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yandere/7351950  눈치 없는 인간 1

https://arca.live/b/yandere/7385254  눈치 없는 인간 2



"안녕하세요! 얀붕 대리님. 퇴근 잘하셨나요?"

흔들렸던 스마트폰에 온 메시지는 수영 씨의 것이었다. 받았으니 답장이나 해줘야지.

 "예. 안녕하세요. 지금 퇴근하는 길입니다."

 "아, 그럼 오늘은 시간 있으신가요?"

 `오늘은`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생각해보면, 저번에 얘기했던 저녁 약속 말씀하시는 건가. 꼬치. 고프긴 한데.

 "혹시 저녁 식사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저녁이라…. 배가 고프긴 하지만 혼자 술 먹으라고 하기엔 미안하기도 하고. 물어는 봐야겠지. 

 "저, 죄송합니다만, 실례가 안 된다면 실은 제가 술을 잘 안 마셔서 그런데, 가도 될까요?"

 "아…. 네. 괜찮아요. 제가 죄송했던 것들이 많아서 식사하고 싶었던 것이니 괜찮아요."

그래. 다행이라고 하니까 괜찮겠지 뭐, 그렇겠지?

 "여기까지 오시기엔 멀 테니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대리님 회사 주변에 있는 타임스퀘어에서 뵐게요." 

 "그럼, 조금 있다가 뵙겠습니다."

수영 씨와의 전화를 끝내고, 계단을 타고 내려가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조금 늦을 거 같으니 집에 전화해야겠지.

뚜~ 뚜~

 "응. 얀붕이니?"

 "어. 엄마. 나 식사 약속이 있어서 밥 먹고 들어갈게."

 "회사?"

 "음. 뭐, 그렇게 볼 수 있지. 내가 있는 회사보다 훨씬 큰 협력 업체 쪽 직원이 밥 먹자고 해서."

확실히 내가 있는 회사보다 훨씬 높은 곳이긴 하지. 발주 계약서에서도 갑, 을 정해져 있고.

 "여자냐?"

매번 그런 것만 물어보긴 하지.

 "음. 상대가 여자긴 해."

 "책임질 거 아니면 술 먹지 말고 집에 와라."

매번 하시는 말씀.

 "아이. 진짜, 그 정도까지 갈 사람 아니야. 걱정하지 마셔요. 밥만 먹고 갈 거야."

 "그래."

뚝!

전화가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참…. 내가 실수할까 봐 엄청나게 걱정하시는데, 내가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있나. 내가 어느 분 때문에 술 안 먹고 살고 있는데 말이야.

 "절대 그런 일 안 일어나."

메시지의 내용을 읽고 수영 씨가 알려준 주소를 보고 회사 주변에 있는 번화가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야근하던 때가 아니라서 그런가, 퇴근 시간대였기 때문일까. 성인보단 학생들의 비율이 높은 번화가 거리. 

까르르 웃으며 몸을 기대고 걸어가는 학생 커플.

키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손을 맞잡고 걸어가는 두 남녀.

가게에서 파는 옷을 하나 집어 상대에게 맞춰보는 어르신 부부.

보기만 해도 따뜻해져 가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웃음꽃이 핀다.

정말 저런 식으로 영원할 수 있다면 나도….

꼬르륵~

 "고프네."

일 할 때는 최소한으로 먹던 것에 대한 보상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것인가. 내장이 밥 달라고 튕기며 큰 소리를 낸다. 하긴 오늘도 언제 어디서든 빠르게 먹을 수 있는 편의점 주먹밥 2개와 에너지음료 3개로 버틴 나였기에, 내 몸에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아 있다. 

돌겠네. 꼬르륵 소리 한번 들어버리니 확 밀려온다.

갑자기 갈비도 당기고. 삼겹살도 당기고.

맛있는 음식들을 상상하며 쭉 걸어가다 보니 번화가 중앙 쪽에 있는 타임스퀘어가 보인다. 그리고 그곳엔,

 "아! 여기에요!"

활기 띤 미소로 손을 흔들며 나를 반겨주는 수영 씨. 

예전에 뵈었던 때와 비슷한 새하얀 오피스룩. 키가 조금 작긴 하지만 동그란 얼굴 때문인지 귀여움을 더욱 돋보이는 인상. 외형만 보아선 새내기처럼 보인다. 나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셨나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한다. 

 "아뇨. 저도 방금 왔습니다."

 "다행이군요."

짧게 인사를 마치고 그녀를 따라 목적지로 걸어갔다. 배가 너무나 고팠던 탓일까. 대화를 나누면서 걸어가긴 했지만, 머릿속에선 꼬치구이 생각뿐이다.

대략 10분 정도를 걸어가니 깔끔하게 니스칠한 나무문 앞 음식점에서 멈춰 섰고.

 "여기에요."

 "오."

한글이 아닌 다른 나라의 글자로 새겨진 연등과 간판, 번화가 거리에서 보았던 식당들과 다르게 다른 나라 식당에 온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

이자카야 한 번도 와본 적 없었구나.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와 점원의 환영을 들으며 자리에 앉았다. 쌀쌀한 밖과 다른 따뜻한 온기와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기름 냄새. 그것들이 뒤섞인 체 맡는 냄새는 내 식욕을 더욱 자극하고 있었다. 아, 갑자기 튀김도 당기는데.

 "대리님. 눈 풀리셨어요."

내 팔을 콕콕 찌르며 살며시 입꼬리를 올리는 수영 씨.

 "아, 죄송합니다. 오늘따라 너무 배가 고파서 몸이 많이 풀려버렸나 봐요."

혹시나 침을 흘리진 않았는지 입을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 어유 쪽팔리게.

안내를 받고 간 자리에 앉고 비치된 촉촉한 수건을 이용해 손을 닦는 동안 점원분이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주문 도와드릴까요?" 

 "전 이곳은 처음이라서, 시켜 주시는 대로 먹겠습니다."

 "그러시면 제가 주문할게요."

점원분이 건네주신 메뉴판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알아서 주문하시는 수영 씨. 듣기로는 무슨 세트였던 것 같은데 나와보면 알겠지. 얻어먹는 처지에서 뭘 요구하겠나.

 "예. 그럼 마지막으로, 잔은 몇 잔 드릴까요?"

 "두..."

 "하나 주시면 좋겠습니다."

검지를 피고 점원분께 말씀드렸다. 

 "네? 하나요? 술은 안 드세요?"

 "네. 몸이 잘 못 받습니다. 아주 특별한 때 아니면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사양의 표시로 양 손바닥을 보이고 고개를 흔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마신 다음에 느껴지는 알싸한 그 독한 맛이 너무나 싫어서 안 마신다. 억지로라면 아주 천천히 어울려준다면 어울려 줄 테지만,

 `책임질 거 아니면 술 먹지 말고 집에 와라.`

실수할 가능성이 생기는 거라면 완전히 차단해버리고 사는 것이 좋다. 나만 잘하면 된다고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잘 풀렸으면 이런 시답잖은 변명 따윈 안 했겠지.

아버지처럼 무책임하게 살기 싫으니까. 

 "아, 그럼 저 혼자 마셔야 하나요?" 

