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6일, 흐림 그리고 덥고 습함.


모레면 삼촌이 출장을 가신다.

그나마 삼촌에 대한 기억이 내일 당장 없어지진 않아서 그럴까. 지금 당장은 평온하다.

그래도 삼촌은 그런 내가 걱정스러운지 아는 동생에게 부탁해서 잠시 같이 있어달라고 할거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농담이겠지.





때는 여름, 인터넷에서 안 지인들이랑 이야기를 할 때였다.


[나 : 아 ㅅㅂ 너무 더워졌네.]

[A : 에어컨 개꿀이고.]

[나 : 에어컨 부럽네요. 우리는 전기세 때문에 못 틀게 하는 데]

[B : ㅇㄴㄷ? ㅇㄴㄷ! 이번엔 전기세 좀 안 낮춰주나.]

[C : 이번 정부가 막바지인데 그럴 리가, 배쨰라하겠지. 아 물론 전 부자라서 계속 틉니다 ^^]

[나 : 비틱쉑]

[B : 죽창... 존나 큰 죽창이 필요하다...]


...뭐, 그렇게 노닥거리면서 놀다가 갠톡으로 메세지가 온 것이었다.


[A : 야, 얀붕아.]

[나 : ? 네 형님.]

[A : 너 에어컨 원하냐?]

[나 : 당근빳따죠.]

[나 : 근데 왜요?]

[A : 니 여름동안 에어컨 나오는 알바 해보실?]

[나 : 편의점 같은 건가요?]


분명 A 형님은 편의점이나 그런 거 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지?


[A : 아니, 딱히 육체노동도 없고 시간만 버리는 일이긴 한데.]

[A : 최저시금 정도는 챙겨줄게.]

[나 : 뭐... 할 일 없었으니 상관은 없지만...]

[나 : 무슨 일이길래 그래요?]

[A : 어... 그러니까...]

[A : 베이비시터?]

[A : 아니, 아기는 아니니]

[A : 걸시터?]


뭐시여??? 소녀를 돌보는 일???

아무튼 이 형님과 안지도 몇 년 됐으니까 받아들여보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 날, A형님네 집으로 갔다.


"아 왔냐?"

"오랜만이에요 형, 형 정모에 오고 난 뒤인데 얼마정도만에 보는 거죠 이게?"

"거의 1년 반 다됐네. 그 동안 너무 바빠가지고 진짜 오랫만에 본다 야."

"그러게요. 그러고보니 그 걸시터라는 건..."

"아.. 응 그래, 일단 들어와봐."


잠깐 A형님은 얼굴을 어둡게 만든 뒤, 이내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나를 집안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어진 이야기. 1년 반전에 대략적으로 듣긴했지만, A형님께선 1년 반 전에 형님 부부께서 돌아가셔서 나와 동년배 정도의 조카를 맡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다만 조카에게 문제가 있어서...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요?"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서 뇌에 손상이 왔다고... 그래서 하루가 지나면 사람들의 얼굴을 잊어버려."

"그건..."

"그런 문제로 학교에 갈 수도 없고, 집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방법들을 가르치고 있는 데..."


거기까지 말씀하신 뒤, 목이 마르다는 듯이 차를 연거푸 마시셨다.


"...내가 출장을 간 적이 있었거든."

"아 네, 분명 C시에 3일 동안인가 가신거였죠?"

"그래, 그러고 난 뒤, 걔랑 만났을 때, 응. 좀 말이 아니었지."

"그... 구체적으로?"

"너무 외로워서 맛이 가기 일보직전이라고 해야하나..."

"아... 음... 네."


뭔지 몰라도 A형님이 얼버무릴 정도면 좀 큰 일이 있었나보네.


"아무튼 그래서 내가 이번에 또 나갈 일이 생겨서, 그 동안 내 집에 머물면서 내 조카랑 같이 있어줬으면 해서."

"네?"


이 행님이 지금 뭐랬나


"어, 그러니까, 저와 동년배의 여자애랑 한 집에서 살라고요? 언제부터 세계는 씹덕 시드로 생성되었나요?"

