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결투표(自決投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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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의식이 혼미했다.

스스로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온기가 느껴져 정신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문희야.”

“괜찮아? 많이 힘들었지?”

 

백이란이 제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강문희가 온수에 적신 수건으로 그의 몸을 닦아주고 있었다.

 

그제야 조금 전에 있던 일이 떠올랐다.

 

그는 여동생에게 범해진 것이다.

시계를 보니 벌써 몇 시간이나 지나가 있었다.

 

백은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만족할 만큼 즐긴 뒤 떠난 듯 했다.

어느새 손목을 묶고 있던 고리도 사라져 있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복받쳐와 자유로워진 팔로 강문희를 껴안았다.

그녀는 싱긋 웃더니 그에게 팔을 감았다.

 

“네가 당하는 일은 피하지 말고 마주봐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녀는 도망치지 않고 그를 계속 지켜봐준 것이었다.

 

“만약 그랬다간 이란이 너에게 전부 떠맡기고 도망치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 물론 너라면 어떤 난관이 있든 혼자서도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딱히 그런 걸 못한다고 의심했던 게 아니라……”

 

그리 말하다가도 갑자기 자기가 말실수를 한 건 아닐지 싶어 당황하며 덧붙이는 강문희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백이란은 피식 웃었다.

 

“문희야.”

“응?”

“사랑해.”

 

그는 끌어안은 그녀의 고개를 살짝 돌리고는 입을 맞추었다.

따스한 온기가 서로의 입술을 통해 교환된다.

 

“…기습이라니, 너무하네.”

“미안, 혹시 싫었어?”

“……아니.”

 

입술을 떼어놓자 그녀는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시선을 살포시 돌렸다.

귀여운 그녀의 모습에 다시금 미소를 짓고야 마는 백이란이었다.

 

“염장질은 적어도 둘만 있는 데서 해줄래?”

“선정이 누나?”

 

그러다 문득 들려온 목소리 쪽을 바라본다.

그 자리에는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소녀가 불평하듯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누나도 있었어?”

“그럼 울먹이면서 끝까지 함께 해줘야한다며 앉아있는 애를 냅두고 그냥 갈 수 있겠냐?”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당시의 강문희가 그랬다는 모양이겠지.

다시 그녀를 바라보니 배시시 웃는다.

 

“아, 맞다.”

 

서로를 마주보다가 무언가 스쳐지나간 생각에 백이란은 중얼거렸다.

 

뒤이어 그는 바닥 근처로 시선을 향했다.

다른 두 사람 역시 그의 눈길을 따라갔다.

 

다리에 창이 꽂힌 채 쓰러져있는 성란의 모습이 그 자리에 있었다.

 

아예 관통한 탓에 출혈량 자체가 많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꽤 지나서 그런지 창백해보였다.

이미 의식을 잃은 것인지 입을 벌린 채 이따금 파들파들 경련할 뿐이었다.

 

그나마 가슴이 들어가고 나오는 모습에 호흡은 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모습에 박선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얘들아, 이런 상황이면 차라리…….”

 

이대로 내버려두면 성란은 아마 죽을 것이다.

그리고 사망자가 나온 순간 게임은 종료된다.

 

폭력이 금지된 플레이어 입장에서 사망자를 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여기 있는 셈이다.

 

“영차…….”

“도와줘서 고마워.”

 

그러나 그 이야기를 채 꺼내기도 전에 성란에게 달라붙어 치료를 시작한 두 사람이었다.

 

강문희가 창을 뽑고 그 자리에 백이란이 손을 가져다대자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래, 니들이 안 그럴 리가 없지.”

 

백이란을 몇 번이고 강간했던 데에 그치지 않고

그를 영원히 이곳에 감금시킬 계획도 짜고 있던 그녀였다.

 

물론 그 죄를 따져보고 그래도 죽게 둘 수는 없다는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사람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다만 이 둘은 분명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다친 사람을 도와주겠다는 게 유일한 이유일 것이다.

도울 수 있는 능력이 되고, 도울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랬을 뿐이다.

 

“이러니까 포기할 수밖에 없지…….”

“응? 언니, 방금 뭐라고 했어?”

“너희들 존나 백년해로 하라고 했다, 왜.”

 

그 두 사람을 보며 쓴웃음을 지어버리고 마는 박선정이었다.