힘없는 목소리로 시무룩해진 그녀의 표정을 보니 마음이 약해진다. 옆에서 지켜보시던 점원분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우리를 계속 쳐다보기만 할 뿐이고.

머릿속에선 이전에 들었던 두 남녀의 음성이 번갈아 가며 내 속을 뒤흔든다.

 `책임질 거 아니면 술 먹지 말고 집에 와라.`

 `술자리라고 해서 꼭 술을 마시지 않아도 좋으니까, 자리에 어울리는 것도 괜찮고 또 조금은 마셔도 괜찮아.`

어쩔 수 없지. 이번만 할까. 이런 거로 마음 약해지면 좋지 않은데.

 "아닙니다. 두 잔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가운데 중지도 올려 숫자 2를 가리키며 점원분께 말씀드리니 쌩~ 하고 가버리셨다. 먼저 상의를 하고 들어올 걸 그랬나.

 "마시셔도 괜찮으세요? 아깐 몸에 안 맞으신다고 하셔서요."

 "정말 아주 조금만, 마시겠습니다. 같이 온 분께 죄송하기도 하니까요."

 "헤헤. 감사합니다."

그새 풀어지며 웃는 그녀의 미소를 보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다.

그래.

저 귀여움에 졌다고 하자.

시간이 조금 지나자 김이 모락모락 나며 짭조름하고 탱글탱글 윤기 나게 생긴 닭고기 꼬치와 가라아게 등 여러 먹거리를 앞에 두고 사케라고 불리는 술을 잔에 따르고 들어 올렸다.

 "건배~."

 "건배."

쨍~

눈을 감고 단숨에 들이키는 수영 씨를 보고, 나도 따라 해보기로 하였다.

 "푸흐. 좋아."

 "카학. 콜록콜록."

잔을 내려놓고 입을 가리며 참기 힘든 기침을 내뱉었다. 와. 이건 뭐냐. 이 이상한 고소한 맛은.

 "후우. 이거 많이 독한 것 같습니다." 

 "녜? 아뇨, 아뇨. 이 정도면 소주보단 안 독해요."

혀가 조금 풀린 입으로 이야기하는 그녀를 보고 귀엽다고 할 테지만, 지금 난 그걸 신경 쓸 틈이 없다. 당장, 머리도 띵하고 눈깔도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내가 죽을 것 같은 느낌밖에 안 들거든.

 "죄송합니다만, 여기서부턴 정말 천천히 마셔야 할 것만 같아요."

텅 빈 금속제 컵에 물을 따르고 입안에 머금으며 조금씩 천천히 마셨다.

찬 것을 마셨는데도 불구하고 몸 안에서 바깥으로 나오는 숨은 뜨겁기만 하였다.

 "해독이 잘 안 되시나 봐요."

 "후우. 예. 울긋불긋하게 올라오면서 정신이 올바르지 못한 게 너무 견디기 힘듭니다."

 "에고. 저 때문에 괜한 고생 하시는 거 아니에요?"

 "아뇨. 그렇다고 너무 안 마시면 예절도 잊어버리고 살지 모르니 조금씩은 마셔야죠. 둘이 왔는데 상대방 혼자 마시라고 하는 건 조금 아닌 것 같기도 해서요."

가능하면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만 거짓말을 하며 말한다.

주도는 개뿔.


술기운이 들어가면서 우리도 다른 사람들처럼 웃음꽃을 피우며 일을 제외한 여러 가지의 대화를 나누었다. 처음엔 음식을 먹으며 수영 씨의 추천으로 온 이 가게가 참 좋다고 엄지를 올리기도 하고, 집을 나오다가 본 고양이가 매우 귀여워서 사진으로 찍은 것을 보여주거나, 사소한 것부터 살면서 겪은 놀라운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리님~ 너무 제 얘기만 해서 심심한데, 대리님에 관한 이야기도 조금만 들려주시면 안 돼요?"

술잔을 흔들면서 그윽하게 쳐다보는 수영 씨의 눈을 보며 생각했다.

무슨 얘기를 해줘야 하지. 재미없을 게 뻔한데.

 "제 얘기요? 어떤 것이 궁금하세요?"

 "음~ 아무거나 좋아요. 조그마한 것이라도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조그마한 것이라…. 생각 좀 해볼게요." 

내 얘기. 뭘 할 수 있을까. 그저 평일에는 일하고, 퇴근하면 집에 가서 자고, 애들이랑 놀아주는 것 말고는 특별한 것은 없었던 것 같은데.

어렸을 때, 전등 줄이 너무나 잡고 싶은 마음에 책상 위에 올라가 점프하면서 잡으려다가 떨어져서 팔 부러진 이야기?

팔 부러진 것도 모자라서 마당에서 뛰어놀다가 넘어져서 다리 부러져서 유치원도 안 다니던 녀석이 왼팔, 오른 다리 골절로 깁스한 것이 동네방네 소문난 이야기?

이런 이야기가 재미있을 리가 없을 텐데.

 "저, 대리님...?"

 "예?"

 "너무 그렇게 빤히 쳐다보시면, 굉장히…. 부끄러워요."

 "아, 죄송합니다. 생각하느라 미처 몰랐습니다."

난처하신 듯 눈을 제대로 못 마주치는 수영 씨의 모습을 보고 눈동자를 굴려 물이 담긴 컵을 바라보았다.

생각하느라 몰랐는데 미안하게 되었네. 뭐가 있더라.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아도 말할 거리가 없네요. 대신에 궁금하신 거 있으신가요? 그걸 답해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궁금한 거라면…."

골똘히 고민하며 입술과 입술 사이의 균열을 손가락으로 쓸며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우웅. 좋아하는 사람이나 이상형 있으세요??"

좋아하는 사람? 내 이상형? 그걸 왜?

 "좋아하는 사람이나 이상형이요?"

 "네!" 

 "음. 안타깝게도."

 `오~ 야아안붕이~ 어디 가? 이제 퇴근이야?`

 "딱히 그런 사람은."

 `...`

 "없었던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이상형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왜 내 얼굴을 콕콕 찌르는 예진이 얼굴과 무표정한 이웃집 분의 몸매가 떠오르긴 했지만, 애써 무시한 채 답을 말했다.

 "아…. 그러시군요." 

 "예."

그 뒤엔 수영 씨나 나나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있는 상황.

진짜 다른 사람이랑 대화하는 재주가 너무나 없는 놈이라서 나 자신이 너무나도 싫다.

 "저, 실은 오늘 뵙자고 한 거 말인데요."

그리고 다시금 우리들의 침묵을 깨는 건 수영 씨의 말 한마디로 시작되었다.

 "네."

 "말, 해도…. 되나요?"

 "네."

먹는 것에 정신 팔려서 그녀가 하고자 할 말의 무게감은 느끼지도 못한 채 기계처럼 네, 네. 하고 말했다. 처음에 약속 잡은 대로 미안한 마음에서 했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니면 뭐길래 그러나 했지만, 

 "저, 실은.... 얀붕 대리님 많이, 좋아해요. 정말로, 진짜 진짜 많이 좋아해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입안에 닭고기를 머금은 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체 나의 답을 기다리는 수영 씨였다.