"야 임마, 그래도 씹덕취향이면 온건하지, 태그로 고어가 붙지 않았으니까."


고어가 붙었으면 형님 지금 여기 없지 않으실까요?


"그리고 혹시 문제라도 생기면..."

"니가 책임질 자신 있으면 상관없다. 아니, 우리네 회사 지점장 하나 맡길 테니까 하지 않을래?"

"네?"

"아니 내 조카 미인이니까 너도 맘에 들꺼거든, 그러니까 어때? 응?"


어딘가 필사적인 모습으로 그렇게 말하셨다.

왜, 왜지...


"이,일단 본인을 만나봐도 될까요?"

"...응, 그래 만나러 가자."


그러면서 A형님은 긴 복도를 지나 안쪽 방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있는 방 하나. 숙부님은 침을 삼키고 문을 두드렸고, 곧 이어 귀여운 목소리와 함께 문이 살짝 열리고 그 틈으로 한 여자가 얼굴만 내밀었다.


"네, 무슨 일인가요 삼촌?"


...확실히 A형님이 미인이라고 평할만 했다. 다만 백발? 아, 스트레스 너무 받으면 머리가 샌다고 했던가.


"어... 누군가요? 혹시 제가 또 잊은..."

"아, 아니야. 어제 말했는데 일기 읽어봤니?"

"...아, 그게 진짜였군요. ...정말 괜찮나요 삼촌?"

"내가 몇년 간 알고 지낸 애야."

"성범죄의 대부분은 알고 지내던 사람이래요."


이 여자 본인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네.


"그럴 용기가 있었으면 이 새끼가 고자형 주인공 인생 살진 않았겠지."


이 형님이 더 하네!


"뭐, 아무튼 싫으면 지금 말해줄 수 있겠니? 삼촌이 전에 말했듯이 내일부터 멀리 있어야해서..."

"...그럼 일단, 너, 이름이 뭐야?"


건방지다 이 휴먼, 싫어... 아니 그래도 돈을 받으니까 힘내자


"얀붕이라고 하는데, 넌?"

"얀순이. ...지금부터 내 방 보고,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 받아들이고 아니면 꺼져."


싸가지를 밥말아 드셨수?

뭐 됐다 형님 얼굴 생각해서 참아야지...

그렇게 생각하던 때가 저한테 있었습니다.

방 안에 있었던 것은 빽뺵히 있었던 얼굴, 아니 그림들.

삼촌의 그림이 대다수였고, 삼촌과 닮은 남자의 그림과 이 여자와 닮은 여성의 그림이 그 뒤를 이었다.

SAN치 체크 시간이었던건가...?


"공포스럽지? 니가 계속 만나야 할 여자는 이렇게 정신 나간 여자야. 견디지 못할 거 같으면 꺼져."


이걸 어떻게 견뎌. 그런 식으로 말하려 했다.

말하려 했는데, 그런,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하면...


"에라이 이딴 것도 못 버틸 거 같냐. A형, 돈이나 준비해주세요."

"...그래."


계속해서 표독스럽게 말하던 그 여자의 얼굴은 어딘가 안도하는 듯 했다.




나는 부모님에게 말하면서 사정을 설명했고, 별 문제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해서 여기에 머무르면서 얀순이와 같이 있기로 되었는데... 서로 뭘 말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은 채로 그대로 저녁이 되었다.  


"분명 얀붕이는 스테이크 먹고 싶다고 했었지?"

"아... 네..."


그리고 나온 것은 거대한 스테이크. 에? 뭐야? 스테이크라는 거 이렇게 두꺼운 거였어?

자르니까... 빨갛다? 아 스테이크는 원래 안쪽은 덜 익히지? 근데 이 상태로 먹는 거 맞지?


"어떻게 먹는지 모르겠어?"

"...부끄럽지만."


얀순이의 물음에 솔직하게 대답한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다! 모르는 걸 아는 척 하는 게 죄ㄷ...


"일단 이렇게 썰고."