티 없이 맑은 저 둘의 관계를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자신처럼 추악한 인간이 함부로 더럽혀도 될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니 스스로의 연심도 포기할 수 있었다.

 

결단을 내릴 당시의 감정이 떠올라 조금은 서글퍼졌다.

 

그러나 오늘은, 울지 않았다.

 

 

1.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붙들고 아무리 버텨도 시간은 흘러간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든 다음날 아침은 돌아온다.

 

“…….”

 

침묵 가운데서 아침식사가 끝났다.

 

아무런 대화도 주고받지 않았으나 적어도 겉보기만큼은 이전의 식사 풍경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어제의 일 때문인지 성란조차 긴장한 듯이 백은하 쪽을 흘끗흘끗 바라보며 얌전히 앉아있었다.

 

이 상황의 장본인인 백은하는 한술 더 떠서 아예 탈락 이전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였다.

조용히 식사를 하다가 심지어는 평소처럼 나서서 식기를 정리했다.

 

함께 그릇을 주방에 가져다놓은 이시연이 다른 방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

백은하는 다시금 테이블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시설엔 아무 것도 없는 방이 하나 있었는데 현재는 이시연의 흡연실로 사용되는 중이었다.

 

아무튼 테이블로 돌아오니 그곳에 있는 것은 성란뿐이었다.

 

“오늘 당장은 투표를 시도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네요.”

“그, 그러게 말이에요.”

 

별 생각 없이 그녀에게 말을 걸자 성란은 어깨를 흠칫 떨며 대답했다.

 

성란은 백은하에게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설령 그녀도 폭력을 사용했을지언정 두들겨패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사람에게 냅다 창을 꽂아버리는 작자다.

심지어 그 창을 맞은 게 본인이기까지 하니 무서워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되레 트라우마가 도져 도망가지나 않은 게 다행인 수준이었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도망가지 않은 게 아니라 그러지 못했을 뿐이지만 말이다.

 

매일 오전마다 투표함이 개방되는 이상 이곳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 그녀를 흘끗 쳐다보더니 백은하는 테이블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앞뒷면이 흑백으로 칠해진 다섯 장의 카드였다.

 

“이건…?”

“성란 언니 거예요. 돌려줄게요.”

 

어차피 한 번 사용하면 다시 성란에게 지급될 물건이었다.

 

그렇다면 탈락한 이상 그녀와는 어느 정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도 있으니

차라리 이렇게 선의를 베푸는 척 넘겨주는 편이 나았다.

 

“나름의 호의 표현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그런가요…?”

“어제는 미안했어요. 너무 감정적이 되어버려서.”

 

멋쩍게 웃으며 백은하는 뺨을 긁적였다.

 

그 모습에 성란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당장에 적대할 기색은 보이질 않았다.

 

“탈락자끼리 잘 지내봐요.”

“…그러도록 하죠, 백은하 양.”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마음을 열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말이다.

 

오히려 살갑게 다가오는만큼 어제의 모습이 비쳐보여 불안할 정도였다.

 

“교대까지 하면서 지킬 필요는 없겠죠?”

“고작 세 시간이니… 만반의 대비를 해두도록 해요.”

 

하지만 그렇게 마주앉아 계속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또 나름 대화가 통한다는 게 참 신기했다.

 

“그런데 은하 양. 그 사슬은 뭐에요?”

“아, 투명인간이 카드를 투입하는 순간 붙잡을 수 있게 준비하는 거예요.”

“한 표는 먹히는 게 전제로군요.”

“상대가 투명인간이니 어쩔 수 없죠 뭐. 그래도 저희 카드도 10장이나 있으니까요.”

 

어떻게 투표함을 지킬지에 대해 토의할 때는 꽤나 마음에 든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백은하는 머리도 그럭저럭 잘 돌아갔으며 예의바르게 그녀를 대했다.

 

요컨대 백은하는 ‘엘리트스러운’ 여자였다.

적어도 성란이 판단하기에는 말이다.

 

“성란 언니는 오빠를 좋아하는 거죠?”

 

그러다가 그런 화제가 나왔던 것은 성란이 그녀와 나름 친하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아무렴 무슨 군사작전을 벌이는 규모도 아니고

고작 두 사람의 방위 계획만으로 세 시간 내내 떠들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개인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만 것이었다.

 

그 질문에 성란은 순간 몸을 움츠렸다.