오물, 오물 아주 천천히 닭고기를 씹으면서 난생처음 듣는 누군가의 고백에 멍해졌다. 

와, 무슨 일이지?

학교에 다닐 때나 웨딩홀에서 아르바이트할 때도, 현재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에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상황.

진짜, 살면서 처음으로 이성에게 고백받았다.

좋아한다고? 나를? 왜지? 무엇 때문에?

꿀꺽.

조금 전까지 촉촉했던 닭고기가 이상할 정도로 뻑뻑하게 느껴지며 어떻게든 입안에 있던 것을 씹어 넘기고 그녀에게 답을 해주기 위해 손으로 입을 가리고 혀로 정리했다.

 "아."

나의 대답을 기다리며 입을 다문 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다음 연도가 되면 앞의 숫자가 3으로 변하는 내가 3으로 변하기 전에 처음 겪는 누군가의 고백.

앞의 숫자가 3이 되면 순간이동이나 하면서 회사 출근이나 할 줄 알았던 나인데….

 "어. 음."

술 때문일까. 아니면 화장 때문에 더 그런 것일까.

붉게 상기된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기가 힘들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술기운 탓이기도 하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돌아가질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지? 진짜 하나도 생각 안 해보았던 것인데.

그녀가 예쁘지 않다던가, 성격이 싫다든가 하는 그런 이유로 생각도 안 해본 게 아니라

정말, 진짜로, 진심으로,

 "후."

내 앞에 있는 그녀. 수영 씨는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보다 훨씬 대단한 회사. 나와 달리 은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어 보일 나이. 주름 없이 탱탱한 얼굴. 

그런 것들을 전부 종합해보면 

너무 아깝잖아.

이런 사람이 나랑 사귄다는 게. 

 "정말로, 진짜 죄송합니다. 현재의 저로선 딱히 누군가를 사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요."

 "..."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한 체, 자세를 바꾸어 무릎 꿇고 고개를 더 숙였다. 조용히 훌쩍이는 수영 씨에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 진짜 미안해요. 외형이 마음에 안 든다거나 성격이 싫다거나 그런 건 전혀 아니에요. 진짜, 정말로, 제 개인적인 문제도 많이 있기도 해서 그러는 거니. 너무, 기분 나빠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자기 부모 수발도 제대로 못 하는 인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잘해준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바로 옆. 정말 제일 가까운 존재에게조차 제대로 못 하면서 다른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그럼 아픔만 두 배 이상 늘어버릴 뿐이다.

그녀의 거절을 고백함과 동시에 나름대로 상대의 가치를 띄워주는 식으로 열심히 얘기해 보았지만, 오히려….

 "훌쩍."

그녀의 눈물만 앞당겨 버린 것만 같다. 

 "아, 그, 정말 죄송합니다.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양손을 모아 상 아래로 내려놓고 고개를 한 번 더 숙였다. 

그녀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면서 했던 말이지만.

이런 답.

그리 좋은 답변은 아닌 것 같다.

 "훌쩍, 흑. 흐윽. 왜요? 좋아하는 사람도 없으시고, 이상형도 딱히 없다면 조금이라도 만나주시면 안 되나요?"

고개를 숙인 터라 훌쩍이는 그녀의 목소리만 들린 체, 그대로 무릎 꿇고 있었다. 나보다 더 화려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나 좋다고 굴러떨어지는데 안 받는 것도 이상하겠지만, 나도 마음 같아선 "감사합니다!" 하면서 고백을 받아들였겠지.

 "누군가를 만난다고 하는 것을 가볍게 시작을 못 할 것 같아요. 그저, 조금 마음에 들었다고 선뜻 만나는 게…. 많이 두렵습니다."

 "훌쩍."

 "또 설명해드리긴 어려운 개인적인 사정이라 설명해드릴 순 없지만. 절대로, 수영 씨가 맘에 안 들어서 거절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저보다 훨씬 더 멋진 사람을 금방 보게 될 거예요. 저보다 젊으시고, 능력 있으신 분이니 진짜로, 정말 멋진 분 만나실 거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제집 사정이 이렇고 이래서 술도, 담배도 안 피우면서 아주아주 절제하면서 살고 있습니다.`라고 부끄러운 가정사를 밖으로 떠벌릴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런 걸 앞에서 얘기하는 게 더 부끄럽지. 가정사나 쉽게 떠벌리는 입 싼 놈이 되는 건데.

 "훌쩍, 그러니까. 그 개인적이라는 게 언제 해결되시는 건가요."

수영 씨의 물음에 고개를 들어 얼굴을 바라보니 터져버린 울음 때문에 붉게 물들인 얼굴을 상에 비치된 휴지를 이용해 자신의 얼굴에 맺힌 눈물을 정리하고 있었다. 

 "잘, 모르겠어요. 굉장히, 오래 걸릴 것 같아요. 어쩌면 평생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부담감을 혹시나, 제가 연애하고 있는 사람에게 아픔으로 줄지도 모르고, 또 제대로 신경 써주지 못해서 슬프게 할 거면 차라리…. 시도도 안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적어도 최소한 내가 누군가를 만나려면 엄마의 회전근개의 완전 재생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한 달 약으로 한 달 생활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 기운이 회복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있다. 그래야만 내가 편히 움직일 것 같았다. 지금 이 만남도 원래는 거절하고 집으로 퇴근하려고 했지만, 형이나 과장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자리에 어울렸던 것처럼.

 "후우... 그런가요. 저는, 훌쩍, 좋아할 대상을, 잘못 고른 것 같네요. 후흑."

술병을 들어 자신의 잔에 따르고 단숨에 들이키는 수영 씨.

탁!

 "스으읍. 푸하아. 부끄럽고 너~무 아프네요. 진짜, 기회가 생긴 것 같아서 용기 엄~청 많이 낸 건데에."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쩔 수 없죠. 그럼, 저 혼자라도 마실 테니 말 상대라도 해주세요."

 "아, 예.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뒤로 수영 씨는 혼자 술을 더 시키고 계속 마셨다. 술기운에 혀가 꼬여버린 입으로 어눌하게 말하기도 하였고.

 "그으러니까. 제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시냐구요오. 네?"

 "그건, 잘 몰랐습니다. 그런 쪽으로 눈치 없다는 말 많이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으우와. 에헤헤. 눈치 없데요~ 눈~치 없데요~ 눈치 없데요~ 대리님은, 사람 마음도, 몰랐다네요~ 몰랐다네요~ 내 맘도, 우으. 흐에엥~"

술기운을 빌리긴 했어도 이젠 눈치 없는 인간이라고 놀리기까지 한다.

미안한 마음에 그녀의 주정이라도 들어주고자 하는 질문마다 다 대답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엄청나게 곤란한 질문은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술주정 부리는 사람 앞에 있는 것은 너무나 힘들다.

부끄러운 행동을 해놓고 "내가 그랬어? 기억이 없는데?" 하면서 책임을 회피할 때를 생각하면 너무나 화가 났기 때문이다. 그럴 거면 좀 처먹지 말고 살아. 덜 처먹던가.

뭐, 이분이라면 그럴 사람 아니겠지만.

