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순 링크 모음


문을 걸어 닫은 방 안, 마이크를 든 상태에서 앉아있는 선배를 내려다 본다.

 

“거짓말 아니야”

 

“거짓말, 선배는 날 얼마나 걱정시켜야 직성이 풀려요?”


“아니래도” 


“내가 걱정하는게 안보여요? 설마 얼마 전에 때린 것 때문에 그래요? 그거라면 곧바로 사과했잖아요.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선배가 하는 것 봐요. 얼마 전에 선배가 심하게 당할 뻔했을 때, 제가 얼마나 자책했는데. 그런데 몇번을 주의를 줘도

선배는 무사태평하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잖아요. ”


“그게 아니라, 진짜 별 거 아니라서 그래. 그리고 같은 학교 학생이잖아. 자꾸 눈을 마주치는 것 정도는 언제고 일어나지”

 

역시! 학교에서 만났잖아요. 선배. 그 년이랑 상종 자체를 하지 말라니까요? 그때 선배한테 겁탈하려고 든 년한테 얼굴도 비치지 말고, 그냥 쉬는시간만 되면

어디 도서관이나 목사님 계시는 상담실 그런 데 있어요. 주변에 어른이 있으면 그년도 함부로 다가가지 못할테니까.”

 

기독교 학교라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 학교는 중고등학교 둘 다 상담실에 목사님이 상주하신다.


이 상담실은 상담하러 오는 학생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만, 교무실처럼

여름에는 에어컨 바람이 쌩쌩하고 겨울엔 히터를 빵빵하게 틀으면서 학생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기 때문에 인기가 많다. 


그러니까 선배가 그곳에 있다면 목사님의 보호로 그년에게서 안전할 수 있다.

아무리 학교의 사각지대에 숨어서 날뛰는 그 짐승 같은 년도 뭇사람들 앞에서는 어쩌지 못하겠지.

얀붕 선배를 힘으로 끌고 가려고 해도 그걸 발견한 목사님과 주위의 학생들이 곧바로 이상함을 감지하고 제지하려고 할 테니까. 


매주 수요일 1교시 때마다 강당에서 지루한 설교를 듣게 하는 -그래서 애들은 수용일,혹은 수용시간이라고 비꼬는- 우리 아카데미의 유일한 장점이다. 그것도 한 달 전에  발견한. 

 

문득 생각을 멈추고 눈앞을 바라보니, 선배가 나를 올려다 보며 어쩌지 못하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다.

비좁은 노래방 구석에 큰 화면을 뒤로 하고 벽에 손을 대고서 앉아 있는 선배를 몰아세우듯 지척에까지 접근하여 그를 내려다보는 나. 잠시 헛기침을 하고 물러났다.    


“아무튼, 알았어요? 그런 여자는 응당 신고를 해야 되는데, 미성년자라서 처벌이 잘 안 될 거란 말이에요.”


어린아이에게 주의를 주듯 말하고 나니, 어딘지 모르게 이상함을 느꼈다. 선배와 나 말고 또 누군가가 바로 곁에 있는 느낌. 오른쪽 벽 너머에 전해지는 누군가의 인기척.  


소리가 울리게끔 벽을 한 번 때린 뒤에 천천히 뒤로 물러선 다음 내 손에 들린 마이크를 바라보다가, 노래방 기계 옆에 있는 또 하나의 마이크를 집어다 선배에게 가져다 주었다. 


늘 그랬듯 언제나 조용하던 선배는 노래만 부르면 활발해졌다. 썩 잘 부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스트레스를 푸는 모습에 느긋하게 그의 모습을 감상하였다…


****


옆방에서 두 남녀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은 번갈아가며 노래를 부르는 듯 하다.

보기도 싫은 여자의 듣기도 싫은 소음으로 자기 노래를 마친 뒤에, 그가 마이크를 잡고 열창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가창력은 그저 그런 편인 듯한 그가 목이 쉬도록 무작정 내지르는 고음은, 방음재로 가득 찬 벽 안에서 길을 잃고 말지만 그에 놓칠세라

나는 벽에 귀를 대고 그 속을 떠도는 미약한 반향을 잡아낸다. 

 

그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것도 이별의 아픔을 노래하는 발라드를. 나도 아는 노래이다.

분명 그는 누군가와 사귄 적은 없을 것이다. 아니라면 두 번에 걸친 대쉬에 그런…. 순진한 반응은 나오지 않았겠지. 