뎃? 어째서 제 손을 잡는 것인 데스웅? 왜 나한테 밀착해서 써는 법부터... 아 저기, 네?


"...이렇게 먹는 거야. 간단하지?"

"...아... 응..."


아, 응 간단하네. 그, 그런데 어쨰서 그렇게 까지 밀착하신거죠? 네?


"...삼촌 내가 뭐 잘못했어?"

"젊은이의 순정을 가지고 놀았어."

"???"


아, 저만 의식하는 건가요? 씹덕새끼가 나대서 죄송합니다...

뭐 이래저래 저녁 시간이 끝나고, A형님에게 지내라고 한 방으로 가려할 때, 얀순이가 나를 잡아세웠다.


"잠깐 기다려."

"왜?"


솔직히 지금도 심장이 바운스바운스 뛰고 있거든요? 진정해야 할 거 같거든요? 보내주시면 안되나요?


"니 그림 좀 그리게 해줘."

"내, 내 그림?"


어째서???


"어차피 내일되면 너 까먹으니까 그려놔서 일기에 첨부해놔야해. 너도 내일 나랑 귀찮은 말썽부리긴 싫지?"

"아... 응..."


그런가, 그럼 얘 방의 그림들은...


"그럼 따라와."

"오케이."


그렇게 따라 방으로 들어갔는데... 아니 역시 사정이 대충 짐작이 가도 어딜 둘러봐도 사람 얼굴처럼 보이는 그림이 있는 거는 SAN치 체크 계속 하는 기분이라서 두근두근... 거리네, 공포 쪽의 느낌으로.

그러니까 빨리 나가고 싶은데...


"끝났지? 그럼 돌아가도 돼?"


다행이 이 여자 손이 엄청 빨라서 순식간에 내 정면 모습이 그려졌기에 나가려 했지만


"아니, 기다려. 옆모습하고 뒷모습까지 전부 스케치하게."

"예?"


저렇게 세세하게 했는데 저게 스케치라고요?

아니 그리고 옆모습하고 뒷모습까지 한다고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

"3d 프린터로도 뽑아내게."

"네???"


피규어가 되어버렷?


"그 정도는 해야지 내가 내일 너랑 이야기 할 수 있어."

"얼마나 심각한거야...?"

"...출장 다녀오신 삼촌이 3D 프린터를 구입할 정도로는 위험했지. 지금이라도 그만둘래?"

"아니, 하기로 한 건 해야지."


솔직히 좀 많이 쫄리지만!


"그래... 서로 상처받는 길을 선택하겠다는 거구나."

"아니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해?"


내가 부정하려는 것을 안다는 듯이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이렇게 미친 년이랑 같이 있는 데,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을 거라고?"

"미친 년은..."

"미친 거 맞잖아? 솔직히 벽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얼굴 그림들 보고 무서워하고 있잖아?"

"..."


그야 무섭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딘가 우는 것만 같아서, 되지도 않는 허세를 부리게 되는 것이었다.


"내가 본 것 중에선 이 것보다 더 한 것도 있었어. 이런 거 가지고 겁내게?"

"...허세는."


아, 왜, 뭐, 남자는 되지도 않는 허세를 부려야할 때가 있다고.

그래도 내 대답에 다소는 안심을 했는지, 그녀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진 것만 같았다.

뭐, 그 이후로는 따로 할 일은 없었고, 내 방으로 들어가서 잤다.



-7월 17일, 맑음 그리고 더움.


내일이면 삼촌이 해외로 출장가신다.

짧게 걸려도 2주가 걸린다고 하셨으니, 마음의 준비는 해놨어도 여전히 불안해진다.

...그렇다고 억지부릴 수는 없다. 예전처럼 삼촌에게 민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 오히려 중역이신데 나 때문에 그 동안 제대로 외부 활동을 못하셔서 죄송할 따름이다.

그래서 인지 어제 일기에 썼던대로 삼촌은 자신을 대신해서 내 외로움을 달래줄 남자아이를 데려왔다.

