 요소를 죄다 섞어놓은 이 오타쿠스러운 책을 안다고? 


"솔직히 봐봐, 집착이 심한 것도 남주가 안받아줘서 그렇다니까? 이렇게 예쁜데 안받아주는 남자가 고자지. 고자." 


가장 마음에 드는 삽화를 들이밀며 열성적으로 설명하는 지훈.

세희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오타쿠 특.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가 나오면 못 참고 입을 턴다.

찔렸다면 당신은 진성 오타쿠다. 


"고백받고 같이 쎄쎄쎄 했으면 서로한테 좋을 텐데. 에휴." 


물론 그러면 조금 노잼이 될 것 같긴 하지만, 독자로써, 두 사람을 응원하는 순애교 신도로써 상상은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흐응..."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지훈을 쳐다보는 세희.

처음에 보여줬던 쾌활한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안광이 사라진 눈동자는 어쩐지 무서워 보이기까지 했다. 


-탁. 


잔을 내려두는 소리에 상상에 빠져있던 지훈의 정신이 확 깼다. 


아, 한참 좋은 부분이었는데. 


"잘 마셨어. 오빠." 


"어? 응. 가게?" 


"응! 다음에 또 올게~" 


"그만 와도 돼. 아니, 이제 그만 좀 와." 


세희는 킥킥 웃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바이바이~" 


-철컥.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집에는 다시 지훈 혼자 남았다. 


종이 넘기는 소리만이 이따금 들릴 뿐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하아, 역시 귀엽다니깐." 


조금 아는 척해줬다고 흥분해서 와다다 말하는 모습이 너무 하찮았다.

그런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서... 순간 못 참을 뻔했지만. 


생글생글 웃던 세희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지훈과 있었을 때와 똑같이 미소를 띄고 있지만, 왠지 고혹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주변에 매혹적인 오오라가 맴도는 것만 같았다. 


세희는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냈다. 


SD카드. 


그것도 1테라짜리 대용량 SD카드였다.

그리고 배터리 몇 개가 주머니에서 떨어졌다. 


-딸칵. 


USB에 SD카드를 끼운 세희. 


마우스 클릭을 몇 번 하자 영상 하나가 모니터에 나타났다.

화질이 썩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주 나쁘진 않았다.

영상 길이에 비하면 오히려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움냐움냐. 


"아, 잠꼬대부터 시작이네." 


영상을 튼 세희는 서랍에서 두꺼운 종이 뭉치를 꺼냈다. 


전부 지훈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었다. 


자는 사진, 등교하는 사진, 게임하는 사진, 샤워하는 사진 등등. 


자기 집에 고화질 소형 카메라가 수십 개가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선배는 모르겠지. 


"...이거 정리하고 음성 파일도 정리해야 하는데." 


할 일이 산더미였다. 


하지만 흐뭇한 미소는 떠나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