어제의 격통 속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백은하는 그녀가 자신의 오빠를 더럽혔다고 말했다.

 

“…그래요. 포기 못해요.”

 

허나 이내 성란은 각오를 다지고 말했다.

만약 당장에 백은하가 덤벼든다고 해도 대응할 수 있도록 의자에서 엉덩이를 반쯤 뺐다.

 

백이란과 관련된 일이라면 적어도 순순히 물러나줄 수는 없었다.

설령 무슨 대가를 치루게 되더라도.

 

“아뇨, 딱히 포기하라고는 안 했는데요…?”

“……?”

 

그러나 정말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백은하의 모습에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당신도 이란이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요?”

“아, 뭐… 그렇긴 한데요.”

“그리고 어제 분명 오빠가 더럽혀졌다고…….”

“그건 오빠 잘못이 제일 크잖아요.”

 

성란의 생각과 다르게, 의외로 백은하가 그녀에게 품은 질투는 그리 크지 않았다.

 

물론 소중한 오빠를 범하고 친한 언니들을 괴롭힌 악감정을 모두 합치면

창으로 한 번쯤 찔러줘야 겨우 직성이 풀릴 정도로 크기는 했지만.

 

“저, 그러면 말인데요…….”

 

그래도 성란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백이란에게 다가오는 모든 존재를

가슴팍에 말뚝을 박아 처분하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혹시 괜찮으면 오늘은 셋이서 하지 않을래요?”

“……네?”

 

아니, 오히려 백이란을 사이에 둔 관계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호의적이었다.

 

백은하의 애정은 그를 깎아내림으로써 겨우 성립된 것이었다.

따라서 백이란은 언제나 ‘더러운’ 존재로 있을 필요가 있었다.

 

그는 문란한 생활을 보내야만 했고

지금 상황에서 그것을 이뤄줄 수 있는 사람은 성란뿐이었다.

 

백은하로서는 성란과 손을 잡고 싶을 수밖에 없었다.

 

“어, 음, 그러니까, 셋이서라는 건… 그, 그거, 말하는 거죠?”

“네, 그래요.”

 

물론 그런 걸 알고 있을 리 없는 성란은 혼란스러울 뿐이었지만 말이다.

 

“언니, 안 될까요?”

“뭐, 정 그러고 싶다면야… 좋아요.”

 

하지만 이내 그녀는 고개를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애초에 딱히 문제될 것이야 없어보였다.

 

어차피 이대로 내버려두면 백은하는 자기 나름대로 백이란에게 다가갈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보이는 곳에 두고 제어하는 편이 나았다.

 

다른 이유를 말하자면 그녀에게는 꽤 호감을 느끼고 있던 탓도 있었다.

 

희미하게 백이란이 겹쳐보이는 외모도 있었고

성격 자체부터 성란에겐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타입이었다.

 

물론 첫인상이 너무 나빴던 탓에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너무 과도하게 재평가가 이뤄진 것에 가까웠다.

 

또, 성란 본인은 자각하고 있지 못하겠지만

한때 공포의 대상이었던 존재가 자신에게 부탁해온다는 상황 자체에 대한 기쁨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이든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탈락자 두 사람의 동맹이 견고히 맺어졌다는 점이었다.

 

 

2.

 

강문희는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탁상시계가 째깍째깍 소리를 내었다.

침실의 문은 이미 잠겼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오늘은 탈락자들이 조용했다.

 

오전에는 투표함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오후에도 무언가 움직이는 기색은 없었다.

 

덕분에 그와 나란히 앉아 퍼즐을 맞추며

오랜만에 여유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탈락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는 것 정도는 강문희도 알고 있었다.

아마 그녀들은 밤을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미 그의 방에서는 음란한 교접이 이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워 침착할 수가 없었다.

 

통화가 걸려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통화방에 있던 것은 탈락자를 제외한 다섯 명.

백이란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드는 것은 의아함이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붙들려있을 게 뻔하기에 굳이 그를 초대하진 않을 테다.

 

그런데 그가 이 통화방에 있다는 것은 그가 직접 나머지 사람들을 초대했다는 소리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하자 강문희의 뇌내에 희망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백이란은 다른 두 사람이 방에 찾아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서

자신 역시도 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직접 통화를 걸었으리라.

 

그러나 이내 침묵이 감돈다.

꽤나 위화감이 느껴졌다.