아마도 말이지.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도 그렇고, 술이 나한테는 불구대천 원수이지. 몸에도 안 맞고, 맛이 좋은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엄마의 몸을 망가뜨린 원인 중 하나인 아빠가 그렇게나 좋아하던 것이 술이었으니까. 

좋게 볼 일 있나.

 "우엩. 에헤헤. 자아. 가요! 가! 요롷게 기부니 꿍~한 날은 더 마셔야 푸울린다니까요~."

얼마나 그녀의 주정에 어울렸는지도 모른 체, 가게를 나와 바깥을 확인하니 노을졌던 하늘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여러 행성으로 반짝반짝 은 빛깔의 자수를 맺은 어두운 밤하늘과 까만 밤과 대비되는 밝은 빛으로 무장한 가게 간판들이 눈에 띄었다. 

 "너무 많이 드셨어요. 자택에서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신체 접촉은 최대한 피한 체 그녀가 가는 대로 그대로 따라갔다. 

주정이 너무 심한 건지, 너무 심하게 취한 것 때문인지 비틀거리며 걷는 그녀의 뒤꽁무니만 쫓기만 해도 불안하다.

그러다가,

 "얼레레?"

아니, 그러니까 술 먹고 이리저리 움직이지 좀 말라고. 

 "위, 위험해요!"

하고 싶지 않았던 접촉까지 하면서 넘어지지 않게 하였다. 

 "후암. 아으으. 우음."

 "미안하긴 하지만, 이건 좀, 힘든데." 

 "푸후. 이히힛."

 "윽. 술 냄새. 독하기도 하지."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술 냄새를 내 얼굴에 훅 뱉으며 무엇이 좋은지 웃으면서 곯아떨어진 수영 씨.

그와 반대로 술기운으로 온전치 못한 정신과 안에서 올라오는 술 냄새 때문에 화가 좀 나 있는 상태였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내 앞에 계신 이분은 그런 건 모르고 맘 편히 꿈나라로 가신 듯하다.

 "수영 씨. 잠깐 정신 좀 차려보세요. 주소라도 알려주셔야 자택으로 보내드리죠. 수영 씨?"

눈을 감고 태평하게 곯아떨어지는 그녀를 부축하고 어디 쉴 곳이 없는지 주변을 잘 찾아보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왜 모텔뿐이야 여긴? 여기 번화가에 이런 곳이 있었어? 도대체 어디까지 들어온 거야?"

쉴 곳을 찾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다... 야릇한 분홍, 빨강으로 점철된 네온사인이 걸린 가게 들 뿐이었다. 

「얀텔얌」, 「야너두」 등등 인터넷에서 몇 번 본 적 있는 상호들이 보일 뿐.

어쩌지. 저곳에 들어가면 했던 안 했든 간에 의심받고 해명하기에도 귀찮아지고 참으로 위험할 텐데. 

아, 제발. 정말 어디 안전한 곳 없는 건가.

「24시 침팬지네 보드게임 카페」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가 눈에 띄는 상호가 보여 자세히 읽어보았다.

 "와. 다행이다. 여기 보드게임 카페도 있구나."

평소에는 믿지도 않고 욕받이나 되어버리는 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부축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 확인했을 때 6층이라고 했으니까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것이 좋겠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보드게임 카페 내부의 카운터가 보였다. 밤인데도 약간의 소음이 들리는 곳. 물론, 바깥이나 술집들처럼 왁자지껄은 아니고 사람이 대화하며 즐긴다는 느낌 정도의 소음.

보통 보드게임 영업점에 따라서는 기본 음료들 말고 술을 팔기도 하지만, 여긴 어떤 곳인지 잘 모르겠다.

그게 중요하냐. 내 안전부터 찾고 봐야지.

 "어서 오십시오."

계산대에서 고개를 숙이는 점원 앞으로 수영 씨를 부축하며 갔다. 자리가 있는지부터 물어봐야겠지.

 "후. 두 사람, 자리, 있습니까?"

술기운으로 말이 어눌해져서 상대에게 폐를 끼칠까 봐 두려워 아주 천천히 한 음절씩 끊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손님. 여긴 모텔이 아닙니다." 

곤란한 얼굴을 하는 점원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이곳 말고는 전부 다 지뢰밭이나 마찬가지라서 어떻게든 머물러야 한다. 

 "절대로, 그런 쪽으로 빠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또, 집에 갈 정신만 차리면 바로 나갈 테니 조금만 양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

곤히 고민하던 여점원을 그대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여기 말곤 갈 곳이 없어서 그래요. 다른 곳은 너무나 위험해서요."

애써 웃으며 상대에게 부탁하고 있다. 

 "절대로, 선 넘으시면 안 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여점원분께 감사를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다행으로 이곳 보드게임 카페는 개방적인 곳이 아니라 방 하나씩 배정받고 거기에서 노는 곳이기에, 좁기는 하여도 바닥에 앉아 노는 공간이기에 사람 한 명 정도는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완전히 개방하는 곳이었으면 편히 쉬지도 못했을 텐데 다행이다.

 "8번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점원분을 따라 방 안에 들어가 수영 씨의 구두를 벗겨 따뜻한 바닥에 눕히고 내 양복 재킷을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음료는 무엇으로 드릴까요?"

맞다. 이런 방으로 된 보드게임 카페는 음료가 입장값이었지 참. 제일 싼 거나 시켜야지.

 "아메리카노 뜨거운 것, 찬 것 한잔 씩 가져다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약속만 지켜주시면 됩니다."

스르륵 문을 닫고 가버리는 점원분. 난 벽에 기대어 잠시 시간을 버틸 생각으로 있었다.

정말 다행이다. 쫓겨났으면 어디서 시간을 버텼어야 했나 생각했다.

역시 술 마시는 건 너무 고욕이군.

 "후. 망할 놈의 술. 또 시작이네. 이래서 안 먹으려고 했던 건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몸의 이상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이상을 잡기 위해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시킨 것이지만, 아무래도 너무 늦은 듯싶다. 

내가 술을 먹지 않는 이유 중 하나.

가려움? 울긋불긋? 어지러움? 맨정신이 아니라서 나오는 민폐?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에취!"

비염이 심해진다. 일상생활이 힘들어질 정도로. 

 "에엑츄! 에이씨. 약도, 에에... 아, 안 챙겼는데 도졌... 네에에취!"

정확하게는 100% 술 때문이라고 하기보단, 술을 먹은 뒤 나타나는 증상 때문에 비염이 갑자기 심각해진다고 보면 된다.

술을 마시면 추위를 느끼고, 추위를 느끼기 시작하면 신체는 체온을 유지하는 방법의 하나로 콧물의 양을 늘리는 것으로 체온의 손실을 줄이려고 한다.

콧물의 양을 늘리다 보면 코안 쪽 살에 더 많은 양이 닿을 테고 당연히 살에 액체가 계속 닿으니 부을 테고.

그럼? 구멍의 크기가 작아지지. 

가뜩이나 태어날 때부터 코뼈가 휜 것도 모자라서 속 안에 구멍도 작은데 거기서 콧물 때문에 살이 불어 3중 악조건이 곁들여지면

코로 숨 쉬는 건 거의 불가능해진다. 거기에 미친 듯이 나오는 재채기 때문에 허리는 알이 배길 정도고. 