웃음이 나온다. 지금 그가 노래를 부르는 순간에, 뇌가 녹아버린다면, 하고 상상한다. 

그의 목소리가, 자꾸만 덧없이 공기 속으로 녹아드는 듯해서 애달프게도 애처로운 몸짓으로 그를 연호하게만 된다.

 

“얀붕아…..”

 

어느새부턴가 나는 벽에 몸을 맡기고 허리를 꼿꼿이 피고 다리를 쭉 펴고 발을 쭉 뻗는다.  

손가락이 더욱 깊은 곳을 파고든다. 파고들어야 한다. 파고들어도 아쉽고 부족한 느낌도 다른 손이 윗옷을 브래지어 안을 파고들어간다.

아래쪽으로 더욱 깊숙이 더 빠져서 스며들고, 위쪽으로 돌리고 어루만져서 매만지고 부르르 떤다.    

 

“하읏”

 

얀붕아, 안아줘. 알몸으로 날 안아줘. 얀붕아, 아, 아, 아……..!!!

 

 

요즘 나에 대한 새로이 알게 된 것이 있는데, 바로 내가 의외로 자제력이 강하다는 것이다.

8월의 개학일 뒤로 한달이 지나도록 얀붕이를 덮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인내심이라고 해야 되나? 어쨌든 나는 참을 대로 참았다. 

 

지금 이 순간도, 그에게 달려가 깔고 앉고픈 마음에 안달이 나는데, 대체 왜 얀붕이는 이런 내 마음을 세상은 이런 내 마음을 이토록 몰라주고

얀붕이와 나를 위해 협조해 주지 않는걸까? 

 

내가 이 세상의 발전을 위해서 내가 한 약간의 헌신이라도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을진대, 어째서

그들은 나에게 정작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을 줄 수 없다고 무안을 준단 말인가. 돈으로 정도로 이 마음이 해결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나룻배이고 싶다. 그가 노를 향해 손을 뻗어서 내 위에 올라탄다면, 내가 행복해 질 수 있다.  

 

쪼옥-

 

노래방 바로 옆에 있는 카페에 들러 스무디를 사 창가 자리에 가 앉았다. 차갑고 달디 단 요거트가 식도를 넘어가는 느낌에 안심이 되었다. 

 

아까는 좀 놀라고 말았다.

벽 너머로 그가 노래 부르는 것을 귀를 갖다 대고 감상하는데, 갑자기 누가 벽을 퍽 치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 우당탕 넘어졌기 때문이다.

 

어느 모로 보나 얀순이 그년일 것이다. 그때 얀붕이의 주선으로 서로 대면했을 때 몇 마디 정도 밖에 나누지 못했지만, 그래도  

첫만남부터 마음에 안 드는 년이었다. 얀붕이는 나만의 것인데 어디서 알게 됐는지 몰라도 그 간사한 혀놀림으로 얀붕이에게

중학교 시절부터 꼬리를 친 것 아니겠는가. 그것도 내가 얀붕이를 만나기 약간 전부터.

 

같잖은 년.

 

잠시 그렇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동안, 어느새 즐길 대로 즐긴 듯 얀붕이와 그녀가 나왔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내 머릿속에 제멋대로 어떠한 이미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둘은 정다운 연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손을 맞잡은 그들은 곱게 차려입은 듯한 둘만의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 더더욱 가까워졌다. 그들은 한 쌍의 거울처럼 한쪽의 미소를 보고 한쪽이 미소짓고, 한쪽의 행복이 다른쪽에 비치어 서로를 전염시켰다. 

그리고 심지어는 입술까지도. 그만큼 그들은 한없이 서로에게 접근했다. 멀리서 사라지는 더러운 창문 너머의 나를 내버려 두고, 


기분이 나빴다. 그저, 그저 상상일 뿐인데 사실이 아닌데 그렇게 생각해버린  

그 순간 살의가 끓어올랐다.

먹던 스무디를 내버리고 문을 열고 나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를 찢어버리게끔.

바로 옆에서 느릿느릿 경계 태세를 취하는 얀붕이를 왼팔로 확 밀어버리고,

그년을 쓰러뜨렸다. 언제부턴가 손에 들린 돌멩이로 그녀의 대가리를 후려친다. 때리면 때릴수록 더욱 오른팔에 힘을 주어서

그 가증스러운 년의 이목구비가 바다를 둥둥 떠다니는 해초처럼 마구 버르집는다.