 

분명 백이란이 아무도 안 왔으니 자기도 끼겠다며 말해올 차례였다.

 

“…이란아?”

 

그러나 스크린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은 어쩐지 거친 그의 숨소리였다.

 

[이란아, 어디 아파?]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제야 하나둘 의문을 품고 입을 연다.

 

그런 가운데 강문희는 그것이 어디선가 들어본 소리임을 깨닫는다.

깨닫고야 마는 것이다.

 

이곳에서 몇 번이고 눈앞에서 들었던, 쾌락을 억지로 삼키는 숨소리였다.

 

[아, 미안해요. 저희 오빠가 운동 중이어서요. 그치 오빠?]

[으, 으응… 운동하고 있어…….]

[후후, 이란 씨. 목소리 엄청 떨리고 있어요.]

 

그리고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에 나머지 사람들도 상황을 이해하고 만다.

 

[야, 백은하? 너 뭐하는 거야.]

[운동하는 중이라고 말했잖아?]

 

노여움이 섞인 박선정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백은하는 여전히 능청을 떨 뿐이었다.

 

[저기, 오빠. 말해주라?]

[그냥… 애들이랑, 흐윽, 운동하고 있어……. 걱정하지 마, 누나…….]

[……백은하. 너, 다음에 두고 봐.]

 

이내 여동생의 재촉에 떠밀려 백이란이 겨우 말을 잇는다.

그 소리를 듣고서 상태를 대강 짐작한 것인지 박선정은 이를 갈았다.

 

[문희야, 나가서 방 새로 파자.]

[그, 그럴까요, 언니…?]

 

그러더니 박선정이 말을 잇기에 강문희는 조심스레 수긍했다.

거기에는 약간의 머뭇거림이 있었다.

 

저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상상이 갔다.

행위 와중에 있는 백이란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알고 싶다는 욕망 또한 있었다.

미지를 들춰내어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아, 나가시는 건가요?]

[언니들 잊으시면 안 돼요? 오빠는 저희한테 잡혀있다는 거.]

 

그런 강문희의 마음을 간파했기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통화 저편의 두 사람은 쐐기를 박았다.

통화를 끊지 말라며 백이란을 인질 삼아 협박해오는 그녀들이었다.

 

“아, 알았어. 여기 있을게.”

[망할 년들…….]

 

거부한다는 선택지는 물론 없었다.

 

[아, 러브젤이라는 거 은근히 괜찮네요.]

[오빠. 성란이 언니가 데워준 걸로 문질러지니까 어때?]

[능력을 이렇게도 쓸 수 있더란 말이죠.]

 

뒤이어 들려오는 것은 끈적한 정도를 넘어 비닐을 우그러뜨리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의 물소리.

 

[아, 후끈후끈한 오일로 마사지를 해주고 있을 뿐이니까 걱정마세요?]

[흐윽… 은하야. 제발 통화 끊어줘…….]

[왜요? 오빠도 예전부터 여자친구랑 밤에 전화하는 거 좋아했잖아요?]


“…….”

 

빨라지는 물소리. 한 떨기 가녀린 그의 신음. 감탄하는 두 여자의 목소리.

 

[와, 이란 씨. 방금 거의 천장에 닿을 뻔 했어요!]

 

이해하고 싶지 않은데, 머리가 그 이미지를 강제로 그려버린다.

강문희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한 백은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 그러고 보니 이번 규칙 제안자는 오빠였지? 다들 기다리니까 얼른 안 하면 민폐라고?]

[그러면… 적어도 놓아…… 윽?! 들어올리지 맛!]

[자아, 이란 씨. 잘 보이게 책상 위로 올려드릴게요.]

 

옷깃 스치는 소리가 이어진다.

이내 남녀의 목소리가 겹치며 얕은 물을 첨벙이는 듯한 소리마저 들려온다.

 

[킥… 오빠, 동급생 여자한테 들려서 동생한테 억지로 박고 있는 기분이 어때?]

[아아, 저항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대신 움직여드릴 테니까.]

[아무튼 얼른 규칙 작성해야지? 이러다 오늘 안에 안 끝나겠어.]

 

두 여자의 키득대자 뒤이어 누군가 쾅 하고 책상을 내려쳤다.

아마도 박선정이었으리라고 강문희는 추측했다.