 "하아. 돌겠군. 으으."

누군가가 보는 것도 아닌데 휴지를 쥔 손으로 입과 코를 막는다. 언제 흐를지도 모르는 콧물과 갑작스러운 재채기로 인해 튀어나오는 침들을 막기 위해 손을 떼지 않는다.

 `짜증나. 유전으로 줘도 이딴 걸 주다니.`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화가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며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쾌락만 생각하고 그 후에 일어날 일들은 하나도 생각 안 하니까 내가 이 모양 이 꼴이겠지.


대략 3시간 정도 지났을까.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난 그녀에게 보드게임 카페에 들어온 것에 관해 설명해주고 밖으로 나와 택시에 태워 집으로 보냈다.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인 그녀이긴 했지만, 뭐, 잘 가시겠지. 오늘 많이 힘들 테지만 나보다 더 나은 사람 만나면 그런 것도 금방 잊을 테고 말이야.

수영 씨를 보낸 다음엔 스마트폰으로 콜택시를 부르고 집으로 갔다. 이 새벽 시간에 버스가 운행할 일은 없으니 이거라도 타고 가야 집에 가겠지.

야간 업무를 하는 것이 아니면 대부분 자고 있을 이 시간에 집에 도착했다.

"너 왜 입이랑 코 가리고 오냐."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기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졸린 눈으로 서 있는 형이 보였다.

"비염."

"하긴, 밖이 좀 쌀쌀했는데 술을 먹었으니 도졌겠지. 근데, 엄마한테 들을 땐 네가 이렇게까지 늦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왜 이렇게 늦게 왔냐?"

"응. 1:1로 술을 마셨거든. 상대가 너무 취해서 택시로 집에 좀 보내주려고 주소를 물어봤는데 너무 꼴아서 말을 안 하더라고. 어쩔 수 없이 보드게임 방에서 술 좀 깰 때까지 같이 있어 주다가 택시 잡고 집으로 보낸 다음에 왔어."

"여자?"

"어."

"이쁘냐?"

"그냥 귀엽게 생긴 사람."

"그러냐. 씻어라."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가는 형.

신발을 벗은 나도 내 방으로 들어가 휴지를 써서 코를 헹! 하고 풀어버리고 입고 있던 옷도 의자에 휙휙 던져버린체 바로 씻으러 들어갔다.

"에취에!"

개같은 비염. 하도 재채기를 해서 그런지 허리 쪽을 삐끗한 것처럼 전기 오르는 느낌이 난다. 재채기 할 때 마다 손을 허리에 올리는 건 덤이고.

"후. 돌겠네."

나도 바보는 아니기에 그 사람의 행동을 보고 나를 유혹하는 행동이 맞는 건가 하고 생각도 해봤지만, 귀엽긴 해도 연인까지 생각은 안 해보았던 사람이라 모텔로 가서 쉰다거나 하는 그런 행동은 안 하였다. 누가 보면 답답하다고 할 테지만, 위험한 행동은 하지 않는 편이다.

물론, 술을 안 마시는 이유가 해독을 못 해 울긋불긋한 것과 가려움이 심한 것도 있고, 비염 때문에 더럽게 보이는 꼴도 싫기도 하고, 맛없어서 싫어하는 것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할 실수를 줄이기 위해 안 마시는 것이다. 아주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줄이기 위해서.

"으윽."

아주 조금이라도 잠을 자서,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지.

그래. 아주 잠깐이라도 자자. 안 자는 것보단 좋겠지.

"에엑, 씨바악! 에츄!"

☆같은 비염. 내일 밖에 나가게 되면 비상용으로 약을 좀 챙겨야지.


2시간은 잤을까. 스마트폰의 알람이 시끄럽게 울린다. 

 "미치겠네. 눈 감았다가 뜨니까 씻을 시간이라니."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나 적당히 씻고 출근 준비를 한다. 비염약 챙겨서 먹은 것 때문에 졸음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집중력이 많이 떨어지는 하루다.

시끄럽고 더럽게 재채기하면서 남들한테 민폐 끼칠 바에야, 약 먹고 졸음 참으면서 하는 게 더 좋겠지.

 "이쁜아. 너 왜 그렇게 병든 닭 되버렸냐? 모니터에 얼굴 처박겠네." 

 "아... 네. 비염이 갑자기 심해져서 약을 먹었어요. 그것 때문에 재채기나 콧물 흐르는 건 나아졌지만, 많이 졸리네요."

 "그러냐. 힘내라."

과장님께서 등을 쓸어주시다가 가셨다. 남들이 보기에도 상태가 좋지 않은 건가.

하긴 지금 제정신으로 문서작성을 하는 게 아니라서 그런지 모니터에 출력되는 글자를 보아도 눈과 입으로는 제대로 인지하는데 머릿속에서 받아들일 땐 다른 숫자로 이해하는 것 같았다.

 "졸릴 때 실수하면 안 되는데. 으읔."

약 때문에 무거워진 눈꺼풀에 힘이 들어가기 빌면서 졸음을 쫓기 위해 박하 향이 굉장히 강한 껌을 입안에 여러 개 집어넣고 씹어 목 안에 시원함이 퍼진 걸 확인한 뒤, 찬물을 한 번에 들이킨다.

 "으엑, 후우... 목구멍 아프네."

남들이 보면 정신 나간 방법이라고 하지만, 이렇게라도 해서 제정신을 차려야 한다.

내가 상대하고 있는 회사는 굉장히 커다란 회사이기에 아주 조금의 실수도 없어야 한다.

만약에, 확인용 샘플과 다른 규격의 제품으로 납품하게 되면 엄청난 위약금을 물어야 하기 때문이지.

 "제발 부탁이야. 이것만. 좀 끝내자."

내가 가진 것들에 비해 굉장히 좋은 회사. 그리고 이런 나에게 많은 관심을 주시는 감사한 분들도 많이 계셔서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크다. 

 "잘하자. 할 수 있다."


수영 씨의 고백을 들은 뒤로 대략 일주일이 지난 오늘. 

이전과 다른 변화가 있다고 치면 연락하겠다고 먼저 말해놓고 까먹고 살다가 예진이의 카톡을 보고 미안하다고 전화했던 일이나,

쉬는 날에 옆집에 계신 분과 엄마가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는 듯 오랫동안 수다 떠는 것을 본 적 있는 것 정도.

딱히 평상시와 다른 날은 아닌 것 같았다.

과장님이 부르시지 않았다면 말이지.

 "얀붕아!" 

 "네. 과장님."

허겁지겁 달려오시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 같다. 무슨 일이 있던 것이길래 저렇게 분주하실까.

 "안 좋은 소식이 하나 있는데, 빠르게 움직여야겠다."

 "예. 그럼 어디로 갈까요?"

 "거기 원청. Yansgall로 지금 가."

지금 가라는 말씀에 시계를 쳐다보니

 오후 5시 50분.

뭐야. 곧 퇴근 시간인데 지금 가라고?

 "곧 6시인데요? 퇴근 시간인데 지금 가라는 말씀이세요?"