피가 나온다. 즙이 짜이고 바닥의 타일에 물들인다. 나의 사복에 스며드는 피와 웅덩이처럼 번져나가는 선지피를 바라보자 한껏 후련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싶었다. 얀붕이를 쳐다보았다. 그가 무서움증에 덜덜 떨어대고, 혹한의 추위가 닥친듯 이를 떨어댄다. 기분이 좋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곳은 카페 안 창가 자리였다. 스무디는 반쯤 남아 있었고 그들은 아직도 서로 손을 잡고 어울려서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꽉 쥐어 경련하는 주먹 사이로 피가 배어나왔다. 손바닥에 박혀든 손톱 때문이었고, 뒤미처 무엇인가를 박박 긁어대고 싶은 듯 

가려움이 느껴졌다. 자꾸만 발작이 도졌다. 종이가 필요했다. 볼펜도 필요했다. 

 

박박 긁어내듯 수만 개의 선을 겹치고, 점을 짓찍고, 이리저리 통통 튀는 공처럼 지그재그로 여러 번의 드리프트와 유턴, 직선과 곡선의 향연, 

동그라미를 그리다가도 아니라는 듯 엑스를 찍찍 긋고, 밑줄을 긋고 가위표를 치고, 도형을 만들고 그 안을 채워넣고, 반비례 그래프를 그리듯 점과 점을 이어 바느질하듯 선을 잇고,

무작위적으로 글자를 쓰다가도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세로 두 줄을 찍찍 그어버리고, 그것도 아니라는 듯 검게 칠해버리고, 소묘를 하듯 연필을 비스듬히 뉘여서 종이의 한 면을

살짝 회색으로 칠한 다음, 오른쪽 상단부는 검게 칠하고, 이미 그려져 있던 형체에 덧그려서 일견 기하학적이게 복잡해 보이는 구조물의 겨냥도를 그리거나,

어느 곳은 어둡게 어느 곳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밝은 빛을 표현하면서 명암을 내기도 하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손날로 비벼서 전부 흐려게 만들거나. 

 

연속적이고 순간적으로 비선형적이고 비논리적인

무질서와 무작위로 흑연을 낭비하면서. 새하얀 A4용지를 까맣게 채우고 싶었다.


무아지경으로 몰두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야 머릿속이 개운해지니까. 까맣게 탄 머리가 확 녹아버렸으면.

치가 떨렸다. 

고조된 감정에 호흡이 가빨라지고 가녘에서부터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들이 응당 느껴야 할 불안감을 내가 느끼고 있었다. 용서 못해. 용서 못해. 용서 못해. 용납 못해

 

이건 노렸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내가 그를 만나고, 그와 같이 어울리고, 그는 내가 사랑한다는 것마저도 끝끝내 인정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만나고 마침내 내가 무감정한 사람이 아닌, 무수한 고통스러운 기억에 짓눌려 고통에 둔감하게 된 것 뿐이라는 것을 알려줬다. 


온통 짓물러진 껍질 속에서 사소한 말에도 상처받는 영혼이 있음을 증명하고, 내가 사랑에 괴로워하게끔 만들었다.

그녀는 알고서 이런 짓을 한 것이다. 일부러 얀붕이에게 접근한 다음, 그와 친밀한 사이가 되어서, 

그리고 고등학교에 들어가 그를 만나고 이윽고 그에게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나에게 얀붕이와 자신의 관계를 과시하며 나를

비웃기 위해서 이런 악취미같은 짓을 한 것이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당장이라도 아까 머릿속의 상상처럼 그녀에게 무엇이든 휘둘러서 물고를 내고 싶었다.  

그러면 얀붕이는 혼자가 된다. 나도 혼자다. 내가 얀붕이를 감싸 안는다. 얀붕이를 몸을 웅크리고 내 품에 파고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늦봄의 거리는 가을이 완연하게 임박하여 6시에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낙엽과 수시로 부는 가을바람이 서늘했다.

어느새 둘은 온데간데 없었다.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찬 나의 피해망상이 그들의 부재를 늦추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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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익이 끝났다. 

그동안 좀 놀았는데, 솔직히 내글 기다리던 사람 있음?

농담이고, 불성실한 연재 ㅈㅅ.

아마 이번주에 글 한편 더 쓸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