 

[아핫. 오빠, 내 가슴이 아니라 스크린을 터치해야지.]

[네가… 억지로 누르고 있… 흐으.]

[손을 떼놓질 않으니 어쩔 수 없네. 오빠 마음을 담아 내가 대신 타이핑하는 수밖에.]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있는 스크린에 문자가 하나 떠오른다.

 

‘문희야 미안해♥

‘규칙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규칙의 제안권이 다음 차례로 넘어갑니다.’

 

“……!”

 

그것을 본 순간 가슴에 무언가 응어리가 맺히는 것만 같은 감각이 스쳐지나갔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께로 손을 가져가고 만다.

 

그저 그의 여동생이 자신을 놀리기 위해 쓴 글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감각과 함께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아, 나와버렸다.]

 

거기에 박차를 가하듯 무심정하게 백은하는 중얼거렸다.

 

쏟아진다. 새하얀 탁류가 마구 쏟아진다.

그 장면이 머리를 떠나가질 않았다.

 

[은하 양. 저도 그거 해보고 싶어요!]

[죄송해요. 제가 언니 정도로 힘이 좋은 건 아니라서.]

 

그런 와중에도 이시연은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한 것인지 이내 스크린에 새로운 문자가 떠오른다.

 

‘홀에서는 처음에 지급된 복장을 완벽히 착용해야 한다.’

 

[앗, 이러면 테이블에서 못하잖아요?!]

[…그러라고 넣은 거란다.]

[으으, 투표권 전부 방에 두고왔는데…….]

 

이윽고 저편에서 마구 불평을 말해온다.

 

저 방에는 백이란의 카드가 있긴 할 테지만

그게 들어있는 서랍을 방의 주인 외의 인물이 열려고 하면 제재가 들어간다는 모양이다.

 

아마도 주최 측이 백이란에게 능력을 증명하겠답시고 발동시킨 트랩과 같은 것이리라.

그녀들도 열지도 못할 서랍 때문에 손목이 잘리고 싶지는 않겠지.

 

이내 강문희는 서랍을 열곤 카드 한 장을 투입했다.

 

[찬성] 7

[반대] 0

 

잠시 시간이 지나자 스크린이 투표의 결과를 알려온다.

 

[어쩔 수 없군요. 공개 플레이도 좋았는데요.]

[손 놓고만 있어야 한다는 거 은근히 짜증나는데. 오빠, 이 기분 받아줄 각오해.]

[다음에는 제 차례잖아요?]

[아, 맞다. 미안해요 언니.]

 

그리 말하면서도 여전히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가득한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내 통화가 끊어진다.

 

“……이란아.”

 

순식간에 몸에서 힘이 풀리며 축 늘어졌다.

견디기 힘들 정도의 허탈감이 몰려왔다.

 

그녀들의 밤은 이제 막 시작한 참이다.

오늘 밤새 백이란이 대체 얼마나 범해질까.

 

그런 생각을 했더니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으아?!”

 

그러다가 갑자기 울려퍼진 멜로디에 강문희는 깜짝 놀라 허리를 곧추 세웠다.

 

책상에 놓인 스크린이 다시금 새로운 통화를 알리고 있었다.

 

적혀있는 이름은 백이란과 박선정의 것.

 

완전히 도발이었다.

백이란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다시금 각인시켜주기 위한 희롱이었다.

 

아마 이번에 연결되면 날이 밝을 때까지 통화가 끊어지는 일은 없겠지.

성란과 백은하는 밤새 그가 어떻게 범해지는지 보고해댈 터였다.

 

그걸 굳이 받아줄 필요는 없었다.

 

“…….”

 

그러나 궁금하고, 또 불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연인이 어떤 일에 처해있는지, 밤새 무슨 일을 당할지.

 

꿀꺽. 침을 삼켰다.

 

이미 진즉에 이걸 무시하고 거절 버튼을 눌렀을 박선정에게 마음속으로 사과하고

강문희는 파들파들 떨리는 손끝으로 스크린을 터치했다.

 

귀를 범하듯 찌걱찌걱 음란한 소리가 들렸다.

완전히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고야 말았다.

 

“아핫, 언니들 변태──.”

 

소녀는 스크린 너머에서 비웃었다.




오늘은 글이 미묘하게 툭툭 걸리는 느낌.

진짜 물흐르듯이 소설 뽑아내는 사람들 넘나 부러운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