저번처럼 여자가 아닌 게 그나마 나은 것일까. 아니, 그래도 남녀가 한 집에서 사는 건 아니지 않을까?

외형은 피규어 1753번이다.




"...에어컨 개좋아."


하루종일 에어컨 틀고 있어도 되고 잘 떄도 안 꺼도 된다니... A형님 당신은 신입니까?


"대략 2주 정도 걸린다고 생각하는데... 아마 연장될 가능성도 있어. 그 기간 동안 잘 부탁할게 얀붕아."

"예 형님, 잘 지내보겠습니다."

"얀순아,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 만약 돈이 부족하면..."

"괜찮아요 삼촌, 제가 꽤 벌고 있는 거 아시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괜찮아요. 저번에 못다한 데이트 하고오세요."

"야, 잠깐, 너?!"

"먼저 방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얀순이 녀석 튀었어?!


"...그 뭐냐, 아무튼 갔다올게. 너도 무슨 일 생기면 내 갠톡으로 바로 보내고."

"일단 형님."

"왜?"

"형수님 생기는 건가요?"

"야?!"

"저도 들어가겠습니다!"


나도 튀자!

뭐, 튀는 것보단, 일단 얀순이와 업무 연락을 한다는 생각이지만.


똑똑


얀순이의 문을 두드리자, 저절로 열렸다.


"들어와도 돼."


그 얼굴 지옥을? 아니지, 겁먹지 말자 다 그림이야.


"아, 응. 일단 너랑 무슨 일을 할 지는 이야기 해놔야 할 거 같아서."

"삼촌이 말 안했어?"

"안했어. 일단 내가 뭐 해야해? 요리? 청소?"

"...그러게. 청소는 해주면 좋긴 하겠는데, 무리해서 내 방 청소를 할 필요는 없고, 요리는 내가 전부 주문할 테니까 괜찮아."

"주문? 배달시킨다는 거야?"

"삼촌이 없으니까 괜히 요리할 필요도 없고. 너도 그게 편하잖아?"

"아니 뭐, 편하긴 하지만..."


금전적으로 괜찮나?

아니 어제 말하는 거 들으면 나름 번다고 했는 데 무슨 일을 하나?


"걱정이 있으면 말해."

"아, 응 아니, 금전적으로 괜찮나 해서..."

"괜찮아. 요리할 시간에 펜을 움직여서 그림 그리는 편이 더 이득이야 나한텐."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건가?


"뭐, 그런 이유로... 응, 그러네. 어제 그런 말 해놓고 미안하지만, 되도록 내 방에서 같이 있어줬으면 좋겠어."

"어?"


미쳤습니까?


"...참으로 많은 걸 말하는 얼굴이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진 않지만, 삼촌이 없는 동안 내 증상이 얼마나 심해질지 모르니까, 되도록 같이 있어줬으면 하는 거 뿐이야."

"...그, 뭐시냐. 그럼 게임 같은 거 하고 있어도 돼?"

"소리 크게 틀어놓고 해도 돼. 19금 게임이라도 할래?"

"안 해!"


미쳤다고 그걸 어제 처음 본 여성 앞에서 하겠냐?!


"나는 상관없는 데 말이지."

"아니 그래도..."

"내가 작업하는 것 중에선 19금 일러도 있으니까."

"네?"


이 여자 또 폭탄 하나 집어넣었어요.


"그 뭐시냐... 저도 일단 남자라..."

"그래도 어차피 같이 있을 거니까 숨기지 않는 편이 서로 편하잖아?"

"...게임에 집중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나야 편하지."


그렇게, 참으로 기묘한 동거 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7월 18일 구름 조금, 그리고 더움


삼촌이 출장을 갔다. 여전히 불안하다.

삼촌의 그림들과 피규어들을 많이 만들어놨지만 과연 이번에는 이틀이라도 기억이 유지될지 모르겠다. 그래도 괜찮아. 아직은 삼촌의 얼굴이 기억이 나. 

그리고 그제와 어제의 내가 쓴 게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짜로 있었다. 피규어를 만들어놨다는 건, 내 방을 봤다는 건데, 그래도 안 도망갔다고? 말이 돼? 