 "그렇다고 하네. 급한가 봐. 얼른 준비하고 가. 나머지는 가서 직접 들으래."

 "아. 저,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내가 아는 거면 알려줄게."

 "그, 정말 죄송합니다만, 그런 사안을 왜 제가 아니라 과장님이 먼저 아시고 알려주시게 된 건가요? 제가 먼저 알아야 하는 거 아니었나요?"

 "모르겠다. 그게 맞긴 하지만, 이상하게 위에서 내려오더라.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어. 왜 이렇게 바쁜지 모르겠다."

머리를 긁적이시는 과장님을 보고 아무래도 이번 사항의 해답은 그 회사로 가봐야 알 것만 같았다.

가만히 있어 봤자 어차피 답도 없어. 빠르게 가야지.

 "알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가보겠습니다."

 "아 맞다. 야! 하나 더 있어!"

 "아. 네!"

재빠르게 가기 위해 책상 위의 짐을 정리하다가, 뒤에서 부르시는 말씀이 들려 급히 몸을 멈추고 경청했다.

 "그 원청. 네가 담당했던 본사 사람 있잖냐. 그 사람 찾아가래."

 "아. 예. 그럼 그분께 전화하고 최대한 빠르게 이동하겠습니다."

점심을 먹은 뒤 하긴 했지만, 곧바로 사람을 만나야 하기에 화장실로 가서 양치질을 한 번 더 하기로 했다.

양치질을 끝낸 뒤엔 내 책상으로 돌아와 최대한 빠르게 짐을 챙기고 회사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타고 갔다. 금액 부담이 크지만, 과장님께서 저렇게 땀을 흘리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보통 사안은 아닌 듯싶었다.

택시를 타고 가면서도 바짝 타오르는 입안 때문에 챙겨둔 생수통도 다 먹어버린 지 오래다.

계속 생각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원청에서 부른 걸까.

전화로 답해도 충분했을 것 같기도 하고 내가 간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맞는 걸까.

도저히 머릿속에서 해결방안이 잡히지 않는다.

무엇 때문인지 알고 가는 것도 아니지만 안다고 해도 해결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함.

 "하아..."

한숨을 쉬면서 계속 생각만 할 뿐이었다. 

 "다 왔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자동결제를 등록해둔 탓에 도착한 것을 보고 택시에서 바로 내렸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엔,

내가 다니던 회사에 비해 심각할 정도로 높은 회사 앞에 서니 기가 죽어버렸다.

 "와. 엄청나게 크네. 말로만 들었던 곳인데. 내가 여기랑 거래했나."

Yansgall.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담당하던 회사의 이름으로, 여러 사업을 개척하며 차곡차곡 몸을 불려가 이젠 외국에서도 알아주는 아주 큰 기업이다.

계열사까지 일일이 나열한다면 식품, 건설, 의료 약품 등 진짜 손을 뻗지 않은 곳을 찾는 게 더 빠를 정도로 여러 분야에서 활약 중이다. 

 "후. 무섭긴 하지만, 잘하자. 잘해. 난 배운 대로 하는 거야." 

주머니에서 녹여 먹는 구강청결제를 하나 꺼내 입안에 넣고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한 번에 5명 이상 들어가도 자리가 넉넉할 커다란 회전문으로 들어가 회사 안으로 진입했다.

으리으리해 보이는 외형과 어울리는 깨끗한 백색의 대리석. 벽장식이며 엘리베이터의 색깔이며 다 하나하나 고급스러워 보이고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회사 내부로 진입하기 위해선 출입키가 필요하지만 난 그런 것이 없으므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들어갈 순 없었고 따로 방법이 없는가 하고 생각했다.

 "전화해야겠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담당자였던 수정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 뚜~

상대방이 전화를 받길 바라면서 계속 붙잡고 있었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받질 않으셨다.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소리샘으로~"

삑.

망할. 하필 이런 때 받지도 않는다니 돌겠네. 할 일을 다 한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머리를 굴리면서 생각했다.

찾아가라고 해서 왔고, 전화하니 담당자는 받질 않을 때, 난 어떻게 해야 하나.

역시 그냥 안내데스크 쪽으로 가서 물어보는 수밖에 없나. 만약 여기서도 해결 안 되면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는 것 같은데….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예. 안녕하세요. 「유지프로」의 김 얀붕 대리입니다. 오늘 약속이 있어서 이곳 회사에서 뵙기로 했는데 담당자님께서 전화를 받지 않으셔서요. 혹시 어떤 말씀이라도 있으셨나 싶어서요."

 "네. 알겠습니다. 성함 한 번 다시 확인해도 될까요?"

 "예. 「유지프로」의 김 얀붕 대리입니다."

딸깍딸깍.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키보드 스프링 소리를 내며 타자를 치는 직원분.

 "... 만나 뵙기로 약속되어있는 분이 맞으시는군요. 14층으로 가신 다음 약속 때문에 오셨다고 말씀해주시면 다른 분들께서 부회장님께 안내해주실 겁니다." 

 "예? 부회장님이요?"

안내데스크에 계신 직원분께 임시 출입증을 받고 그것을 이용해 엘리베이터 앞으로 갈 수 있었다.

그렇게 높은 분을 나 혼자 만나 봬도 되나. 최소 부장님이랑 같이 왔어야 했을 듯싶은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확인해본 결과.

14층 부회장실. 그것도 단독 사용. 

 "와. 층 하나를 혼자 쓴다고…. 실화냐. 근데, 진짜 만나 봬야 하나. 잘못 알려준 거 아니야? 내 직급에 뭔 부회장님이야."

천박하게 입 밖으로 별 이상한 소리를 내게 되었지만, 대화 한 번 하기도 힘든 분이랑 봬야 한다는 상황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딩동!

엘리베이터의 전광판이 14라는 숫자로 변하자, 문이 열리며 잠깐 보지 못했던 환한 빛이 들어온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직원분께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대리님."

 "아, 안녕하십니까. 「유지프로」의 김 얀붕 대리입니다."

 "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앞에 계신 분의 안내를 따라 걸어가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 매우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운 값비싸 보이는 액자들과 고급스러워 보이는 카펫과 테이블과 의자. 1층에서 보았던 것 이상으로 화려한 장식과 깨끗하게 청소된 바닥.

하지만 그와 대비되는 적은 숫자의 수행원. 회사의 크기를 생각하면 훨씬 더 많은 수행원이 붙을 것 같은데 딱 한 명만 보이는 것이 조금 이상했다.

아니지. 이상할 것도 없지. 시간이 시간이니 다들 퇴근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여기입니다."

똑똑.

 "도착하셨습니다."

부회장실이라고 떡하니 팻말이 붙은 곳을 손바닥으로 가리킨 다음, 노크하고 문을 열며 고개를 숙이는 직원분께 맞인사를 하였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아. 예. 정말 감사합니다."

열리는 문 안으로 들어가 낯익은 얼굴을 보게 되었다.

처음 뵙는 분이라서 놀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아는 얼굴을 보게 되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잘 오셨습니다."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에서 일어나 내게 말씀을 전하시는 분은 다름 아닌 수영 씨.

이게 무슨 장난인 건가 하고 책상 위에 있는 명패를 바라보니.

yansgall 부회장 진 수영.

