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가 쏟아지는 날, 30분쯤 전이었을까? 전화를 걸은 그녀는 전화를 받고도 10초 정도 말이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10초가 흘렀다. 겨우 목소리를 낸 그녀는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빗소리 거셀 무렵, 말을 할 때마다 숨을 헐떡였고 뭔가 때리는 소리도 들렸다. 이별통보였다. 전화가 다 끝나고 멍하니 빗소리를 들으면서  깨달은 사실이다. 


 붉어진 눈두덩이를 붙잡고 밖으로 나간다. 텅빈 마음이 어째서 무거운 것인가. 모순된 감정에 고통받다 빗물에라도 마음을 채우고 싶다는 기대를 품고 밖으로 나갔다.


 도중까지 우산을 쓰다가 그녀에게 고백했던 공원에 들러서 우산을 접었다. 빗물이 굽은 등과 어깨를 적셨지만 벤치에 앉아 고백했던 그때를 회상하니 마음이 조금 채워졌다. 나는 눈매를 얇게 늘어뜨려 미소를 짓고 빗물을 받아들였다.


 조금 편안해져서 눈을 살며시 감으려는데 천둥번개가 울렸다. 몇번의 눈부심에 째려보듯 눈을 뜨고 몇번을 진동에 심장을 불규칙적으로 두근거렸다. 그 이후로 들리는 거센 빗소리, 그것은 통화사이로 들렸던 그녀의 광적인 신음과 닮아있었다.


 나는 눈을 일그러뜨리고 손이 햐얘지도록 우산을 잡았다. 빗소리가 듣기 싫어서 필사적으로 귀를 막았지만 나는 힘이 잔뜩 들어간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우산을 마구 휘둘렀다. 빈 공원에서 우산을 막 휘둘러대니 우스꽝스러워 보일 법 했지만 우산을 휘두를 때마다 내리치는 번개, 천둥의 휘몰아치는 장단은 나를 지휘자로 보이게 하였다. 그리고 우산이 반쯤 부러졌을 때 마지막으로 내리친 번개는 눈 앞의 나무를 두 동강 내고 불을 붙였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공원 바닥에 엉덩이부터 철부덕 내려앉았다.


"저기.. 뭐해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는 경직되어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 보았다.

"에엑~! 불이잖아! 소..소방서.. 읏,앗"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려던 모양이였지만 당황한 탓인지 핸드폰은 놓치고, 허공에 손질을 하는사이 -철푸덕- 핸드폰은 그대로 축축한 땅바닥에 떨어졌다. 나도 당황해서 그녀와 눈이 맞은 채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저기, 제 휴대폰 쓰실래요?"


 내가 말을 걸자 그녀는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소리쳤다.


"그게 아니라 불이잖아요! 빨리 소방서!"


 나는 아차 하고 소방서에 전화를 걸었다. 기다리는 동안 그녀가 말을 걸었다. 비오는 날 공원 한바닥에 자리를 틀고 앉아있는게 그렇게 신기했는지 그녀는 코앞까지 와서 질문을 펼쳤다.


 그녀는 키는 작지만 긴 흑발에 똑부러지게 생긴 사람이었다. 눈빛이 조금 날카롭고 여둡지만 색기가 있었다. 말도 잘해서 한참동안을 질문을 하며 내가 이렇게된 경위, 심지어 일부 신상정보까지 캐내었다.


"음... 얀붕씨는 그런 경위로 이 꼴이 되신 거군요... 후후 저는 여... 엇! 드디어 소방차가 왔네요. 저희는 갑시다."


 그녀는 내 부러진 우산을 보더는 자신의 우산을 씌워주곤 내 팔뚝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자신은 혼자서 전국을 여행하는 중이니까 집까지 우산을 씌워주겠다고 하였다. 나는 머쓱한 마음에 검지손가락으로 뒷통수를 긁고 집을 향해 걸었다.


"제가 여행을 떠난지 벌써 2주일째인데 목욕을 2번밖에 못했어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오늘 한번만 부탁드립니다."


 그러고보니 이 근처는 묵을 숙소도 전무하고 심지어는 대중목욕탕조차 없다. 사람들이 관광을 하러 올 장소는 아닌데... 어라? 이 사람은 그럼 왜 여기있지? 그런 의문은 들었으나 그때는 벌써 내 집 앞이였고 나는 그녀의 묘한 기운에 휩쓸려 그녀를 집에 들였다.


"아! 주인분이 먼저 씼으세요. 비도 맞으셨고 땅바닥에도 구르셨잖아요? 자~ 자! 빨리!"

 그녀는 나를 반강제로 목욕탕에 집어 넣었다. 급하게 손부터 씻고 있는데 그녀가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보일러는 제가 방금 틀었으니까 따뜻한 물 잘 나올거예요. 그리고 갈아입을 옷은 문 앞에 있으니까 그것도 곡정 마시구요."

 우리집 보일러는 베란다 안쪽에 있어서 처음 온 사람들은 절대 찾지 못하는데...


 나는 대충 씼고 나갔더니 그녀는 벌써 저녁을 한상 차려놓은 상태였다. 그녀는 샤워만 하고 나올테니까 먼저 먹지 말라고 나에게 일렀다. 


 씼고 나온 그녀와는 겸상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의 이름은 얀순이였고 나이는 나보다 3살 밑이였다. 그녀는 내 얘기 잘 들어줘서 오늘 있었던 일로 울상이였던 나를 꼬옥 안아주었다.


"하하... 죄송합나다. 오늘만 조금 묵을 수 있을까요?"


나는 짧은 대화동안 그녀에게 마음을 열었기에 웃으며 수락했다. 그녀는 소파에서 잔다고 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를 침대에 재우고 나는 다른데서 자려 했지만 그녀는 침대는 뤈래 집주인의 것이라며 내 말을 거부했다. 밤새 추적추적 내리는 시린 비에도 그날밤은 왜인지 온몸에 따스한 온기를 느꼈다.


 다음날은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잠을 깼다.

"아, 깨워버렸나요? 염치없지만 세탁기 좀 빌릴게요. 어제는 많이 졎으셨잖아요."

 그녀는 언제 빼입은 건지 내 후줄근한 티셔츠를 입고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어제와는 다르게 고무줄로 한움큼 머리를 묵었는데 밝은 데서 보니까 어제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약간 날카롭지만 큰 눈에 흑요석 같이 까만 동공이 커다랗게 박혀 있는고, 그것이 머리를 뒤로 졎혀 드러난 새하얀 목선과 대비되어 인형과도 같은 모습을 하였다.


 그런 모습으로 가사에 열중하는 얀순을 보며 나는 방안의 커튼을 열고 창밖을 보았다. 가을처럼 파란 하늘에 눈 왔는지 구름 몇 개. 비 묻은 건물은 선명하게 보였지만 햇빛에 반짝거렸다. 멀리서는 무지개가 보였고 어느샌가 얀순은 내 옆에서 미소짓고 있었다. 그래, 저 바깥풍경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내리는 비. 장마처럼 어둡고 추적이는 비가 아니라 맑은 하늘에 내려 건물을 빛내주고 무지개를 만드는, 얀순의 미소같은 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