아무튼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었는데도 되도록 나를 신경 쓰려하지 않은 채로, 게임만 주구창창 했다. 전기충격기, 괜히 준비한건가...

일단은 계속 두고봐야겠다.




-7월 19일 흐림, 후덥지근


삼촌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혹시나를 위해서 그렇게나 많이 피규어를 만들어뒀건만, 피규어를 봐도 그 것이 삼촌인지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

부모님 때도 그럴거라 어렴풋이 생각하긴 했지만, 결국 나는 사람을 기억 못하는 채일까...

그리고 남자애와는 오늘도 별일 없이 지나갔다.




-7월 20일 흐림, 후덥지근


마음에 구멍이 뚫린 듯이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허무감에 휩싸인다.

삼촌의 빈자리가 너무 크다. 그래도, 얀붕이가 있어줘서 그나마 조금 나을까...

작업을 하다가 허무감에 빠져 소리죽여 울다가 일어나보니 얀붕이가 이불을 덮어주었다.

솔직히 나로써도 상당히 방심했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을 보면 그렇게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이건 고독감에서 오는 생각일까? 아니면 나 자신이 얀붕이와 점점 가까워지는 걸까?


...


-7월 23일, 비.


잔소리를 들었다... 얀붕이가 배달음식만 먹지 말고 집밥도 먹으라는 것이었다.

내가 첫날에도 말했지만 작업하는 것이 더 시간대비 비용적으로 나을 거라고 했지만... 얀붕이는 기어코 나를 건강한 밥을 먹이겠다면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요리는 된장국에 계란말이, 그리고 나물무침이었다.

뭐... 맛있는 거 아닐까? 분하지만 나보다는 잘 한다.


...


-7월 28일, 맑음.


얀붕이랑 마트에 갔다.

그... 뭐시냐, 인터넷 주문이 아니고 마트에 남자랑 같이 나가게 될 줄은 몰랐다. 응, 난 평생 독신으로 살 줄 알았는데...

아니, 데이트가 아니야, 그냥... 그냥, 식재료를 보충하는 것 뿐이야.

솔직히, 삼촌이 없어서 그에게 너무 의존적으로 되는 것 뿐일거야, 기분의 미혹, 그는 삼촌이 없을 때의 대리,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부끄러운 기분이 들지 말았으면 해...



-8월 3일, 흐림


삼촌이 아마도 여름방학이 끝나고나서야 돌아올 수 있을 거 같다고 사과하셨다.

죄송하기는 제가 죄송해야죠... 저 때문에 삼촌이 그 동안 활동에 제약이 많았을 텐데...

그리고 얀붕이는 그에 맞춰서 잠깐 집에 갔다오겠다고 했다.

이틀 정도 걸릴 거라는데... 일단 괜찮다고 했는데, 진짜 괜찮을까.



-8월 4일, 비


외로워, 외로워, 외로워, 삼촌, 얀붕이,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아.

누구도 머릿 속에서 떠오르지 않아, 이렇게나 마음이 저려오는 데, 간절하게 바라는 데,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아, 살려줘, 누가 나를 이 지옥에서 꺼내줘, 제발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아무리 얀순이네에서 머물더라도, 일단 내 집은 따로 있다. 얀순이네에서 얀순이의 무방비한 모습에 눈이 가지 않도록 집에 놓은 게임 소프트들을 다시 보급하는 의미도 있고, 아버지 생신이기도 해서 축하도 해드리고, 그 외 잡다한 일들을 처리하다 보니, 5일이 되었다.

얀순이에게 말한대로 이틀 정도밖에 안걸리긴 했지만... 괜찮으려나, 걔 첫 인상과는 다르게 너무 연약하단 말이지...

아, 생각하다보니 벌써 왔네, 초인종ㅇ부휅?!


갑자기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나에게 돌진했다. 배에 정통으로 스트라이크를 날렸네! 아파!


"얀붕아..."

"콜록콜록... 야,얀순아...?"