`와. 이거 어떻게 된 일이지?`

띵~ 하며 망치로 한 대 맞은 듯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내가 직접 귀로 들었을 땐 나와 같은 대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왜 명패에는 부회장이라고 적혀 있는 거지?

 "이쪽으로 앉으세요."

내 앞의 상대가 진짜 부회장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음처럼 꽁꽁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다.

나, 지금까지 그럼, 얼마나 높은 사람이랑 거래를 진행 했던 거야?

전화도 그렇고.

특히,

아 잠깐, 이자카야 때 더 예의 바르게 행동할걸...

엄청나게 많이 불안하다.

정신 차려야 해.

 "부르셨다고 하셔서 왔습니다."

한 글자도 실수하지 않기 위해 또박또박 말하며 으리으리해 보이는 검은색으로 광택이 나는 내빈용 소파 제일 끝에 앉았다.

차분히 생각하자.

상대가 진짜 부회장님이라고 하신다면 말 하나하나 신경을 써가면서 해야 한다.

나 때문에 회사에 잘못을 할 수 없으니까.

 "어떤 일 때문에 오신 것인지는 아시나요?"

 "죄송합니다. 이곳에서 설명을 들어야 한다는 말씀만 듣고 바로 왔습니다."

조심히 수영 씨를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전에 보았던 밝고 귀여운 느낌과는 사뭇 거리가 먼,

내가 평상시에 하는 것과 비슷한 딱딱한 말투.

단정했던 새하얀 와이셔츠와 까만 재킷의 조합이 아닌 일부러 안 잠근 듯 풀어헤친 빨간 블라우스와 아주 진한 얼굴 화장.

그런 수영 씨가 중앙 소파 쪽으로 또각또각 하이힐을 신은 다리로 걸어온다.

한 손에는 문서 더미를, 한 손에는 얼음이 들어있는 음료를 가지고서.

 "견본 샘플과 굉장히 다른 규격의 제품들이 납품되었습니다. 확인해보시죠."

그녀가 건네준 문서 뭉치를 보고 확인해보았다.

 "..."

뭐야 이거. 수치가 왜 이래. 견본용 샘플이랑 비교했을 때랑 차이가 왜 이렇게 다른 건데.

 "무엇 때문에 부른 것인지 아시겠나요."

 "... 네. 충분히 알았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날짜가 내일까지로 알고 있는데요. 회사에 알린다고 해서 해결이 될까요?"

얼어붙을 것만 같은 싸늘한 목소리. 스마트폰을 급히 들어 과장님께 전화하려던 움직임을 멈추고 침을 꼴깍 삼킨 체 수영 씨를 바라보았다. 

 "지금 급하게 공장 여러 대 잡고 급하게 한다 해도 이 물량 절대 못 나오는 거 아주 잘 아실 텐데요."

 "네. 맞습니다."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내가 있는 소파로 걸어와 옆에 앉으며 조금씩 가까이 붙는 수영 씨. 

 "제가 하라는 대로. 하나하나 그대로 따르시면 기간을 연장해드릴 수 있어요."

스르륵

 내 옆에 붙어 몸을 달라붙으며 입을 여는 수영 씨.

 "무, 무엇을 하면 되는 건가요?"

 "진짜, 몰라요?"

내 재킷 안쪽 와이셔츠에 손가락을 올린체 빙글빙글 돌리며 고양이 같은 교태를 부린다.

가까이서 제대로 보니 의상과 화장이 달라서인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이전엔 귀엽고 동글동글해서 지켜주고 싶은 이미지였다면,

지금은 고혹적이고 언제라도 먹잇감을 잡아먹을 것만 같은 눈화장에서 나오는 매서운 눈빛.

설마, 그렇고 그런 건 아니겠지. 만약에 그렇다고 해도 입 밖으로 나온 이야기는 아니니까 섣불리 행동할 수도 없으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말씀해주시면 그대로…."

 "하아. 이렇게나 수동적인 인간이었을 줄이야. 존나 답답하네." 

이름만 보아도 누구나 다 알 유명한 체인점 커피를 상에 내려놓고 말하는 수영 씨.

 "부, 부회장님?"

짜증이 난 얼굴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담겨있는 것으로 보이는 플라스틱 잔 뚜껑을 열어 책상에 올려있는 설탕을 미니 스푼으로 무려 5번이나 퍼서 과격 휘젓고는 빨대가 있음에도 입에 가져다 벌컥벌컥 마시는 수영 씨.

 "뭐, 말이 짧다고? 너보다 어린 여자애가 반말하니 기분 나빠?"

와그작

 그러곤 입안에 들어간 작은 얼음들을 이빨로 잘근잘근 부숴버리며 먹고 있는 모습.

조금 전까지의 차분함과 많이 다른, 그녀의 다른 목소리에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반말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것보단 도대체 왜 이러한 행동을 하시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 

 "아, 그렇, 다기보다는 원래 말씀하시던 때와 많이 달라서요."

 "당연히 연기지. 그래야 너희가 좋아하잖아?"

연기? 그 깜찍한 모습이 다 연기였던 건가. 

 "엥알 거리기 얼마나 힘든 줄 알아? 평상시엔 하지도 않는 존댓말도 해야 하고 얼마나 귀찮은지 아느냐고. 매일 목도 아프고 짜증 난다고."

 "그, 그래도 사람 대 사람이니 예의를 지켜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 목에 걸린 넥타이를 쭉 잡아당기고 한 주먹도 안되는 거리에서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야. 먼저 예의, 호의를 개처럼 무시한 게 누군데 나한테 그딴 말 하는 거야?"

 "네? 제가 언제…."

 "일부러 술에 꼴은 척 기대면서 같이 있어달라고 아양을 부리니까 보드게임 카페나 처가고 거기서 3시간 동안이나 가만히 있냐? 여자가 그 정도로 엉기면 무슨 뜻인지 몰라?"

당연히 혹시나 싶어 이거 그건가? 싶어도 술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니 나 나름대로 배려한 것이다. 절대로, 예의나 호의를 무시한 것이 아니다.

 "도, 동의도 안 했는데 그런 걸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나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그런 건 연인들이나 하는 것이니까요."

 "와. 알면서 안 했다? 그렇게 선을 긋는다 이거지 지금?"

오른손으로 턱을 괸 체 가운데 있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들기고 계셨다. 기분이 매우 안 좋은가보다. 어떻게 말해야 기분이 풀릴까. 

 "야. 나 똑바로 봐."

내가 앉아 있는 소파 앞에 있는 수영 씨는 나를 마주 본 체 내 턱을 잡고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너. 아직도 모르겠어? 네가 실수한 거, 회사에서 책임을 못 지니까 내가 도와주겠다고 하는 거잖아? 그럼 그대로 따르면 되는 거 아니겠어?"

 "네. 그렇긴 합니다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그 순간.

 "웁?" 

10cm도 안 될만한 거리에서 나의 넥타이를 확 당기자 그녀의 입술과 내 입술에 닿았다.

살면서 처음 가족이 아닌 다른 이성과 입술이 맞닿았다. 

방금 마셨던 아메리카노와 그녀의 향기 때문인 걸까.