가벼운 항의라도 하려생각했다.

그런데 얀순이 머리는 풀어해쳐져서, 눈은 생기를 잃고, 무언가를 갈구하듯이 내 얼굴을 만지면서 나에게 물어봤다.


"얀붕이... 얀붕이 맞지?"

"아, 네 맞습니다. 얀붕입니다."


아니 좀 무서워?! 아 잠깐만 눈 충혈되어있네, 잠은 제대로 자는거 맞냐?!


"얀붕이다... 얀붕이야......Zzz...."

"야 잠깐만 여기서 자면 어떻게해!? 야?!"




-8월 6일


어제의 일기는 없었다. 너무 외로워서 또 맛이 갔었나보다.

이래서는 삼촌이 출장을 갔다가 왔을 때랑 변한 게 없다고 생각되어서 참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얀붕이는 한숨을 내쉬더니, 그럴 수도 있지라면서 나를 껴안았다.

...응, 껴안았다. 순간 당황했지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하는 말에 어디까지나 난 보호되어야할 존재로써 보이는 건가 하면서 조금은 슬퍼졌다.

과연 이 증상은 언제가 되서야 고쳐질까, 고쳐지긴 하는 걸까.

차라리 진심으로 얀붕이를 이 집에만 있도록 하는 편이 현실적인게 아닐까?

...아니야, 그래도 극복하려고 해야해. 언젠가 얀붕이도 떠날테니...


"...아..."


일기를 쓰다말고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얀붕이는 언젠가 나를 떠난다.

계속해서 그래왔던 것처럼 하루를 못 보면, 나는 또 잊어버리게 되겠지. 잊어버리고, 감정은 갈 데를 잃어버리고, 비참하게 울부짖게 될거야.

그래, 그러면 삼촌에게 민폐를 끼치게 되니까, 그러니까 조금은, 조금은 억지를 부려도 되지 않을까?


"얀순아, 안 자?"

"어? 아, 응.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걸까. 나는 지금, 오른손에 전기충격기를 들고, 무얼 하려 한 걸까.

이러면 안되는 데, 이래서 내가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게 되어버린건데, 나는 또...


"어서 자, 몸 축내지 말고."

"...응, 그럴 게."


그렇게 말하면서 얀붕이는 내 방에서 떠날...


"무슨 일이야?"

"아, 그게..."


무의식적으로 얀붕이의 팔을 잡았다.

...안 된다, 보내고 싶지 않아, 계속, 계속 내 곁에 있어줬으면 해.

그러니까, 비겁하긴 해도, 이래도 되겠지?


"같이 잘래?"




네, 얀붕이 리포터입니다. 하하하, 지금 보듯이 얀순이의 옆에서 자고 있습니다. 하하하하하하하....

왜 이렇게 되었지.

아니, 뭐, 그런 버려지는 것 같은 강아지의 눈으로 바라보면 어쩔 수 없지만...

응, 그 뭐시냐, 저도 남자거든요. 옆에 미인이 자고 있으면 엄청 긴장되거든요.

근데 그 미인은 그냥 곤히 자고 있네요.


"잠 다 잤구만 이거..."


내일 아침밥 만들어 줄 수 있으려나...?




-8월 7일.

...곤란했다. 조금 많이 편안했는지 얀붕이 옆에서 푹 자버렸다.

미인계를 쓰려했는데... ...역시 전기충격기로 하는 게 확실할까?

아니야, 그건 아직 최후의 수단... ...아니 그래도 누군가가 삼촌이 말했듯이 고자형 주인공이니까 좀 더 대놓고 하는 게 좋을까?

...작업하던 일러스트가 끝나면 남성향의 야한 만화들이라도 찾아봐야할까?




-8월 10일.


고자새꺄!!!!!!!!!!!!!!!




-8월 11일.


누군가, 아마도 삼촌이 말씀하셨던 고자형 주인공이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어제는 전부 실패해서 화를 내고 자버렸지만, 일단 오늘이라도 반성하는 마음으로 어제의 실패를 적어놓는다.


몸에 요리를 올린다 - 음식 낭비하지 말라고 화냈다. ...얀붕이는 왠지 요리를 즐겨하니까 이해할 수 있다. 이해할 수는 있는데... 사람의 나신(중요부위는 가렸지만)을 보고 감상은 그 것뿐일까?

손을 가슴에 얹게 해본다 - 우와악거리면서 튕기듯이 떨어졌다. ...여기서 정말 고자가 아닌가하고 의심을 했다.

목욕하는데 들어간다 - 뭔가 지레짐작하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 기쁘긴한데... 기쁘긴한데... 어째서 연인이나 그런 종류가 아니라 개가 된 듯한 느낌이지? 그... 내가 스스로 쓰긴 그렇지만 나, 나름 미인인데, 그 걸로 끝이야? 진짜?


...그래서 오늘은 좀 더 과격하게, 밧줄로 나 자신을 일부러 야한 식으로 묶어서 사고가 일어난 것처럼 해봤지만 잔소리하면서 풀어줬고, 입으로 음식을 넘기기 전엔 손으로 저지당했고, 어제랑 다르게 타올 없이 목욕탕에 들어가려했지만 엄청 빠르게 씻더니 나와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아니, 쓰다듬어주는 건 기분이 좋지만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니야. 뭔가 핀트가 많이 달라.

그래서 씻는 데 도와달라고 했지만 뭔가 대형견 씻기는 느낌으로 되어버렸고!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하아..."


일기를 쓰다말고 한숨이 나온다. 계속해서 감금해서 나와만 있도록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러면 삼촌에게 민폐를 끼쳐버리고...


뚜르르르르-


"전화?"


핸드폰의 화면을 보니 삼촌의 전화였다. 곧장 전화를 받아서 이야기를 나누니, 여러 사정으로 일정이 앞당겨진 탓에, 내일이면 집에 올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그런가. 얀붕이와는, 내일까지인 건가...


"응, 괜찮아. 삼촌이 오니까, 얀붕이에 대해서는 잊을 수 있을 거야."


삼촌이 온다고 해서 그런가, 심적으로 여유가 생겨서 그렇게 자신을 타일렀다.

자신을, 타일렀다.




"형, 데이트 잘 하고 왔어요?"

"사업이라니까?"

"사업적인 관계로 시작해서 부부 ㅗㅜㅑ"

"진짜 아니라니까? 아무튼 나 없는 동안 괜찮았어?"


A형 없는 동안 괜찮았냐고 하면...


"그... 형님 죄송합니다."

"...무슨 일 있었어."

"얀순이가... 개처럼 되어버렸습니다."

"???"

"먹을 거 가지고 장난치고... 계속 손에 가까워지려하고... 외로워서 그런지 목욕하는데도 들어오고..."

"야이고자새끼야."

"네?"


뭔가 너무 빠르게 말하셔서 못들었습니다? 야이고뭐?


"하아... 일단 아르바이트 자체는 지속할테니까 8월이 끝날 때까지라도 계속 있어줄 수 있을까?"

"네, 뭐 괜찮긴한데... 내일하고 모레는 비워도 될까요? 친구들이랑 좀 놀고 싶어서."

"그래, 그럼 3일 뒤에 보자."

"3일 뒤에 봐요 형."


제대로 된 휴식이다 예후!


-8월 12일

삼촌이 돌아오셨다. 얀붕이는 돌아갔다. 그래도 삼촌이 8월 마지막까지는 부탁한다하셨다.

그러면 얀붕이와 더 같이 있을 수 있는 걸까, 얀붕이를 그 사이에 나를 보도록 할 수 있는 걸까.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은 15일이 될 때까지 버틸 수는 있겠지.


-8월 13일


삼촌이 있다. 삼촌이 있는데, 외로워, 15일까지의 시간이 너무 길어, 얼굴이 기억나지도 않아, 이렇게나 피규어를 만들어대어도, 얀붕이라는 실감이 안나, 잊었는데 잊혀지지가 않아, 달래기 위해서 그림을 그려봐도 전혀 갈증이 채워지지 않아, 역시 얀붕이를 가뒀어야했어, 얀붕이와 영원히 함께해야했어, 괜히 삼촌이 온다고 겁이 나서 안한 게 잘못한 거야, 지금이라도 준비해야해, 얀붕이와, 계속, 계속, 같이 있을 준비를...