커피의 쓴맛과 강한 여자 향수 냄새가 났다.

아니다. 지금은 그럴 것이 아니라. 

 "죄송합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입술끼리 닿지 않을 정도만 밀고 그 안에 손가락을 놓아 이 이상 가까이 와도 입술끼리 부딪치지 않을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야. 너 지금 뭐하냐." 

 "예?" 

 "너. 여기 네 실수 책임지러 온 거잖아. 놀러 온 거 아니라니까?"

정색하며 목소리를 내리까는 그녀의 위압에 눌려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실수, 책임이라는 두 단어 때문에. 

 "네.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그게 아니지. 가만히 있으라고."

 "..."

 "그래. 가만히. 손 내려."

그녀의 압박에 못 이겨 내 입술에 올려놓았던 손을 내 허벅지에 올려놓았다.

 "읏. 하아. 우음. 츄웁."

그러자 또 한 번 입술과 입술이 부딪히며 키스로 추정되는 행동을 하는 수영 씨.

이런 거 사귀는 사이도 아는데 하면 안 되는 건데. 

처음을 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간에 바로 두 번째 입맞춤으로 이어졌다. 

 "뭐해. 눈 감지 말고 떠."

그녀의 말에 따라 감아 버린 눈을 뜨고 숨을 내쉬며 키스를 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뱀이 먹잇감을 자기 몸으로 감싸며 포식할 준비를 하듯, 그녀의 혀가 내 혀를 감싼다.

 "츄웁. 츕. 하아아... 뭐해. 나처럼 하지 않고."

그녀의 혀가 내 혀를 핥는 것을 느끼고, 그대로 따라 하려고 했지만, 생각만큼 잘 안 되었다. 그녀의 혀 위로 내 혀를 얹거나 핥아보려고 해도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가기 급급했다.

 "후음. 청결제 향도 좋아. 후응. 하압.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준비해온거 아니야?"

 "읍. 우웁. 헤에. 아니요. 절대로, 그런게 아닌, 웁. 후웁." 

 "헤에. 그건 그렇고 왜 이렇게 못하는 거야. 얼굴만 보면 경험 많을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해본 적이 없어서."

 "처음이야?"

 "네…."

 "아. 그래? 그럼, 내가 제대로 가르쳐야겠네."

무엇이 이 분의 기분을 좋게 하였는지 씩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그런데 갑자기 아까처럼 상냥하게가 아닌, 턱을 잡고 있던 손으로 내 뒤통수를 잡고 끌어당긴다.

3번째의 입맞춤은 1, 2번째와 차원이 다른 과격함으로 숨을 밀어 넣으며 혀를 집어넣는다.

 "욱. 우웁. 읏. 후우읍. 하아."

숨쉬기가 힘들 정도의 접촉과 숨결에 내 호흡도 거칠어지며 혹시나 그렇고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다는 상상에 빠지며 억지로 참고 있던 흥분이 조금씩 나의 숨결로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하아... 색다른 맛인데." 

입술을 떼고 길게 늘어진 은빛 실타래를 손가락으로 끊어 그녀의 입술과 입술 사이의 공간을 한 번 쓸고 거기에 남아있던 잔여물은 혀를 돌려 닦는 모습을 보였다. 

 "자. 핥아."

조금 전까지 입술과 입안을 오갔던 손가락으로 내 입술에 가져다 놓는다.

균열과 균열 사이에 손가락을 억지로 밀어 넣지만 굳게 다물고 있던 이빨에 부딪힌다.

 "나 인내심 많지 않아. 어서." 

그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기에, 입에 힘을 풀고 강제로 밀어 넣는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할짝. 츠읍. 후웁."

처음으로 핥아보는 얇고 가녀린 수영 씨의 손가락. 양쪽의 입안을 왔다 갔다 했던 잔여물을 빨며 그녀의 손가락을 혀로 감싸보기도 하고, 감싼 체 당기기도 했다.

 "그래. 그렇게 혀를 돌리면서 음미해봐."

 "후웁. 츄웁, 츕, 하아, 츕." 

 "후훗. 진짜 마음에 들어. 볼 때마다 얼마나 가지고 싶었던지. 우음." 

손가락을 내빼며 자기 입속에 넣는 수영 씨.

폭주, 과열하여 망가진 로봇처럼 소파에 널브러진 내 몸 위로 올라타 얼굴을 더듬는다. 

 "그건 그렇고 그동안 몰랐던 건데, 아랫입술에서도 이쪽이 조금 더 도톰했네."

부드럽고 얇은 손가락으로 아랫입술에서 왼쪽 부근을 톡톡 두드리고 양옆으로 쓸고 있다. 어렸을 때, 입술을 자주 쥐어뜯어서 약간의 변형이 생긴 것으로 알고 있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이런 상황으로 진행될 때마다, 영화나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그런 상황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괜한 상상이길 바라고 있다. 제발 아니길.

 "안경 때문에 잘 몰랐는데, 왼쪽 속눈썹에도 점이 있었고."

입술을 쓸던 손가락의 위치를 움직여 안경 너머 아래쪽 속눈썹 근처를 손가락으로 쓸고 있다.

 "남자치고 얼굴도 아주 작고, 귀는 그것들보다 더 작아."

내 귀 쪽으로 얼굴을 다가가면서 말씀하고 계셨다. 

 "후우. 쪽. 쪼옥. 하압. 우음."

 "흐읏. 힛!"

귀 언저리에 숨을 불어넣으며 귓불에 입을 맞추며 살짝 깨물고는 입술로 잡아당긴다.

 "하아. 하아. 제발, 거긴, 하지 말아주세요…."

 "흐응~ 귀가 약했네. 더 괴롭혀줘야겠는데?"

 "제발... 큿. 아흐윽. 흣. 히익!"

집에서 홀로 처리할 때 느끼던 흥분감과 전혀 다른,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부들부들 떨며 아연실색할 뿐.

 "그렇게 좋았어? 싸지도 않았는데 가버리면 안돼잖아?"

쪼옥

양팔로 내 어깨를 감싸 안아 볼에 입을 맞추며 목과 턱선을 핥는다. 

 "하아. 흐으윽! 으윽!"

아마도 얼굴에는 새빨간 입술 자국이 남아 있겠지. 

나를 끌어안은 수영 씨의 신체 윤곽을 상상하며 쾌락의 바다에 빠져 상상을 하게 된다. 그 상상 때문인지 힘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내 아래쪽도 거세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제발, 그만... 참기 힘들어. 

 "역시 여기서 하기엔 너무 아까워. 따라와."

소파에서 일어나 상에 놓았던 커피를 집어 들고 눈을 흘기며 문밖으로 나가는 수영 씨. 그 사람의 말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나였기에 가방을 챙기고 급하게 따라갔다.

 "하아. 하아. 하아."

흐트러진 넥타이와 셔츠를 정리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녀를 따라간다.

내가 소속된 회사와 난 을. 그녀와 그녀가 속해 있는 회사는 갑이었기에.

회사에 피해를 준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에 본래라면 이런 처사에 의문을 가지고 따졌어야 했지만, 내 실수가 너무 크게 느껴져 의심도, 거절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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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었다.