"야 그럼 다음에 보자."

"다음이 언제려나. 겨울방학?"

"뭐 그 전에 또 볼 기회 나지 않겠어?"

"대학원생(진)이?"

"아니거든? 그냥 대학생이거든? 그런 불길한 소리하지마라."

"응 이미 교수한테 표식 찍힘"

"아 아니라고!"

"응 이미 교수한테 점심 같이 먹자는 소리 들음"

"아무튼 아님, 아무튼 아니야!!!"


아 친구놈 놀리니까 재밌다.

그나저나 놀다보니까 이렇게나 어두워졌네. 이제 집에 가서 다시 얀순이네 집에 갈 준비를...


"얀붕이지?"


나를 향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광기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얀순이가 있었고,


"정말, 늦었어."


무언가로 내 입을 막았고, 저항하기도 전에 졸음이 쏟아져서 나는...




"...여긴...?"


어쩐지 멍한 정신으로 눈을 뜬다.

어딘가 깔끔한 방, 컴퓨터가 있고, 침대가 있었으며, 구속도구 같은 것들이 보였다.

일단, 일단은 일어나야지...


"어?"


일어나려고 했지만 힘 없이 넘어져버렸다.

힘이 제대로 안들어가고, 뭔가 발에...


"수갑...?"

"벌써 일어났어?"


멍한 머리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는 목소리, 아는 목소리인데...


"얀순이...?"

"응, 얀순이야."


머리가 멍해서 그런가, 반쯤 지레짐작으로 맞출 수 밖에 없었지만, 아무래도 정답인 거 같았다.


"나, 뭔가 제대로 안 움직여지니까, 좀 움직일 수 있게 해줄 수 있어?"

"싫어."


멍한 머리에 확실한 거절의 말이 되돌아왔다.


"어째서...?"

"나, 깨달아버렸어. 나는 얀붕이와 절대로 떨어지면 안된다고."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머리가 멍해서 뭔가가 뭔지를 모르겠다.


"얀붕아, 난 얀붕이를 잊기가 싫어."

"어째서...?"


명확한 의문으로 나온 말이 아니었다. 그저 그 말 밖에 할 수 없었을 뿐, 그러나 그 한 마디가 얀순이의 마음을 건드렸는지 나에게 다가와서


"츄릅...하읍...하..."

"아...?"


키스를 했다.


"사랑해, 조금이라도 떨어져있으면 잊어버릴까봐 불안해, 그러니까 영원히 같이 있자, 한시도 떨어지지 말자, 그걸로 좋지? 얀붕이도 아는 대로 나는 돈을 잘 벌어, 그러니까 평생 여기에만 있어도 불편하지 않을꺼야, 아 그래도 얀붕이가 가끔씩 음식을 해줬으면 좋겠어. 얀붕이의 요리들은 전부 맛있었으니까, 방 밖에는 못 나가지만 그 외라면 다 들어줄게, 무얼하고 싶어? 원하는 시츄에이션이라도 있어? 전부 받아줄게, 전부 실현시켜줄게, 그러니까


나에게서 멀어지지마."


"아..."


머리가 여전히 멍해서, 하지만 얀순이가 크게 어긋나버린 것은 알 수 있어서, 안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얀순이의 눈은 죽어있었고, 간절했고, 그리고... 미쳐버렸다.

이제와서는 그녀를 긍정하는 말밖에 선택지가 남아있지 않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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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하는 데, 사랑할 대상이 전혀 기억이 안나고, 그럼에도 사랑을 하고, 공회전이 계속되어서 맛이 가버린 소녀 이야기.

솔직히 이거 고자형 주인공 아니더라도 이 루트 확정이라 괜히 고자형 주인공했나 싶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